스님은 正祖 10年, 1786年(丙午年) 全南 務安郡 三鄕面에서 태어 나셨다. 俗家 姓은 張氏, 本貫은 興城, 字는 中孚(중부), 나이 15歲에 出家하시니, 法名은 意恂(의순). 艸衣(초의)는 法號(拈花之號).
이밖에 여러가지 號가 있는데, 그중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一枝庵(일지암), 海師, 艸師 等이 있다.
스님은 임금으로 부터, 大覺登階 普濟尊者 艸衣大禪師라는 號를 下賜받으신 바, 스님이 茶僧만의 스님이 아니고, 詩 書 畵 三絶에 德이 높으신 高僧이었던 까닭이리라.
나이 15歲 되던, 1801年 羅州郡 茶道面 雲興寺(운흥사)를 찾아가, 碧峰 敏性(벽봉 민성)스님을 받들어 出家하시어 수도 하시던 중, 19歲에 이르러, 靈岩 月出山에 홀로 오르시어 暝想에 잠겨있다가,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시고, 忽然 깨친 바가 있어, 이후 매사에 막힘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 後, 海南 大興寺에서 高僧大德 琓虎 倫佑(완호 윤우)스님을 모셔, 具足戒(구족계)를 받으시었다. 艸衣라는 法號는 이때 받으신 것이다. 衣鉢傳人의 拈花之號(염화지호). 法統은 曹溪門人.
艸衣라는 法名의 由來는 高麗 때 野雲禪師가 쓰신 自警文에 <采根木果慰飢腸, 松落草衣遮色身>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 글에서 빌렸다는 說과, 中國 史略에 <穴居陶居 構木爲巢 食木實衣草衣>에서 빌렸다는 說이 있다. 一說에는 의미와 무관하게, 스승 완호 대선사께서, 엤날 達磨大尊者께서, 慧可禪師에게, 自身의 法을 衣鉢(의발--옷과 밥그릇)을 내려 줌으로서 代를 잇게 하였다는 故事에 따라서 縞衣, 荷衣, 草衣라는 法號 셋을 지어 제자들에게 내려 주었다는 說도 있다.
20代 중반 무렵, 강진 茶山 草堂으로 나아가 流配 中이던 茶山 先生에게 儒學과 詩書를 배워, 儒佛 양 분야에 두루 깊은 학문을 兼備하실 수 있었다. 이 무렵 스님은 丁若鏞 先生 等과 함께, 月出山 白雲洞에 들어가 같이 生活하며 詩, 書, 畵를 같이 짓고, 읽고, 그리셨는데, 이때 이 분들이 그리고 詩를 넣어 쓰고, 跋文(발문)을 쓴 作品이 白雲圖, 또는 靑山圖라 한다.
30代에 들어 서울과 全州, 慶州 佛國謝 等을 돌아 다니시면서, 學識 높은 선비들과 두루 교류를 하며 知識을 쌓았고, 여러 절의 佛事에 참여, 佛殿 上樑文을 지어 모시거나, 佛敎 關聯 刊行 사업에 참여 하셨다 한다.
禪師 39歲 되시던 西記 1824年 一枝庵을 지으셨다. 이후 71歲로 入寂하신 1856年까지 이곳에 居處하시었다. 그의 全 生涯를 통한 思想과 哲學이 集大成된 곳이고 우리나라 茶 文化의 聖地가 된 곳이다. 東茶頌을 저술하신 곳이 바로 이 일지암이다.
禪師 53歲 되시던 1837年 봄, 東茶頌을 著戌하시니, 모두 31句頌으로 茶의 起源, 茶 나무의 모양, 茶의 效能과 製茶法, 우리 茶의 優秀性 等을 說明하시었다.
禪師 55歲 되시던 1840年, 憲宗으로 부터 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號를 받으시었다. 禪師의 學識과 큰 德이 임금에게 까지 알려져, 湖南八高의 한 사람으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당시 憲宗 임금께서는 王室에서 그림을 그리던 小痴 許鍊 先生에게, "湖南에 艸衣라는 승려가 있다는데, 그의 指行이 어떠한가?"'하고 직접 물으셨다 한다. 당시 조선사회는 佛門을 賤視하던 社會였음에 비추어 볼 때, 禪師의 學德이 얼마나 높았었나를 짐작하게 하는 逸話라 할 수 있다.
禪師 58歲 되시던 1834年에 故鄕을 떠나온지 무려 43年만에 고향을 찾으시고 詩 한 수를 남기셨다. 15歲의 어린 나이에 出家하여 실로 오랫만의 歸鄕이었다.
歸 故 鄕 詩 (귀 고 향 시) 고향에 돌아오니 癸卯年
遠 別 鄕 關 四 十 秋 (원 별 향 관 사 십 추) 고향 땅을 멀리 나가 사십년이 흘러 갔고,
歸 來 不 覺 雪 盈 頭 (귀 래 불 각 설 영 두) 지금까지 머리카락 희어진것 알지 못했네.
新 基 草 沒 家 安 在 (신 기 초 몰 가 안 재) 샛골은 풀에 묻혀 있으나, 집 그대로 있고,
古 墓 苔 荒 履 跡 愁 (고 묘 태 황 리 적 수) 무덤은 이끼로 황량하고 발자취만 슬프네.
心 死 恨 從 何 處 起 (심 사 한 종 하 처 기) 마음 비웠는데 한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고.
血 乾 淚 亦 不 能 流 (혈 건 루 역 불 능 류) 피는 말라버렸고 눈물조차 흐르지 못하네.
孤 丈 更 欲 隨 雲 去 (고 장 경 욕 수 운 거) 외로운 나,구름 흐르는대로 또 가려 할제,
已 矣 人 生 愧 首 邱 (이 의 인 생 괴 수 구) 수구초심이라는 옛 말이 부끄러울 뿐이네.
마음을 비우고 空門에 들어, 生死를 超越했다 해도, 根本을 더듬을 제, 어찌 마음이 明鏡이길 바라겠는가? 이 시를 살피니 오히려 大禪師의 고매한 인품과 無碍의 法心이 오히려 크게 다가옴은 어쩐 연유인지...
禪師 71歲 되시던 해에, 平生 知己였던 阮堂 先生께서 作故하시었다. 두 분은 한 지붕 아래서 거의 三年 세월을 같은 밥을 드시며 지냈을 만큼 各別한 사이였다. 阮堂 死後, 知己를 잃은 허전함에서 인지, 日常 해오던 詩作이며, 著述을 中斷하시고 禪定에 드시는 일이 잦았고, 山門 밖 出入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한다.
禪師 81歲 되시던 高宗 三年 8月 2日, 몸져 누워 계시던 禪師는, 侍者를 불러, 부축하라 하신 뒤, 西쪽을 향해 跏趺坐하시고 앉아 고요함에 드시니, 歲壽 81歲요, 法臘 65歲였다.
一心--大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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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대흥사 초의문화제 “여보게 벗'----- '저기 저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가을 山 無心하나 有情한 마음으로 차 한잔 나눔세" 10월 29일(土) ~ 30일(日) 가을 산빛 아름다운 시절에 평안한 기쁨 늘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조선 후기 민족문화의 산실이며 차의 성지인 두륜산 대흥사에서 제14회 초의문화제를 개최합니다. 이제 우리 차는 특정인의 호사를 벗어나 모든 국민이 호감을 가지고 마시는 대중적인 문화로 자리를 잡아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이런 즈음에 차를 마시는 일이 곧 맑고 진실한 성품을 기르고 민족 고유의 풍속을 이어가는 정신문화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따라서 초의 선사의 후학들이 모여 생명 본연의 순수한 마음자리에 계합하는 禪 이치와, 차의 中正이 하나로 통하는 茶禪一味의 사상과 정신을 밝히신 다성 초의 선사의 유지를 받들고 선양하고자 합니다. 특히 올 해는 전국의 여러 차문화 단체가 초의문화제에 참여하여 다양한 차문화를 선보이고 대중들에게 차의 맛과 공덕을 회향합니다. -대흥사-
-주요행사- 喫끽 茶다 去거
하나. 들차회(차 무료 시음장) - 10월 29일 ~ 30일 성보 박물관 '저기 저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 가을 두륜산 無心하나 有情한 마음으로 누구나 향기로운 차를 마실 수 있는 참 좋은 인연의 자리········ 둘. 작은 음악회 - 10월 29일(토) 대흥사 보현전 국악 entertainment '아우레 꼬레아‘가 한바탕 신명을 풀어낸다. 제1부 전통음악·제2부 신디사이저와 타악기등이 어우러진 퓨전 음악이 가을밤 산중을 흔든다. 남도 민요, 대정창의 Prince of Che-ju, 프론티어, 신풀이- ---- 은은하고 힘 넘치는 풍류에 몸을 맡기면 달마가 대흥사에 온 까닭을 알수있다. 셋. 전시회 10월 22일 ~ 11월 15일 성보 박물관 중국 고대 황실에서 사용하던 진귀한 차도구등을 선보이는 동양 차문화 2000년 다구유물 전시회’ 茶와 禪이 어우러진 시중 이영수 서각 초대전’ -행사일정- 특별행사 100가족이 펼치는 들차회 : 10월29일~30일 : 녹우당, 대흥사 일지암,미황사 차문화 체험한마당 : 10월29일~30일 : 대흥사 일원 차 관련 도서 소장전 : 10월28일~30일 : 해남군 문화예술회관 소재 박춘묵 다시화전 : 10월28일~30일 : 해남군 문화예술회관 시중 이영수 서각전 : 10월22일~11월 6일 : 성보박물관 동양 차 문화 2000년 : 다구유물 전시회 : 10월29일~11월15일 : 성보박물관 차 문화체험 템플스테이 : 10월28일~30일 : 대흥사 어린이 차 문화 교실 : 10월29일~30일 : 대흥사 <10월29일(토요일)> 열반139주년 : 초의선사추모제 : 10:00 : 일 지 암 사생대회와 서예대회 : 10:00 : 대흥사 일원 다성 초의선사 전 육법공양 : 15:00 : 초의선사 동상 앞 기념식과 초의상 시상식 : 15:30 : 초의선사 동상 앞 작은 음악회 : 차와 음악이 있는 차인의 밤 : 19:00 : 대 흥 사 보 현 전 <10월30일(일요일)> 예불과 새벽숲길 산책 : 04:00 : 대 흥 사 여연스님과 함께하는 차담선담 : 07:00 : 일 지 암 부도전 조사 다례 : 09:30 : 대흥사 부도전 차인 천도 다례제 : 11:00 : 보 현 전 <부대행사> 차 음식 한마당 : 10월29일~30일 : 대흥사 일원 도자기 작품 전시회 : 10월29일~30일 : 대흥사 일원 차 상품 전시회 : 10월29일~30일 : 대흥사 일원 대흥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 대흥사(大興寺)는 근대 이전 대둔사와 대흥사로 불리었다가 근대 이후 대흥사로 정착되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의 빼어난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한 이 곳 대흥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도량으로서 특히 임진왜란 이후 서산(西山)대사의 의발(衣鉢)이 전해지면서 조선불교의 중심 도량이 되었다.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종사(大宗師)가 배출되었으며,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13 대강사(大講師)가 이 곳에서 배출되었다. 암울했던 조선시대의 불교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들의 존재는 한국불교의 오늘이 있게 한 최대 원동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대흥사는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는 도량이다. 서산대사의 구국 정신은 이미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지금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표충사(表忠祀)는 개인의 수행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보다 우선시했던 한국불교의 전통을 대표하는 전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매년 지역 내의 여러 학생들은 이 곳에 모여 호국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각종 행사에 참여해 오고 있다.
대흥사 경내와 산내 암자에는 중요한 성보문화재가 상당 수 존재한다.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 308호), 탑산사 동종(보물 제 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 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 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 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 1357호), 천불전(전남유형문화재 제 48호), 천불상(전남유형문화재 제 52호), 용화당(전남유형문화재 제 93호), 대광명전(전남유형문화재 제 94호), 관음보살도(전남유형문화재 제 179호), 표충사(전남기념물 제 19호) 등의 지정문화재와 그 외 성보 문화유산이 대흥사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수많은 선승(禪僧)과 교학승(敎學僧)을 배출하면서 한국불교의 중심도량으로 성장한 대흥사, 한국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호국도량의 위상을 간직하고 있는 이 곳 대흥사는 지금도 성불(成佛)과 중생구제의 서원을 간직한 뭇스님들의 정진이 끊이지 않는 청정수행도량이다 창건연기 우리 나라 대부분의 사찰에는 다양한 창건연기(創建緣起)가 전하고 있다. 이들 창건 연기는 역사적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사찰의 전통과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대흥사에도 몇 가지 창건 연기가 전하고 있다. 대흥사의 창건 연기를 전하고 있는 자료로는 『죽미기(竹迷記)』, 『만일암고기(挽日菴古記)』, 『북암기(北菴記)』 등이 있으며, 1823년(순조 23) 간행된 『대둔사지(大芚寺志)』는 이들 자료를 종합한 내용과 함께 이때까지의 사찰 역사를 총 정리해 놓은 중요 자료이다. 먼저, 『만일암고기』에 전하는 창건 연기는 426년(백제 구이신왕 7)의 신라 정관존자(淨觀尊者) 창건설이다. 신라의 정관 스님이 426년 대흥사 산내 암자의 하나인 만일암을 창건, 이후 508년(무녕왕 8)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선행(善行) 비구가 중건하였다고하나 안타깝게도 이 자료에서 창건주로 소개한 정관존자는 생애나 활동 내용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죽미기』는 544년(신라 진흥왕 5) 아도화상(阿度和尙)의 창건설을 전하며, 자장(慈藏) 스님과 도선(道詵) 스님이 계속해서 중건하였다는 기록도 함께 실려 있다. 현재 사찰 내에서는 대체로 아도화상의 창건설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현재로써는 대흥사의 정확한 창건 시점을 밝히기가 매우 어려운 상태라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응진전(應眞殿) 앞에 세워져 있는 삼층석탑의 제작 연대가 통일신라 말기 경으로 추정되고 있는 상태이므로 대흥사는 늦어도 통일신라 말기 이전에 창건된 고찰로 보아야 한다. 또한 정관존자나 아도화상 같은 분들이 창건주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점은 그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대흥사의 전통을 이해하는 데 있어 반드시 중시되어야할 내용이다.
연혁 창건 이후 대흥사의 연혁을 전해 주는 자료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대흥사가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시대의 상황을 전해 주는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대둔사지』에 의하면 고려 후기의 천태종 소속 고승인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 스님의 주석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천책 스님이 대흥사 북암(北庵)에 한동안 주석하였으며, 『대둔사지』를 편찬하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님이 사용하던 발우가 이 곳에 전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천책 스님이 대흥사 인근의 백련사(白蓮寺, 현 대흥사의 말사)에서 출가하고 그 곳에서 장기간 주석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이 기록은 상당한 타당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 앞마당에 신암(信菴), 사은(思隱), 성유(性柔) 등 세 분 고승의 부도가 세워져 있다는 기록이 실려 있는데, 이들 고승도 역시 고려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 보여지긴하나 구체적인 행장은 알 길이 없다. 여하튼 고려시대의 대흥사와 관련한 자료는 매우 부족한 현실이며, 이것은 당시 대흥사가 왕실이나 불교계에서 크게 중시하던 사찰이 아니었다는 측면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대흥사의 위상이 크게 부각된 시점은 서산대사의 의발(衣鉢)이 이 곳 대흥사에 전해지고 조정과 불교계에서 모두 대흥사를 중시하기 시작했던 조선중기 이후부터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이후 대흥사에서는 13 대종사와 13 대강사가 계속 배출되어 조선불교계를 이끌어왔으며, 조선의 조정에서는 표충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므로써 호국정신의 근원지와도 같은 위상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대흥사는 일제강점기에 시행된 30본말사법 제도 아래에서 44개의 사암을 관장하는 본사로 지정되었다가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22교구 본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가는길 광주 : 나주.목포방면 ⇒ 나주 ⇒ 해남.영암.완도 방면의 이정표를 보면서 달린다. 잘못하면 목포로 빠져버리기 쉬우므로 되도록이면 2차선을 이용할 것 ⇒ 영산포 ⇒ 나주-영암도로 ⇒ 해남.완도와 목포방면으로 갈라지는 큰 삼거리가 나오면, 해남방면으로 들어선다 ⇒ 해남
두륜산(頭輪山)에 올라 -강중구 (수필가)
이른 아침, 간단한 여장을 갖추고 두륜산(頭輪山)을 오른다. 취락 구조개선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 곳은 상점과 여관들이 울창한 오리 숲 속에 제멋대로 늘어서서 사찰의 경관을 흐리게 하고 사하촌이 끝나는 곳에는 피안교라 이름한 조그마한 다리가 걸려 있다. 피안교를 건너서자 대흥사의 긴 역사를 말해 주는 수많은 비석과 부도 군이 나서고, 또 하나의 정취 어린 다리를 건너 해탈문을 들어서니 아담한 정원이 나선다. 완경사의 비탈에다 연못을 파고 계곡의 물을 끌어들여 흘러내리게 한 정원에는 커다란 바위가 보기 좋게 늘어서 있고 아름드리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있다. 초의선사(草衣禪師)도 참선을 하다가 이 곳에 앉아 쉬었을까. 소치(小癡)는 저 맑은 물에 비치는 산 그림자를 보고 그림을 그렸겠지. 아니 그보다도 근세의 삼절(三絶)인 시(詩)와 선(禪)의 초의(草衣)와, 시와 서(書)의 추사(秋史)와, 시와 화(畵)의 소치(小癡)가 이 곳에 모여 앉아 선문답을 했으리라. 바위에 걸터앉아 유리알처럼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과 투명하기만 한 연못을 바라보며 사념에 잠긴다. 두륜산 아홉 골에 30여 동의 전각을 거느리고 있는 이 대흥사(大興寺)는 신라 진흥왕 7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진흥왕의 어머니인 소지부인(昭只夫人)을 위하여 창건한 절로 1천4백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원효(元曉), 의상(義湘), 도선(道詵) 육봉(六峰)대사 등이 중창과 개축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승병을 지휘하던 야전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서산대사가 만고불파지지 삼재불입지처(萬古不破之地 三災不入之處)라고 말한 것처럼 멀리는 임진왜란으로부터 가까이는 6.25동란에 이르기까지 한번도 피해를 입지 않은 절이라 태고의 숨결이 그대로 흐르고 있는 곳이다. 삼진교 너머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는 대웅보전은 이 절의 주인공답게 두륜의 산봉우리로 사방을 감싸놓고 그 한가운데를 골라잡아 앉았다. 뒤에는 울창한 삼림으로 뒤덮였고, 앞에는 맑은 계류가 흘러내리는 곳에 장중한 건물을 세워놓고 동국진체의 대가인 원교 이광사롤 하여금 '大雄寶殿'이라는 현판을 써 달게 했다. 그런데 제주도로 유배를 가던 추사(秋史)가 친구인 초의를 만나려고 이곳에 들렸다가 이 현판을 보고는 "저런 촌스러운 글씨를 달아두느냐"면서 글씨를 써주면서 바꿔 달게 했는데 9년 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돌아갈 때 다시 들려 “지난번에는 내가 잘못생각 했다.”면서 자신이 쓴 현판은 내리고 원교의 글씨를 다시 걸게 했으니, 그래서 그가 쓴 ‘無量壽閣’은 지금도 요사채인 백설당에 걸려있다. 덩치 큰 대웅보전에 어울리지 않게 조그마한 3층 석탑(보물 제320호)은 수줍어서 외진 뜰에 홀로 섰지만 그 단정한 몸매는 참선을 하고 있는 사미니 같고, 마음씨는 지장보살 같아서 중생의 소망을 빌어주기에 천년도 더한 세월을 보냈건만 그래도 마다 않고 오늘도 길손을 기다리고 섰다. 다시 삼진교를 건너 서 있는 천불전(千佛殿)은 일천 개나 되는 작은 부처님들이 정좌하고 앉아서 참선에 여념이 없다. 이 곳은 천의 제자불이 현세불의 설법을 듣고 미래불이 되는 곳이라 한다. 그렇게 하여 미래의 이 세상을 제도할 것이란다. 그렇다면 지금 저렇게 조그마한 부처님들이 먼 훗날에는 은진미륵불처럼 큰 부처님이 될 것인가. 그리하여 온 세상을 돌며 중생을 제도한다면 이 사바 세계는 극락이 되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천 년을 수도하였고 앞으로 또 몇 만 년을 참선하고 나서야 이 사바세계를 구제할 것인가. 억겁을 헤아리는 부처님 앞에 서서 찰나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육십 평생을 원망해 본다.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을 따라 서산대사의 유물 전시관을 찾았지만 뜰 앞에는 엊그저께 내린 눈이 그대로 쌓였고 문은 굳게 잠겨있어 이 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서산대사의 장삼(長衫)이랑 면화(綿靴),범패(梵패),창과 칼 등을 하나도 보지 못하고 표충사(表忠祠)로 향한다. 묘향산 보현사에 계시던 서산대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 곳으로 와서 야전지를 설치하고 왜적과 싸워서 큰공을 세웠다. 그 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서산대사가 열반한 지 184년째가 되는 정조12년에 어명에 의해 지었다고 전해지는 이 표충사는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인 사명당과 뇌묵당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그러나 표충사는 2백 여 년의 세월동안 비바람에 시달려서 많이 퇴락 했고 뜰에는 찬바람만 을씨년스럽게 불고 있을 뿐, 스님 한 분 보이지 않는다. 두륜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눈 속에 파묻혔고 온 산은 잡목으로 뒤덮였는데 소나무를 대신해서 짙푸른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섰지만 아직은 꽃봉오리조차 맺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만난 계곡에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사방을 둘러보니 두륜산은 이름대로 나를 둥글게 감싸고 있어서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만 솥뚜껑처럼 보일 뿐이다. 인적 없는 산길을 타박타박 걷는데 멧새들은 아직도 단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는가, 삭풍에 떨고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두륜산 교향곡을 읊고 있다. 이윽고 상봉이 저만치 바라다 보일 무렵 윗쪽에서 인기척이 있기에 “야호-!”하고 함성을 질렀더니 응답이 왔다. 반가왔다. 한겨울 눈 쌓인 산 속을 헤매다가 사람을 만났으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런데 ‘산승(山僧)은 저녁 약석(藥石)먹고 30리’라는 속담이 있었던가. 스님은 저녁 식사를 하고 30리 저쪽에 있는 암자를 다녀온다더니 오늘 산에서 만난 스님들은 아침 식사를 하기 전에 눈쌓인 두륜산을 한 바퀴 돌고 있었다. 백발의 노스님들이 기다란 지팡이를 짚고 앞뒤로는 동자승을 세워서 눈 쌓인 숲 속을 헤치면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보는 광경에 얼떨떨해서 한참을 지켜보고 섰다가 다시 정상을 향해 진로를 잡는다.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산등성이가 아침 햇살을 받아 눈부시고 군데군데 모습을 드러낸 바위는 추위에 못이겨 곰처럼 몸을 움추리고 있다. 이윽고 능선에 올라서자 이제까지 포근하던 날씨는 간 곳 없고 삭풍이 사람을 날려보낼 듯이 휘몰아친다. 매서운 바람이다. 살을 에일 듯한 삭풍을 피해 양지쪽에 한참을 쪼그리고 앉았다가 상봉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서부터는 급경사의 바위 봉우리였다. 어떤 곳은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가 하면 또 어떤 곳은 바위 너덜겅이고 발 디딜 틈도 없는 관목 수림이 아니면 얼어붙은 암벽이 나선다. 과연 이런 상태로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것인가. 얼마 남지 않은 산봉우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망설이고 있다가 용기 내어 다시 오른다. 이 곳은 네 손발로 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아이젠도 피켓도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기다가는 쉬고, 쉬다가는 또 기고, 서로 밀고 당기면서 조심조심 기어오르기를 얼마 만인가. 이윽고 사방이 확 트여 더 오를 곳이 없는 눈 쌓인 두륜산 정상에 서서 ‘야호!’하고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른다. 동무야, 두륜산에 올라보렴. 해남 반도 한가운데 우뚝 솟은 두륜산 위에 서면 조국 강산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너는 알 것이다.
다도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섬 중에 왕자가 되었을 해남이 어쩌다가 섬이 되지 못하고. 하지만 동무야, 두륜산에 올라보면 파아란 바다가 사방으로 펼쳐져 있단다. 거기에다 초록 섬을 흩뿌려 놓고 완도, 진도, 고금도, 보길도라 이름했었지. 그 위에다 구름 한 점 올려놓고 아스라이 한라산도 그려 놓았어.
동무야, 보라 저 찬란한 햇빛이 비치는 바다를, 그리고 산과 들을. 충무공은 저 명량해협에서 왜적을 물리쳤고 장보고는 청해진에서 무역을 했었지. 조약도 앞 바다는 올해도 김이 풍년인가. 양암봉 아래서 고려자기를 굽는 연기가 보이는 듯 하구나.
동무야, 두륜산에 올라보면 충무공의 명량해전도 고산이 명문을 남긴 것도 소치가 남종화를 꽃피운 것도 우연이 아님을 너는 알 것이다.
하지만 동무야, 이 두륜산에 올라서 나는 한낱 먼지임을 알고 내려간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 내 가슴에 깊이 와 닿음은 또 어쩐 일일까. 동무야-.
[조선일보 유석재 기자]
숨어 있던 4m를 찾았다! 1000년 전 돌에 새긴 고려시대 천인상(天人像)과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광배(부처의
후광)가 또렷이 새 모습을 드러냈다. 전남 해남군 삼산면의 ‘대흥사(大興寺) 북미륵암(北彌勒庵)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28일 보물(제48호)에서
국보(제308호)로 승격 지정됐다. 오랜 세월 동안 보호각인 용화전(龍華殿)에 가려져 있던 천인상 등이 새로 발견되면서 뛰어난 가치가 재평가됐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초기(11세기)의 대표적인 마애불(磨崖佛)인 대흥사 마애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약 8m, 너비 약 12m,
본존불의 높이만 4.85m에 이르는 대형 조각 불상. 그러나 이 전체 모습은 작년에 낡은 용화전을 수리하면서 비로소 드러났다. 용화전 일부를
해체하던 관련 전문가들은 건물에 가려져 있었던 부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원래 4m 정도로 생각했던 전체 높이가 두 배 가까이 됐고, 용화전의 기둥과 천장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바위벽에
천인상과 광배 전체의 웅장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이 새로 확인됐던 것. 용화전은 1754년에 중수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1929년의 보수 작업 때
불상의 많은 부분이 건물에 가려진 것으로 보인다.
(유석재기자 [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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