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의 다풍
한국다선의 조정, 大興寺
초의선사가
『동다송』을 지어 고래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차문화를 살리면서 그 정신을 중정청경으로 정립, 중국이나 일본다도와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만약 초의 선사가 차문화를 펼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한국 차문화는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었을까 몹시 궁금해진다. 마침
오는 11월 6일, 제13회 초의문화제를 맞아 지난해부터 시작한 선고다인천도재를 비롯 헌공다례제 등 크고 작은 행사가 대흥사에서 진행된다.
한국차문화를 중흥시킨 초의 선사가 오랫동안 주석하면서 다선불이 정신을 이끌어냈던 한국다선의 조정인 해남 대흥사의 다풍을 정리해
본다.
우리에게 일본식 다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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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년 다도를 묻는 홍현주에게 초의 선사가 저술해서 보낸 책. 태평양박물관
소장. | 70년대 말 한국차문화가 싹을 틔우기 직전 일본 NHK 방송사의
기자가 당시 종정(宗正)인 서옹(西翁) 선사가 있는 대흥사로 찾아와 한국에 다도가 있는가?라고 물었다. 이때 스님은 한 마디로 말해 없다〔無〕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170년 전 초의 선사가 전개한 다도는 어디로 가고 서옹 선사는 없다고 말했는가. 몇 해 전 필자는 서옹
선사에게 그때 왜 한국의 다도는 없다고 말했는지 기억을 되살려 여쭈어 보았다. 서옹 선사는 당시 일본 기자의 의도를 꿰뚫어본
뒤 다도가 일본의 것이라고 망상에 가득 찬 그들을 꼬집은 뒤 일본의 다도는 차와 물을 잘 가리는 방법을 가르치는 다도가 아니다. 오직 차를 돌려
마시면서 허구에 가득 찬 인사치례를 하는 것이 일본의 다도라고 질타하고, 우리들에게 너희들 같은 다도는 없다고 갈파하셨던 것이다.
30년이 지난 오늘 그 말씀이 들려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초의 선사는 중국이나 일본의 다도와 다른 중정청경(中正淸境)을 제시한
한국차의 새로운 정신을 개척해냈다. 초의 스님이 한국차를 중흥시킨 다선의 조정이 바로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에 있는 두륜산 대흥사이다.
다선을 지켜온 조정, 대흥사 선다일미
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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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대선사 영정. 기측년(1889)에 소치가 그린 영정. 태평양박물관
소장. |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해 낸 대흥사는 서산문도 중 가장 번창한 소요태능계와 편양언기계가 함께 살면서 서산문풍을
드높였던 곳이다. 청허의 법맥을 잇는 제자만도 천여 명에 이르고 있으니 한국불교계 모든 승도(僧徒)가 청허법손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청허의 적손은 사명유정(四冥惟政)-편양언기(鞭羊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으로
이어졌다. 대흥사는 편양언기(鞭羊彦機ㆍ1581~1644)로 연담유일(連潭有一ㆍ1720~1799)을 거쳐 한국차문화의 중흥조인
초의의순(草衣意恂ㆍ1786~1866)과 아암혜장(兒菴惠藏), 범해각안(梵海覺岸ㆍ1820~1896) 등 유난히도 많은 다승을 배출했다.
한국다선의 원류는 임제 문하에 양기방회가 나와 임제-황룡-양기-백운수단-원오극근-호구소륭을 거쳐 석옥청공-태고보우로 이어왔고,
그 뒤 서산문도로 이어져 편양언기-풍담-월담-환성-호암-연담유일을 거쳐 완호윤우-초의의순으로 대흥사의 다풍이 면면히
이어져왔다. 원오극근 선사가 일본인 제자에게 네 글자로 써 준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진결(眞訣)이 일본 나라의
대덕사에 보존되면서 일본 다도의 전유물처럼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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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의 선사가 그렸다는 42수 관세음보살상. 대흥사
소장. |
그러나 양기방회(楊岐方會ㆍ992~1049), 원오극근(圓悟克勤ㆍ1063~1135)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은 한국으로
이어졌다. 원오극근에서 호구소륭(虎丘紹隆ㆍ1077~1136)으로 이어지는 다선의 정통맥을 청허 선사가 이어와 초의의순에 의해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한국다선의 조정 대흥사가 차지하는 위상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아지는 것이다.
추사ㆍ초의ㆍ다산 통해 차문화 부활
초의가 살았던 19세기는 혼란기였다. 조선의 음다 풍습 또한 자연 쇠퇴했으나 서산(西山)문도를 중심으로 차문화는 꺼지지 않았다.
그 시기 다신으로 불리는 초의 스님과 당대 금석학의 최고봉인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이 만나면서 조선시대 차문화의 하나의 틀이 형성되어 갔다.
강진에 유배된 정약용은 만덕산 백련사 혜장 스님을 만나면서 차에 눈을 뜬다. 혜장은 다산에게 『주역』의 원리를 배웠고 다산은
혜장에게서 다도를 터득한다. 그 무렵 다산은 혜장 선사로부터 대흥사에 기거하던 초의 스님을 소개받는다. 「초의대종사탑비명」에는 이렇게
전한다. 다산승지(茶山承旨)로부터 유서(儒書)를 받고 시도(詩道)를 배워 교리에 정통하였고 크게 선경을 얻어 마침내 운유의 멋을
지었다. 초의는 다산의 아들 유산의 소개로 추사를 만난다. 초의는 제주도에 귀양간 추사에게 해마다 차를 선물했는데 추사는 그
답례로 명선(名禪)을 선물한다. 원오극근이 쓴 다선일미에 견주어 추사는 명선을 써준 것이다.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정신이 조선에 널리 퍼졌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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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추사가 초의 선사에게 써 준 "명선". 간송미술관 소장. 오른쪽)한국제다가
대흥사에 기증한 초의 선사 동상. |
초의와 교류했던 다산 정약용은 음다홍음주망(飮茶興飮酒亡)이라 했다. 차를 마시면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는 이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한국다도문화를 정립한 초의의 다풍은 일본 다도문화를 앞지르고 있다. 일본다도를 완성한 센노리큐(千利休)는 다도정신을
황경청적(和敬靑寂)으로 정립했는데 초의 선사는 중정청경으로 정리하여 중국이나 일본다도와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초의 선사의 다도관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이가 정조대왕의 사위인 홍현주다. 초의가 홍현주의 부탁을 받고 지은 것이 『동다행(東茶行)』이다. 그러나 오늘날
『동다행』은 전해오지 않고 필사본인 『동다송(東茶頌)』만 전해올 뿐이다. 또 초의 선사에게 영향을 받은 차인으로는 자하신위가
있다. 신위는 초의 선사의 부탁으로 선사의 스승인 완호윤우(玩虎尹佑ㆍ1758~1826)의 탑명과 서문을 써준 인연으로 초의와 가까웠다.
「신위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초의 선사가 손수 만든 차를 받아 달여 마시면서 시흥(始興)의 자하 산속 서재를 지키는 자하에게 그의 시를
받으러 오는 제자나 시화(詩話)를 나누려고 찾아오는 선배들은 끊이지 않았다.
그처럼 초의 선사가 이룩한 차문화 공간에서 초의가 추사와 다산을 만났고, 남종화를 개척한 소치는 초의를 만나면서 새로운
그림세계를 개척한다. 또한 정조대왕의 사위인 홍현주는 초의에게 새로운 차세계를 개척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대흥사
주지 몽산 스님은 19세기 초의가 차문화를 중흥시키지 못했다면 오늘날 우리 차문화는 명멸되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흥사는 초의의 다풍을
이어 범해각안(梵海覺岸)과 금명보정(錦溟寶鼎) 선사가 배출된다. 그 중 범해각안 선사는 초의의 다도를 계승했다. 범해는 초의가 돌아간 지
12년이 되던 해 「초의차」란 시를 지었다.
곡우절 맑은
날
穀雨初晴日 노란싹잎은 아직 피지 않았네
黃芽葉未開 솥에서
데쳐내어
空精炒出 밀실에서
말린다
密室好乾來 모나거나 둥근차 찍어내고
栢斗方圓印 죽순 껍질로
포장하여 竹皮苞裏裁 바깥바람 들지 않게
간수하니 嚴藏防外氣 찻잔에 향기
가득하네 一椀滿香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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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초의 선사 법손인 화중 스님이 대광명전에 살면서 차를 만들고 다도를
폈다.오른쪽) 초의 선사가 건립한 대흥사 대광명전 현판 | 그는 대흥사의
13대 강사의 한 분으로 추앙될 만큼 학문적 명성을 드날리기도 했다. 또 초의 선사의 다풍을 이어간 선사로 다송자 보정 선사를 들 수 있다.
그는 다송자(茶松子)로 알려졌는데 차시 80여 수를 남겼고 초의 선사가 쓴 『동다송』을 필사해냈다. 금명(茶松子) 스님은 범해 스님으로부터 감화
받아 초의 선사 다풍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그가 편찬한 『백열록』에 초의 선사의 『동다송』과 범해의 『다약설』을 직접 수사(手寫)하여
넣었던 것이다. 그의 전차(煎茶)라는 차시를 보자. 차를 달이다(煎茶)
스님네가 찾아와서 조주문을
두드리면 有僧來叩趙州扃 다송자 이름값에 후원으로
나간다 自愧茶名就後庭 해남의 초의 선사 『동다송』을
진작 읽고 曾觀海外草翁頌 당나라 육우의 『다경』도
살피었네 更考唐中陸子經 정신을 깨우려면
경뢰소(驚雷笑)가 알맞겠고 養精宜點驚雷笑 손님을 맞을 때는 자용형(姿茸馨)이
제격이니 待客須傾紫茸馨 질화로 동병 속에 솔바람 멎고 나면
土竈銅甁松雨寂 한 잔의 작설차는 제호보다
신령하다 一鍾离舌勝醍靈
이렇듯 대흥사의 다풍은 면면히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세 대흥사의 다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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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초의 선사를 추모하는 추모법회. 오른쪽)차인들이 힘을 모아 중건한 일지암
초암. | 해방 이후 대흥사의 다풍은 누가 이었는가. 최근 다맥 전승의 문제로
전면에 부각된 응송 박영희(朴暎熙ㆍ1892~1990)를 거론한다. 응송 스님은 1893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18세에 연파계의 취운화상을
은사로 득도, 대흥사에 머물면서 초의의 차정신을 이어갔다는 견해가 있다. 또 한 명은 초의 선사의 법손으로 초의가 살았던
대광명전을 지키며 그의 선다일미 정신을 이어간 스님이다. 그 스님의 속성은 이 씨요 법명은 화중(化仲)이다. 응송 스님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으나 초의 선사의 정통맥이 화중 스님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대흥사의 가풍 중 차의 11덕이 전해왔는데 노동의 칠완다가를 뛰어 넘은 인상이
짙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대흥사는 여러 부침을 겪어왔다. 1979년 1월 20일 김봉호, 김제현, 박종한, 김미희 여사가
주축이 되어 서울무역회관 12층에서 첫모임을 갖고 한국차인회가 태동했고, 일지암 복원사업의 시작으로 첫 출발을 했다.
일지암 터를 찾는 일 또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초의선사의 제자가 쓴 『몽화편』에 일지암의 위치가 비교적 상세히 그려져 이를 참고로 일지암 터를 찾기 시작했다. 명원 김미희 선생은 일지암
복원터를 찾기 위해 버선발로 오르다 김봉호 선생이 업고 오르셨다는 것은 원로 다인들 사이에 미담으로 전해오고 있다. 또한 박종한 선생이 90이
넘은 응송스님을 업고 다니며 일지암 터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 뒤 일지암 터가 확인되자 79년 6월 5일 공사를 시작, 이듬해
4월 6일 비로소 완공을 보았다. 이로써 초의 선사가 40여 년간 주석했던 일지암의 차향은 80년 4월 6일 완공으로 초의의 숨결과 차향이
되살아나게 됐다. [img9] 그 뒤에 한국제다 서양원 회장은 대흥사 성보박물관 앞에 초의 동상을 기증했으며, 다성 초의 선사의
뜻과 다도 정신을 기리는 초의문화제가 1992년 초의 선사의 입적일(음력 8월 2일)에 일지암에서 시작된 이래 올해로 13회를 맞는다. 몇 해
전부터는 초의 선사의 정신이 깃든 대흥사로 옮겨 그 얼과 정신을 기리고 있으며, 지난해부터는 명원문화재단(이사장 김의정)은 대흥사와
현대선고다인천도재를 올린다. 대흥사가 다선의 조정으로 그 정통을 이어가며 초의 선사가 이룩한 다선의 공간이 꽃피우는 순간이다. 대흥사 주지 몽산
스님은 초의 스님의 다선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차를 통해 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도와 예에 맞는 바른 다도정신으로 이끌어 나가고자 힘쓸 것이라
말했다.
우리의 차문화 속에 초의 선사가
말한 중정의 정신이 이어져 온다.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든 차문화는 신라 때 사천성에서 활약한 정중무상 선사 이후 이 땅으로 이어졌다.
선다일미의 정신 속에 조주선풍인 끽다거가 되살아나고 선차의 은은한 향기가 한반도 곳곳에 뿌려졌다. 초의는 『동다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 차나무는 원래 중국과 같지만 색과 향기와 효능과 맛에 일등공적이 있다고 하여, 육안차는 맛이 좋고 몽산차는 약효가 좋은데
동차(東茶)는 두 가지를 겸비했다고 고인은 높이 평가했다. 19세기 초의가 말한 동다의 정신이 한국다도의 천년
역사 속에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