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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08:08

명주짜기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

 

명     칭

명주짜기(명주짜기)

 

분     류

무형유산 / 공예기술/ 섬유공예/ 직물공예

 

수량/면적

 

 

지 정 일

1988.04.01

 

소 재 지

경북 경북전역 

 

시     대

 

 

소 유 자

 

 

관 리 자

 

 

 

일반설명 | 전문설명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이다. 일반적으로 견사로 만든 견직물을 ‘비단’이라고 하지만 견사 종류와 세직 및 무늬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양잠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고조선 때부터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정교한 직물을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을 정도로 섬세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보다 질이 좋은 견직물이 생산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종류가 다양해서 색과 품질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 중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일상적인 옷감재료로 사용되었다. 제직방법과 제직상태, 산지와 원료 등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다가 근래에 명주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명주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를 치는 일부터 시작된다. 명주실은 누에고치를 끓는 물에 넣고 실 끝을 풀어서 자새·왕챙이 등의 기구로 실켜기를 해 타래실을 만든 것이다. 이 명주실로 날실을 날고 베메기로 날실에 풀을 먹여 도투마리에 감아서 베틀에 올려 잉아실을 걸고 날실 끝을 말코에 매면 명주짜기 준비가 모두 끝난다. 직녀가 베틀 앉을깨에 앉아 부티를 허리에 걸고 베틀신을 신고 발을 앞뒤로 밀고 당기며 날실을 개구(開口)시켜 북속의 씨실꾸리에서 씨실을 넣고 바디로 치면 명주가 짜이게 된다.

예전에는 전국 각지의 가정에서 베틀로 명주를 짜 자급자족하였는데, 조선 후기이후 개량식 직기로 대량 제직함에 따라 재래식 명주짜기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화려한 견직물에 밀려 명주의 수요가 줄어듦에 간신히 그 명맥만을 이어오고 있다. 이에 명주의 제작기술에 대한 전통을 잇기 위하여 성주 두리실의 명주짜기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기능보유자로 조옥이씨가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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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설명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이다. 일반적으로 견사로 만든 견직물을 ‘비단’이라고 하지만 견사 종류와 세직 및 무늬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양잠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고조선 때부터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정교한 직물을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을 정도로 섬세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보다 질이 좋은 견직물이 생산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종류가 다양해서 색과 품질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 중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일상적인 옷감재료로 사용되었다. 제직방법과 제직상태, 산지와 원료 등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다가 근래에 명주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명주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누에를 치는 일부터 시작된다. 명주실은 누에고치를 끓는 물에 넣고 실 끝을 풀어서 자새·왕챙이 등의 기구로 실켜기를 해 타래실을 만든 것이다. 이 명주실로 날실을 날고 베메기로 날실에 풀을 먹여 도투마리에 감아서 베틀에 올려 잉아실을 걸고 날실 끝을 말코에 매면 명주짜기 준비가 모두 끝난다. 직녀가 베틀 앉을깨에 앉아 부티를 허리에 걸고 베틀신을 신고 발을 앞뒤로 밀고 당기며 날실을 개구(開口)시켜 북속의 씨실꾸리에서 씨실을 넣고 바디로 치면 명주가 짜이게 된다.

예전에는 전국 각지의 가정에서 베틀로 명주를 짜 자급자족하였는데, 조선 후기이후 개량식 직기로 대량 제직함에 따라 재래식 명주짜기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더구나 오늘날에는 화려한 견직물에 밀려 명주의 수요가 줄어듦에 간신히 그 명맥만을 이어오고 있다. 이에 명주의 제작기술에 대한 전통을 잇기 위하여 성주 두리실의 명주짜기를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으며, 기능보유자로 조옥이씨가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우리나라에서는 문헌을 통해 볼 때 기원전 2∼3세기, 즉 삼한시대부터 직물을 짜기 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견직물도 이때부터 남부지방에서 생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직물이 발달하여 주(紬)가 생산되었다. 주는 굵은 실로 짜여진 것으로 주로 중류층의 속옷으로, 또는 평인의 옷으로 사용되었다. 고려로 넘어오면서도 생산기법에는 큰 변화가 없이 이전의 것을 계승하여 왔으나 질이 좋은 고운 주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어 품질을 구분하기도 하였다. 조선조에 오면서는 종류가 다양해져서 색과 품질로써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리고 견중에서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남녀노소 모두에게 일상적인 의료(衣料)로서 사용되었다.

명주는 뽕나무를 키워서 그 잎으로 누에를 키우고, 누에가 만든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서 수직기로 여자들이 짜낸 것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현재는 기계생산에 의하여 공장에서 짜여지며 수의용으로 쓰여져왔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서는 우리의 것을 찾는 마음에서 또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 명주로 옷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우리옷은 단아하고 청초하며 품위를 지녀야만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따라서 한복의 옷감으로는 명주를 으뜸으로 생각해왔다. 명주야말로 한복의 미의 특성을 잘 살려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옛부터 내려오는 명주짜기의 기법을 계승하고 있는 경상도 성주 두리실에서는 뽕나무를 재배하고 명주를 짜서 왕실에 바쳐왔다. 그러나 지금은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로 지정된 두리실 명주짜기의 조옥이할머니가 명맥을 이어 계승하고 있다. 또한 길쌈하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데, 그 중에서도 명주짜는 바디와 북을 각각 100점 이상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명주의 질감은 어떤 견직물보다도 포근하고 따스하며 우아하다. 그러나 손질법이 복잡하여 애용되지 못했으나, 앞으로 가공법을 연구하여 우리 것을 살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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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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