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1964년 12월 7일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었다.
애오개(아현동)·가믄돌(玄石)·사직골 등지의 것을 본산대(本山臺)라고 부르는 데 대하여 경기도 양주군 주내면(州內面)에 전승되는 탈놀음을 별산대라고 부른다. 양주별산대는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양주사람 이을축(李乙丑)이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들에게 배워 양주에 정착시킨 것이라 하며, 그는 양주 최초의 가면제작가라고도 한다.
초파일·단오·추석에 주로 연희되었고, 그 밖에 명절이나 기우제(祈雨祭) 때도 연출되었다. 놀이 전에 탈고사를 지내는 것이 상례인데 고사에는 조라(산제에 쓰는 술)와 떡과 삼색과일·소머리·돼지다리 등 푸짐한 제물이 준비된다. 제물과 제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면 앞놀이(길놀이)가 시작되는데, 서낭대와 탈들을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마을을 순회한다. 놀이터는 양주 사직골로, 불곡산(佛谷山) 계곡 입구의 사방이 경사진 곳이 천연의 노천극장 구실을 하였고, 한가운데는 개복청(改服廳)과 삼현청(三絃廳)이 설치되었으며 그 주위에 잘 바라볼 수 있는 곳에 관객들이 앉게 되고, 조명은 모닥불이나 기름불로 밝히며 밑에서 위로 비추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한다.
놀이는 다른 가면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음악반주가 따르는 춤이 주가 되며 거기에 묵극적(默劇的:팬터마임)인 몸짓과 동작 ·사설, 그리고 노래가 곁들여져 가무적인 부분과 연극적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등장인물은 상좌 2명과 먹중 4명과 완보(完甫)·옴중·소무(小巫)·연잎·눈끔적이·샌님·취발이·말뚝이·쇠뚝이·왜장녀·애사당·원숭이·포도부장·도령·해산모(解産母)·신주부·신할아비·미얄할미·도끼·도끼누이 등이며, 탈은 대개 바가지탈로 현재 22개의 탈이 있어 역할에 따라 겸용하기도 한다.
놀이는 모두 8마당 9거리로 짜여졌으며 제1마당은 상좌마당, 제2마당은 옴중마당, 제3마당은 먹중마당, 제4마당은 연잎·눈끔적이마당, 제5마당은 팔먹중마당, 제6마당은 노장마당, 제7마당은 샌님마당, 제8마당은 신할아비·미얄할미마당이다.
사설(대사)은 봉산탈춤이 비교적 운문적(韻文的)이라면 별산대놀이는 평범한 일상 회화로 비어(卑語)를 쓰며 동작은 하나의 전기적인 역할을 한다. 춤사위는 한국 민속가면극 중 가장 분화·발전된 것으로 몸의 마디마디 속에 멋[神]을 집어넣은 염불장단의 거드름춤과 멋을 풀어내는 타령장단의 깨끼춤으로 구분되어 몸짓 또는 동작이 유연한 형식미를 갖추었다. 반주악기는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피리·젓대·해금·장구·북 등인데 꽹과리·호적 등을 추가하는 경우도 있으며 반주장단에는 염불·타령·굿거리 등이 있다.
연희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의 공통된 내용으로 남녀의 갈등, 양반에 대한 풍자·모욕, 서민생활의 빈곤상 등 당시의 현실 폭로와 특권계급에 대한 반항정신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오늘날 산대놀이라 하면 이를 가리킬 만큼 대표적인 것이 되었다.
※양주 별산대 놀이의 역사와 배경
양주 별산대(楊洲別山臺)놀이는 서울 중심의 경기지방에서 연희되어 온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분파로서, 본산대(本山臺)라고하는 녹번(碌磻), 아현(阿峴)등지의 것과 대동소이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이 산대놀이는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도 연희되었으며, 나례도감(儺禮都監) 후에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관장한 궁중 행사에도 동원되었다.
그리하여 연희자들은 쌀, 포(布)등을 지급받았다. 그들은 보통 편놈(便人)들로서, 인조이후 공의(公儀)로서의 산대연희가 폐지되자 각기 분산되어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산대놀 이 단체(契)를 모았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공연한 결과 녹번리(碌磻里)산대, 애 오개(阿 峴)산대, 노량진(鷺梁津)산대, 퇴계원(退溪院)산대,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 등이 생긴 것이다.
특히 양주별산대놀이는 약 200년전부터 해마다 주로 4월 초파일과 5월 단오에 한 양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산대놀이를 놀다가, 그들이 지방공연 관계로 공연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자 관아의 하리패인 아전(衙前)들이 사직골 딱딱이패를 본 떠서 탈을 만들고 연희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때의 중심 인물은 이을축(李乙丑)으로 양주 최초의 탈 제작자 이다. 양주의 옛 읍은 교통의 요지로서 주막이 즐비했고, 또 양주목사(楊洲牧使)가 주재 (駐在) 하던 곳으로 한강이북에서는 가장 큰 고을이었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민간화된 양주별산대놀이는 목사가 주재하던 객문동을 중심으 로 소위 '본바닥' 사람들만이 출 수 있던 독특한 탈춤으로 전승되었다. 양주 별산 대놀이는 4월 초파일, 5월 단오, 8월 추석에 주로 연희되고 크고 작은 명절외에 가 뭄때의 기우제(祈雨祭)같은 때에도 연희되었다.
격식대로하자면 놀이전의 고사(告祀)에는 조라(祭酒)와 떡과 삼색 과일 외에 쇠머리, 돼지다리등 푸짐한 제물이 올 라야 하고, 그 제물과 조라를 음복하여 취기가 돌아야 놀이가 시작되었다.
놀이비용은 마을유지들과 부가(富家)나 상인들이 추렴하고 연희자는 원칙적으로 무보수 였다고한다. 놀이터는 주로 마을 북서쪽 불곡산(佛曲山) 아래의 사직골이 었고, 여기에는 당(堂)집이 있어 놀이의 가면과 여러도구를 보관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사직당이 없어지고 놀이터가 경작지로 바뀌어 지금은 전수회관(傳授會館) 앞뜰에서 낮에 연희된다.
원래 산대(山臺)란 말은 산붕(山棚), 채붕(綵棚), 오산(鰲山) 등을 전부 포함한 범 칭(汎稱) 으로 잡희(雜戱)를 노는 일종의 높은 무대 배경이나 무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산대도감극', 또는 '산대놀이'라는 호칭은 한때 나례도감이나 산 대도감에 속하고, '산대'라는 공의(公儀)의 무대에서 놀던 호칭을 물려받은 것이지 만, 공의로서의 뒷받침이 없어지고 민속극화된 뒤 부터는 산대놀이터는 더욱 간소 한 야외무대가 되고말았다. 경도잡지(京都雜誌)에서 산대극을 야희(野戱)로 분류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 유래된 것이 아닌가 한다.
※양주 별산대 놀이의 특징과 의의
양주 별산대놀이는 다른 한국 탈춤의 연출형태와 마찬가지로 음악반주에 춤이 주가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歌舞的) 부분과 거기에 묵극적(默劇的)인 몸짓(科)과 덕담 (德談), 재담(才談)이라고 하는 사설(曰),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 상연된다.
상좌, 연잎과 눈끔적이, 왜장녀, 애사당, 소무(小巫), 노장, 원숭이, 해산모, 포도부장, 미얄할미역(役)은 대사 없이 춤과 몸짓(mime)과 동작으로만 연기하지만, 그 밖의 역들은 대사 와 함께 춤과 몸짓 및 동작으로 연기한다. 봉산(鳳山)탈춤의 대사가 비교적 운문의 억양을 고집하고 있는데 비하여, 양주 별산대놀이는 평명(平明)한 일상 회화조(會話調)의 대사이다. 그리고 옴과 취발이와 말뚝이의 대사는 이 놀이의 대사 중 백미(白眉)로서 관중의 흥미를 끌었고, 말 없는 탈의 연기에서는 노장의 펜터마임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시종 대사한마디 없이 춤과 몸짓으로만 소무(小巫)와의 파계 과정과 농희(弄戱)를 훌 륭히 한 마당의 놀이로 성립시키고있다.
노래는 장단을 청하는 짤막한 불림과 그밖에 매화타령(梅花打令), 백구타령(白鷗打令), 천자(千字)풀이, 덕담(德談) 등으로 가짓수가 많은편은 못되며, 그것도 덕담외에는 처음의 허두만 조금 부르다 곧 재담이나 춤으로 바꾸어버려 동작의 신호적인 큐의 역할을 한다.
민속예능(民俗藝能)의 일반적 특성으로 연출 시간에는 제한이 없어 보통 저녁에 시작하면 다음날 새벽까지 계속되었으며, 그때그때의 흥(興)과 형편에 따라 3~4시간으로 줄이는 수도 있었다. 산대놀이의 반주악기로는 삼현육각(三絃六角), 즉 피리2, 젓대1, 해금1, 장구1, 북1로 구성 되지만 이밖에 꽹과리를 추가하는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리와 장구만으로도 춤을 춘다. 반주악(伴奏樂)은 완중(緩重)한 염불, 리듬이 명확한 타령, 유장(悠長)한 굿거리곡 등을 사용한다.
산대춤은 봉산 탈춤이나 오광대(五廣大)놀이의 덧배기춤에 비하여 비교적 전아(典雅)한 맛이 있고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이것은 아마 경기인의 기질이나 궁중무 (宮中舞)의 영향등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더 분석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우선 양주 별산대춤은 크게 거(그)드름식 춤과 깨끼식 춤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현전하는 양주 별산대놀이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극과 공통된 내용으로 조선조 서민문학(庶民文學)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巫堂), 사당(寺堂), 하인(下人) 및 기타의 늙고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하여 현실 폭로와 풍자, 호색(好色), 웃음과 탄식 등을 보여주며, 그 주제는
1)벽사(酸邪)의 의식무(儀式舞)와 굿
2)파계승에 대한 풍자
3)양반에 대한 모욕
4)남녀의 대립과 갈등
5)서민생활의 실상(實相) 등을 보여 주는 것 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는 당시의 특권계층과 형식 도덕에 대한 일종의 비판정신을 구체적으로 연출하는 민중극이다.
이것은 세계 어느나라의 민속극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 는 것으로, 인간의 약점이나 시류(時流)의 악폐(惡弊), 당시에 호사를 부리는 계층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parody)인 바, 이러한 서민문학 상(相)은 임진, 병자의 양란이후 새로 일어난 서민문화를 주류를 이룬 사조로서 서민예술의 하나인 산대놀이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양주 별산대놀이의 연희자도 다른 탈춤의 경우와 같이 대두분 반농반예(半農半藝)의 비직업적인 연희자들로 구성되어 왔으며, 이속(吏屬)과 무부(巫夫)가 많았다. 일반인들은 탈을 쓰면 조상의 넋이 겁을 내어 제사를 못 지낸다고 하여 꺼려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
| ||
이름 |
취발이 | ||
용도 |
양주별산대 놀이 | ||
종류 |
예능가면 | ||
시대 |
조선시대 | ||
발생 |
경기도 양주 | ||
전승 |
경기도 양주 | ||
크기 |
높이25.7cm, 너비20.5cm | ||
재료 |
바가지, 소나무, 종이 | ||
기타 |
| ||
|
| ||
쇠뚝이 역에 함께 쓰이는 가면이다. 얼굴은 진홍색 바탕으로, 코는 소나무 조각을 붙여 만들었으며, 입과 눈 가장지리는 백지를 꼬아 만들었고 입은 누에고치 형이며 작다. 머리에는 쇠꼬리로 된 노란색의 풀어진 상투가 달렸고, 뺨과 이마에는 주름이 있다. 두 눈은 희고 아래를 향해 처져 있고 눈초리에 붉은 점을 찍었다. 등에 학을 그린 푸른 쾌자에 붉은 띠를 두르고, 푸른 행전에 귀롱나무 생가지를 든다. 쇠뚝이로 나올 때는 곤장을 든다. |
|
|
|
|
|
|
|
|
|
|
이름 |
소무 1 | |||
용도 |
양주별산대 놀이 | |||
종류 |
예능가면 | |||
시대 |
조선시대 | |||
발생 |
경기도 양주 | |||
전승 |
경기도 양주 | |||
크기 |
높이23cm, 너비18.3cm | |||
재료 |
바가지, 소나무, 종이 | |||
기타 |
| |||
|
| |||
애사당 또는 당녀역에 함께 쓰인 가면이다. 얼굴 바탕은 백색으로 코는 소나무를 깎아 만들어 붙였으며, 눈가장자리, 눈썹, 입은 백지를 꼬아 만들어 붙였다. 눈초리에 붉은 점을 찍고 연지, 곤지를 찍었다. 이마와 얼굴에는 금색종이를 붙였다. 검은 큰머리에 연두색저고리, 빨간치마를 입고 그 위에 푸른 쾌자를 입고 붉은 띠를 맨다. 애사당으로 나올 때는 댕기머리에 흰 고깔을 쓰고 색동저고리, 붉은 치마에 도포를 입고 홍띠를 띠고 법고채를 든다. 소무와 애사당과 당녀를 따로 만들 때에는 소무는 연지, 곤지를 찍고, 당녀와 애사당은 연지만 찍고, 소무와 당녀는 눈초리에 붉은 점을 찍는다. |
|
|
| |
이름 |
말뚝이 | ||
용도 |
양주별산대 놀이 | ||
종류 |
예능가면 | ||
시대 |
조선시대 | ||
발생 |
경기도 양주 | ||
전승 |
경기도 양주 | ||
크기 |
높이25.2cm, 너비21.5cm | ||
재료 |
바가지, 소나무, 종이 | ||
기타 |
| ||
|
| ||
양반의 하인역에 쓰이는 가면이나, 신장수역과 도끼역에 함께 사용된다. 얼굴 바탕은 자줏빛이며 코, 양뺨의 혹, 아랫입술, 이마의 혹, 눈썹 등은 소나무를 깎아 만들어 붙였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고, 아랫입술은 내밀었으며, 턱에는 녹색의 나뭇잎 모양이 그려져 있다. 코와 이마에는 금색종이를 붙였고, 눈썹에는 여러 가지 색을 넣었다. 연두색 쾌자에 붉은 띠, 패랭이갓을 쓰고, 푸른 행전을 치고 채찍을 드나, 도끼역을 할 때에는 패랭이를 안 쓴다. 넋풀이를 할 때는 굴건제복을 입는다. |
|
|
| |
이름 |
미얄할미 | ||
용도 |
양주별산대 놀이 | ||
종류 |
예능가면 | ||
시대 |
조선시대 | ||
발생 |
경기도 양주 | ||
전승 |
경기도 양주 | ||
크기 |
높이25.8cm, 너비20.5cm | ||
재료 |
바가지, 소나무, 종이 | ||
기타 |
| ||
|
| ||
얼굴은 갈색 혹은 검은 바탕의 늙은 할미의 탈이다. 코와 왼쪽 뺨 위의 혹은 소나무 조각을 붙여 만들었고, 눈 가장자리는 백지를 꼬아 만들어 붙였다. 입은 반달형으로 바가지를 파서 만들어 비뚤어지고, 얼굴에는 흰 점이 찍혀 있으며 코와 이마에는 금색 종이를 붙였다. 흰 치마 저고리에 황색 큰 머리를 하고 지팡이(긴양대)를 갖는다. |
|
| ||
이름 |
목중 | ||
용도 |
양주별산대놀이 | ||
종류 |
예능가면 | ||
시대 |
조선시대 | ||
발생 |
경기도 양주 | ||
전승 |
경기도 양주 | ||
크기 |
높이25.5cm, 너비21cm | ||
재료 |
바가지, 소나무, 종이 | ||
기타 |
| ||
|
| ||
양주별산대놀이에는 4명의 목중이 나온다. 이들 목중의 바탕은 주홍색, 갈색, 연갈색으로 각각 다르나 형태는 비슷하다. 첫째목중 또는 원목이라는 가면은 얼굴바탕이 주홍색으로 코, 눈썹, 양뺨과 이마 위의 혹, 아랫입술 등은 소나무를 깎아 만들어 붙였으며, 눈썹에는 여러 가지 채색을 올렸고, 이마에는 주름이 깊다. 코, 뺨, 이마에 금색종이를 붙였다. 둘째목중은 갈색 바탕에 이마에는 혹이 없으며 양뺨의 혹은 둥글다. 둘째, 세째, 네째 목중은 허드래기 중이다. 용잠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 행전을 친다. |
|
|
| |
이름 |
노장 | ||
용도 |
양주별산대놀이 | ||
종류 |
예능가면 | ||
시대 |
조선시대 | ||
발생 |
경기도 양주 | ||
전승 |
경기도 양주 | ||
크기 |
높이26cm, 너비21.4cm | ||
재료 |
바가지, 소나무, 종이 | ||
기타 |
| ||
|
| ||
얼굴은 검은 바탕에 흰 점과 붉은 점이 불규칙하게 찍혀 있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고 눈 속은 황색이며 광대뼈가 높다. 아랫입술, 뺨, 이마의 혹은 나무를 깎아 만들어 붙였으며, 붉은 아랫입술은 강조되어 앞으로 내밀었다. 등에 호랑이를 그린 회색장삼을 입고 붉은 띠에 회색행전, 송낙을 쓴다. 목에는 긴 염주를, 손목에는 작은 염주를 건다. 한 손에 부채를 들고 다른 손에 지팡이를 짚으며, 투전도 갖고 나온다. |
|
|
| |
이름 |
연닢 | ||
용도 |
양주별산대놀이 | ||
종류 |
예능가면 | ||
시대 |
조선시대 | ||
발생 |
경기도 양주 | ||
전승 |
경기도 양주 | ||
크기 |
높이24.8cm, 너비19.5cm | ||
재료 |
바가지, 소나무, 종이 | ||
기타 |
| ||
|
| ||
천강성 또는 천신이라고도 한다. 머리는 청색의 연잎을 쓴 것처럼 만들고, 하부는 홍색 바탕에 코, 눈썹, 양 뺨 위의 혹을 소나무 조각을 붙여 만들었다. 입과 눈가장자리는 백지를 꼬아 만등어 붙였으며, 눈썹에는 여러 가지 채색을 넣었다. 코에는 금색종이를 붙였으며, 이는 드러내놓고 있으며, 입언저리에 회색 점이 있다. 등에 학을 그린 푸른 쾌자에 붉은 띠, 푸른 행전에 화선을 든다. |
제1과장 ‘상좌춤’은 악귀를 쫓는 의식무 (儀式舞)이다.
제2과장 ‘옴중과 상좌’는 주로 옴중과 상좌의 재담으로 엮어진다.
제3과장 ‘옴중과 목중’에서는 옴중의 의관과 얼굴에 대한 재담을 나눈다. 옴중은 옴벙거지로써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 하지만 옴이 오른 중임이 발각된다는 내용으로,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보여준다.
제4과장 ‘연잎과 눈끔적이’에서는 초인적 능력을 가진 고승 연잎과 눈끔적이가 나타나 옴중과 목중을 벌한다. 이 과장은 〈봉산탈춤〉에서의 사자 출현과 비교되나, 사자보다 훨씬 숭고하고 초월적인 모습으로 표현된다.
제5과장은 ‘팔목중놀이’이다. 제1경 ‘염불놀이’는 8목중이 나와 희화된 염불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타락상을 보여준다. 제2경 ‘침놀이’는 말뚝이의 자식, 손자, 증손자가 죽게 되자 신주부를 불러 침을 놓고 살린다는 내용이다. 죽음을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는 현세적 가치관을 드러낸 탈춤이다. 제3경 ‘애사당북놀이’는 목중들이 애사당을 희롱하는 내용으로 중들의 파계상을 풍자한다. http://uniweb.unitel.co.kr:8085/html/mask/img/yell1_1.gif">
제6과장은 ‘노장’에 대한 풍자의 마다이다. 제1경 ‘파계승놀이’는 노장의 파계과정을 보여주며, 제2경 ‘신장수놀이’는 노장이 두 소무와 살림을 차린 뒤 신장수에게서 두 소무의 신발을 외상으로 사고, 외상값을 받으러 온 원숭이는 소무를 희롱하고 그냥 간다. 제3경 ‘취발이놀이’는 취발이가 나와 노장에게서 소무 1명을 빼앗아 살림을 차린 뒤 아이를 얻고 글을 가르친다.
제7과장은 ‘샌님’이다. 제1경 ‘의막사령(依幕使令)놀이’는 하인 말뚝이가 샌님, 서방님, 도령님을 모시고 나와 친구 쇠뚝이와 함께 위선적인 양반들을 풍자한다. 제 2경 ‘포도부장놀이’는 샌님이 자기의 첩 소무를 평민인 젊은 포도부장한테 빼앗기는 내용으로서, 늙음에 대한 젊음의 승리, 양반에 대한 평민의 승리를 보여줌으로써 서민정신의 승리를 표현하고 있다.
제8과장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는 신할아비가 부인 미얄할미와 다투다가 미얄이 죽자 아들, 딸을 불러 장사를 지내는데, 딸이 무당이 되어 지노귀굿을 한다. 남성과 여성이 대립이라는 서민 생활상을 보여주며, 굿의 흔적이 나타난다.
배역들은 탈을 태우거나 부수어버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약 60여년 전부터는 사직골에 당집이 있어 탈을 당집에 보관하였다가 해마다 개장(改粧)하여 썼고, 당집이 없어진 뒤로는 연희자의 집에 보관해오고 있다 http://uniweb.unitel.co.kr:8085/html/mask/img/yell1_1.gif">
http://uniweb.unitel.co.kr:8085/html/mask/img/mask_listbar02.gif">
이용 도구
이용되는 가면은 〈봉산탈춤〉의 가면에 비해 사실적이다. 등장 인원수는 32명이나, 겸용하는 가면이 있기 때문에 실제 사용하는 가면수는 22개 내외이다. 가면의 재료는 바가지가 주이고 그 밖에 종이, 나무 등이다.
반주악기는 피리 2개와 젓대, 해금, 장구, 북 등이며 꽹과리와 태평소를 추가하기도 하고, 피리와 장구만으로 하기도 한다. 반주악은 염불곡, 타령, 굿거리장단 등이다. 춤사위의 분류는 거드름춤과 깨끼춤의 두 종류로 크게 나누어지고, 다시 각각 10여 종류로 세분되는바, 한국민속춤의 기본은 여기서 찾을 수도 있다 http://uniweb.unitel.co.kr:8085/html/mask/img/yell1_1.gif">
http://uniweb.unitel.co.kr:8085/html/mask/img/mask_listbar02.gif">
전수현황
현 기능보유자로는 신순봉(申順奉: 소무, 상쇠잡이), 고명달 (高明達: 노장, 눈끔적이), 석거억(石巨億: 목중, 피리악사), 유경성(柳敬成: 왜장녀, 가면제작), 박교응(朴敎應: 첫상좌, 완보, 말뚝이), 김상용〔金相容: 목중, 원숭이, 도끼누이(무당)〕, 노재영(盧載永: 옴중, 취발이), 이병권(李秉權: 상좌)이 지정되어 있다.
채록본은 조종순(趙鍾洵), 구술 김지연(金志淵) 필사본(1930), 임석재 (任?宰) 채록본(1966), 김성대 기록 이보라(李保羅) 정리본(1958∼1959), 임석재, 이두현(李杜鉉) 채록본(1964), 최상수(崔常壽) 채록본(1965), 이두현 채록본 (1969), 김성대 기록 심우성(沈雨晟) 정리본(1975) 등이 있다
'코리아테크 > 한국의국보, 보물,기념물,천연기념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갓일-2 (0) | 2008.09.21 |
---|---|
[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3 (0) | 2008.09.21 |
[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0) | 2008.09.21 |
[스크랩] 우리나라의 무형문화재 목록(1호~115호) (0) | 2008.09.21 |
[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1 (0) | 2008.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