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테크/한국의국보, 보물,기념물,천연기념물

[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3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08:49

 


남사당놀이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명     칭 남사당놀이(男寺黨놀이)
분     류 무형유산 / 전통연행/ 연희/ 광대굿놀이
수량/면적
지 정 일 1964.12.07
소 재 지 서울 서울전역 
시     대
소 유 자
관 리 자
설     명 남사당놀이는 꼭두쇠(우두머리)를 비롯해 최소 40명에 이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연예인인 남사당패가 농·어촌을 돌며, 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조선 후기부터 1920년대까지 행했던 놀이이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사회에서 자연 발생한 민중놀이로, 양반들로부터 박대를 당해 마을에서 공연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정점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화주, 놀이를 관장하는 뜬쇠, 연희자인 가열, 새내기인 삐리, 나이든 저승패와 등짐꾼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사당놀이는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으로 이루어진다. 풍물은 일종의 농악놀이로 공연 시작을 알리면서 구경꾼을 유도하기 위한 놀이라 볼 수 있다. 버나는 중국의 접시 돌리기와 비슷하게 쳇바퀴나 대접 등을 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묘기이다. 살판은 오늘날의 덤블링(재주넘기)과 같은 땅재주로,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름은 줄타기 곡예를 이르는 말로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만큼 어렵다 하여 남사당패내에서만 쓰여지던 말이었으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덧뵈기는 탈을 쓰고 하는 일종의 탈놀이이다. 인형극을 이르는 덜미는 인형극에 나오는 중요등장인물에 따라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고 부른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인형극이 남사당놀이밖에 없다는데 역사적 의미가 크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층에서 발생하여 서민들을 위해 공연된 놀이로,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한과 양반사회의 부도덕성을 놀이를 통해서 비판하며 풀고,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민족예술의 바탕이 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 본문설명

남사당놀이는 꼭두쇠(우두머리)를 비롯해 최소 40명에 이르는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연예인인 남사당패가 농·어촌을 돌며, 주로 서민층을 대상으로 조선 후기부터 1920년대까지 행했던 놀이이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사회에서 자연 발생한 민중놀이로, 양반들로부터 박대를 당해 마을에서 공연하는 것도 자유롭지 못했다.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정점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화주, 놀이를 관장하는 뜬쇠, 연희자인 가열, 새내기인 삐리, 나이든 저승패와 등짐꾼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남사당놀이는 풍물, 버나, 살판, 어름, 덧뵈기, 덜미 등으로 이루어진다. 풍물은 일종의 농악놀이로 공연 시작을 알리면서 구경꾼을 유도하기 위한 놀이라 볼 수 있다. 버나는 중국의 접시 돌리기와 비슷하게 쳇바퀴나 대접 등을 막대기나 담뱃대 등으로 돌리는 묘기이다. 살판은 오늘날의 덤블링(재주넘기)과 같은 땅재주로,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어름은 줄타기 곡예를 이르는 말로 얼음 위를 조심스럽게 걷는 것만큼 어렵다 하여 남사당패내에서만 쓰여지던 말이었으나 점차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덧뵈기는 탈을 쓰고 하는 일종의 탈놀이이다. 인형극을 이르는 덜미는 인형극에 나오는 중요등장인물에 따라 꼭두각시놀음, 박첨지놀음, 홍동지놀음이라고 부른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오늘날까지 전승되어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 전통인형극이 남사당놀이밖에 없다는데 역사적 의미가 크다.

남사당놀이는 서민층에서 발생하여 서민들을 위해 공연된 놀이로,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한과 양반사회의 부도덕성을 놀이를 통해서 비판하며 풀고, 민중의식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으며 오늘날 민족예술의 바탕이 되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보충설명

조선후기에서 1920년대까지도 ‘굿중패 ’또는 남사당(男寺黨)이라고 부르던 전문적인 유랑연예인들이 우리나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민중오락을 제공해 왔다. 그들의 주요 상연은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보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 등으로 재인 광대의 가무백희(歌舞百戱)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었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주로 남사당패가 오늘날까지 전승하고 있다. 이들 연희자들은 인형극을 덜미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는 꼭두각시놀음, 박첨지(朴僉知)놀음 또는 홍동지 놀음이라고 부른다. 이같은 명칭은 모두 인형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 인형극은 삼국시대인 고구려 때부터 있었으며 대륙으로부터 중국을 거치거나 북방에서 전래된 서역악(西域樂)의 일종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점은 고구려 무악 중에 서역에서 전래된 가면무악과도 서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형극은 주로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남한 일대에서 유랑연예인 남사당에 의하여 공연되었던 것 같다. 현존하는 꼭두각시놀음의 극본이 형성된 시기는 그 내용으로 보아 조선후기 서민문화의 대두와 때를 같이하여 이루어졌으며, 극본 내용은 산대도감계통극(山臺都監系統劇)과 같은 계통의 것이다.

첫째 무속과 관련되는 기반문화 요소의 잔존을 볼 수 있으며, 둘째 파계승에 대한 풍자인데 이 두 가지는 모두 그 정도가 심하지 않다. 셋째 일부처첩(一夫妻妾)의 갈등과 평민층의 생활상, 넷째 양반계급의 횡포에 대한 조롱, 다섯째로 내세의 명복을 비는 불자(佛者)에의 귀의 등을 7내지 8막으로 나누어 다룬다. 박첨지가 설명의 역할을 하여 각 막(幕)을 이어 일관성을 유지한다.

꼭두각시놀음의 구성은 남운룡(南雲龍) 구술본에 따르면 서막에서 박첨지를 시작으로 전막의 각 인형을 차례로 포장막 위로 선보이고 나서, 제1막 박첨지 유람가, 제2막 상좌중춤, 제3막 꼭두각시에서 박첨지와 본처인 꼭두각시와 첩인 덜머리집과의 삼각관계의 갈등에서 꼭두각시는 중이 되려고 입산한다. 제4막 이시미, 제5막 작은 박첨지, 제6막 동방삭, 제7막 표생원, 제8막 깜벡이, 제9막 치도(治道), 제10막 평안감사 매사냥( 이 막에서 양반의 횡포를 보인다.), 제11막 평안감사 상여( 이 막에서 양반에 대한 여러가지 모욕이 있다.)가 있다. 종막에서는 절을 짓고, 복을 비는 축원을 한다.

우리나라 인형극의 조종법은 중국의 인형극과 대체로 동일하며, 일본 인형극과도 동일계통이다. 그러나 인형 조종자가 반주음악에 따라 조종과 창과 대사를 겸하는 일인삼역을 하여 일본의 인형극처럼 분화되지 않았다. 무대는 포장을 치고, 그 뒤에서 조종자가 인형을 포장막 위로 내보내 놀리며 무대와 마주앉은 반주자와 대화를 나눈다.

사용되는 인형은 박첨지, 꼭두각시, 홍동지, 홍백가, 소무당, 덜머리집, 상좌(2), 평안감사, 상제, 이시미, 새, 마을 사람(4) 등이며, 상여, 만사, 법당 등 소도구가 사용된다.



 

관련 자료 

http://kr.blog.yahoo.com/gjtmsla1000/2224.html?p=1
 
남사당놀이男社黨놀이)

 
 
 
 
 
 



남사당놀이 男社黨놀이
▒ 지정번호 :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 지정연월일 : 1964년 12월 7일
▒ 보 유 자: 남사당놀이 보존회 외
▒ 전 승 지: 서울특별시


남사당은 남자들로 구성된 유랑예인(流浪藝人)집단으로, 조선조 후기부터 1920년대까지 우리나라 농어촌을 떠돌아다니며 민중에게 즐거움을 제공하였다.
이 남사당놀이는 우두머리 곧, 모갑인 꼭두쇠를 정점으로 풍물(농악)·버나(대접돌리기)·살판(땅재주)·어름(줄타기)·덧뵈기(탈놀음)·덜미(꼭두각시놀음) 등으로 재인(才人)·광대(廣大)의 가무백희(歌舞百戱)의 전통을 이어 왔다.
남사당놀이의 연원이나 형성과정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00년대 초 이전에 서민사회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민중놀이집단으로 사당패의 주요 구성원이 여자임에 반하여, 남사당패는 꼭두쇠를 우두머리로 한 남자들만의 사회였다. 구성은 맨 위에 꼭두쇠가 있고 그 밑에 곰뱅이쇠·뜬쇠·가열·삐리·저승패·등짐꾼 등 40∼50명으로 이루어졌다. 그 조직은 엄격하였고 모자란 인원은 가난한 농가의 아이나 고아ㆍ가출아 등으로 충당하였다. 현재까지 이들의 은거지로 밝혀진 곳은 경기도 안성·진위, 충남 당진·회덕, 전남 강진·구례, 경남 진양·남해,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인데 놀이가 거의 없는 겨울철에는 삐리들의 기예(技藝)를 가르쳤다고 한다. 1920년대 이후 독립적인 존속이 어려워지게 되자 중매구와 걸립패와의 교습을 거치게 되고, 사당패·솟대장이패와의 교류도 갖게 되면서 오늘의 형태로 변모된 것이다.
남사당놀이 가운데 얼른(요술) 등의 종목은 이미 사라졌지만 나머지 여섯 종목은 다음과 같다.
풍물 : 일종의 농악인 인사굿으로 시작하여 돌림벅구·선소리판·당산벌림·양상치기 등 24판 내외의 판굿을 돈다음 상쇠놀이·따벅구(벅구놀이)·징놀이·북놀이·새미받기·채상놀이 등의 순서로 농악을 친다. 이 풍물은 웃다리 가락(충청·경기·이북지방)을 바탕으로 하며 꾕가리·북·징·장구·날라리 땡각(令角)의 잽이(악사)와 법고 등을 포함한 최소 24명 정도가 일조를 이루는데 짜임새 있는 진풀이와 동니·채상 등의 몸재주와 묘기를 가미하여 연희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버나 : 대접이나 쳇바퀴·대야 등을 앵두나무 막대기로 돌리는 묘기이다. 이 놀이의 묘미는 접시 등을 돌리는 외에 돌리는 사람인 버나잽이와 받는 소리꾼인 매호씨(어릿광대)가 주고 받는 재담과 소리가 극성(劇性)이 짙은 데 있다.
살판 : 잘하면 살판이요, 못하면 죽을판이라는 뜻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종류는 앞곤두·뒷곤두·번개곤두 등 11가지 순서를 가지고 있는데, 본래는 대광대패나 솟대쟁이패의 놀이 가운데 하나였는데 남사당놀이로 수용한 것이다. 살판쇠(땅재주꾼)와 매호씨가 잽이의 장단에 맞추어 재담을 주고받으며 재주를 부린다.
어름 : 줄타기 곡예로 얼음 위를 걷듯이 어렵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대 중앙을 가로지른 외줄을 어름산이(줄꾼)가 건너가며 매호씨와 재담을 주고받는 놀이다. 종류는 앞으로 가기·장단줄·거미줄 늘이기 등 15종의 순서가 있다.
덧뵈기 : 덧(곱)본다는 것은 탈을 쓰고 연희를 하는 일종의 탈놀음이다. 춤보다는 재담과 연기가 우세한 풍자극으로 마당씻이·옴탈잡이·샌님잡이·먹중잡이 등 네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때그때 지역민의 취향과 흥취에 영합하였다.
덜미 : 남사당놀이의 마지막 순서로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전하지 않는 전통인형극인 꼭두각시놀이로, 남사당 연희자들은 덜미라 부른다. 대개 두마당 일곱거리로서, 즉 박첨지마당(박첨지유람거리·피조리거리·꼭두각시거리·이시미거리), 평안감사마당(매사냥거리·상여거리·절짓고 허는 거리) 등이다.
이 6가지 놀이는 대략 밤 9시부터 다음날 새벽 3∼4시까지 연희되어 총 6∼7시간을 공연하였지만 현재는 2∼3시간 정도로 축소 연희되고 있다.

 
 
관련 자 

http://blog.paran.com/kimdaniel/22428616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놀이 보존회에서 경복궁에서 공연이 있었습니다.

 "왕의 남자"에서 줄놀이 대역을 하신 "권원태"님의 공연 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관련 자료 

 http://blog.paran.com/mjhpt/22612782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출처 : ..
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