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笠) /
조선 시대 사대부의 대표적인 관모의 하나로 머리를 덮는 부분인 모자와 얼굴을 가리는 차양 부분인 양태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 햇볕이나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용구로서의 쓰개였으나, 재료·형태·제작법이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사회성을 가지는 관모로 되었다. 갓은 상투 튼 머리에 망건(網巾)과 탕건(宕巾)을 쓰고 그 위에 쓰는데 외출 때나 의례행사 등 의관을 갖추어야 할 때 사용되었다.
<역사> * 고대 / 삼국시대 시초형은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입형백화피모(笠形白樺皮帽)와 고구려 고분인 감신총 벽화에 나오는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의 갓을 쓴 수렵인물에서 볼 수 있다. 문헌상은 『삼국유사』에 신라 원성왕이 꿈에 복두(幞頭, 조선 때,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패를 받을 때 쓰던 관)를 벗고 소립(素笠)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갓은 삼국시대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고려시대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됨으로써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최초의 기록은 1357년(공민왕 6)에 문무백관에게 갓을 쓰도록 한 것인데, 이어 1367년 7월에는 아문의 정3품 이하 관원들에게 각기 품수에 따라 백옥·청옥·수정 등으로 장식된 흑립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1374년 4월에는 재상·중방·각문이 모두 갓을 착용하도록 하였는데 그때의 갓은 재료나 제작 기술상 조선시대의 흑립과는 다르나 형태는 패랭이형일 것이다.
* 조선시대 갓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걸쳐 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쳐 흑립으로 발전되었다. 태종 때 한때 백관들이 갓을 쓰고 궁궐에 출입한 적이 있었으나 '朝路에 雨雪日이 아닌데도 대소관리가 착립하고 있어 未便하다'고 하여 이듬해부터 조정에서는 사모를 쓰게되고 갓은 편복에 착용하게 되었으며, 다양했던 관모 중 가장 널리 사용되었던 갓은 특히 양반층에서 즐겨 썼다. * 근대
1894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중절모자가 등장하지만 갓은 계속 착용되었다. 1895년에는 천인층에게도 갓을 쓰도록 허락하고 패랭이 쓰는 것을 금함으로써, 의관제도에 귀천의 구별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다. 조선의 갓 문화는 계속 이어져 민족항일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의관 갖추기를 잃지 않았고, 지금도 두루마기에 갓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흑립(黑笠)의 형태 변화> 갓의 모양이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은 1498년(성종 20) 3월 '입자(笠子, 갓)의 모양이 승립(僧笠)과 같으니 이를 개정하라'고 하는 기록에서부터인데, 당시의 갓은 모자의 정상이 둥그렇고 테가 넓은 형태였다.
연산군초에는 둥글던 모정이 조금 뾰족하게 변하였고, 이후부터 모자의 모양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원통형으로 된 것이다. 1504년(연산군 10) 5월에는 모자가 높고 양태의 넓이를 절충한 새로운 형태의 갓을 만들도록 하였으나, 중종 말기에는 모자의 높이가 극도로 높아지고 양태는 극히 좁아졌으며, 명종초에는 모자의 높이와 양태의 넓이를 적당히 가감하여 만든 경쾌한 형태의 '金舜皐笠子'가 등장하였다가 곧 다시 모자는 점점 낮아지고 양태는 우산을 펼친 모양처럼 넓어졌다. 1556(명종 11) 입제(笠制)의 개정이 논의되었으나 주로 모자가 낮고 양태는 극히 넓은 형태의 갓이 명종 말기까지 쓰였다. 선조 때에는 초년부터 모자가 높고 양태가 좁아지기 시작하여 말년까지 계속되었고, 광해군 때에는 그와 반대로 양태가 극히 넓어지고 모자가 아주 낮아져 안반처럼 넓은 양태에 마치 주발을 옆어놓은 것 같은 모양의 갓이 유행되었다. 넓은 양태의 갓이 인조말부터는 갑자기 모자도 높아져서 이른바 '큰갓'이 되었으며, 효종 때까지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숙종때는 한때 모자가 낮고 양태가 좁은 '작은갓'이 유행했다.
영·정조 때의 갓은 그 시대의 풍속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양태가 비교적 넓으며 거기에 밀화나 호박·대모 등으로 만든 갓끈을 가슴 밑으로 길게 늘어뜨려 그 멋을 한층 더하였다.
순조 말기에는 양태가 더욱 넓어져서 종전의 어깨를 덮을 정도에서 앉은 사람을 완전히 덮을 정도가 되었는데,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 사회개혁의 일환으로 종래의 '큰갓'은 '작은갓'으로 변화되었다.
완고한 것으로만 되어 있던 선비의 의관, 특히 그들이 중히 여기던 갓이 이렇듯 시속에 따라 변천해왔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종류> ** 형태상 - 방갓형(方笠型) - 삿갓(蘆笠)·방갓(方笠)·전모(氈帽) 패랭이형 - 패랭이·초립·흑립·전립·주립·백립 ** 용도상 - 흑립 주립(朱笠) - 붉은 옻칠 * 무관 당상관이 戎服을 입을 때 착용 백립(白笠) - 상복에 착용 일반에서는 대상을 지낸 후 담제까지 착용, 국상때 착용
** 싸기(갓싸개)의 종류상 진사립(眞絲笠) - 머리카락보다 더 가늘게 다듬은 죽사(竹絲, 대실)로 갓모자와 양태를 네겹으로 엮
고, 그 위에 중국산 촉사를 한올한올 입혀서 칠을 한 것으로, 왕이나 귀인이 착용하던극상품
이다. 왕이 쓰는 어립(御笠)에는 은각 밑뿌리에 당사(唐絲, 중국에서 나는 명주실)를 물들여
서 꼰 홍사(紅絲)를 감는다.
그것을 '합사돌린다'고 하며 은각 밑뿌리의 색실은 신분에 따라 다르다. 음양사립(陰陽絲笠) - 갓모자는 말총으로 곱게 엮고 양태만 죽사에다 촉사를 올려 옻칠한 것 이다. 진
사립의 다음 등품이며, 은각 밑뿌리에는 靑絲를 두른다. 음양립(陰陽笠) - 말총으로 만든 갓모자인 총모자에 양태는 죽사를 쓰나 양태 위에 촉사 대 신 생사를
입혀 옻칠한 것이다. 음양사립 다음 등품이며, 음양립부터 아래 등품의 것은 은각 밑뿌리에
녹사(綠絲)를 두른다. 馬尾笠 - 종립, 혹은 마종립이라고도 하며, 말총으로 갓모자와 양태를 엮어 만 든 것이다.
『경국대전』에는 종립은 사족들의 것으로 되어 있고, 『대전후 속록』에는 당상관 이하는
착용을 금하는 기록이 있으므로 조선 중기까지는 당상관 이상에서만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포립(布笠) - 넓은 의미의 갓이라 하면 방갓형과 패랭이형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것을 말하나, 일반적
으로는 좁은 의미의 갓, 즉 흑립을 말한다. 패랭이·초립의 단계를 거치면서 완성된 흑립은 우
리나라의 전형적인 갓으로 정착되면서 사대부나 서민 모두에게 널리 사용되었으며, 섬세하
고 미려한 형태로 우리나라 사람의 고유한 멋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의관이 되었다.
<제작법>
'갓일'은 1964년 12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고, 기능보유자는 高丁生과 吳松竹이다.
갓은 질이 좋은 대나무를 아주 가늘게 쪼개어서 실올처럼 가늘고 길게 다듬어서 양태와 모자를 만들어 붙인 다음 싸기를 하고 옻칠하여 완성한다. 따라서 갓을 완성하는 데는 세 공정을 거치게 된다. 세죽사나 말총으로 갓모자를 만드는 일과 머리카락같이 가는 대로 양태를 엮는 일, 또 갓방에서 갓모자와 양태를 서로 모아 갓을 완성하는 일로서, 이 세 공정은 각 각 따로 행해지는 것이 예사였다. 갓을 모으는 일 중에는 양태가 아래로 우긋하게 곡선을 이루도록 모양잡는 일, 속칭 '버렁 잡는다'고 하는 일이 가장 숙련을 요하는 일이다. 제주도의 총모자와 거제도의 양태가 특히 유명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갓[흑립]은 인류가 고안해낸 관모 중에서 세계에서 으뜸가는 화사한 관모이다.
머리에 얹되 쓴 것 같지도 않게 가볍고, 섬세하게 짜여진 차양 위에 내리쬐는 햇살은 얼굴에 엷은 그림자를 드리워 은근한 아름다움을 표출한다.
그러면서도 양태가 넓은 갓을 쓰고 좌정하면 위풍이 당당하고 기품있는 선비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장식품> * 갓끈[笠纓] - 원래는 갓을 머리 위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턱 밑에 매는 실용적 구실을 하던 부분인데,
차츰 재료가 다양해재면서 장식적인 구실도 겸하였다. 헝겊으로 만든 포백영(布帛纓)· 옥·마노·호박·산호·금패·밀화·수정 등으로 만든 주영(珠纓) 및
대로 만든 죽영(竹纓)이 있다.
갓끈은 갓을 쓰면 일단 턱 밑에서 고정시킨 뒤 내려뜨리지만, 주영·죽영은 그냥 장식으로 길
게 가슴 밑까지 내려뜨리고 따로 검은 헝겊끈으로 고정시키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442년(세종 24) 9월 옥석·번옥 및 마노 등으로 만든 갓끈은 당상관
이상에게 허용하고, 향리에게는 옥·마노는 물론 산호·수정으로 만든 것도 금한 기록이 있다.
『경국대전』예전 의장조에는 당상관 이상의 갓끈을 금옥으로 제도화하였는데, 1497년 10월
에 '입영(笠纓)을 포백으로 함이 어떠한가'라는 왕의 전지에 따라서 한때 주영을 폐지하고
포백영으로 고친 일이 있었다.
1508년(중종 3) 정월에는 '입영의 값이 멋대로 높아지니 폐하자'는 주청이 있었으나, 『대전
후속록』예전 금제조에는 여전히 '마노·호박·명박·산호·청금석입영은 당상관 외는 일체 금한
다.'라는 기록이 있고, 『대전회통』에도 주영에 관해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현존하는 주영
의 유품들로 보아 조선 말엽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흥선대원군 집정시에는 의관
과 문물의 간소화시책에 따라 입영으로 대를 사용하도록 하였으므로, 한때 죽영이 유행하기
도 했다. * 정자(頂子) - 갓의 정상에 장식한 꾸밈새로 계급에 따라 재료가 달랐는데, 고려말 공민왕때 직품에 따
라 백옥·청옥·수정 등의 정자를 달리 정하여 흑립에 달도록 한 데서 비롯되어 조선시대로 이
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경국대전』예전의 장조에 의하면 대군은 금정자, 3품이상은 은정자이며, 사헌부·사간원의
관원과 관찰사·절도사는 옥정자를 사용하고 감찰은 수정정자를 사용한다 하였는데, 그 제도
는 『대전회통』에 기록된 제도와도 동일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 형태가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없으며, 장식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오직 옥로가 있을 뿐이다. 玉鷺는 옥으로
백로의 형상을 조각한 것으로서 갓의 모정에 장식한 옥로립은 시임대신·원임대신·장신이 의
식때에 융복(戎服)이나 군복에 착용했고, 또한 외국으로 나가는 사신이 착용하였다. * 갓집[笠盒] - 조선 시대 갓의 착용이 일반화되면서 갓을 쓰지 않을 때에는 갓집을 만들어 소중히 보
관하였다. 형태상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받침과 덮개가 분리되지 않은 형인데,
보통 대오리로 아랫부분은 원통형, 윗부분은 원추형으로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종이를 발
라 기름을 먹여서 만든다. 밑변을 이등분하여 여닫게 해서 이 부분으로 갓을 집어넣을 수 있
도록 하였으며, 위쪽에 끈을 달아서 걸게 되어 있다. 다른 하나는 상자처럼 뚜껑을 따로 만들
어 덮은 것으로 나무로 짜거나 종이를 여러 겹 발라서 만든다. 덮개는 갓과 비슷하게 양태 부분과 총대우(모자집)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밑받침은 원·
사각·팔각·12각형 등 다양하다. 이것은 또, 흔히 표면에 여러가지 무늬나 장식을 넣어 아름답
게 꾸몄는데, 주로 장농 위에 얹어 두고 사용했으므로 방안치레의 구실을 하기도 했다.
* 갓모[笠帽] -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우장. 바른 표기는 '갈모'이며 우모(雨帽라고도 한다.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둥그스름하게 펴져 있어 펼치면 고깔모양이 되고 접으면 홀쭉해서 쥘
부채처럼 된다.
갈모지 또는 환지라는 기름을 먹인 종이에 접는 간살마다 대를 가늘게 잘라서 만든 살을 넣
고 꼭대기에 닭의 볏처럼 생긴 꼭지를 단다. 안쪽 중턱의 양옆에 실끈을 달아서 비가 올 때에
는 갓 위에 ?쳐쓴 뒤 이 끈을 턱밑에 매어 고정시킨다.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갓(흑립) 사용을 조선초까지 소급할 수 있
으며, 선조 때 이순신이 쓴 『淸江先生후鯖쇄語』에는 명종 때를 전후한 입제의 설명중에 우
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선비와 갓>
조선조에 와서는 고려조의 비교적 자유분방했던 사회적 윤리관이, 삼강 오륜의 도덕관에 의하여 유교적 윤리관으로 강요 되었던 것이며, 특히 유교의 숭조사상은 '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하여 자기의 몸을 터럭만큼도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는 선비정신으로 몸가짐의 기본을 삼았던 것이다.
그것이, 뚜렷하게 연역적인 과정에서 어떻게 의관정장(衣冠正裝)으로 정착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선 머리의 보호를 위한 치장은, 알고 보면 대단한 의미가 있다, 쉽게 말해서, 머리카락 한올도 함부로 다루지않는 정성의 표상이 바로 안전모격인 갓을, 망건을, 탕건을......항상 머리를 보호하는 수단으로 착용 했다고 유추된다.
이 유교적인 격식은 비단 갓 과 같은 의상등의 외관만이 그런것이 아니라, 전통 예법에는 심지어, 먹는것 까지도 일일히 격식이 따르게 되어 있어서, 그 예법을 모두 지킨다는 것은 일반인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하다 못해 도포자락을 잡는 법까지도 격식대로 해야 한다는데, 어느 상인이 돈으로 양반을 샀다가 책상다리를 못해서 포기했다는 웃지못할 일화가 있기도 하다. 백과사전 연관이미지
원래는 비와 바람을 가리기 위하여 머리에 쓰던 실용적인 용구로서의 머리 쓰개. 형태상으로 보면 모자(crown)와 양태(brim)의 구별이 어려운 방갓형과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의 두 계열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두 계열의 갓이 상고시대부터 사용되어 오는 동안, 각각 재료와 형태 및 제작법이 다양하게 발전하면서 점차 사회성을 가지는 관모로 되었다.
그 중에서 조선 초기에 완성된 흑립은 갓의 발전과정상 최고의 완성품으로, 조선 5백년간 남자들의 위엄과 체모를 상징하는 관모로 사용되었다.
비가 오면 갓 위에 갓모(갈모)를 덧쓰고, 갓을 쓰지 않을 때에는 갓집에 넣어 소중히 보관하였다.
갓에 들인 이러한 관심과 정성은 의례를 존중했던 당시대의 규범에서 연유하며, 흑색이면서도 투명한 갓에서 보여지는 독특한 미적 특징은 복식이 갖는 흑백의 조화에서 더욱 차분하며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갓’이라고 하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관모였던 ‘흑립’만을 말한다. 고구려 고분인 감신총(龕神塚) 벽화에는 모자와 양태의 구별이 뚜렷한 패랭이형의 갓을 쓴 수렵 인물이 있고, 《삼국유사》에 신라 원성왕이 꿈에 복두(복頭)를 벗고 소립(素笠)을 썼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에도 갓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말에는 갓이 관리들의 관모로 제정됨으로써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1357년(공민왕 6)에 문무백관에게 갓을 쓰도록 한 것인데, 이어 1367년 7월에는 문무관에게 품계에 따라 정자(頂子)의 장식을 달리한 흑립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때의 갓은 기본 형태는 패랭이형일 것이나, 재료나 제작 기술상 조선시대의 흑립과는 다르다. 고려 말에서 조선초에 걸쳐 갓은 패랭이 · 초립의 단계를 거쳐 흑립으로 발전되었다. 태종 때에 관리들이 갓을 쓰고 궁궐을 출입한 적이 있었으나 곧 사모(紗帽)를 쓰도록 함으로써, 갓은 이후 점차 사대부들의 편복(便服)에 착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흑칠을 본색으로 한 상협하관(上狹下寬)의 갓[흑립]은 성종대 이후에 완성되어 조선 말까지 양반층이 전용물로서 즐겨 썼다.
1894년 단발령의 시행으로 중절모자가 등장하지만 갓은 계속 착용되었다. 1895년에는 천인층(賤人層)에게도 갓을 쓰도록 허락함으로써,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일반화되었다. 조선의 갓 문화는 의관갖추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 문화의 한 반영이며 전통적인 복장에서는 지금도 두루마기에 갓을 쓴 모습을 볼 수 있다. ‘갓’은 한자로 ‘흑립(黑笠)’ 또는 ‘입자(笠子)’로 표기되기도 한다. 성인 남자용으로서 그 형태는 위보다 아래가 조금 넓은 원통형의 모옥(帽屋, crown)과 아래가 약간 둥그렇게 곡선을 이루고 있는 양태, 즉 차양(brim) 부분으로 이루어지며, 갓을 머리에 고정시키기 위한 갓끈(笠縷)이 있다. 갓에는 진사립(眞絲笠) · 음양사립(陰陽絲笠) · 음양립(陰陽笠) · 포립(布笠) · 마미립(馬尾笠) 등이 있고, 이들을 신분에 따라 달리 착용하였다.
갓끈은 원래 갓을 머리위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턱 밑에 매는 실용적 구실을 하던 부분인데, 차츰 재료가 다양해지면서 장식적인 구실도 겸하였다. 헝겊으로 만든 포백영(布帛纓), 옥 · 마노 · 호박 · 산호 · 금패 · 밀화 · 수정 등으로 만든 주영(珠纓) 및 대로 만든 죽영(竹纓)이 있다. 헝겊으로 만든 갓끈은 갓을 쓰면 일단 턱 밑에서 고정시킨 뒤 내려뜨리지만, 주영 · 죽영은 그냥 장식으로 길게 가슴 밑까지 내려뜨리고 따로 검은 헝겊끈으로 고정시킨다. 갓끈에 대한 사치도 대단하여 계급에 따라 제한하거나 한 때 주영을 폐지하고 포백영으로 고친 일도 있었으나, 현전하는 유품들을 보면 조선 말엽까지도 주영은 계속되었던 것 같다. 흥선대원군 집정시에는 의관과 문물의 간소화시책에 따라 한 때 죽영이 유행하기도 했다.
갓과 관계되는 것이 '머리카락의 손보기'인데 동양 3국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은 2가지로 분류하여, 하나는 한족의 두발치장법이고, 또하나는 북학의 청조 조발로서, 이 두가지는 우리와 극명하게 대조가 된다,
즉, 한족의 두발은 우리와 같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터럭만큼도 머리를 다치지 않는다는 것이 같다, 그러나 그것은 위생적으로는 어려움이 따르며 청국의 경우는 드라마에서 보듯 조발자체가 특수하여 우리와는 전연 다른 두발의 형태이며, 위생적으로는 오히려 우리보다 현실적인 면이 있다.
일본의 경우는 사무라이의 두발에서 보듯 이마빼기를 밀어내는것, 그러니까 청국이나 일본은 두발의 가꿈이 우리와는달리 '受之父母....'의 사상이 없는대신 보다 위생적인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상투는, 알고 보면 꽤나 형식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선 내가 어렸을때 흔히 본대로 머리숱 많은 사람의 상투는 일단 머리를 풀고 가운데의 머리를 쳐냅니다, 그렇게하여 보기좋은 굵기로 상투를 찌게 되는데 그 상투의 청결유지가 매우 어려웠다.
또, 머리숱이 적은 사람의 상투는 보기에도 애처럽도록 모양갖추기에 처절한 노력을 한다.
<조선조의 마지막 선비>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아침에 세수를 하고 들어오기만 하면 마치 아이들처럼 옷소매와 저고리 앞자락이 흥건히 젖어 있곤 했다 한다. 망명 시절인지라 옷도 단벌밖에 없어 외출하려면 아랫사람이 부엌에 들고 가서 말려야 했다. 옷말리기에 짜증이 난 아랫사람이 어떻게 세수를 하기에 옷을 적시나 하고 문틈으로 세수하는 것을 숨어 보았던 것 같다. 머리를 뻣뻣이 세우고 오른손 한 손만으로 물을 길어 얼굴을 씻고 있으니 옷소매에 물이 흘러들고 저고리 앞자락이 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고개를 좀 숙이면 옷이 젖지 않을게 아닙니까." 라고 묻자, 호토치길, "세숫대야 같은 미물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그런 불측한....." 하고 야단을 맞고 있다. "그러시다면 왼손도 함께 쓰면 조금은 덜 젖을 게 아닙니까." 라고 묻자, "천한 그 왼손을 존귀한 얼굴에 대다니 그런 불손한.... . " 하며 연거푸 호통을 맞고 있다. 예 우리 선비들은 머리를 존중하여 천(天), 조(祖), 군(君), 사(師), 부(父), 등 존장(尊長)을 제외하고는 머리를 숙이는 법이 없었다. 또한 오른손을 존중하여 갓을 쓰고 수염을 다듬고 밥을 먹고 존구한 두상작업에만 오른손을 ?다. 반면에 왼손은 비천하게 여겨 발을 씻을 때나 돈을 주고 받을 때나 쓰는 손이요, 존귀한 얼굴을 씻을 때는 접근도 시키지 않았다. 선비들의 이 같은 존두비하(尊頭卑下). 존우비좌(尊右卑左) 사상은 얼핏 보기에 고답적인 것만 같다. 하지만 겉보기만 고답적일 뿐 세상 살면서 당하게 마련인 그 많은 존비를 분명히 하여 존을 택하고 비를 버리는 일이 체질화되고 일상화되계끔 한 선비들의 생활철학이었던 것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의(義)와 불의(不義), 도(道) 와 부도(不道), 절(節)과 변절(變節), 지(志) 와 상지(喪志), 예(禮)와 비례(非禮) 그리고 선악(善惡), 영욕(榮辱), 이해(利害), 용치(勇恥), 같은 상반된 기로에서 방황하게 마련이다. 고난이 수반되는 불의. 부도. 변절. 상지. 비례를 서슴없이 버리는 선택의 기틀을 이존비의 신체철학으로 체질화 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은 선비 사상을 일상화 하고 살았던 조선의 마지막 선비 였는지도 모른다. 나라가 기울자 장지연의 기개를 연상시키는 <시일야우방성대곡> 이란 직필(直筆)이 말해주듯 언론으로 의(義)를 지켰고, 민족이 뿌리째 먹혀들자 그민족사의 뿌리를 지키는데 지(志)를 세웠으며, 끝내 외지에서 옥사함으로써 절(節)을 지켰다. <이규태의 저서....'韓國人의 의식 구조'중에서>
<제주민속박물관 자료 중에서>
<< 총모자를 겯는 골머리와 갓, 탕건과 탕건틀
고급 말총과 제주여인들의 섬세한 손길 /
천고마비 계절인 요즘은 말들의 털빛이 유난히 윤기가 흐른다.
사계절 마음껏 풀을 뜯을 수 있는 너른 초원이 있어 말들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제주.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자란 말들은 당연히 좋은 털을 가졌고, 질 좋은 말총으로 만든 제주의 갓과 탕건, 망건 등은 아주 좋은 품질을 자랑했다.
제주의 말총공예는 주로 남자들이 갓을 만들었던 타지방과 달리 여인들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갓일을 물려주었고, 대대로 여인들이 갓과 탕건, 망건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갓과 탕건, 망건 등은 무역선을 타고 타지로 고가에 팔려나갔으며 거친 환경으로 인한 어려운 살림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게 누구 없느냐' / 도포자락 휘날리던 선비들의 필수품
<< 염색하기전의 총모자와 골머리, 바농대(바늘)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어린아이도 선비와 상민을 나눌 수 있는 차이가 있다. 바로 갓을 쓴 사람이 양반이고 쓰지 않은 사람은 상민인 것이다. 이렇게 갓은 조선시대에 신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역할을 하였다.
촉감이 좋고, 가벼울 뿐만 아니라 윤기나는 세련된 검은 빛깔과 고운 결은 세계 어느 나라의 관모를 보더라도 찾아보기 쉽지않은 품위와 우아함이 어우러져 있는 작품이다. 이 섬세한 예술품인 갓은 총모자와 양태로 크게 두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갓에서 컵처럼 생긴 머리부분을 총모자라고 하고, 평평한 차양을 양태라고 한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재료가 전혀 다르다. 총모자는 실처럼 가는 말총이나 쇠총으로 `모자골'이라는 원통형 나무틀에 고정시켜 `골머리'라는 받침대에 올려놓고 겯어 낸다. 이렇게 겯어진 총모자는 말총의 굵기가 가늘수록 좋고, 간격이 일정하고 촘촘할수록 상품(上品)으로 값을 더 쳤다고 한다.
양태는 대나무의 딱딱한 겉껍질만 실처럼 가느다랗게 쪼갠 대오리를 겯어 만들었다.
원형의 평평한 양태틀에서 만들었는데 그 지름이 크고 결이 고울수록 값이 더 비싸다고 한다. 말총공예는 워낙 섬세한 작업으로 이루어져 총모자와 양태를 만드는 장인이 다르고 이를 만드는 장인을 총모자장과 양태장이라 따로 불리었다.
이렇게 만든 총모자와 양태는 원래의 말총색깔과 대나무의 밝은 색깔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데 `사지'라는 말총붓으로 먹칠을 하여 염색한 후, 두 개의 부분을 하나로 견고하게 이어 옹근 갓으로 완성했다.
과거에도 귀해 양반들만 쓰고 다닐 수 있었던 갓이 지금은 좋은 재료도 구할 수 없고 만드는 장인들도 귀해져 이제는 시가만도 수백만원대라고. 소중하게 여겨 왔던 관모인 갓이 장인과 전수자가 사라져가면서 잊혀져 가는 생활문화유산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의 의생활에서 필수품목의 하나였던 갓. 이제는 의복의 변화와 단발령 이후 점차 수요가 줄어들어 무형문화재로 보전되어 전승되고 있다.
서양복이 보편화된 현대에서 갓과 탕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의복이 바뀌고, 먹고, 자는 생활이 서양화로 바뀌어 간다고 해도 바뀌지 않는 우리 한민족의 전통이 자긍심 높은 선비의 머리에 씌어졌던 갓에서 느낄 수 있는 정신이 아닐까 한다.
턱없이 낮은 지원금과 전승자를 찾기 힘든 현실에서 묵묵히 전통의 맥을 이어가는 장인정신과 제주의 소중한 문화를 후세에도 전해줄 수 있도록 좀더 실질적인 문화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한다.
<< 김천 직지문화공원내 '갓' 모양으로 전 인류에 하나 밖에 없는 화장실
경북 김천시 운수면 운수리 35번지 일원에는 즐거움과 문화가 함께하는 ‘직지문화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훈민정음으로 도배한 ‘갓’ 화장실이 있다. '동국제일가람'이라 일컫는 천년고찰 직지사와 옛날 우리들의 선조들이 과거 길에 오를 때 영남선비들은 반드시 지나던 추풍령 길목. 그 언저리에 세워져 역사적 지리적 의미가 크다.
옛 선비들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상징적인 건물구조로, 내부에는 직지문화공원 관리실도 있다. ‘갓’의 멋과 조화를 이루도록 ‘세종어제 훈민정음’ 언해본으로 내외벽을 단장했다.
선비의 고고한 자태와 바른 가르침을 계승하고 새로운 창조정신을 화장실문화 개선운동에 접목시킴으로써 새로운 변화를 꾀했다. 갓은 예로부터 총각이 결혼하면 예복을 갖춰 입고 갓을 쓰고 마을 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인사를 올리고 다녔으며, 일종의 성인 신고식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또한 500m 거리에는 ‘언덕 위의 무지개’모양을 하고 외부는 직지사의 사계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마감자재로 디자인했다.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파스텔 그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화사함과 정겨움이 배어나고 친근감이 있는 ‘쌍무지개 화장실’도 눈길을 끈다.
‘직지문화공원’중앙에는 음악조형분수를 중심으로 광장 3개소, 폭 25m 높이17m의 대형 2단 폭포가 관광객들에게 시원함을 더해 준다. 직지사 경내로 흐르는 물을 끌어들여 공원 내로 흐르게 하는 330m의 계류시설, 지압보도, 3600m의 산책로, 정자와 파고라, 의자 등 편의시설들이 설치되어 있는 김천의 명소 중의 명소이다.
직지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한 곳이다. 문화시설로 국내외 17개국 유명 조각가들의 작품 50점이 있다. 20여개 시(詩)비, 아파트 7층 높이의 전국에서 가장 큰 장승 2기(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170m의 성곽과 전통담장 등 볼거리가 많다.
분수와 어우러진 환상적인 오케스트라 리듬에 맞춰 춤을 추는 분수의 물줄기를 보고 있노라면 갑갑한 일상의 찌든 때를 한순간에 푸는 시원한 청량제가 된다.
특히 야간에 화려한 조명과 어우러진 음악분수는 가히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다양한 볼거리와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어 여름휴가를 김천직지문화공원으로 가는 것은 어떨까. 볼거리와 즐길 거리 먹을 거리가 많아 피서지로 추천하고 싶다.
** 찾아가는 길 : 경부고속도로김천 TG---> 승용차로 15분 거리(김천역에서 시내버스운행)
자료 수집 및 편집 : 권 오 신
추가 수집한 자료(정리요)

갓은 농부가 비를 피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소 귀천을 막론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 때면 다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비 오지 않을 때도 쓰니, 이는 매우 무의미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 나라 사람이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기자(箕子)가 우리 나라에 와서 큰 갓과 긴 소매의 옷을 지어 입혀 백성으로 하여금 몸을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싸움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믿을 수 없는 허황한 말이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옛 고깔의 남겨진 모양이라고 하였으나, 이 역시 그렇지 않다. 고깔은 꽈리와 같이 생겼으므로 꽈리를 일명 피변초(皮弁草)라고 한다. 지금의 갓은 위는 평평하고 아래 갓양태는 넓은데 어찌 고깔이라 보겠는가? 옛날에 풀로 갓을 만들어 비를 피했던 것일 따름이다.
요즈음 갓의 제도는 점점 높고 넓어져, 쓰기에도 아치(雅致)가 없고 균형이 안 맞아 볼품이 없다. 속담에 '갓이 너무 크면 항우(項羽)라도 쭈그러들고, 갓이 파손되면 학자도 당황한다.'고 한다.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일체 금하고 별도로 관건(冠巾)을 만들어 반포하되 등급의 차별을 정해야 한다. 다만 소립(小笠)을 제작하여 말 타는 자와 보행자가 들길을 걸을 때에 머리에 쓰고 비를 피하거나 햇볕을 가리는 도구로 하는 것은 괜찮다. 그 제도는, 모자는 이마를 덮을 수 있으면 되고 꼭대기는 지금의 갓같이 평평하지 않아도 좋으며, 만약 꺾을 수 있으면 꺾어서 전립(氈笠)처럼 뾰족하지 않은 것이 좋다. 다만 갓모의 높이는 조금 낮추고 갓양태는 날카롭지 않게 해야 한다. 베 2자 5푼이면 되고, 갓끈은 넓되 길게 할 필요는 없다. 평양 무열사(武烈祠)의 이여백(李如栢)의 화상을 보면 알 것이니, 이는 그 본보기이다.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면 배가 기우뚱거리는데, 이 때 조그마한 배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양태의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른다.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양태 끝이 남의 눈을 다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는 난장이가 갓 쓴 것처럼 민망하다. 이는 사소한 일이지만 들에 가다가 풍우를 만나면 갓모자는 좁고 갓양태는 넓고 지투(紙套)는 경직하여, 바람이 그 사이로 들어오면 펄럭이는 소리가 벽력 같은데, 위로 갓이 말려 멋대로 펄럭인다. 양쪽 갓끈을 단단히 동여매면, 갓끈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턱과 귀가 모두 당겨 올라가고 상투와 수염이 빠지려 한다.
유의(油衣)는 치마같이 하여 머리에 써서 손으로 잡는 것인데, 바야흐로 비바람이 불어칠 때는 갓이 펄럭여 일정하지 않으므로 불가불 끈을 풀어 손으로 갓의 좌우를 부축해야 한다. 그러나 빗물이 넓은 소매로 들어오므로 무거워서 들 수가 없다. 또, 말이 자빠지려 할 경우 어떻게 손으로 고삐를 잡겠는가? 이렇게 되면 위의를 잃은 것을 부끄러워할 겨를은커녕 죽고 사는 것이 시각에 달리게 된다.
일찍이 여진(女眞) 사람이 말 타는 것을 보았는데, 급한 비를 만나면 얼른 소매와 옷깃이 있는 유의를 입고 또 폭건(幅巾)같이 부드러운 모자를 쓰고 채찍질하여 달렸다. 그러니 어찌 쾌활하지 않겠는가? 또, 지금의 갓은 제작이 허술하여 갓모자와 갓양태의 사이에 아교가 풀어지면 서로 빠져 버린다. 역관들이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요동 들판을 지나다가 비를 만나 갓양태는 파손되어 달아나고 다만 모자만 쓰고 간다. 중국 사람이야 우리 나라 풍속에 그런 관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보통으로 보나, 같이 간 사람은 다 조소한다. 그렇다고 어디서 갓을 사겠는가? 매양 들판 가운데의 행인들을 보니, 비를 만나도 갓 위에 씌울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갓양태가 빠져 나가고 부서질까 염려하여 풀을 뜯어 갓양태 아래에 태를 만들어 가리며, 또는 갓을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 한 손으로는 상투를 쥐고 허겁지겁 달린다. 대개 갓 하나의 값이 3, 4백 냥이 되므로 갓을 생명처럼 보호하여, 그 궁색하고 구차함이 한결같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초립의 생긴 모양도 지극히 괴이하다. 소년은 물론이고, 아전들이 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서도 갓을 착용한다. 길흉에 구별이 없으니 이 무슨 예절인가? 또, 빽빽하여 통풍이 안 되므로 바람이 불면 초립끈이 턱을 파고들어 할 수 없이 시원히 초립끈을 풀면 바람에 날려가 마치 종이연 모양으로 멀리 날아올라 간 곳을 모르게 된다. 나이가 좀 든 사람이 초립을 어깨 뒤로 드리우고 다니는 것은 더욱 가증스럽다. 또, 만들기도 어렵고 값도 비싸니 금하게 하는 것이 좋다.
대저 나태한 풍습과 오만한 태도가 모두 갓에서 생기니, 어찌 옛 습속이라 하여 따르고 금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