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대마도 인문지리서]
(상) 역사인식으로서의 대마도
지난 4일 대마도 남쪽 관문 이즈하라항 입국 심사장은 본격 휴가철을 맞아 한국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부산에서 49.5㎞, 일본 규슈에선 132㎞에 있는 가깝고도 먼 섬. 일본의 독도 교과서 왜곡 문제로 악화된 한·일 관계의 여파 때문인지 입국 심사가 강화돼 두 시간 이상 줄을 서야 했다. 2층 심사장으로 향한 좁은 계단을 큰 여행 가방을 걸치고 간신히 올라서서도 지문과 사진이 찍힌 연후에야 비로소 입도(入島)가 허용됐다.
한·일 역사, 문화 교류의 다리인 대마도. 일본말로 쓰시마라고 불리는 이 섬을 두고 우리 역사학자들은 ‘고토(故土)’라고 학술적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우리는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실효지배’하는 고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잘 모른다. ‘대마도는 일본 땅,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 가사 한 구절이 대마도 인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마도가 국민에게 새롭게 인식된 것은 지난 7월 여·야 국회의원 50여명이 '대마도 반환요구결의안' 발의를 추진하면서다. 그 과정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1949년 "대마도는 명백한 우리 땅"이라며 반환 요청했다는 사실도 부각됐다. 얼핏 일본의 독도 망언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겠으나 대마도 문헌과 인문지리는 '우리 역사로서의 대마도'를 되돌아 보게 하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대마도 최북단 와니우라 해안가에 '한국전망대'라는 곳이 있다. 대마시가 한국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조성한 전망대이다. 이곳에선 쾌청한 날이면 부산을 볼 수 있다. 대마시는 여기서 찍은 부산의 야경을 활용해 한국 관광객을 모은다. 한데 팔각정 전망대 안에 '한국과 대마도의 역사'라는 연표가 탐방객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막부 시대를 연 17세기부터 한국과 대마도의 관계가 시작된 것처럼 정리돼 걸려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와 관련된 일본 대부분의 자료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시작한다. 나가사키 현립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유물 역시 임란 이후만 집중적으로 전시됐다. 대마도는 임란 후 교류를 시작한 조선통신사의 첫 기착지였으나 일본은 조선통신사가 갖는 양국 교린의 목적보다 막부의 습직(襲職) 축하 사절로 평가절하시키려는 의도를 은연중 드러내기도 한다. 대마도의 역사는 중국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왜전(倭傳)'에서 비롯된다. 3세기 모습을 묘사했다고 보이는 이 기록에 '대마국'으로 표기됐다.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도 '대마국' '대마도' '대마주' 등으로 나와 있다. 특히 일본서기 '신대(神代)'는 '한향지도(韓鄕之島)', 즉 '한국(三韓)섬'으로도 나와 있다. '환단고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일본 '대주편년략' 등 수많은 자료가 삼한 시대부터 우리 땅임을 적시하고 있다. 마치 탐라국 제주도, 우산국 울릉도가 한국땅인 것처럼 사료는 대마도가 한국땅 또는 속주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지도 문헌은 대마도 인식을 더욱 명확히 한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부하가 그린 '팔도총도'는 대마도를 조선 영토로 표기했다. 조선말기 우리가 제작한 '대동총도' '조선방역지도' '동국조선총도' '대동여지도' '강원도도' '경상도도'에도 독도와 마찬가지로 우리 영토, 즉 동래부(부산) 부속 도서로 취급하고 있다. 그들에게 관직을 주고 수직(受職)왜인이라 한 것도 이 개념에서 출발한다. 고려 공민왕 17년 대마도 번주(宗經茂)에게 만호(萬戶), 조선 세조 7년에는 번주(宗成職)에게 판중추부사(정1품) 겸 대마도주 도절제사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바다 위에 떠있는 산'이라고 불릴 만큼 험준한 산세와 부족한 농경지(전체의 4%) 때문에 사람 살 곳이 못 돼 고려 이후 공도(空島) 정책을 편 것이 우리의 실책이라면 실책이었다. 14세기 말 정지, 박위 장군 등이 정벌하고, 15세기 초 이종무 장군이 확실하게 굴복시켰으나 편입보다 번신(藩臣)으로써 예를 갖추게 하는 데 그쳤다. 그리고 1868년 메이지유신을 통해 중앙권력을 강화한 일본은 600여년간 한국의 번으로서 충성을 다해온 대마도주 소오(宗) 가문을 강제 접수하고 1869년 외무성 관리를 파견해 일본 나가사키현의 일개 지방행정단위로 재편해 버린다. 전북대 하우봉(사학) 교수는 "일본과 청(淸) 양쪽에 조공을 바친 오키나와의 류큐(琉球)왕국처럼 조선후기의 대마도도 조선과 일본 양쪽에 예속된 '양속(兩屬)관계'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대마도는 독도를 대하는 일본의 논리로 보자면 자신들이 '실효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연 7만여명에 이르는 한국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공장 하나 없는 섬의 경제가 돌아가는 데 일조하고 있다. 대마도 시내를 걷다 보면 이상한 한글 문구를 가끔 발견하게 된다. '한국어 하는 사람이 없어 한국 손님을 받지 않습니다.' 떠들썩한 한국관광객의 음주문화에 놀란 업주들이 혼네(本音=본심)를 드러내지 않고 '한국 손님 사절'을 에둘러 하는 말이다. 또 한글 간판이 섬 구석구석을 안내한다. 한국관광객 경제권이어선지 주민들은 우호적이며 친절하다. 2008년 8월 대마도. 일본 자위대가 '한국전망대' 바로 밑에 주둔하는 현실에서 '신(新) 양속'이 계속되고 있다. 그것이 고토 대마도의 오늘이다. ◇ 대마도는 면적 709㎢로 거제도보다 크며 제주도보다 작다. 섬 인구는 3만7000여명으로 중심지인 남단 이즈하라에 1만4000여명이 살고 있다. 부산에서 49.5㎞로 섬 북단 하타가쓰항까지 1시간20분, 이즈하라항까지 2시간20분이면 갈 수 있다. 섬 전체의 80%가 울창한 원시림으로 일본 본토에서 볼 수 없는 대륙계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섬 내 대학이 없어 부산으로 유학 오는 학생들이 많다. 글=전정희 기자·사진=이동희 기자, 취재협조=대마도문화연구소 - 2008. 8. 18일자 국민일보 [7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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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내고향 옹달샘
글쓴이 : 옹달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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