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니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한번 구원받으면 계속해서 구원받는다」(E. 팔머).
한번 선택된 자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성경의 원리를 가장 뜨겁게 받아들인 자가 어거스틴(Augustine)이었다.
구라파의 탕아였던 그가「완전타락에서 무조건 선택되어 특별한 속죄를 받고 거절할 수조차 없는 은혜」를 누린 후 그의 참회록에서 누누이 외치는 고백이었다. 그렇다 일단 성도(聖徒)로 부름을 받은 자는 성령께 붙잡힌바 되어 기필코 천국에 안착되고야 만다.이런 원칙을 우리는 "성도의 견인(堅忍)" 그리고 "궁긍적 구원(Ultimate Salvation)이라고 부른다.
각기 다른 주장들을 먼저 소개한다.
1. 천주교는 견인을 반대한다.
그들의 구원관이 신인협동론(神人協同論)에 근거하고 있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2. 알미니안 주의도 반대한다.
이들의 구원관도 인간의 자유 의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신자가 타락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구원을 인간의 선행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3. 루터 파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인간의 계속적인 노력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박형룡. 교의신학 5권. 구원론. 서울: 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77. 386쪽)
4. 개혁주의는 이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1) 견인의 내용
개혁주의에서 주장하는 견인이란 하나님의 선택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악에 넘어지는 경우가 있어도 다시 일어나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2) 성경적 근거: 이 교리의 근거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 10장 28, 29절이다.
3) 교리의 기초
(1) 이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항구성에 기초하고 있다.
(2)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기업의 언약에 기초하는 것으로써 그 약속은 창세 전에 주신 것이며(마 25:34), 그 약속은 불변이다(롬 8:17).
(3)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구원을 보증해 주셨기 때문이다(고후 5:5).
(박형룡. 교의신학 5권. 구원론. 서울: 한국 기독교 교육 연구원. 1977. 409쪽)
1. 견인(堅忍)이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인내(perseverance)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견고하게 붙든다"는 뜻이다.
어떤 차(車)가 가다가 그만 고장을 일으켜 길 위에 멈추어 버렸다. 운전수가 내려와 아무리 고치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정비사가 달려왔다.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차를 공장으로 끌고 가기로 했다. 어떻게 끌고 가는가? 그때 바로 견인차
(牽引車)가 왔다. 고장난 차는 견인차에 붙잡아 매인채 공장으로 끌려갔다.
견인차(牽引車)의 비유는 매우 적절한 비유이다. 그러나 한자로 표시한 견인차(牽引車)의 견인(牽引)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견인(堅忍)은 아니다. 한자를 오인하지 않기를 바란다.
"견인"의 의미가 이런 것이다.갈수 없는 어떤 것을 또 다른 어떤 것이 끌고 가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위험한 산길을 어느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손을 붙잡고 걸어가고 있다. 앞에 벼랑이 나타났다. 동시에 아버지는 아이의 손을 꼬옥 잡는다. 앞에 짐승이 나타났다. 아버지는 더욱 손에 힘을 준다. 그리고는 아이를 뒤편에 세운다.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는 .....! 어두움이 온다. 지척을 분간 할 수 없다. 억세게 손에 힘을 준다.「조심해!」, 짐승소리가 어둠을 찢는다. 이제 아버지는 아이를 아예 팔에 안는다. 집에까지 그렇게 아이를 안고 간다."견인"의 의미가 그런 것이다.아이는 자기가 아버지를 붙잡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아버지 쪽에서 더욱 세게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아이가 아버지를 붙잡고 있는가? 아니면 아버지가 아이을 붙잡고 있는가? 알미니안 주의는 아이가 아버지를 붙잡고 있다고 할 것이고, 칼빈주의는 아버지가 아들을 붙잡았다고 할 것이다.물론 평상시는 이들의 주장이 모두 옳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걸음마를 갓 배운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가는 도중에 돌에 걸렸을 때, 어린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았을 때와 부모가 어린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을 때의 반응은 다른 것이다.아이가 부모의 손을 붙잡고 있으면 아이는 부모의 손을 놓고 넘어질 것이다. 그러나 부모가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부모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이것이 바로 견인이다.
성도의 견인은 그래서 참으로 안심이다. 안전하다. 하나님의 일단 선택한 성도를 놓았다 잡았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도를 계속해서 끝 날까지 붙잡고, 믿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성경은 그것을「불꽃같은 눈초리」,「구름기동과 불기둥」「소망의 영원한 닻줄」등으로 실감하게 묘사하고 있다(히 6:18-20, 계 1:14, 19:12-16, 사 4:4-6, 신 1:33, 출 13:21-22, 시 23).
전능하신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안전함에 대한 성구를 소개한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
성경은 분명히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단언한다. 믿는대로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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