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한국교회는 지금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에 사로잡혀 있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어느덧 감정을 자극하고 흥분시키는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음악 및 율동적인 소양을 지닌 젊은이들이다.
저들은 음악 및 율동을 하면서 감동적 인 언어와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 감동적인 음악과 율동 또는 통성 기도가 반복되다가 예배로 이어진다. 언제부터 예배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이런 프로그램에 사로잡힌 예배의 현상을 대표적인 부흥사인 최복규 목사님은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오늘의 예배와 설교에는 십자가도 회개도 성결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지난 4월 28일 지적한 일이 있다. 자리를 함께 했던 합신교단의 존경을 받는 목회자인 김기영 목사님도 이와 같은 현상을 못마땅 하게 여기면서 모 교회가 이와 같은 현상의 주범이란 말까지 서슴없이 했다.
음악과 율동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성보다 감성에 치우치면 매우 위험하다. 그래서 중세교회는 물론 일부 개혁교회들은 감정을 흥분시키는 음악과 악기를 자제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더 많이 자극하고 더 많이 흥분시키기 위해서 각종 음악 및 율동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중이다. 감정적인 흥분을 성령충만으로 착각하게 되었다.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다.
둘째, 한국교회는 유명한 목회자의 유명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있다.
목회자의 진실한 삶보다는 목회자가 각종 두드러진 유명 카리스마를 지니면 그것으로 족하게 되었다.
그것이 설교의 카리스마이든지 방언의 카리스마이든지 치유의 카리스마이든지 뒤집어짐의 카리스마이든지 코미디의 카리스마이든지 정치력의 카리스마이든지 경제력의 카리스마이든지 반공의 카리스마이든지 상관이 없다. 수천 수만 명의 청중들을 사로잡기만 하면 된다. 카리스마가 강하면 강 할수록 사람들은 몰려든다.
나는 ‘교회성장지’ 12월호에서 이런 말까지 했다. “지금 일부 한국교회는 바른 삶보다는 흥분과 기현상을 나타내 보이고 그것들을 추구하게 만들므로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진실한 삶보다는 약간 무당적이고 약간 귀신적인고 약간 이단적인 요소들을 나타내 보여야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 같다.”
문선명 집단이나 김기동 집단에만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은 아니다. 유명 카리스마가 강하면 강할수록 약간 무당적이고 약간 귀신적인고 약간 이단적일수록 사람들은 몰려온다.
지금 한국교회는 유명한 목회자의 유명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이동원 목사님은 최근에 수많은 젊은 목회자들이 설교 세미나와 능력전도 세미나에 몰려드는 것은 유명한 목회자, 성공한 목회자,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목회자가 되려는 야심 때문이라고 바로 지적했다.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다.
셋째, 한국교회는 지금 아부성 발언과 몸짓에 사로잡혀 있다.
목회자들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죄와 허물을 지적하는 책망보다는 모든 것을 눈감아주는 아부성 발언과 몸짓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조언을 이미 오래 전에 로버트 슐러가 했다.
로버트 슐러는 죄를 지적하면 안 된다고 강조했었다. 결국 오늘의 한국 교회는 그 조언에 따라 죄에 대한 설교는 가능하면 하지 않게 되었다. 위로와 축복만 강조하게 되었다.
어느 유명한 목회자는 이런 말까지 했다. “교회의 신자들이 줄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중진들이 주일을 범하고 주일에 다른 곳에 가서 딴 짓을 해도 모른 척 하여야 합니다.”
결국 한국교회는 신자들이 회개와 헌신의 기본 신앙을 지니지 못해도 출석만 잘 하고 헌금만 잘 하면 신앙이 있는 것처럼 치켜 세워주게 되었다.
결국 목회자는 속이고 신자는 스스로 속아넘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은혜로운’ 목회라고 피차 착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 아무개가 분명히 신앙이 없는데 어느 교회에서는 신앙이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교회는 종교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사교의 장소로 바뀌어지게 된 것이었다.
피차 격려하고 치켜세우는 아부성 발언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교회는 누구나 가면 기분 좋은 곳으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서글프고 불행한 일이다.
한국교회에 소망이 있는가? 진솔한 자기 성찰이 있다면 소망은 있다.
목회자들이 먼저 자기를 책망하고 그리고 신자들을 눈물로 책망할 수만 있다면 소망은 있다.
목회자들이 가벼운 시대의 유행에 편승하는 대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준 고귀한 신앙과 삶을 진지하게 배우려고만 한다면 소망은 있다.
목회자들이 성공보다 성결을 추구할 수만 있다면 소망은 있다.
목회자들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교회의 부흥만 추구하는 대신 약하고 작은 교회들을 돌아볼 수만 있다면 소망은 있다.
죄를 무섭게 책망하며 울면서 회개를 촉구하던 이성봉 목사님이나 김치선 목사님의 설교가 그립다.
돈이나 명예나 정욕에 사로잡히는 대신 오직 십자가의 주님께 사로잡혀서 살던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보고 싶다.
죄인들에 대한 증오나 정죄대신 마귀새끼 같은 안재선을 용서와 사랑으로 품은 그래서 그와 그의 자녀들을 마귀의 자녀들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든 손양원 목사님과 같은 신앙과 사랑의 선배들이 보고 싶다.
조용히 진실하게 삶으로 그러나 감동적으로 설교하던 박윤선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이 보고 싶다.
깊고 넓은 역사의식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며 꿋꿋하게 서서 아무에게도 타협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던 강원용 목사님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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