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과 고통의 관계가 틀리다
신약성경 27권 중에도 고통과 어려움과 시련과 유혹과 갈등의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다. 신약성경 중에 어느 하나도 진공 속에서 기록 된 것은 없다.
모두가 인간의 삶을 소재로 기록됐다.
이와 같이 성경에는 어려움과 죄와 유혹 등이 기록되어 있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2장에 와서야 모든 악과 고난과 죽음과 죄 등의 기록이 끝난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긴다.
그런데 주님도 사람들과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다.
그는 죄가 없으셨으나 하나님께 순종하고 고난을 당하시면서 십자가까지 지셨다.
이것은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 .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히 5:9) 위해서였다.
성경에서는 근본적으로 인간을 수동적인 존재나 희생자(피해자)로 묘사하지 않았다. 또 근본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자로 묘사하지 않았다.
성경에서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존재로 기록하고 있다.
성경은 인간의 목적을 모태부터 희생자(피해자)로 묘사하고 있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을 책임이 있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받지만 인간은 무엇이냐가 문제점(issue)이다.
인간은 죄인이냐 의인이냐가 문제점이고 우리가 소망을 무엇에 두느냐,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느냐 아니면 물질에 두느냐 또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쾨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느냐가 문제점이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의 전형(paradigm-모범)이 되신다.
이는 주님께서는 주님은 자진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십자가까지 지셨다. 이것을 능동적으로 또 자진해서 하셨다.
인류를 구원할 목적을 가지고 "내 뜻대로 마옵시도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시면서 자진해서 죽으신 것이다. 고로 예수님은 희생자(피해자)로 자기를 우리와 동일시하지 않으신다. 십자가는 희생(피해)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주된 의미는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사 53:5를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심각한 질문을 주는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누구를 의뢰하느냐.
하나님이냐 아니면 모래 위에 우상으로 세운 "자신"이냐 하는 것이다.
내가 누구냐?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한 사람이냐?
나는 반석이신 예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사느냐. 아니면 무엇이 나의 피난처이냐.
이것들은 본질적인 질문들이다. 고통과 관련해서 근본적으로 알아야 할 질문들이다.
이 다음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실 질문은:
"네가 어떤 일을 당하고 살다 왔느냐?"
"너에게 있었든 그 나쁜 일들에 대해서 나에게 말을 해 보라"가 아니라 "너는 네가 당한 일에 대해 무엇을 했느냐? 네가 누구를 섬겼느냐? 네가 어려운 일을 당한 것을 내가 안다 그러나 네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했고 누구를 섬겼느냐"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하실 것이다.
성경에서는 왜보다 무엇이 더 중요하다. 무엇 즉 고통은 성경의 내용(context)이다.
이 내용(context)에서 하나님의 의와 영광이 나타나고 우리의 믿음이 나타난다.
그래서 욥기에서도 욥의 고통이 주가 된 것이 아니다. 욥이 모든 것을 잃었어도 욥의 끝은 완전히 다르다: "내가 회개하나이다," "전에는 귀로만 들었더니 이제는 내 눈으로 하나님을 뵈웠나이다." 욥은 하나님을 알아왔다.
그러나 욥이 당한 고난이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가까이 알게 했다.
고난과 고통에는 언제나 더 큰 뜻이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해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고 했다.
즉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을 의뢰하라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인간의 삶에는 갖가지 어려움이 있다. 우리는 대인 관계에서 많은 갈등을 가지며 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다. 즉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신다.
이것은 내가 누구를 섬기느냐를 시험하시는 것이다. 불신자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할 줄 안다.
따라서 고통은 목적이 있다:
1) 고통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시험이다(신 8:2).
고통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들어낸다. 우리가 누구를 섬기느냐를 들어낸다.
2) 또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게 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벧전 1:7).
고통은 우리를 변화시킨다. 우리를 정금보다 귀하게 만드신다.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지를 알게 한다.
요점은 우리는 모두 고통을 당하지만 본질적으로 희생자(피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죄인이다. 문제는 우리의 책임과 고통과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 운동의 정체를 들어내는 핵심적 문제점의 하나이다.
즉 인간의 책임과 인간의 고난과의 관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방법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중에 큰 유행을 타고 있는 것이 심리이설의 내적치유이다.
내적치유에서는 인간은 모두 수동적이요 피해자라는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모두 수동적으로 고통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모두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요 파생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우리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기독교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많은 상담이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 서점에서 판매하는 상담에 관한 책들의 몇 %가 이런 내용을 취급하고 있는지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상담에 관한 책의 최소 80-90% 이상이 이런 심리적 사상과 철학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들이다. 인간은 수동적으로 고통을 받고, 죄는 욕구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보상적으로 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의 내용들이다.
얼마전(2003년 3월?)크리스찬 헤럴드에 내적치유 세미나에 관한 전면 광고가 있었다. 하나님이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면서 마음이 아팠다.
우리는 이러한 내적치유의 오류를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정확히 알고 우리의 마음을 항상 하나님을 향해 두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금도 예레미야를 통해서 우리에게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찜인고."(렘 8:22)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처녀 딸 애굽이여 길르앗으로 올라가서 유향을 취하라 네가 많은 의약을 쓸지라도 무효하여 낫지 못하리라.(렘 46 :11)
하나님은 지금도 그의 백성들의 응답을 기다리신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렘 17:14)
우리는 내적치유법을 찾지 말고, 어떤 문제를 가지고도 우리의 대 의사 되시고, 길르앗의 유향 되시는 주님께 달려갈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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