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투명한 사회'로 한발 내딛어
[51] 재산공개·금융실명제
취임 3일째인 1993년 2월 27일, 대통령 김영삼은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했다. 17억7822만원. 이것은 김영삼이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단행한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의 시작이었다. 3월 21일 민자당 의원과 당무위원들이 재산을 공개하자 사람들의 입이 벌어졌다. 이들 재산의 평균액은 25억원이 넘었고, 100억원 이상의 부동산을 지닌 사람이 8명이었다. 빌딩 11개와 주택 11채를 보유하거나 시가 수백억원의 땅을 50억원에 신고한 사람도 있었다. '상위 50걸' 중 민정계가 45명이었다.
재산공개 파문으로 국회의장 박준규가 민자당을 탈당했고, 유학성·김문기 등은 의원직을 사퇴했다. 전 국회의장 김재순은 3월 29일 정계은퇴 성명을 발표하며 '토사구팽(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잡아먹힌다)'이란 고사성어로 심경을 표현했다. 자신을 한신(韓信)에, 김영삼을 한고조 유방(劉邦)에 비유한 셈이었다. 5월 20일에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통과돼 공무원의 재산 공개를 제도화했다.
6월 22일, 김영삼은 부총리 이경식을 불러 금융실명제를 빨리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이야기가 새면 모가지다. 비밀을 지켜라." 이경식과 재무부장관 홍재형은 대통령 비서실장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을 진행했다. 김영삼은 "비밀이 샌다면 급속도로 자본이 빠져나가 하루 아침에 우리 경제가 폭삭 망할 수도 있기 때문에 철저히 보안을 유지했다"고 회고했다. 실무진이 7월 하순 미국 출장을 떠난 뒤 경유지인 도쿄에 내려 몰래 귀국했고, 과천의 밀폐된 아파트에서 '남북통일 작전'이란 암호명의 작업을 수행했다.
8월 12일 저녁 7시45분, 금융실명제 실시가 헌법 제76조의 '대통령 긴급명령권'에 의해 전격 발표됐다. 이로부터 모든 개인과 법인은 금융기관과의 거래 때 실명이 아니면 거래를 할 수 없게 됐다. 부정축재 자금과 부동산 투기 자금의 '세탁 절차'였던 가·차명 예금이 사라졌고, 세원이 투명해져 이자 소득세가 낮춰졌다. 부작용이 있긴 했지만,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는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를 투명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대통령 김영삼의 인기는 상한가였다. 그 해 4월 한 방송의 여론조사에서 김영삼은 최진실과 허재를 제치고 '10대 청소년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중스타'로 뽑혔다.
▲ 1993년 8월 12일 대통령 긴급명령권으로 전격 단행된 금융실명제 실시
발표를 다룬 대한뉴스 영상물. 당시 최진실이 출연한 공보처 제작 금융실명제
홍보물 두 건도 실었다. /유석재 기자
- 2008. 8. 11일자 조선일보 [A8면] 유석재 기자 karma@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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