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구약 성경의 역사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역사적 종교다. 하나님의 계시는 역사적인 상황 중에, 곧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통하여 주신 것이다. 계시는 역사적 배경과 뗄 수 없고 오직 그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역사가 현대인이 말하는 역사와 모든 면에서 같다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라면 자기 시대의 모든 사실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서술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역사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특정한 백성을 어떻게 하셨는지에 대해서만 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기록은 역사라기보다 증언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앙고백을 기록했던 것이다. 따라서 ‘성경의 역사’는 ‘구원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 거룩한 역사의 범위는 그 어떤 역사서보다도 방대하다. 하나님의 견지에서는 인류사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즉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태초부터’(창 1:1)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계 21:1,5) 마지막 때까지 전부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구약은 39권의 책을 모은 것이다. 이 책들이 배열된 순서는 저작 연대나 취급하는 내용의 연대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문학적 양식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구약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문학이 있다. 첫째, 역사서(모세 오경부터 에스더까지), 둘째, 지혜 문학(욥기부터 아가서까지), 셋째, 예언서(다섯 개의 대선지서(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부터 12개의 소선지서(호세아-말라기)가 있다.
◐ 구약 성경의 역사 ◑
1) 창조 - 성경은 우주와 땅, 생명과 사람의 창조에 대한 위엄찬 서술로 시작한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는 하나님으로 시작하여(태초에 하나님이…창조하시니라) 계속 진전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창조에 와서 그친다.(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그 이후 창세기 2장부터는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하는 역사가 펼쳐진다.
2) 선택된 아브라함 - 주전 2천년 이후 매우 중대한 일이 시작되었으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신 일이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너를 축복하리라”는 말속에 모두 녹아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라엘은 약속된 후손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 속에는 이스라엘 뿐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과 그들의 복에 대한 말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야 비로소 그 약속들이 성취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참 후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는 열 두 아들이 있었다. 그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된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들은 그들의 말년을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보내다 죽은 것이 아니라, 흉년에 몰려 애굽으로 내려가 거기서 살다가 죽게 된다.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은 애굽에서 가장 높은 행정 수반이 되었다. 외국인으로서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하나님의 섭리로 그 일을 이루게 된다. 창세기의 막은 이 요셉의 죽음과 함께 내려진다.
3) 출애굽 - 그 후 애굽에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서(출 1:8)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역으로 괴롭게 한다.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의 약속대로 모세를 세우셔서 그들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이끌어 가신다. 그들이 애굽에서 유랑한 세월은 무려 430년이나 되었다(출 12:40-41).
출애굽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세 가지 귀중한 선물을 주신다. 첫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새로운 언약이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5-6)
둘째는,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이었다. 그리고 셋째는, 속죄하는 희생의 제도였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막을 짓게 하시고, 속죄의 제사 예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친히 가르쳐주신 것이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한 지 1주년이 되는 날에 세워졌다(출 40:17). 그리고 2주 후에 유월절을 지켰으며(민 9:1-3), 또 2주 후에 20세 이상 모든 장정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자들을 계수하였다(민 1:1 이하). 그 진전은 매우 놀라웠다. 이스라엘은 처음에 갓 해방된 노예들의 무조직적인 오합지졸이었으나(출 13:17 이하), 여호와의 언약을 맺은 ‘거룩한 나라’가 되었고(출 19:1 이하-레위기), 하나님이 그들 중에 거하시는 ‘제사장 나라’가 되더니 이제는(민수기) 전투태세를 갖추어 진을 치고 약속한 땅을 향하여 행진하는 ‘군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속에 빠르게 성장해가던 이스라엘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무너져간다. 그 이유는 ‘백성들의 불평’(민 11:1-6)과 ‘모세의 누이 미리암과 형 아론이 모세의 권위를 손상하기 시작한 것’(민 12장), 그리고 가나안을 탐색하려고 보낸 ‘정탐꾼들의 실망스런 보고’에 기인한다. 정탐꾼 중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하나님을 불신하지 말고 그 땅 거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백성들은 오히려 그들을 돌로 치려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어른 중에는 아무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심판을 내리고 말았다. 오직 신실한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에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4) 가나안 정착 - 모세는 죽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자기를 계승하여 여호수아가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도록 임명하였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여호수아에게 임하였다.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수 1:6)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넜던 것처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요단을 건널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복하게 되고, 여호수아는 각 족속 별로 제비를 뽑아 기업을 나눠준다(수 13-22장).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땅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지만, 그곳에 살던 거민을 도륙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는 순종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이방 문화가 그 영토 안에 그대로 남게 되었고, 이스라엘의 신앙과 행실에까지 스며들게 되었다. 이것이 사사기에 기록된 약 200여 년 동안의 상태였다. 타락과 압제, 그리고 구원의 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사사기의 중심에 서 있는 사사들은 여러 가지 역할을 담당했다. 첫째는, ‘군사의 영도자’로서 이스라엘을 압제자에게서 구해 냈다. 둘째로, 그들은 ‘영적인 지도자’였다. 셋째는, 그들의 칭호가 보여 주는 대로 ‘재판관’으로서 사건을 심리하고 이스라엘에 공평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법과 질서가 온전히 지켜지지는 못했다. 그 증거가 사사기의 가장 마지막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하)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을 기점으로 이스라엘은 사사시대를 끝맺고 왕정시대의 서막을 열게 된다.
5) 왕국 수립 - 이스라엘의 첫 왕은 기스의 아들 사울이었다. 여러 모로 훌륭한 모습에 감동하신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친히 기름 부어 주심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게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결국은 망하게 되었다. 그는 세 번이나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을 어겼다. 아말렉을 완전히 멸절 시키라고 할 때 듣지 않았고, 희생을 드리는 제사장의 특권을 스스로 취하였으며, 무당에게 가서 자신의 일을 물어보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다. 끝내 사울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한다.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자가 다윗이다. 다윗의 첫 업적은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나라를 모든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한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숙적들인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 시리아(수리아) 등을 치고 약속의 땅 전부, 곧 이집트의 나일강에서부터 유브라데스강까지 다스렸다. 이러한 승리와는 반대로 다윗은 국내에서 일어난 반란은 참아야 했다. 처음에는 그의 아들 압살롬이 모반하였고, 다음으로 세바라는 저속한 자가 왕위를 엿보았다.
다윗은 예루살렘에 자기를 위한 집을 짓고서 여호와를 위한 집짓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금하고 그의 아들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이와 함께 한 가지 약속을 하신다.
“네(다윗)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삼하 7:12)
다윗의 자손을 왕으로 인정하겠다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이다. 약속대로 솔로몬이 왕위를 잇게 되었고, 다윗이 고대했던 하나님의 집인 예루살렘 성전을 짓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솔로몬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 공주들을 첩으로 취하였고, 그 첩들은 솔로몬의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다(왕상 11:1-8). 게다가 솔로몬은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3만 명을 강제 노역에 소집하는 압제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그의 건축사업과 호화스런 궁정생활을 무리하게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르호보암이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백성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였다.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 12:4)
르호보암의 늙은 모사들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고 그들을 품으라고 충고해주었건만, 그는 젊고 미숙한 모사들의 충고를 듣고서 오히려 백성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래서 북쪽과 동쪽의 열 지파들은 분격하여 다윗 왕조에게서 떠나 여로보암 장수를 중심으로 독립을 선포하고 만다. 나라가 남북으로 갈린 것이다. 결국 북 이스라엘은 여로보암을 첫 왕으로 세우고 수도는 세겜(이후 사마리아오 개칭)으로 정하였다. 남 유다는 르호보암 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고 수도는 예루살렘으로 하였다.
6) 북 이스라엘 - 북 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은 솔로몬의 신하였다.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다섯 왕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는데 그들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시간이 흘러 주전 881년, 즉 여로보암이 죽은 지 28년 후에 오므리 왕조가 시작되었다. 오므리는 수도를 사마리아에 정하고 이 성읍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으로 만들었다. 그는 자기의 아들 아합을 페니키아 공주 이세벨과 혼인시킴으로서 이스라엘에 큰 어려움을 가져왔다. 이세벨은 두로의 주된 신인 멜카르드(바알)의 예배자일 뿐만 아니라, 궁중에 ‘바알의 선지자들’을 두고 자기 남편인 왕도 이 우상숭배에 참여하게 하였다.
궁중에서 행해지는 이런 뻔뻔스런 배교가 계기가 되어 하나님의 선지자가 큰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 첫 선지자는 길르앗에서 나타난 엘리야였다. 그는 바알 선지자들에게 갈멜산에서 승부를 가리자고 도전하고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임으로 850명의 바알의 선지자들을 물리치게 된다.
후에 이스라엘 군대 장관으로서 엘리사 선지자의 권위로 왕위에 오르게 된 예후가 철저하게 아합의 집을 숙청하고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를 몰아내게 된다. 예후의 왕조는 북 이스라엘 전 기간의 절반에 해당하는 약 100년(주전 841-751)동안 지속되었다. 그 결과 예후의 증손자인 여로보암 2세 때에 이르러 북 이스라엘의 국력은 전성기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평화와 번영은 사치와 방종을 불러오게 되었고, 영적․육적으로 타락에 빠진 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 주전 722년 멸망당하게 된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은 대부분 추방당하게 되고, 이스라엘에는 시리아인과 바빌로니아인들이 이주하게 된다. 그 결과로 생긴 혼합된 족속이 사마리아인의 기원이 되었다.
7) 남 유다 -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의 멸망 뒤 135년이나 왕국을 더 지속한다. 독립 기간에 주목할 만한 것은 두 번의 종교개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첫 개혁은 이사야, 미가 선지자의 격려로 히스기야 왕이 단행하였다. 히스기야는 그의 통치 초기에 성전을 수리하여 다시 문을 열었다. 그는 자기 부친 아하스가 도입한 앗시리아 우상의 여러 장비들을 자기 나라에서 단호하게 제하여 버렸다. 그리하여 앗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십 팔 만 오천이나 되는 앗시리아의 군사를 싸움한번 해보지 않고 이기게 된다. 이를 통해 유다는 하나님의 역사를 똑똑히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죽은 후 반세기 동안은 배교(背敎)의 시대였다. 그의 아들 므낫세는 앗시리아에 꼼짝 못하고 추종하는 속왕이었다. 그는 종교적 혼합주의를 택하여 히스기야가 파괴하였던 가나안과 앗시리아의 우상 예배를 다시 받아들였다. 일월성신의 예배, 강신술, 바알 예배와 유아 희생까지 행하여 하나님의 땅을 더럽혔다. 그의 아들 아몬이 2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나 더 나아진 것은 없었다.
주전 639-609에 다스린 요시야 왕은 형세를 다시금 뒤바꾸어서 그의 증조부 히스기야보다 더 철저한 개혁을 단행한다. 그는 개혁 중 신명기 전부, 혹은 일부로 보이는 ‘율법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백성을 무론 대소하고 광장에 모으고 발견된 율법서를 친히 그들에게 읽어 주었다. 그리고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새롭게 하고 앗시리아와 가나안의 우상들을 성읍과 지방에서 없애고, 산당들을 불태우며, 강신술과 유아 희생을 금하고,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였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어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 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25)
그러나 요시아가 전쟁 중 전사함으로 그가 주도한 개혁의 결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의 아들 여호야김이 그의 선한 일을 재빨리 뒤엎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 주변 국제 정세는 상당히 변하였다. 지난 200여 년 동안 중동 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던 앗시리아가 신흥 강국으로 떠오른 바빌로니아에 의해 함락된 것이다. 그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유다는 주전 597년 바벨론에게 1차 침공을 받게 되었고, 10년 후 주전 587-6에 2차 침공을 받아 솔로몬이 세웠던 찬란한 예루살렘 성전은 완전히 불타 없어지고 남 유다도 망하게 되었다.
8) 바벨론 포로 귀환 - 바벨론 포로는 약 50년 간 계속되었다. 포로기간 중 무엇보다 그들에게 가장 큰 시련은 종교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성전을 잃어버림으로 영적으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겔이 그들 중에 있으면서 그들을 인도했다. 에스겔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했다. 하나님은 여전히 자신의 백성들을 버리시지 않았던 것이다.
주전 559년에 싸이러스(고레스) 2세가 페르시아(바사) 왕국의 왕위에 올랐다. 9년 후에 그는 메디아(메대) 군대를 이김으로 메디아 왕도 되었으며, 메디아와 페르시아(메대와 바사)는 연합국이 되었다. 싸이러스(고레스)는 주전 546년에 리디아 왕 크로우써스를 패배시킴으로 소아시아 전체가 그의 제국에 병합되었다. 유다 포로들은 싸이러스(고레스)의 전승을 듣고 그들이 바빌로니아에서 구출 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고 기대하게 되었다. 결국 주전 539년에 기다리던 구원이 왔다. 바빌로니아를 점령한 싸이러스(고레스)는 두 칙령을 내려 유다 포로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중건하라고 지시한다. 성전 지을 재료와 치수를 포함한 두 번째 칙령이 에스라 5:3-5에 보존되어 있다. 싸이러스가 그러한 포고를 발한 것은 그의 일반적 정책과 완전히 합치한다. 브루스(F. F. Bruce)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싸이러스의 제국관은 앗시리아의 제국관과 매우 다르다. 앗시리아인들은 그들의 식민지에 자기들의 신들을 예배하라고 강요하며, 식민지의 신을 정복함을 자랑하였다. 싸이러스는 그러한 정책으로 그의 식민지 백성의 종교적 감정을 상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다. 반대로 그는 그들의 여러 신들을 친히 예배하여 줌으로 그들의 감정을 유화하려 하였다”(Israel and the Nations, 1963, 삽화 넣은 판, 1969, 100.)
포로에서의 귀환은 분명히 구분되는 세 단계로 일어났다. 이 사건들의 순서에 관해서는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으나 여기서는 전통적인 견해를 소개하려 한다. 첫째로 고레스의 칙령이 있은 지 1년 후인 주전 538년 스룹바벨이 큰 무리의 유대인들을 이끌고 성전을 다시 세우려고 유대 땅으로 떠났고, 두 번째로 에스라가 율법을 세우려고 떠났으며(주전 458년), 마지막으로 느헤미야가 성벽을 중건하려고 떠났다(주전 445년).
먼저 스룹바벨은(주전 538)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번제단을 쌓고 성전의 기초를 놓았다. 그러나 이 때 사마리아인들이 함께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려 하자 이를 거절하였고, 이로 인해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의 대치로 인해 성전 재건이 약 15년 동안 중지되었다. 성전 건축이 다시 계속된 것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의 후원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전재건은 주전 520년에 다시 시작되었고, 515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성전파괴 후 약 70년 후의 일이다.
포로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제사장이며 서기관이었던 에스라였다. 이스라엘의 종교적․도덕적 본분을 율법에 따라 규제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13년 후에 느헤미야가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을 더 굳건히 재건한 후 대 공중 집회가 소집되었다. 그 자리에서 에스라와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백성들에게 크게 낭독하여 들려주며 설명했다. 그리고 국가적인 죄를 공적으로 고백하고, 언약을 새롭게 하여 앞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킬 것을 다짐하였다. 마지막으로 큰 기쁨 가운데 성벽 중건을 기념하였는데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느 12:43). 느헤미야 시대를 끝으로 구약과 신약 사이의 중간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 신구약 중간시대는 교재를 참고하라!
◉ 대 제국들
☞ 다음 연대들은 각 제국들의 주권이 이스라엘에 미친 기간을 표시한다.
주전 854-612년 앗시리아
612-605년 이집트
605-539년 바빌로니아
539-331년 페르시아
331-63년 그리스(셀레우코스가와 프톨레미가를 포함)
63년 로마
◉ 중요한 연대
주전 약 1280년 출애굽(이집트 탈출)
약 1050년 사울 왕의 왕국 건립
약 1010년 다윗이 왕위에 오름
약 930년 솔로몬 왕의 죽음, 분단된 왕국의 시작(북 이스라엘 & 남 유다)
약 722년 사마리아 함락, 북 이스라엘의 멸망
약 701년 산헤립의 예루살렘 포위
약 612년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함락
약 597년 예루살렘 함락, 바빌로니아 포로의 시작
약 586년 예루살렘 멸망
약 539년 싸이러스(고레스)의 칙령, 1년쯤 후에 첫 포로 귀환
약 515년 성전이 재건됨
약 458년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
약 445년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
약 323년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
약 167년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성전을 더럽힘. 마카비의 반항시작
약 63년 폼페이가 예루살렘에 도착함, 유대가 로마의 속령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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