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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 도 자 료 - 새벽기도의 유래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19. 19:12
새벽기도의 유래

 

-한국교회와 1907년 대 부흥-

1. 대 부흥(復興)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905년 6월 25일 서울에서 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남장로교 레이놀즈(W. D. Reynoldes)의 동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한 바 있었다. 그 동의에 의하면 "이제 때가 성숙하였으니, 하나의 한국 민족교회를 창설하여 그 이름을 [한국기독교회]라 하리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한국의 자립·자주적인 민족교회의 형성, 그것도 교파의 구별이 없는 단일한 기독교회의 형성에 대한 범주적인 요청은 이렇게 해서 널리 깔리기 시작했다. 이제 여기에 한 획기적인 모멘트가 그 형성력에 부여되기만 하면 된다고 보았다, 그것이 바로 1907년도의 한국 교회의 대 부흥이었다.

2. 그 부흥의 원류(源流)
이 부흥회를 가능케 해서 전국을 휩쓸게 한 물결은 두 군데서 흘러 왔다. 한 흐름은 선교사들의 기도회에서 연원했다. 1903년 원산(元山)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들이 기도와 성서 연구를 위한 기도회를 갖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장로교와 침례교 교인들까지 가세하게 되었고, 이때 남감리교 선교사 의사 하디(Dr. R. A. Hardie)는 몇 해 동안 애써온 자신의 선교 활동의 열매 없음에 고민하던 중 선교사로 오게된 자신의 동기에 대해 회개하게 되면서 급기야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었다.

1904년 원산의 집회는 반복되었다. 이번에는 삼파 연합의 사경회 도중 장로교의 로브(Rev. A. F. Robb)가 특별한 성령의 감화에 젖어, 한국인으로서 당시 은혜에 깊이 젖어있던 전계은(全啓恩)과 함께 원산 거리를 누비며 가슴을 치면서 통회 전도를 했고, 감리교의 정춘수(鄭春洙) 역시 그 부근을 왕래하면서 감격과 열의로 이 성령의 은사를 선포하였다.

또 하나의 흐름이 바로 한국 교회 지도자들의 깊은 신앙 생활의 경건에서 왔다. 사경회의 영향, 국가의 비운에 통회하는 기독교인들의 내성(內省), 그래서 하나님 밖에는 기댈 곳이 없다는 한국인들의 신앙에서 이 부흥의 물결은 도도히 흘러 왔던 것이다.

목사 영계(靈溪) 길선주(吉善宙)! 한국 최초로 새벽 기도회를 시작했던 그의 성령에의 뜨거운 열정이 바로 1907년 대 부흥의 직접적 동기가 되었다. 이처럼 부흥의 용솟음치는 성령의 샘은 원산의 전계은, 정춘수와 아울러 평양의 길선주 이 세 한국 목사의 신앙 체험에서 연원했고, 따라서 그 부흥 뒤의 한국 교회의 신앙도 이들의 영성이 농도 짙게 그 언저리에 스며있게 된 것이었다.

3. 1907년 1월 13일, 평양 장대현
전날 하디 선교사의 집회로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 부흥회는 다음 주일 밤 길선주가 인도한 집회에서 그 성령의 불길이 터져 올랐다. 교인들의 감동은 놀라웠다. 교회는 '신비스러운 경험'을 하였다. 교회에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에 힘있는 영적 압력이 베어 구속하는 듯하였다.

다음날 월요일 밤에도 장중한 신비의 세력이 임재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교회에 들어설 때 확실히 체감으로 거기서 성령의 임재를 압도당하듯 느끼고 있었다. 그 날 전형적인 평양 대 부흥의 분위기가 감격 넘치게 펼쳐지고 있었다. 런던타임즈의 기사에 의하면, "나의 아버지여!라는 말을 하자마자, 밖으로부터 흠뻑 밀려드는 강대한 힘의 임재에 압도당했다"고 한다.

교인들은 눈물과 감격으로 밤새워 기도했고, 그 감동의 격류는 몇 일 밤낮을 계속했다. 통성 기도의 음성은 신비로운 조화와 여운을 가지고 있었으며, 통회의 울음은 성령의 임재에 압도되는 영혼의 넘치는 찬양의 물결 같았다. 그 통회 자복의 광경을 묘사하는 한 여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저런 고백들! 마치 지옥의 지붕을 열어 젖힌 것과도 같다. ... 이루 상상할 수도 없는 저 죄악의 고백들,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이 무엇으로 이런 고백들을 강제할 수 있으랴? 많은 한국 교인들이 하나님에의 두려움에, 마루에 얼굴을 가리우고 슬피 탄식하였다"고 한다.

4. 새벽예불이 새벽기도로
한국의 최초의 영적 대각성운동이 식을 줄 모르고 빠르게 확대되면서, 한국교회역사의 새 불을 지폈다. 그토록 뜨거운 죄고백과 회개를 불러일으킨 성령의 역사는 식을 줄 모르고 밤을 새우는 게 보통이었고, 또 새벽부터 낮동안 계속 연장되었다.

지나가다가 성령의 불을 받은 사람, 스스로 일어나 죄를 고백하며 성령의 뜨거운 체험을 하면서 예수를 영접한 그들에게 그동안 행해져 왔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신자가 되기 전에 이날 까지 해왔던 불교의 새벽 예불기간이었던 것이었다.

어떤 특정한 기간이 아니더라도 새벽만 되면 예불을 드려왔던게 그 당시에 비크리스쳔들에게 보편적으로 있었던 정기행사였다.

그때 길선주 장로는 이왕 예수를 믿게 되었으니, 그동안 행했던 새벽에불을 없애지 말고, 하나님께 새벽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이어가자고 나오게 되었다.

그것이 오늘날의 새벽예배의 원류이다.
선교의 토착화에 있어서 그 나라의 전통문화를 기독교적으로 토착화시킨 긍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은 새벽예배가 성경에 나온 것이며, 예수님도 행하셨다는 근거자료들을 내걸지만, 그것은 한국의 새벽예배를 교리적으로 합리화시키는 작업일 뿐이다. 그렇다고 치면, 현대에 생긴 종교적 산물을 성경의 문자로 들이댄다면 이단될 것이 뭐가 있겠나.

5. 토착화의 신앙화

토착화 신학을 이상한 이단쯤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어서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낸다.
우리나라의 새벽예불을 새벽기도로 기독교가 더 좋게 활용한 예를 토착화라고 한다.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복음전파와 신앙인의 영적인 성숙을 위해서 충분히 기독교가 교훈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중동 아랍 땅에 기독교를 전파한다면, 그들의 언어로 하나님을 부르는 '알라'라고 부르지 않겠는가 하는 말이다. 한국에 '엘'이나, 'God'로 전하지 않고, 우리의 고유 언어인 하나님을 썼으니 이 또한 선교언어의 토착화 작업이 아니겠는가?
새벽기도는 긴 세월을 거쳐 오늘날 산업사회의 불편함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주5일근무제 확대로 인해 주일성수의 문제도 민감사안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과연 토요일로 예배를 옮길 수 있을까 거기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어떻게 해야하나 하며 신학자와 정치가들이 고민이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예수님의 새벽기도와 초대교회의 축제적 예배의 전통을 따르는 자손으로서, 다시한번 이 시대로 토착화시킬 필요가 있다.
기존의 새벽예불 드리는 듯한 새벽예배가 아니라.
새벽예배 후, 아침식사와 출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여건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건조한 사회에 살면서 영성의 유지를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피폐된 조이조각처럼 허공을 날라다닐 지 모른다.
자신의 영성생활을 소중히 지키며,
급속도로 변하는 시대를 해석할 줄 아는 눈과,
성경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기울이는 귀와
기도를 통해 삶을 역동적으로 이끌어가는 힘찬 발과
일기를 써내려가듯 섬세하게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손과
자신을 하나님 앞에 굴복할 줄 아는 무릎과
공동체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려는 아침의 달콤함을
그 어떤 바쁨과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을 시간과의 싸움, 잠과의 싸움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맘에도 없는 억지로의 참여가 자신을 더 타성에 젖게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알려주고 싶다.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는 자신의 실존체험, 정체성 회복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자신은 새벽예불을 드리게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고 본다.
기독교는 당시에 새벽예불의 형식을 들여오면서
결코 감격적이고, 역동적인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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