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 야마다 쇼지 지음·정선태 옮김 산처럼 펴냄 2003년 3월 15일 1판 어느 일본여성이 있다. 그녀의 삶은 짧았다. 또 참으로 극적인 생애을 살았다. 열여덟 살이 되는 해 그녀는 조선인 박열이 주동한 ‘흑도회’의 일원으로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의 혼례식에 맞추어 암살의 기도한 죄로 검거되어 3년 가까이 재판을 받았다. 그일로 인해 사형에서 천황의 특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었지만 남편 박열과 헤어져 여성전용교도소로 이감되자 그해에 숨을 거둔다. 교도소 측에서는 철창에 노끈을 매어 자살했다고는 하지만 의문의 죽음이었다. 스무살도 안된 일본 여성이 천황을 타도하려는 비밀 결사조직인 흑도회의 리더 박열을 어찌하여 사랑하게 되었으면 왜 꽃다운 나이게 죽을을 맞게 되었던 것일까... 전직 경찰관과 술집 여급 사이에 태어난 가네코는 처절한 정도로 불행한 성장기를 보낸다. 첩을 집에 데려오곤하던 아버지가 이모와 사랑에 빠져 집을 나가버리자 집안은 완전히 파탄이난다. 또 어머닌 이남자 저남자를 집에 데려오기 시작하여 고모뻘 된다는 할머니가 나타나 아홉 살 된 가네코를 조선으로 데려간다. 양녀로 데려간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혹독한 식모살이를 하게 된다.날씨가 춥건 뜨거운 한여름이건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궂은일을 한다. 견디다 못한 가네코는 할머니 집에서 도망쳐 7년여만에 고국 일본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찾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을 창녀로 팔려고 한다. 바로 그무렵 어릴 때 집을 나가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가 나타나 한 남자를 소개해 주어 창녀로 팔려가는 대신 그남자와 결혼을 하게 한다. 하지만 결혼 상대는 어머니의 남동생이었다. 우리의 윤리개념으로는 도저히 이해 못할 일들이었다. 결혼 뒤 바로 소박맞은 가네코의 정말 처참한 여생을 보냈다. 그 뒤 가네코는 헌 가방 하나를 들고 도쿄로 간 뒤 신문팔이를 하며 학비를 마련해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들어간다. 인쇄소 여직공 가게 종업원 파출부 같은 일을 하며 열심히 영어공부를 한다. 그렇게 생활하는데 인생에 급선회할 일이 나타난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3년 연상의 조선인 박열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전부터 가네코는 잡지에 시를 발표한 박열에게 관심을 갖고 있었다. 박열에게 첫눈에 반한 가네코는 박열이 두 달이나 나타나지 않자 그를 찾아 나선다. 그녀는 박열에게 편지를 주면서 자신의 철저한 과거에 대한 고백을 하였다. 박열은 혁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품에 뛰어든 일본인 여성을 감싸안는다. 박열과 가네코는 동지이며 연인 사이로 바뀐 것이다. 가네코는 그래도 부모니까 알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조선인 유학생 박열과의 관계를 알렸지만 아버지는 가계를 더럽혔다며 부모자식 관계를 끊겠다는 편지를 보낸다. 두사람이 교도소에 있을 때 증거없이 오로지 흑도회 일원의 자백으로만 재판을 끌어가게 되었지 때문에 두사람을 가혹하게 대할수 없었고 오히려 특별대우를 해준다. 간수들의 문인 아래 두 사람은 몇시간을 함께 있었는데 그만 아이가 생긴다. 형무소 당국의 직무유기에 쏜아진 비난은 담당판사를 사퇴케하고 내각까지 퇴진케 한다. 박열은 22년을 복무하고 일본이 패망함으로써 석방된다. 하지만 이내 죽는다. 일본인 아내 가네코의 묘는 남편의 고향 근처인 경북 문경시 문경읍 팔령리에 있다 두사람의 사랑을 한국과 일본 모두가 인정해 준 덕이다. 박열 그는 남북한이 함께 인정한 진정한 항일투사 였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불행했다. 요코하마에서, 야마나시에서 , 조선에서 , 그리고 하마마쓰에서 나는 시종일관 가혹한 취급을 받았다. 나는 자아라는 것을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지나온 모든 날들에 감사한다.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지 않았기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벌써 열일곱 살이다." -가네코 후미코의 '자서전'에서- 무책임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아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무적자(無籍者)로 태어난 가네코. 가혹한 운명과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열일곱 어린 나이에 자아를 발견한 그녀는 그로부터 6년 후인 23세 때 일본 우쓰노미야 형무소의 여죄수 독방에서 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불과 4개월 전에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된 그녀의 돌연한 죽음은 당연히 '의혹'으로 번졌다. 화장된 그녀의 유골은 도쿄에 있던 육홍균.장삼중 등 비밀단체 '불령사'의 한인 회원들에 의해 비밀리에 빼돌려져 현해탄 건너 경북 문경에 안치됐다. 옥중에서 의문사한 일본 여인의 유골이 한반도 남단에 묻힌 이유는 그녀가 유명한 한인 아나키스트 박열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유골로 돌아온 조선땅이 그녀에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10세 때인 1912년부터 할머니와 고모가 살던 충북 청원군 부용면에서 1919년까지 살았다. 저녁을 굶고 쫓겨난 어느 날 그녀는 "보리밥이라도 괜찮다면 주겠다"는 조선 아낙의 호의를 받고 "조선에 머물렀던 7년 동안 나는 이때만큼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에 감동한 적이 없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박열이 '청년조선'에 기고한 '개새끼'란 시에서 "어떤 강렬한 감동이 나의 전 생명을 고양하고 있었다"고 느꼈던 그녀는 1922년 봄 박열을 만나 동거에 들어갔다. '동지로서 함께 살 것' 등을 서약한 둘은 아나키스트 조직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黑濤)' 등을 발간하며 제국주의의 심장부 도쿄에서 사랑과 혁명을 꿈꾸었다. 23년 9월 1일 유명한 간도(關東)대지진 발생 이틀 만에 둘은 예비 검속돼 '천황폭살사건'이라는 대역사건의 주범으로 부풀려진다. 대지진의 공황심리를 엉뚱한 곳으로 분출시키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풀었다는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켜 6천여명의 조선인을 '사냥(?)'한 일제는 박열을 천황 폭살을 꾀한 대역죄인으로 만들어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것이다. 박열과 가네코가 아나키스트였던 점이 이용됐다. 일본의 저명한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行德秋水)와 오스키 사가에(大杉榮)가 모두 처형.살해됐을 정도로 아나키즘은 일본에서 천황제와 맞서 싸웠던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한 여성 아나키스트의 짧은 일생을 다루면서도 그녀를 통해 일본 천황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있는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박열과 가네코는 법정을 투쟁의 장으로 삼아 천황제와 맞서 싸움으로써 일본과 조선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예심판사는 박열과 가네코를 격리시키기 위해 가네코에게 일곱 차례나 전향을 권유했으나 가네코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형벌이 사형 하나밖에 없는 형법 제73조 대역죄를 감수했다. 사형수 가네코는 "만약 죽음이 저 남자의 생명을 요구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대신하겠다"라는 서한을 남기기도 했는데 일본 최고재판소가 종군위안부의 배상 거부를 결정한 오늘날 가네코의 삶은 일본 제국주의는 과연 극복됐는지를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 가네코 후미코 조선을 끌어안은 무정부주의자 스물세해 불꽃같은 삶 창고에 쌓여 ![]() 그 후 나는 출판사를 차려 출간할 책을 기획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른 한국사 전공의 일본인과 얘기 중이었는데 갑자기 “무슨 책 낼까 고민하지 말고 이 책이나 내세요” 하며 자기 등 뒤의 책꽂이 한쪽 귀퉁이에 꽂혀 있던 책을 한 권 잡아 빼서 건넸다. 〈가네코 후미코〉였다. 번역을 의뢰받은 번역자도 작업을 하며, 조선을 ‘확대된 자아’로 받아들여 천황제를 강요하는 혹독한 상황에서 조선인 청년 박열과 같이 저항하고 결국 자기 사상을 관철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사상에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 책은 언론에 비중있게 소개됐다. 하지만 보도와 책 판매가 늘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출판사가 2년차 되던 해였는데, 번역료와 제작비에 대한 부담으로 휘청했다. 판매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경영 측면에서 나는 기존 독자층을 염두에 두는 보수적인 사고를 더 고려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잠깐 고민했다. 몇몇 사람들이 보여준 뜨거운 반응에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찾지 않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께서는 전화하셔서 그동안 왜 가네코 후미코에 대한 책이 안 나오는지 의아했다며 책 잘 냈다고 칭찬하셨고, 노촌 이구영 선생은 내 손을 덥석 잡으시며 “잘 했다, 잘 했다” 하셨다. 소설 쓰는 선배는 가네코와 박열이 도쿄에서 ‘불령사’ 등을 만들어 투쟁하는 모습이 1970~80년대 대학 다닐 때 운동권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하다며 소설로 써보겠다고 했다가 일본 취재에 대한 경비 부담으로 보류중이고, 영화로 찍겠다며 지은이의 일본 연락처를 물어오는 영화감독도 있었다. 우연히 보게 된 〈문명의 감각〉이라는 문학평론집의 맨 앞 페이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방문을 열면 어둠 속에서 가네코 후미코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은박으로 처리된 그녀의 이름이 어둠 속에서 빛난다 나는 푸른빛이 감도는 가네코 후미코의 평전을 어루만진다 (……) 스물세 살에 목숨을 버린 가네코 후미코가 독방에 앉아서 수기를 쓰다 말고 나를 바라본다 바다를 건너왔다 바다를 건너간 나의 아름다운 가네코 후미코는 이 밤에도 내게 무정부주의를 타전하다.” 그리고 이 책은 ‘지금 여기’ 우리 삶에 ‘타전’을 보내기 위해 창고에 재고로 잔뜩 쌓여 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윤양미/산처럼 출판사 대표 ★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차이 “약육강식의 우주를 폭파시킨다”는 박열의 허무주의는 전향으로 끝나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는 왜 그의 연인과 달리 자결을 선택했을까 ▣ 장정일/ 소설가 ![]() 간토대지진과 박열의 ‘테러 계획’ 조선인 학살은 대재난 앞에서 고통을 전가하고 국민적 일체감을 누리게 해줄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저질러졌지만, 일본인들이 ‘조센징 사냥’이란 광란에 빠져든 진짜 이유는 그들의 무의식 깊이 ‘도저히 조선인을 길들일 수 없다’는 공포가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은 조선인 폭동이라는 ‘환상의 위협’을 일본인들 뇌리에 심어주었다. 천황제의 주술이었을까? 일본인들에게 “조선인 학살은 국가 비상시국하에서 보여줄 수 있는 충성의 증거”이기도 했다. 흔히는 박열이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려고 모의를 하다가 발각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좀더 복잡하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난 지 이틀 뒤인 9월3일 밤, 요시찰 인물이었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두 사람이 동거하던 집에서 보호검속되었다. 애초에 일본 경찰은 박열과 그가 속했던 조선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불령사(不逞社)를, 진재(震災)를 틈타 폭동을 일으키려고 했던 배후 조직으로 만들려고 했다. 조선인 학살 사건이 “민족적 박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조선인 폭동을 사실로 날조하여 국가의 책임을 완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기 한해 전부터 박열은 여러 차례 폭탄을 구하려고 했고, 그해 5월 무렵부터는 목표를 황태자의 결혼식장으로 구체화하긴 했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계획”이었다. “대역죄를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랐지만,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한 재료를 찾고 있던 예심판사에게 우연히 얻어낸 진술은 ‘대박’을 터트렸다. 혁명적 낭만주의자로 테러를 신봉했던 박열은, 치밀한 조직가나 냉철한 혁명가는 못 됐다. 그는 “강자와 약자의 투쟁, 약육강식 관계가 결국 우주의 대원칙”이라고 믿었는데,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탈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당대의 조선과 중국 지식인들에게 사회진화론만큼 영향을 미친 것도 없었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다. 문제는 그런 사관(史觀)과 논리를 신봉하면 할수록, 강자의 지배가 정당화된다는 거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 무정부주의자 이전에 민족주의자였던 박열에게 사회진화론은 주박이자 장벽이었다. 무정부주의의 귀중한 가르침인 상부상조론을 뻔히 놓고도, 사회진화론을 떨칠 수 없었던 박열은 ‘우승열패와 생존경쟁이 우주와 자연의 원리라면, 우주 자체를 폭파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가 닿는다. 이름하여 우주만물절멸론(宇宙萬物絶滅論). “인간성은 모두 추악할 따름”이니 진화론을 껴안고, “우주의 만물을 멸망”시킬 수밖에! 그를 무정부주의자가 아닌 허무주의자로 부르는 까닭이다. 일전에 읽은 <미래를 여는 역사>의 한 페이지는,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조선 식민통치와 천황제에 항거해 조선인과 연대했던 인물로 가네코 후미코가 소개되고 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게 야마다 쇼지의 <가네코 후미코>(산처럼, 2003). 동지이자 연인이었던 두 사람이, 일본 황실에 폭탄을 투척하려다가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것은 일찌감치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네코 후미코(1903~26)라는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시작되는 <미래를 여는 역사>의 첫 구절을 읽었을 때, 내 가슴은 크게 소리내며 주저앉았다. 겨우 스물셋. 천황의 은사(恩赦)를 받고 사형을 면한 박열은 전향을 하고, 가네코 후미코는 자살을 택했다. 왜 그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는지는, 직접 읽어볼 일이다. ★ <가네코 후미코> 야마다 쇼지 ![]() '천황제' 폭거한 여성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1923년 9월의 일본은 간토대지진으로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었다. 민심의 화살을 돌리려고 일본 관헌은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푼다는 둥 유언비어를 퍼트렸고, 공공연하게 조선인 학살이 벌어졌다. 그 즈음 놀라운 ‘대역사건’이 보도된다. 천황과 황태자를 죽이려는 천황폭살사건! 법정에 선 대역 죄인은 바로 가네코 후미코(1903~26)라는 스무 살 일본 여성과 스물한 살 조선 청년 박열(1902~74). 박열, 허무주의적 아나키스트로 알려진 식민지 조선의 독립운동가! 후미코는 그와 함께 일본에서 ‘불령사 동인’을 결성하는 등 공동 투쟁을 벌인 사상적 동지이자 아내였다. 이 사건은 그러나 성사가 불투명한 기획, 다시 말해 폭탄 입수계획 단계의 것이었으나, 법정에 선 그들은 “자신들의 무죄를 증명하기보다는 공판을 자기 사상을 당당히 밝히는 투쟁의 장으로 삼았다.” 햇수로 4년에 걸친 재판, 그리고 사형선고. 1926년 7월 후미코는 형무소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무기징역 형으로 감형받은 지 석 달 만이었다. 그의 나이 스물셋. 부모한테 버림받은 무적자 천덕꾸러지 억압된 식민지 조선은 확대된 자아였다 남편 박열과 대역사건 검거. 끝내 절명한 고투 생생 ![]() <가네코 후미코>는 시대를 앞서는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 근대 일본을 뿌리로부터 지탱하는 천황제를 향해 돌진했던 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삶과 사상을 밀도있게 재구성해낸 역작이다. 이 책은 신문 과정에서 끊임없이 전향과 회유를 시도했던 예심판사의 말대로 “유서 깊은 일본에서 난 그”가 왜 식민지 조선인과 함께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고, 일본 제국의 밑심인 천황제에 반기를 들었는지에 대한 집요한 답변이다. 일본인인 가네코가 목숨을 걸 만큼 마음에서부터 조선인과 조선 독립에 공감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서승·서준식 구명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던 일본의 역사학자인 지은이 야마다 쇼지는 그것을 ‘확대된 자아’라는 말로 요약한다.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사랑받고 있는 것은 타인이 아니다. 타인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다. 즉, 그것은 자아의 확대라 할 수 있다.’(가네코의 옥중 수기) 가네코에게 식민지 조선은 확대된 자아였다. “바로 그러했기 때문에 가네코는 황민화를 강요하는 천황제에 조선인과 함께 저항하면서 ‘자기’를 관철”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가네코의 조선 체험이 자리잡는다. 가네코는 1912~19년 8년 동안 식민지 조선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옥중에서 가네코는 3·1운동을 지켜보았던 소회를 “남의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감격이 가슴에 용솟음쳤다”고 진술했다. 지은이는 이와 함께, 가네코가 일본에서든 조선에서든 체제로부터 소외되어 살아야 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네코는 처음엔 아버지로부터, 곧이어 어머니로부터도 양육을 거부당한 채 ‘무적자(無籍者)’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며, 성장과정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다. 책에는 조선에서 보낸 청소년기에 양녀로 들어간 일가 집에서 ‘친할머니’에게서 받았던 학대 등 ‘비통했던’ 가네코의 어린 시절을, 읽기가 고통스러울 만큼 복기한다. 딸을 ‘외삼촌’에게 팔아넘기는 아버지에게서 탈출해 가출을 감행한 가네코는 도쿄에서 신문팔이, 오뎅집 일을 하며 밤에는 독학을 했다. 그곳에서 그는 조선인 사회주의자 등과의 만남 속에 아나키스트로 변화해 간다. 이 과정은 소외자 가네코가 ‘자기’를 세계 속에서 ‘발견’해 직진해 나아갔던 과정이기도 했다. 지은이는 수감 당시 여러 정황을 추적함으로써 가네코의 자살이 형무소에서의 집요한 전향공작에 목숨으로 맞선 결과였음을 보여준다. 가네코의 길은 옥중에서 전향(35년)한 뒤 45년 해방과 함께 출옥해 이후 보수적 행로를 걸었던 박열의 길과도 달랐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살았던 여성의 생활 속에서 고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을 불사하고 비전향을 관철할 수 있었던, 그녀의 사상 형성사였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책은 일본의 양심적 역사학자의 실천적, 반성적 역사 읽기이기도 하다. 지은이는 말한다. “일본인이 조선을 가해한 사실을 직시하는 하지 않는 한 일본인의 내셔널리즘은 이후에도 타민족의 억압에 동원될 위험성이 있다. 가네코의 사상과 행동을 명확하게 하는 하나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허미경 기자 carmen@hani.co.kr 출처:인터넷한겨레 가네코 후미코 시-김혜영/낭송-전향미 1923년 붉은 태양처럼 빛나던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구속된 아나키스트 박열과 아내 가네코 후미코의 오래된 사진을 신문에서 발견했다 소파에서 한 쌍의 잉꼬처럼 박열의 품에 안긴 가네코 후미코는 행복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다 박열은 가네코의 가슴에 한 손을 얹은 체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있다 그녀가 읽은 책은 무엇일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일까 아니면 하이쿠 시집일까 1926년 감옥 독방에서 가네코 후미코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부드러운 그녀의 가슴은 돌처럼 굳어 버렸고 텅 빈 눈동자와 일그러진 입술 자살이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타살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슬픈 시체 아버지의 나라를 배반하고 천황을 살해하려던 마녀의 몸에서 향긋한 벚꽃이 피어났다 가네코 후미코의 시체는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 묻혀 있다 무덤에서 걸어 나온 후미코가 동경대학 도서관으로 걸어간다 국가, 법,감옥,사제,재산,계급이 사라진 세상! 가네코 후미코가 연분홍 기모노를 입고 허공을 나비처럼 날아다녔다 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였어 아무도 날 검열할 수 없었어 자유의 날개를 가진 날 꺾을 수 없었지 사랑하는 박열의 품에 안겨 콧노래를 부르며 책을 읽던 그녀가 봄비를 맞으며 나의 서재를 다녀갔다 |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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