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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을 다시 읽고...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21. 06:11
도서명 : 히로히토 - 신화의 뒤편

저자명 : 에드워드 베르 저

역자명 : 유경찬

출판사 : 을유문화사

발행일 : 2002년 01월 31일


책 내용은 말그대로 히로히토 일왕에 대한 책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기를 히로히토는 일본 군부의 '완벽한' 꼭두각시로 움직여져왔다는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 - 이라고하더군요. 전 이런 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것이 전세계를 상대로 사기극 펼친 것이고 2차세계대전의 원인은 히로히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책입니다.

아마 책의 시작은 우리나라에서 영웅시 하는 맥아더를 히로히토가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사실 알고보면 맥아더도 그리 좋은 놈은 못 됩니다. 허나 그건 언젠가 간단히 리뷰할 '일본인도 모르는 천황의 얼굴' 이라는 책에서 언급토록 하죠. 사실 히로히토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맥아더에게 찾아갔던 겁니다. 그리고 맥아더가 건방떠는 폼으로 서있고 상대적으로 너무라도 초라한 모습으로 서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옵니다....

발단은 이렇고 전개부분에서는 히로히토의 일생, 당시 사회상에 대해 서술합니다. 구체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일본인들의 정치 의식이 어땠느지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히로히토의 어린 시절을 축약해본다면 '학자로서는 어울리지만 왕으로서는 부적합하다'라고 일축할 수 있습니다. 그의 동생들에 비해 신체도 부실했고....인재로서도 부족했습니다. 어여튼 간에 사실 그가 조종당해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권한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군부계열은 천황에게 충성한다고 말 할 수있습니다. 사실 이 것은 이토 히로부미의 천황의 신격화 정책이 한 몫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 상층부까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병사같은 경우 광신적으로 따랐다고 볼 수 있죠.

책을 중간까지 보다보면 권한없이 휘둘리는 왕의 모습을 보게됩니다만..... 처음으로 권한을 행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에 대해선 대놓고 한다 하더라도 사면해주는 분위기였기때문에 수많은 문신들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바치자며 쿠데타가 일어납니다... 실제로는 상당히 조용한 쿠데타였죠. 민중에게는 폐를 안 끼쳤으니. 하지만 히로히토는 오히려 정색을 하고 진압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쿠데타에 참여한 군인들은 처벌을 받죠.... 구체적인 이유는 나중에 리뷰할 그 책에 상세히 나옵니다.... 어디까지나 이 책의 의도는 피해자로만 여겨진 히로히토의 실상을 파해치는 의도로 쓰여진 책입니다.

히로히토는 군부들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키는데 반대했다는 의사를 보이지 않습니다.(육군의 확장주의적 태도에 가끔 반대하긴 했죠.) 사실 상 찬성한거죠. 사실 최고결정권은 가진 건 천황이거든요. ...이후의 전개에는 상당히 능동적으로 여기저기 개입한(마루타 부대라던가) 흔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패전을 합니다. 이유야 어쨌든 전쟁이 끝나는 것조차 천황의 인가가 필요했고 천황은 항복 - 연설내용을 보면 항복이 아니라 전쟁을 그만하겠다...라는 내용이죠 - 선언합니다. 그리고 당시 정세 때문에 히로히토는 전범에서 멋어나고 왜곡된 모습으로 보여왔고 그 실체를 밝혀야 한다는 취지에서 쓰여진 것이 바로 이 책입니다....

사실 생각만큼 히로히토가 권한을 가진 건 아닙니다..... 이 책의 문제점이라면 히로히토의 재량권을 과대평가했다는 거죠. 한국민족운동사 강의를 듣다가 3부작으로 추천된 책 중 - 물론 정말로 3부작은 아니죠-_- - 첫번째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이후에 읽을 '일본인도 모르는 천황의 얼굴' 에서 천황의 진실된 모습과 천황에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본인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사실 히로히토 보다 훠씬 자세한 부분도 많기에 보완 및 수정, 추가하는 의미에서 반드시 읽어봐야 할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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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위로 무수한 훈장을 달고 있는 흑백 사진 속의 남자 위로 떠있는 붉은 이름이 상징하는 바,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역사적 진실을 생매장시키고 전쟁 지향적인 군부의 희생양으로만 미화되었던 히로히토에 대해 에드워드 베르가 내미는 기소장.

『마지막 황제』의 작가인 그는 만주에서 자료를 수집하던 도중 히로히토의 실체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히틀러, 무솔리니와 더불어 세계제2차대전을 야기한 전범 가운데 한 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늘 '유감'이라는 표현으로 일관하며 전쟁과는 무관한 생물학자로서 그 죄를 사면 받았던 제124대 일왕 히로히토. 에드워드 베르는 메이지유신, 다이쇼 시대, 히로히토의 침략으로 이어지는 3대 100년간에 감춰지고 은폐된 습습한 일본 과거사에 매스를 들이대며 과감한 어조를 시종일관 놓치지 않는다.

교활한 기회주의자로서의 히로히토의 본모습, 히로히토 승려 만들기, 한발 늦은 원폭 개발 등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일본 침략사의 어두웠던 구석구석이 드러난다.

저자 에드워드 베르 저

로이터통신 파리 특파원을 거쳐, 프랑스 수상 장 모네의 공보비서를 역임하였스며 파리, 베이루트, 델리에서『더 타임스』와『라이프』의 특파원으로 일했다. 1957년부터 1962년까지 알제리 전쟁을 취재했고, 이때 경험을 바탕으로 쓴 『알제리 문제』는 미국무성의 필독 도서가 되기도 하였다. 1962년『더 타임스』의 종군기자로 인도차이나(베트남) 전쟁을 취재했고, 그 후『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서 활약했다.

베르의 대표작은 오스카상을 받은 베르톨루치 감독의『마지막 황제』이다. 일본이 점령한 만주국의 괴뢰 황제 푸이의 일대기를 그린 이 책은 결국 베르가 히로히토 천황의 숨겨진 이야기까지 들추어내게 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경향신문 :
"일본에서 천황이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일본 국민 누구도 천황이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A급 전범으로 기소된 도조 히데키는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태평양전쟁을 주도하고 일본 본토 사수를 외쳤던 그의 이 한마디는 전쟁에 있어서의 천황의 역할을 웅변한다.

그러나 종전 후 일본의 새로운 '쇼군'으로 등장한 맥아더는 이런 보고서를 썼다. "히로히토는 전쟁을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던 완벽한 꼭두각시에 불과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를 기소한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는 주변의 권유에 따랐을 뿐 스스로 결정할 입장이 아니었다. 전쟁의 시작도 내각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고, 종전도 내각이 결정했다".

맥아더의 주장은 이후 미 점령군의 공식 견해로 자리잡았고, 히로히토는 1989년까지 권좌에 앉아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히로히토:신화의 뒤편>(유경찬 옮김)은 '특A급 전범'으로 기소됐어야 할 히로히토가 전범의 굴레를 교묘히 벗고 전후 일본의 부흥을 이끈 국제적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역사의 아이러니를 파헤친 논픽션이다.

지은이 에드워드 베르는 영국 출신 저널리스트로 프랑스.알제리.레바논.인도.홍콩 등을 무대로 활동해 왔다. 그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영화화해 유명해진 '마지막 황제'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베르는 일본이 점령한 만주국의 괴뢰황제 푸이의 일대기를 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히로히토에 관심을 갖게 됐고 히로히토가 '은폐의 일생'을 마칠 무렵인 89년 이 책을 펴냈다. 그는 유능한 저널리스트답게 방대한 사료를 찾아내고 수많은 관련자.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거쳐 탁월한 논픽션을 생산해냈다.

흥미로운 것은 대다수 일본인들의 '치밀한 공모'로 숨겨져온 일본 천황의 실체가 또다른 소수 일본인들의 '치밀한 기록'에 의해 파헤쳐진 점이다. 히로히토의 옥새관(수석비서관 격)이었던 기도 고이치가 히로히토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아낸 <기도 일기>, 스기야마 하지메 장군이 육군 참모총장 재직시절 각종 회의 내용을 일기 형태로 남긴 <스기야마 메모>가 그 기록들이다.

지은이는 이 두가지 문헌이 없었다면 '히로히토'가 햇볕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책은 45년 9월27일로부터 시작한다. '살아있는 신(現人神)'으로 추앙받던 히로히토 천황과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의 역사적 첫 만남이 이뤄진 날이다. 천황은 이날 새 주인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치욕과 향후 자신의 안전을 맞바꾸게 된다. 그 무렵 맥아더와 측근들을 취재했던 미국의 폴 매닝 기자는 "두 사람은 일본의 재건을 위해 함께 일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상호존중과 공감대는 유별난 것이었다. 산적한 문제들을 처리하는 데도 파트너가 돼야 한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히로히토야 새 주인에게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테지만 맥아더가 연합국들의 천황 기소 요구를 물리쳐가면서 히로히토에게 다가선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전후 소련 세력의 확산을 경계하던 맥아더가 천황 중심의 일본을 파트너로 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일본 내부의 평화와 이를 통한 미국의 이익 증진은 차기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서려고 했던 맥아더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여기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교묘한 대중 조작 또한 힘을 보탰다. '히로히토=소극적인 해양생물학자' '히로히토=온화한 평화주의자' '히로히토=강경파들의 희생양'이라는 논리를 전파하고 서양 학자들까지 맞장구를 침으로써 히로히토는 극적으로 부활했다.

책은 히로히토가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은 물론 관동군에 의한 장작림 폭사사건 처리나 2.26폭동 무력진압 결정 등 국정 전반을 총괄한 최고권력자였다는 증거를 제시함으로써 그에게 면죄부를 준 '거짓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히로히토로 대표되는 일본제국에 국권을 침탈당했던 우리로서는 저자의 주장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해진다.

히로히토와 맥아더의 야합, 일본 군국주의자들과 서양 학자들의 결탁을 탓하기에는 우리 처지가 너무 초라한 탓이다.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만들고도 친일파를 정리하지 못해 세기가 바뀐 지금까지 친일문제의 업보에서 자유롭지 못한 한국인들이 누구에게 손가락질을 할 것인가.
- 김민아 기자 ( 2002-02-02 )



히로히토는 왜 전쟁범죄의 책임을 지지 않았는가?

먼저 히로히토에 대해 조금 서술을 하고난뒤에, 태평양전쟁 전범재판의 내용으로 밝혀진 내용으로 서술하겠습니다.

에도막부의 대정봉환을 이후로 메이지천황은 필요한 시기에 적당한 인물들을 바탕으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고, 근대화된 일본의 바탕을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일본의 우월의식을 조장하고, 아울러 자긍심을 심기 위해 모든것은 천황의 신격화로 들어갑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히로히토는 당시 주변사람들의 걱정을 많이 받습니다.

그는 과학을 좋아해서 특히 곤충학에 관심이 많아 자신이 천황이라는 둘레가 없었다면 곤충학자로 살고 싶어했고, 그때 그가 남긴 곤충연구서는 상당한 수준의 것으로 이야기 되고있죠. 그는 일본의 신화나 특히 황실에 대한 내용이 너무 허구적이라 관심이 없었고, 특히 정치와 전쟁에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그를 바꾸기위해 노기-여순요세전투시 육국사령관-과 도고제독-발틱함대 격멸한 영웅, 그가 승전축하연에서 영국등 서구기자들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조선의 이순신제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발언을 하여, 한때 넬슨제독과 아울러 이순신이 최고 명장으로 알려졌었다-이 황태자의 교육을 맡았고, 결국 군국주의의 수장으로서의 사고를 바꾸지는 못했고, 결국 그는 어느정도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외여행을 한다.

영국황실의 환대속에서 그는 영국식의 정치제도를 크게 감명을 받는다.

만주사변에 이은 중일전쟁은 정부의 즉각적인 전쟁중단과 아울러 이미 지배한 조선과 위성국을 통한 지배가 시작된 만주의 안정화를 시행하라고 지시를 하지만, 관동군은 이를 무시하고 중일전쟁을 시행한다. 그러다 내몽고에서 쥬코프중장의 소련군에 밀리고, 장학량이 이끄는 만주군벌과 중국군의 개입으로 초기의 관동군-약 10만명 정도-으로 힘들게 되자, 관동군 사령관은 본토로 급보를 날리고 조선총독부소속의 육군2개사단을 본토의 훈령과는 반대로 투입시킨다. 본국은 결국 증파에 증파에 거듭하여 전쟁은 확대되었다.

천황은 여러명의 총리를 인선 내각을 꾸미고 전쟁확대를 저지하기 위해서 군부를 저지할 명망있는 인물을 내세웠지만, 정부의 묵인속에 자행된 장교들의 암살시도로 내각은 군부의 폭주를 저지하지 못한다.

결국 천황은 군부의 인물중에서 온건파나 중립주의자를 선정하여 전쟁확대를 중지시키고, 전통적인 우방인 영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만주 또는 조금확대된 중국영토를 확고화시키는 정책을 시행하려고 했다.

그래서 선입된 도죠히데기는 우유부단하고 당시 정부의 막강한 권한을 가진 해군-친영미세력-과 육군-친독세력-으로 부터 위험분자로 인식되지 않아 그를 수상으로 발탁한다.

그러나 토죠히데기는 천황의 알현할수 있는 사람을 한정시키고, 신격화된 천황으로 히로이토를 정치 일선에 나올수 없도록 만들었다.

결국 중일전쟁을 이기기 위해서 미국의 대중지원을 막기 위함-육군의 의견-과 일본의 석유, 철강수출의 금지조치로 인한 해군의 위기의식고조와 육군의 횡포에 덩달아 전쟁에 주도권을 쥐기위해-해군의 의견- 태평양전쟁으로 다다른다.

히로히토는 이러한 사실중에서 전쟁의 확대를 막기 위해, 당시 주일대사에게 비밀편지를 부치나 도죠히데기에 의해 압수당하고, 루즈벨트에 보내는 친서들도 도죠수상에 의해 원천봉쇄당한다.

결국 천황의 지시를 받은 주미 일본대사와 도조가 이끄는 내각에서 보낸 전권위임특사는 2중적인 구조로 미국 외교부를 혼란시킨다.

결국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고, 그 마지만 선전포고결의를 위해 히로히토에게 도죠히데기가 천황재가를 받을려구 했으나, 천황은 재가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죠를 앞세운 군부세력은 전쟁을 확정짔고, 다른나라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은체 6개월 안으로 버어마와 인도네시와와 말레시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에서 영미세력을 축출과 동시에 영미육군의 제압과 해군에 막대한 피해를 준뒤 미국과의 회답을 실시하여, 동남아에서 석유기지확보와 지원이 끓킨 중국의 제패인정을 통해 전쟁을 끝낸다는 작전수립하여, 진주만기습직전-이미 야마모토가 이끄는 연합함대는 일본-사할린-알류산열도로 이동했고, 알류산열도에서 정남방인 하와이로 이동중이었다-에 오전에 선전포고문을 미정부에 제출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였튼 종전이후 맥아더는 천황을 신이아닌 인간으로 선언하도록 하고, 또한 전쟁주장자와 정경유착으로있던 재벌가들을 청산하였다. 전범재판에서 당시 헐대사등의 증언과 증거로 히로히토는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으며, 전쟁방지를 위해 일련의 노력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무죄로 판명된다.

그러나 625가 발생하고 다급해진 맥아더는 과거 재벌가를 등용하여 미국의 군수물자를 생산하고 또한 보급기지의 역활을 함으로서 독일과 같이 과거사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일본, 미국식 민주주의의 보급과 활성화를 노렸지만 실패했다.



‘히로히토’ 꼭두각시 아니었다


관련기사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에드워드 베르 지음, 유경찬 옮김, 을유문화사 펴냄, 1만7000원

 

주머니에 손을 넣고 당당하게 서 있는 연합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 옆에 초췌한 표정의 부동자세로 서 있는 패전국 일본의 히로히토 국왕. 도쿄의 미 대사관저에서 1945년 9월27일 찍은 이 한 장의 사진은 이후 어떤 변명보다도 일본 국민들의 국왕에 대한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했다. 이 자리에서 히로히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장군은 연합국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일본이 전쟁 중에 저지른 정치적, 군사적 책임을 판단할 텐데, 제가 그 책임들을 모두 지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

 

2차대전 추축국 동맹의 주인공이었던 히로히토 일왕은 이후,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달리 맥아더의 보고 등을 통해 `타고난 평화주의자'로 서방에 인식된다. “강경파에 의해 주도된 전쟁의 내용은 전혀 몰랐”고 “전쟁 중단의 대결단을 내린 인물”이 됨으로써, 그는 20세기 가장 미스테리한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황제>의 원작자인 언론인 에드워드 베르가 1989년 쓴 <히로히토-신화의 뒤편>은 히로히토가 단순히 `꼭두각시'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현실정치를 중요시하는 많은 사람들은 히로히토에게 정말이지 너무 친절했다. 이제 이 책은 그러한 것들의 균형을 잡아갈 것이다.”

 

“위대한 메이지 천황”시대인 1901년 태어난 히로히토는 생후 70일 만에 생모와 격리되어 황실의 특별교육을 받는다. 구부정한 자세와 시력을 교정하기 위해 4시간 동안 허공을 쳐다봐야 했고, 몇시간씩 특수의자에 앉아 있기도 했다. 아버지인 요시히토 일왕이 기이한 행동으로 즉위한 지 몇년 안 돼 허수아비 노릇을 하는 동안 황태자는 실질적 권한을 가진 인물이 되어갔다. 1921년 영국 방문에서 따뜻한 환대를 받은 황태자의 귀환은 온통 사람들의 관심을 `미래의 천황'으로 쏠리게 했다.

 

히로히토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936년 2.26 폭동이다. 국가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장교들에 의해 일어난 이 쿠데타를 히로히토는 단호하고 잔인하게 진압하도록 했다. 1930년대 군국주의 분위기에서 히로히토가 실권했다는 주장을 뒤엎는 증거다.


베르는 `마루타 실험'으로 악명높은 731부대에게 지급됐던 파격적인 예산, 인도차이나 전쟁을 논의한 어전회의에서 일왕이 한 발언 등을 인용하며 히로히토가 이 모든 것을 몰랐을 리 없다고 강조한다. 특히 진주만 공격을 앞둔 어전회의의 기록들을 보면 히로히토의 관심은 이 전쟁을 빨리 승리로 끝내는 것뿐이지 “도덕성에 관한 우려나 일본 국민들의 희생, 재앙, 고통에 대한 정신적인 고뇌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히로히토는 “원자폭탄의 투하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하며 히로시마 시민에게는 참으로 안된 것이었지만 전쟁중이었으니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1975년 미국방문 뒤 기자 인터뷰에서 “무심하게” 말하기도 했다.

 

베르는 특히 맥아더와 전범재판소의 수석검찰관 조셉 키난이 어떻게 히로히토 일왕을 전범에서 면제시켰는지 추적한다. 맥아더는 일왕이 “전 일본인을 한데 묶는 구심점”이라며 그의 구속은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키난은 히로히토의 일기가 증거로 제출되는 것을 막았다. 재판정에서 키난이 한 발언은 기록해둘 만하다. 전쟁을 앞둔 어전회의에 대해 기도 고이치가 장황하게 설명을 하려 하자 키난은 “좋습니다. 천황은 의사 결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씀이죠. 발표는 천황으로 되어 있었지만 결정을 다른 사람들이 한 것이란 말이죠”라 정리했다. 도조 히데키에게는 “(전쟁이)천황의 뜻이 아니었는지 모른다는 귀하의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천황의 뜻일 리 없죠”라고 말했다. 재판 끝에 도조 등 7명만 교수형에 처해졌다. 반면 생체실험으로 악명높은 731부대의 주역 이시이 시로는 맥아더에게 731부대의 자료를 넘겨주는 대신 면죄부를 받았다.

 

<히로히토…>는 후반부로 가며 진주만 공격을 앞둔 상황과 친서방적이던 사이온지 긴모치의 절망감, 고노에 후미마로 등 막판에 협상노력을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며 박진감을 더해간다. 일본의 원자폭탄 개발계획, 1945년 8월15일 정오에 방송되기로 한 히로히토의 종전조서 녹음테이프를 없애려고 발버둥친 일부 육군 장교들의 작은 쿠데타, 패전과 함께 육·해군이 각각 비밀자금을 확보해 황실의 자손을 외딴 곳으로 데려가 미래의 천황으로 키우려고 했던 시도 등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펼쳐진다.

 

89년에 쓰여진 이 책은 45년 종전발표 직후 일본 곳곳에서 기밀자료 파괴가 대규모로 진행된데다 <기도 일기>와 <스기야마 메모> 등을 제외하곤 대부분 영어자료에 의존했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지난해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을 수상한 허버트 픽스의 <히로히토와 근대일본의 탄생>이 89년 히로히토의 사망 이후 공개된 새로운 자료를 더해 입증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히로히토는 자신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전문을 하루만 빨리 받았더라도 진주만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을 막을 수 있었다는 고백이다. 하지만 `전쟁 개시는 각의에서 결정했지만 종전의 결단은 천황이 내렸다'는 신화로 히로히토는 일본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인물이 됐다. 일본과 히로히토에 대해 막연한 적대감만을 가진 우리에게 베르가 던진 히로히토에 대한 `기소장'과 같은 이야기의 울림은 크다.

김영희 기자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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