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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漢한나라는 부여조선의 제후국이었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1. 11:39

 

1.부여국의 장례풍속을 기록한 <後漢書> 동이열전 卷85

 

夫余國,在玄兎北千里。南與高句驪,東與?婁,西與鮮卑接,北有弱水。地方二千里 本濊地也。

 初,北夷索離國王出行,

부여는 현토의 북쪽 천리에있다. 남으론 고구려와 함께하고 동으로는 읍루와.서로는 선비와 접한다.

북으로는 약수가 있다. 땅은 약 이천리가 되며 본래 예의 땅이다.초에 북의 색리국왕이 출행하였다.

 

 

 

行人無晝夜,好歌吟,音聲不絶。其俗用刑嚴急,被誅者皆沒其家人?奴婢。盜一責十二。 

男女淫皆殺之,尤治惡?婦,?殺,復屍於山上。兄死妻嫂。死則有幟無棺。殺人殉葬, 

多者以百數。其王葬用玉匣,漢朝常豫以玉匣付玄兎郡,王死則迎取以葬焉。 

밤에는 다니질 않고,음주가무를 좋아하고,형벌은 엄하고 급하며

사람을 죽인자는 그 식구들을 전부 노비로 만들며 ,하나를 훔치면 12배로 배상하고,

남녀가 음탕하면 모두 죽이고,악한처도 죽이며,

시체는 산위에 놓는다. 형이죽으면 그 처를 맞이하며,

사람이 죽으면 관을 쓰지 아니하고 깃발을 세우며, 많으면 백여명씩 순장을 한다.

왕이 죽으면 옥으로된 匣을 사용하며 장례를 치루었으며 한나라때에 일상적으로 이 옥갑을

현토군에 付했다.

 

한나라가 부여에 항시 준비하여 가져다 바쳤다는 것,한나라는 황제라는 사람도 정작

  옥갑무덤이 없습니다.

 

두우의 通典중에서 (아주중요)

 

自後漢時夫餘王葬用玉匣,常先以付玄菟郡,王死則迎取以葬。

及公孫淵伏誅,玄菟庫猶得玉匣一具。

晉時夫餘庫有玉璧珪瓚,數代之物,傳以為寶,耆老言「先代之所賜也」。

其印文言「濊王之印」。國有故城,名濊城,蓋本濊貊之地" ..

 

후한이래 부여왕은 장례에 옥갑을 사용하였는데 늘 먼저 현토군에 청(付)하였다

왕이 죽으면 바로 취하여 맞이하여 장례를 치뤘다.

공손연이 기복하여 주살하기에 이르자(及公孫淵伏誅?) 현토의 창고에 유일하게 한 구가 전한다.

진(晉)나라 때 부여의 창고에는 옥벽(玉璧)과 제기가 있었는데 여러대에 걸쳐 전해진 물건으로 보물이였다.

장로가 말하기를 선대로부터 하사되었다고 하는데 그 인장의 글월에 전하기를 "濊王의 "이라 한다.

부여에는 옛 성이 있는데 이름난 예국의 성이다.

모두 본래의 예맥의 땅이다. " 

 

 

(이것이 바로 漢나라가 옥갑을 미리 만들어 두었다가 夫餘王이 崩하면

가져다 바쳤다는것이다. 付라는것이 그 의미인 것이다. 즉,漢은 夫餘의 제후국 !)

 

 

이것이 바로 홍산문화 족장의 무덤에서 발굴되는 옥기를 부장하는 전통을 승계한 것으로 봄

 

2. 홍산문화의 玉器부장 풍습.

2-1.부장품



2-2.옥기유물



 




3.1954년 하북성邯鄲市에서 발굴된 <金縷玉衣>는 과연 

   漢代의 유물일까 ?

 

3-1.지역적 근접성

 

한단시는 하북성남부로서 산서성서남부 하남성북부와 산동성 서부와 매우 근접한 거리이다.

발굴사에 보면 한나라시대의 옥의는 란주산 옥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리적으로 볼 때 옥으로 만든 부장품문화는

하북성 홍산 및 요녕성 릉원지역과 지역적으로 더 가까우며,

후한서 동이열전에 보면 부여는 왕의 장례시 玉匣을 사용하여 장례를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한대에는 보통 濊의 지역인 현토군에 付하였다 되어 있다. 

바로 한단시가 옛 현토지역이다.

바로 그 현토지역에서 金縷玉衣가 출토되었다.

한반도 낙랑에서는 죽은자의 구멍을 틀어막는 데 옥을 사용하엿다고 하며 

한나라시대의 옥의는 魏나라 문제 황초3년에 페지되었다고 한다.

옥의와 관련된 기술은 한나라 이후에서만 나타난다.

 

3-2.하북성 한단시는 어디인가 ? 

 

 



 

 

3.<금루옥의>의 실물사진.

 

 








 

 

 

<금루옥의 사진 cliper님의 사이트참고 -감사를 표합니다> 

 

심제 씀.

 

출처: http://cafe.daum.net/dobulwonin/GBuW/59

 

 

출처 : 삼태극
글쓴이 : 소서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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