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계를 불신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미국발(發) 금융위기에 대해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미국 현지에서 느낀 솔직한 심정과 경제학자로서의 분석을 보내왔다. 거시·금융 경제학이 전공인 정 전 총장은 모교인 프린스턴대학 저명 초빙연구원(distinguished visiting fellow)로서 지난달 초부터 뉴저지주(州)에 머물고 있다.
월 스트리트의 금융혼란은 미국식 금융시스템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있다. 언론들은 마치 미증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처럼 시시각각 급박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위기의 역사는 되풀이되고 있을 뿐이다. 멀리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버블로부터 가까이는 20세기 초반의 대공황, 그리고 최근의 부동산 거품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규제와 감시의 틀을 벗어난 금융시장은 항상 파열음을 내며 자신과 주변에 큰 상처를 입히곤 했다.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면 온갖 치유책이 논의되고 강도 높은 구조조정안이 제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지나고 위기의 기운이 사라지면, 유형·무형의 고통이 따르는 정책들은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책에 항상 무릎을 꿇곤 했다. 이번 월 스트리트 사태는 이러한 미봉책은 결국 큰 화를 부를 수밖에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과연 우리는 이번 미국 사태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위기상황에서 시스템의 문제를 논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시스템을 만들고 운영하는 지도자의 철학에 대한 점검이다. 경제를 운영하는 사람의 철학과 비전에 따라 시스템이 잘 작동할 수 있는가 하면, 또는 여기저기서 균열의 조짐을 보이며 위기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번 미국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방만한 금융기관 경영'의 이면에는 인사(人事)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요즘 미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월 스트리트 출신인 그린스펀(Greenspan)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 대한 재평가의 목소리가 높다. 그가 의장일 때 존재하는 규제를 너무 느슨하게 적용하거나 또는 규제를 너무 많이 풀어서, 투자은행들의 과도한 고위험 투자를 조장하거나 적어도 방조했다는 평이다.
동시에 만약 그린스펀이 1990년대 중반에 물러나고 대신 클린턴(Clinton) 대통령이 당시 FRB 부의장이던 블라인더(Blinder)를 의장으로 임명했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방만한 금융기관 경영'의 이면에는 인사(人事)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요즘 미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월 스트리트 출신인 그린스펀(Greenspan)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에 대한 재평가의 목소리가 높다. 그가 의장일 때 존재하는 규제를 너무 느슨하게 적용하거나 또는 규제를 너무 많이 풀어서, 투자은행들의 과도한 고위험 투자를 조장하거나 적어도 방조했다는 평이다.
동시에 만약 그린스펀이 1990년대 중반에 물러나고 대신 클린턴(Clinton) 대통령이 당시 FRB 부의장이던 블라인더(Blinder)를 의장으로 임명했었더라면 오늘과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허용되지 않는다지만, 만약 원칙주의자이면서 정부의 조정기능을 중시하는 블라인더가 예정대로 의장에 임명되었더라면 규제를 제대로 적용했을 뿐 아니라 지나친 규제완화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의 금융위기도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지도자의 철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지도자의 문제는 신뢰와도 직결된다. 이번 위기수습 과정에서 미국 재무부와 FRB가 고심 끝에 내놓았다는 수습안은 일반의 동의를 선뜻 얻기 어려운 것들이다.
프레디맥(Freddie Mac)과 패니메이(Fannie Mae)의 국유화가 발표되자 미국 고등학교와 대학 강의실에서는 '이제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는가?'라는 자조 섞인 주제로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AIG(세계 최대 보험사)에 대한 구제금융도 과거 대마불사(TBTF; Too big to fail), 즉 아주 크면 쓰러뜨릴 수 없다는 인식과 비슷하게 금융기관이 복잡하기만 하면 문 닫을 수 없느냐는(TCTF; Too complex to fail) 비난이 대단하다. 모기지(mortgage) 관련 부실채권 매입을 위한 7000억 달러 재정자금 조성 제안도 지식인들의 공격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잔치는 월 스트리트가 하고 뒤치다꺼리는 왜 미국의 납세자가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통과되기는 했지만 미국 하원에서 구제금융안이 한 때 부결되었던 것도 이러한 비판적 시각을 반영한다. 사실 수습안이 다 받아들여진다 한들 금융시장이 곧 안정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데도 여론이 기꺼이는 아닐지라도 수습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게 된 것은 금융위기가 전체 경제위기로 이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 국면을 당하여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시작하지는 않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돈으로 때우려고 했던 폴슨(Paulson) 재무장관과 버냉키(Bernanke) 현 FRB 의장의 선택은 두고두고 학자들의 비판적인 분석대상이 될 것이다.
금융에서 신뢰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점은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다. 한국 지도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대목이다.
아울러 이번 사태는 시장도 인간이 만들고 운영하는 것이므로 본질적으로 완벽할 수 없음을 상기시켜 준다. 시장만능주의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인 것이다. 인간이 고안해낸 것 가운데 시장과 화폐보다 더 중요하고 쓸모 있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장은 깨지기 쉽다. 따라서 잘 간수해야 한다. 이것을 모른 채, 또는 일부러 무시한 채 시장에만 맡겨두면 모든 게 잘 될 것이라는 한가한 생각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재고해야 한다. 시장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기보다 시장을 잘 보살피려는 사고의 유연성을 가지자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각종 대내외적 규제완화, 특히 미국식(정확히 말하면 금융위기 직전의 미국식) 시장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정책들이 과연 한국경제에 장밋빛 미래를 보장해줄 것인지 의문이다.
시장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한미FTA(자유무역협정)도 예외가 아니다. FTA는 결국 우리 경제 및 사회의 제도를 미국의 제도와 같게 만들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경제학자로서, 그리고 경제외적 측면에서의 잠재적 이익을 생각할 때, 한미FTA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미국과의 FTA를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는 이들과는 의견을 달리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개방되어 있는 미국과 FTA를 체결했을 때, 자동차 등 몇몇 산업은 몰라도 IT를 비롯한 대부분의 다른 산업에서는 크게 얻을 것이 없다. 금융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문제는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것이 아니라 사태의 추이를 면밀하게 지켜 보면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 이것이 유연한 사고인 것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언제 진정될지 또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마련될 수 있을지 아무도 점칠 수 없다. 세계 금융시장의 변화에 따라 우리 경제도 요동칠 형세다. 이럴 때일수록 당장은 인기 없는 정책일지라도, 건전한 시장경제질서 확립이라는 큰 잣대로 볼 때 꼭 필요한 정책을 뚝심 있게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나치게 느슨해진 규제·감독도 재정비해야 한다. 10년 전 IMF 구제금융을 거치며 한국은 구조조정의 적기를 맞았었다. 그러나 경기상황이 호전되면서 고통을 수반하는 인기 없는 구조조정 정책들은 하나, 둘씩 유명무실해지거나 폐기되기에 이르렀다. 사전적 규제는 몰라도 사후적 감독은 보다 철저해져야 한다. 그리고 철저한 감독이 어려우면 사전적 규제도 쉽게 풀면 안 된다.
끝으로, 이번 월 스트리트 사태는 사상누각(砂上樓閣)이 얼마나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현실화되지 않은 모기지 자산을 바탕으로 또 다른 증권을 창조해 규모를 키워나가던 많은 금융기관들이 파산위기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관행으로부터 안전한가?
사상누각의 위험성은 비단 금융기관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자. 혹시라도 우리는 물가안정과 경제성장을 동시에 성취시켜 줄 수 있다는 신기루를 따라간 것은 아니었을까? 혹시라도 우리는 시장경제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관료들이 '시장경제의 수호자'를 자처할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의심을 애써 누르면서 "그래도 좋은 날이 오기만 한다면 그만이지"라고 자위했던 것은 아닐까? 혹시라도 우리는 "교과서는 교과서일 뿐이고 현실은 다르다"고 하면서 불나방처럼 투기에 몸을 내던진 것은 아니었을까? 이번 월 스트리트의 사태는 우리에게도 많은 질문과 숙제들을 던져주고 있다
출처 : 행복한 동네
글쓴이 : 행복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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