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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이 동시에 하는 합송이 장중하게 흘러나왔다. 수십 개의 법당 문창호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문틈으로 안쪽을 겨우 들여다보았다. 숨이 멎을 듯 경건하고 엄숙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법당을 가득 메운 젊고 앳된 비구니 스님들의 뽀얀 얼굴에 붉은 불빛이 일렁이고 사슴같이 맑은 눈동자들은 불빛에 반사되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나는 새벽예불이 이처럼 웅장하고 장엄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문틈에 눈을 붙인 채 나는 마치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마침내 거대한 파도가 밀려와 나를 통째로 삼켜버리는 듯했다.
-이산하의 <양철북> 중
영화에 등장했던 밀양의 요상한 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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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쏟아지는 국도를 따라 밀양 방면으로 향했다. 지도를 들여다보던 K가 거제도까지의 코스를 밀양-마산-창원-통영으로 잡았다. 운문호를 따라 꽃길이 이어지고, 동창천을 따라가는 20번, 58번 지방도도 아름다웠고, 때론 마을 표지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구촌리’. 하하하 사촌도, 팔촌도 아닌 구촌이라. 저긴 구촌들끼리만 사는 마을인가? 하하하 정말, 그런가본데 이 마을 이름은 ‘사촌리’잖아! 그럼 여긴 사촌들끼리만 사는 마을인가 보네! 머잖아 ‘삼촌리’도 나오지 않을까? 그런 농담을 주고받으며 우리는 ‘비밀스런 햇빛’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밀양. 이창동 감독의 <밀양>으로 타지 사람들도 밀양의 위치를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지만, 우리가 밀양에서 마주친 것은 다른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10대 시절 ‘밀양 아랑제’에 종종 놀러왔던 나는 낯익은 ‘영남루’ 대신 ‘긴늪유원지’나 한번 들를 생각이었다. 근데 지도를 잘못 본 탓인지, 길을 지나쳤다 싶더니 요상한 터널 하나가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서 있었다.
터널 안은 달랑 한 차선, 맞은편 ‘입구’로 차가 먼저 들어서면 영락없이 이쪽 ‘출구’로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난감한 길이었다. 어디선가 본 것도 같은데? 곽경택 감독의 <똥개>였다. 일찍이 밀양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던 영화. 초록색 추리닝 바람에 경상도 사투리, 망가진 정우성이 싸움질을 하던 장소가 바로 이 용평터널 안이었던 것이다. 한 대, 두 대 맞은편에서 연이어 차가 들어서고 결국 차량 다섯 대를 보내고 나서야 터널로 들어설 수 있었다. 흠, 야릇하군. 오가는 방향에 따라 이쪽이 ‘입구’가 되기도 하고, 저쪽이 ‘입구’가 되기도 하는 터널. 그래, 사람은 누구나 제 있는 자리에서 생각하는 법이지. 햇빛 아래 노란 꽃도 다른 불빛 아래에서는 파란 꽃이 되기도 하고, 붉은 꽃이 되기도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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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번 국도, 아름다움에 비명지르다
밀양을 지나 창원으로 향하는 동안 줄곧 듣던 음악도 지겨워져서 엠피3 플레이어 대신 라디오를 틀었다. 최재형 작사, 이수인 작곡이라는 가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나절 청산은 졸고 구름은 둥둥 영 넘어 간다. 은어새끼 송사리 떼 파들거리는…’ 묵직한 바리톤 목소리에 눌려 뒤따르는 가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청산은 졸고’ 부분이 맘에 들어 ‘청산은 졸고’에 도돌이표를 내 맘대로 붙이고 계속 불러댔다. 청산은 졸고, 청산은 졸고, 아닌 게 아니라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게 졸음이 슬며시 오는 날씨였다. 젠장, K랑 L형은 대체 운전면허 언제쯤 딸 거야?
창원, 마산을 관통해 통영으로 가는 길은 딱히 떠들어 댈 게 없다. 편의점, 은행, 관공서, 통신사 대리점, 24시간 김밥집, 서울이나 부산이나 마산이나 창원이나 도심의 길들은 별반 다를 바도 없으니. 그저 마산을 빠져나가던 길에 본 ‘동전마을’ 정도가 이색적이었다고나 할까? 이 마을에선 지폐 내면 안 받고 무조건 동전만 받는 거야. 주유소도, 은행도, 심지어 주일헌금도? 하하하. 그런 싱거운 농담이 행복한 비명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14번 국도에서 77번 국도로 접어들고 나서였다. 보조석에 앉은 인공지능 내비게이션 K의 안내대로 암하삼거리에서 좌회전을 했는데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이정표가 허공에 달랑거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길은 거짓말 조금 더 보태서 동해안일주 7번 국도보다 11배 정도 더 아름다웠다. 아무튼 77번이니까. 가령 7번 국도가 정통파 투수라면 77번 국도는 커브, 슬라이드, 너클볼 등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변화구 위주의 투수였다. 한마디로 핸들을 요리조리 돌려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무진장 바빴냐면? 전혀! 시간은 옆에서 출렁거리는 바닷물만큼이나 철철 넘쳤고, 초저속 커브를 그리며 거제도 모래사장 황금빛 미트에 꽂히기만 하면 되니까. 그래서 7번 선발 투수에 비해 77번 중간계투가 던질 수 있는 이닝 수가 너무 짧다는 게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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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구조라 해변에 텐트를 치고 자기로 했다. S사를 다닌다는 네 청년이 바닷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있었다. 우리는 텐트를 친다, 물을 끓인다, 랜턴을 찾는다, 한동안 부산을 떤 뒤 저녁식사에 곁들여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다. 건배! 첫날은 강원도의 폐교에서, 둘째 날은 금남의 사찰에서, 이젠 텅텅 빈 해변이로구나. 소주 한 병이 한계 투구 수에 달한 투수처럼 물러날 즈음 고기 냄새를 폴폴 풍기던 청년들이 코펠을 챙긴다, 버너를 챙긴다, 부산을 떤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해변은 불 꺼진 야구장처럼 조용해졌고, 밤공기는 서늘했으며, 그래서 죽어서 자빠져 있는 한 그루 야자나무로 불을 지폈다. 섬유질로 된 야자수는 부러지는 게 아니라 한겹 두겹 잘 벗겨졌고, 그래서 잘 탔다. 도시를 떠나 일렁이는 불빛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인 게 얼마 만인가? 밤하늘에 뜬 달이 더 이상 부러워서 못 봐주겠다는 듯 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텐트와 함께 우리의 영혼까지 토닥이던 빗방울
잠이 깼다. 해 뜬 지 꽤 시간이 지난 듯했는데 해변은, 조용했다. 토독 토독 토독. 빗소리가 들렸다. K도 이미 잠이 깬 듯했지만 가만히 빗소리를 감상하고 있는 듯했다. 천국이 따로 없구나. 세상에서 가장 얇은 집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나 감미로워서 나는 다시 눈꺼풀을 닫고 귀를 기울였다. 토독 토독 토독. 텐트는 참 작았고, 그래서 고막과 텐트 사이가 너무나 가까웠고, 그래서 빗방울이 고막 위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텐트가 고막 같고, 텐트가 우리 영혼인 것만 같았다. 빗방울이 때론 굵어지기도 하고, 때론 가늘어지기도 하면서 속삭였다.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렴. 말 그대로 나는 오른쪽으로 비틀었다. 물과 공기와 중력과 바람과 햇살과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었고, 모든 것과 연관된 빗방울이 토닥 토닥 토닥 우리들의 고단한 영혼을 두드려주었다. 고단한 노동 속에서 근육이 결리고 뭉치듯, 고단한 도시생활 속에서 영혼 역시 결리고 뭉치는 거란다. 그래서 이제 일어나야 한다는 것도, 도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작고 얇은 집에서 우리는 영혼의 마사지를 받고 있었다. 그때 빗방울이 다시 속삭였다. 이제 왼쪽으로 돌아누우렴. 나는 나의 영혼을 왼쪽으로 돌아눕혔다. 토닥 토닥 토닥.
노동효 글 <길 위의 칸타빌레> 저자·사진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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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yahoo 안나 (ropa420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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