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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상과 깨달음 사이|스티브 하겐의 “간단명료한 불교”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20. 06:54

 

본지에서는 불자들은 물론 일반 대중에게 불교와 불교 수행을 쉽게 소개하기 위해 미국의 선승이며 명상가인 스티브 하겐 스님의 베스트셀러 저서인 『간단명료한 불교(Buddhism Plain and Simple)』를 번역, 요약하여 6회에 걸쳐 싣는다. 이 책은 올 하반기 국내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스티브 하겐(Steve Hagen) 스님_1964년 대학에서 불교를 접한 뒤, 1967년부터 본격적으로 불교공부를 시작했다. 1975년 『침묵으로 돌아감: 일상에서의 참선』의 저자인, 선사 다이닌 카타기리(Dainin Katagiri)의 제자가 되었고, 1979년 선종의 승려가 되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승려들과 함께 공부하여 1989년 카타기리 로시(Katagiri Roshi)로부터 법수계(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음)를 받았다. 현재 미국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달마명상센터를 운영하면서 각종 강의와 명상지도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세상은 어떻게 그대로의 길이 될 수 있는가: 새 천년을 위한 과학, 철학, 그리고 직관에의 탐구』 등이 있다.

번역·이복희_이화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일찍이 전문서적인 『사진기술개론』과 『컬러사진』을 번역하였고, 틈틈이 마음공부도 하면서 세상을 자유롭게 살았다. 90년대 초반부터는 환경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환경보호 단체들과 함께하였고 환경 관련 자료 번역에도 정성을 기울였다. 스티브 하겐을 좋아하게 되어 이 책과 인연을 맺었고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어 스스로 번역을 결정하고 완역했다.






희망은 있다

붓다 가르침의 세 번째 진리는, 생겨나는 것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카도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또한 사라진다는 것이다.
두카의 소멸- 혼란, 슬픔, 그리고 상실의 끝-이 니르바나(nirvana, 열반)다.
붓다는 니르바나를 “생겨나지 않고, 자라나지 않으며, 그리고 조건 지워지지 않는 것”이라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생겨나고 자라고 조건 지워지면, 생겨나고 자라고 조건 지워진 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겨나지 않고 자라지 않고 조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나고 자라고 조건 지워진 것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 것이다.”

생겨나고 자라고 조건지워진 것은, 당신 자신을 포함하여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주변을 보자. 생겨나지 않고, 자라나지 않고, 다른 것들과 연관되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찾을 수 없으며,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그리고 조건들에 반응하는 모두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이라는 구조 속에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태어나지 않고, 자라지 않고, 또는 조건적이지 않은 현상을 또한 지적하였다. 이 조건지워지지 않은 양상은 직접적 지각으로 가능하며 이를 개념화하거나 규정지을 수 없고, 단지 ‘볼’ 수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의 상황은 결코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실재적이고 진정한 참된 것이 존재한다.



여기에 실재가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끝없이 흐르고 변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영원을 갈망하나, 그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기에 고통스럽다. 다만 이렇게 오고 가며 이 끝없는 생겨남과 사라짐만이 있는 듯이 보인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운동으로 경험한다. 실제로 물리학자들은 말하기를, 물질은 말 그대로 단지 운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어떠한 기준으로 보든지 간에, 우리의 경험은 항상 움직이고 변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신체를 포함하여 물리적인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도 적용된다. 모든 세포 - 실제로 모든 세포 내의 모든 원자 - 도 끝없는 생성과 소멸을 보일 뿐이다. 우리의 몸은 순간순간 재생되며, 그리고 어느 순간도 같지 않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도 끝없이 움직인다. 생각, 느낌, 판단, 그리고 충동이 마치 꽃이 계절에 따라 피어났다 지듯이, 생겨났다 다음 순간 사라진다.
열반은, 철저히 그리고 완전히 이러한 현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는 어리석거나 제정신이 아닌 게 아니다. 단지 보지 못할 뿐으로, 즉 우리가 보고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따름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개인 또는 개체로서, 즉 시간을 통하여 끝없이 지속되는 독립된 존재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가 인간이라 부르는 것을, 붓다는 단순히 ‘흐름’으로 보았다.
당신이 대부분의 사람과 같다면, 자신이 태어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자신의 존재함에 대한 직접적 경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기억을 따라가보자. 당신이 존재하게 된 것을 기억하는가?
물론 당신은 출생 때 시작된 게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수정될 때? 정확히 수정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정자가 난자를 처음 만났을 때?
진실은 당신이 실제적 경험의 일로, ‘존재하게 됨’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동일성 내에서 그 앞에 있었던 무엇을 포함할 뿐이다. 모두는 그 앞의 조건에 따라 정해지며, 그 앞의 것 또한 그 앞의 조건에 따라 결정되며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한, 이는 계속된다. 다른 표현으로는, ‘존재하게 됨’이라는 이 개념에 관해 매우 의외의, 모순적인, 그리고 규정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여기에 ‘실재’가 있다. 세상이 있다. ‘스스로 그러함’이 있다.
이와 동일한 문제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에 발생한다. 예를 들어, 나는 컴퓨터로 이 글을 쓰면서 여기 앉아 있다. 그러나 내가 쓰는 글들이 언제 책이 되는가? 이 글을 쓸 때? 마지막 편집을 끝낼 때? 원고를 출판업자에게 건넬 때? 아니면 인쇄된 페이지들이 묶여 나올 때?
이 책이 언제 시작되었는가? 내가 처음 이 책을 쓰기로 생각하였을 때? 하지만 이 책은 수십 년에 걸쳐 진행되어온 것이다. 내가 처음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하였을 때 이 책도 시작되었는가? 이 책이 근거하고 있는 식견은 2,500여 년 전에 처음 가르쳐진 게 아닌가? 사실 이 책을 쓰는 일은 수백 년에 걸친 수많은 이들의 노력 그리고 통찰과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또 끝은 어떠한가? 이 책(혹은 당신, 또는 나)은 어디서 끝나는가? 모든 것이 흐름이라고 한다면, 끝에 다다를 수 있는 책(혹은 당신, 또는 나)과 같이 영속적인 것은 없다. 지금 어느 순간에 이 책을 만드는 물질은, 마지막 징후를 보이지 않는 끝없는 변형을 언제나 겪고 있다.
그리고 이 책(혹은 당신, 또는 나)의 본질이 물질에 있지 않고 정신적 또는 지적인 차원에 있다면, 또다시 우리는 시작도 사라짐도 없는, 오로지 끝없는 변화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태초에 신이 ~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신은 어디로부터 왔는가?
시작도 끝도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는 것들이다.



먼저 보는 것으로 욕망을 줄이라

앞에서 논의한 세 가지 욕망을 이번에는 다른 각도에서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감각적인 쾌락을 위한 욕망은 단순히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는 욕망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는 그저 행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당신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질  때, 어떻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를 두 번째 욕망으로 이끈다. 우리는 죽지 않기를 원한다. 당신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태어난 이상, 당신은 죽게 되어 있다. 이는 단순 명료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를 꽉 붙잡고 있는 소멸에 대한 이 시각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된다면 어떻게 되나? 실제로 혼돈 위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러하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알 수 있으며, 또 그러한 견해로부터 우리 자신을 어떻게 자유로이 할 수 있는가?
문제는, 우리가 변화를 단순히 오고 가는 것으로 보지 않는 데 있다. 대신 단지 흐름과  변화만을 보여주는 직접적 경험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든 영속성을 수반한다고 여긴다. 사물이 생겨나 한동안 지속되다가 그리고 다음 존재 밖으로 사라진다고 상상한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또 다른 욕망을 품게 되는데, 즉 비존재에 대한 욕망- 우리의 사라짐을 어떻게 해보려는 욕망이다.
이 세 가지 모든 욕망은 변화에 대한 혼란에서 일어난다.
붓다는 이 욕망을 끝내는 일에 관해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가 이를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려는 의도가 바로 또 다른 욕망이 아닌가? 그리고 하나의 욕망이 또 다른 욕망으로 이르게 하지 않는가? 욕망이란 사그라들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모든 연료를 다 태운 등잔처럼 우리는 욕망의 불꽃을 멈출 수 있으며 그 불꽃이 작아져서 꺼지게 할 수 있다. 붓다의 가르침은 이를 행하는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는 ‘욕망을 줄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자아를 잊으라’는 것이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속에 빠뜨리면, 개구리는 튀어나오지만 만약 미지근한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고 서서히 온도를 올리면, 개구리는 죽을 때까지 거기 그대로 있는다.
우리는 개구리가 아니다. 사람은 자신이 건전치 못한 상황으로 너무 깊이 빠져들고 있을 때, ‘보고’ 그리고 ‘아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보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미끄러운 경사 아래로 계속 내려갈 필요는 없다. 멈추고, 돌아서서, 다른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상황을 ‘볼’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
위기로부터 이렇게 물러서는 일은 욕망을 줄이는 연습이 된다. 
감각기관은 과도한 부하를 받으면 감각을 잃게 된다. 그러나 일단 감각이 무뎌지면, 완전히 무감각해지기까지 더욱 과도하게 시도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정확히 중독성 마약의 잘못된 사이클과 같다. 경험하는 전반적인 효과는 우리가 바라는 것과는 정반대다.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먼저 ‘보는 것’이다. 그런 다음 방향을 돌려 찬찬히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압박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봄으로써 혼란스러움에 이르게도 하고 명쾌함에 이르게도 하지만 우리는 방향을 선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은 그 자체로 제어 능력과 조화력이 있다. 우리는 사고로써 이를 넘어서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일 수 있으며, 또한 그 스스로 균형을 되찾게 할 수도 있다. ‘보는 것’으로 균형을 되찾는 일은 불에 손을 넣지 않는 것처럼,  문제가 되지 않으며 힘든 일도 아니다. 행위가 무엇을 수반하는지 ‘볼’수 있을 때, 더 이상 그것을 할 어떠한 충동도 생기지 않게 된다.



욕망의 초점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

욕망에 대처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욕망의 초점을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방법이 있다. 자아를 잊는 일은 우리가 홀로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이들과, 다른 생명체들과, 지구, 그리고 우주와 상호 연관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다. 다른 존재를 제어하는 주된 힘으로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다른 모든 존재들- 그리고 실제로 역동적인 우주의 모든 움직임- 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아를 잊을 무한한 기회가 있는데, 즉 미래의 세대를 위하여 나무를 심고, 시를 쓰고, 식사를 준비하고, 흙으로 뭔가를 만들고, 또한 당신의 상대편도 당신만큼 게임에 중요한 존재라는 점을 진심으로 이해하면서 함께하는 야구 등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의 욕망, 행위, 말, 그리고 생각 등은 제어를 통해 어떤 특별한 목적을 이루려는 방향에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러한 노력이 실패하면 (계속되면 피할 수 없이 실패하게 되지만) 고통을 받는다.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이러한 제어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그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볼’ 수 있을 때, 제어하려는 우리의 욕망은 자연히 약해지기 시작한다. 요점은 제어를 그만두게 하거나, 제어하려는 욕망을 나쁘거나 잘못된 것으로 탓하는 게 아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며,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한 인식과 인정을 통하여, 우리는 고통을 끝낼 수 있다.
제어하려는 욕망의 중심에, 자아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나 ‘보는 것’으로, 이러한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없어지는 것은 자신의 잘못된 인식이다. 우리는 애당초 있지도 않았던 그 무엇에 매달리는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
이에 대해 “그러나 대체 누가 그것을 원하겠는가?”라고 첫 번째로 반응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그 속에서 깊은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이 환영(幻影)이라면, 그때 그 환영에 대한 깨달음은 가장 완전한 자유에 이르게 한다. 가장 큰 두려움은 각자 - 나 - 가 언젠가 소멸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확고한 실체가 있지도 않던 그 무엇이 어떻게 소멸할 수 있겠는가?          
붓다의 가르침은 각자가 근원적인 잘못에서 깨어나는 길로 향하게 한다. 그리고 깨어날 때, 마치 태양이 떠오르자 밤이 물러나듯, 두려움과 근심은 자연히 사라진다. 

 

 

 

 

 

 

 

 
<출처;buddhistculture.co.kr>
불교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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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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