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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테판 설교와 베드로 설교-5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21. 07:27

스테판 설교와 베드로 설교-5


이것을 책망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체적인 잘못이 없이 무조건 나쁘다고 욕을 먹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체적인 잘못의 지적이 없이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당하면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반감(反感)이 생긴다. 그들이 스테판의 책망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스테판을 향하여 이를 갈았다고 하는데 무었 때문에 마음이 찔렸는지 알 수 없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린 사람은 "형제여 어찌할꼬" 하고 회심하였다.

 

그런데 스테판의 설교를 들은 사람이 마음이 찔린 결과는 오히려 이를 갈았다 하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마음이 찔려도 회개하지 못하고 더욱 강팍해지는 일도 있는 있는지 이렇게 상반된 결과가 나타났다.

 

앞에서도 지적한 대로 청중들의 질이 강팍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그 당시 교권주의자들이 었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적한 대로 스테판의 설교에는 복음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신 속죄함과 인생을 구원하는 부활에 대한 선포가 없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강력히 증거한 베드로의 설교와 비교해보면 확연하게 들어 난다.

 

스테판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 우편에 계신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환상 중에 보고 말하고 죽을 때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다. 이에 대하여 이 중 표 목사는 돌에 맞아 몸이 깨어져 죽을 때에 스테판의 속에 있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이 흘러 나왔다고 설파(說破)했다.

 

그리고 스테판의 몸이 깨지면서 피와 함께 흘러나온 복음이 훗날 위대한 복음 전도자 바울을 탄생시켰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울을 변화시켜 위대한 복음의 사도를 만든 스테판의 영성(靈性)은 한번 설교에 수 천명을 회심시킨 베드로의 설교보다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스테판의 순교를 통한 하나님의 원대한 섭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여전히 살기가 등등한 채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 님을 직접 만나고서야 변화되었기 때문이다(행 9:1-9).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알수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다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대로 복음 전파에 힘써야 할 것이다. 스테판이 복음이 부족해서 청중들이 돌을 들고 달려 들었는지 청중들이 강팍해서 죽였는지 하나님만 아신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스테판은 베드로와 같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했지만 복음의 영성이 입술로는 뿜어져 나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마음속에 무엇이 가득하면 입으로 나온다는데 그렇다면 예수가 가득하면 예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테판이 예수로 가득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 죽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자기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였는데 이는 예수 님이 십자가에서 남긴 말과 같다(행 7:60. 눅 23:34)

 

이로 보건대 스테판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찼던 그리스도의 사람이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설교에서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하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 님께서는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온다(눅 6:45)고 하셨다. 그런데도 생전에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알 수 없는 일이다. 스테판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성령이 충만해도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례가 이 경우가 되겠다.

 

성령 충만에도 과정과 단계가 있어서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영성(靈性)에 깊이 들어가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죽으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고전 2:2) 단계도 있고 스테판처럼 성령이 충만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증거하지 못하는 단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만이 아실 것이다.


다만 여기서 새롭게 배우는 것은 성령이 충만해도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를 제대로 증거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사건에서 한가지 더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없는 설교는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의 복음 설교의 대상과 스테판의 설교 대상인 청중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청중들의 마음의 상태가 큰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청중의 상태에 좌우되는 면이 강하지만 설교의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 당시 교권주의자인 제사장의 많은 무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행 6:7).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없는 설교는 사람을 살리기는커녕 더욱 완악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스테판의 순교사건을 통하여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설교자에게 부여된 사명은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하고(행 1:8)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성령 님의 사역의 핵심이라는 점이다. 성령이 오신 것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기 위하여 오셨고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해야 한다고 예수 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요 15:26).


사람이 구원받는 사건은 전적으로 성령 님이 하시는 일이다. 성령 님의 능력이 아니면 영혼 구원도 하나님의 나라도 전파되지 못한다. 복음 전도는 인간의 철학이나 사상을 설파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 영혼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의 복음을 들을 때에 성령 님의 감동하시므로 일어나는 사건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 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사람이 믿도록 감동시킨다는 것이다. 성령 님의 인간 구원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설교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성령 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진정한 사명은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복음만 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쳐놓고 종교 철학이나 인생 철학 같은 설교는 성령 님의 뜻에 맞지 않는 설교가 되므로 진정한 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성령 님이 역사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김동길 교수의 말처럼 공식예배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건은 예수를 알고 믿는 기성교인들의 거룩한 예배보다 예수를 모르는 한 사람이 예배와 설교를 통하여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받는 사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예배는, 믿고 구원받은 많은 신자를 위한 예배가 아니고 예수를 모르는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진정한 예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한 영혼의 주님을 향한 경배가 수많은 신자들의 경배보다 하나님이 더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될 수 있다.

 

우리에 있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보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선 주님의 마음(마 18:12,13)을 생각해야 한다. 구원받은 많은 수의 신자를 보고 기뻐하는 것보다 구원받지 못한 한사람의 영혼을 다시 찾을 때에 더욱 기뻐하신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많은 기성 신자의 유익을 위한 강론보다 한 사람의 불신자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 선포가 설교의 주제가 되어야 하고 이러한 예배를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기성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들인 인생 철학과 도덕, 교훈이나 사상을 전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죽으신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고(고전 2:1,2)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며 그리스도를 위해 다른 것은 배설물로 여긴다(빌 3:7,8)고 고백하였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생명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일임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복음의 능력을 잃어버린 채 날로 날로 쇠락(衰落)해 가고 있다. 이 나라와 민족이 복음의 들어온지 백년이 지나면서 우리 민족은 대대로 내려오던 가난의 저주를 벗어버릴 수 있었다. 이는 한국 백성이 잘나서도 아니요, 한국의 지도자가 유난히 훌륭해서도 아니다.오로지 한국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복음이 전파되면서 생명이 구원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이 강토에 넘치도록 복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생명을 바치면서까지 이룩하려고 하신 생명구원의 사건이 한국교회를 통하여 왕성해지는 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한국이 일제의 수탈과 한국동란을 거치면서 민족의 생존이 기로에 있을 때에 하나님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기독교국가를 통하여 이 민족을 먹이게 하고 살렸다.

 

출처 : 충신사 기독교 문서 선교회
글쓴이 : josep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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