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반 설교와 베드로 설교-3
"죄(罪)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도 논급했지만 피조물은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이것이야말로 피조물의 특성이다. 자동차가 고장나면 스스로 고칠 수 없다. 자동차가 망가져서 기능을 잃고 죽은 상태가 되면 스스로 자신을 고쳐 살아날 수가 없다. 망가져서 죽어버린 자동차를 살리려면 자동차를 만든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동차가 고장났을 때에 고장의 근본적인 문제를 인간만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속성은 피조물의 일반적인 속성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인간은 인간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피조물이다.
인간이란 존재자체가 인간이 만든 피조물과 같은 속성을 보이는 것은 인간도 같은 피조물이라는 증거가 된다. 인간이 피조물이라면 자연히 인간을 만든 조물주는 존재 하게된다. 인간이 보여주는 피조물의 속성이 인간 스스로 자신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다.
조물주인 하나님을 인간이 피조물의 특징을 보여주기에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세상에 널리 전파된 고등종교의 창시자들은 자신 역시 피조물인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수 없기에 자신의 능력과 지혜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사(生死)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을 만든 조물주인 하나님만이 해결 할수 있다. 자동차가 고장나서 망가지면 자동차를 만든 인간만이 자동차를 고쳐서 살리듯이 인간이 고장나서 망가져서 죽으면 인간을 만든 하나님만이 인간을 살릴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피조물인 인간이 창시(創始)했으므로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나타내지 못한다. 오직 인간을 만든 창조주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 교(敎)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啓示)되었으므로 하나님이 창시자(創始者)가 된다. 인간이 창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창시하신 종교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 산에 불러서 십계명(十誡命)을 돌판에 친히 기록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다.
세상의 어떠한 종교도 하나님이 친히 글을 기록하여 인간에게 전해준 종교가 없다. 자신이 수도(修道)하다가 어떤 정신적인 깨달음을 기록해서 종교의 경전을 만들었지 하나님이 친히 경전을 기록하여 인간에게 직접 내려준 예가 없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수양이나 하고 깨달음을 추구하는 정적(靜的)인 종교가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활동하시고 기적을 보여주시는 생동감이 있는 살아있는 종교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처럼 관념의 세계에서 추상적인 세계를 헤매는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의 종교가 아니고 신앙 속에서 광대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확실하고 명확한 종교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나타내는 기적과 표적인데 다른 종교에서는 거의 볼수 없는 자연 법칙을 초월하는 기적이 너무나도 풍성하게 나나난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많은 기적을 보여주었는데 예수 님도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베풀었고 예수 님뿐 아니고 제자들도 많은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였다. 지금도 병원에서 난치병으로 죽게 되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고 살아난 일이 많이 있다.
인간의 의술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병이 하나님의 능력을 입어서 살아난 일이 있음을 기독신자라면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다른 종교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생사의 문제를 기독교에서 해결하는 기적을 보여주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만이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이 되심을 강력히 증거 하는 표적이 되는 것이다.
말이나 글로, 이론으로 그럴듯하게 아무리 화려하게 교리(敎理)를 포장하여도 그 것이 이론으로만 그치고 실제 인간의 근본문제인 생사를 해결하지 못하면 말로만 그치는 속 빈 강정 같은 것이 될 뿐이다. 인간의 관념의 세계를 화려하고 합리적으로 포장하는 것은 누구나 할수 있다. 그러나 능력이 없다면 말과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으로 무슨 말인들 못하는가?
그러므로 능력이 없는 종교는 추상적인 관념의 세계를 배회하는 인간의 철학과 다를 바 없다. 철학자가 자기가 관념으로 구축한 자신의 추상적인 세계를 보여준다면 능력이 없이 화려한 교리만 있는 종교는 하나의 종교철학일 뿐이다. 모든 종교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다.
그러므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능력을 실제로 보여주지 못하는 종교는 그들이 주장하는 가르침을 신뢰할 수 없다. 종교는 철학과 같이 정신적인 관념(觀念)의 유희(遊戱)가 아니고 인생이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기독교는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적으로 가득 차 있으므로 실제 삶에서 기적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어 신자로 하여금 확고한 믿음을 갖게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기적과 이적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든 조물주임을 강력하고 확실하게 증거하는 수단이 되고 기독교에서 섬기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을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말로 아무리 별다른 소리를 해도 기적의 능력이 없는 종교는 인간의 한계 속에서 세워진 인간의 산물(産物)이요, 피조물의 산물일 뿐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간정신의 산물일 뿐이다. 인간이 종교를 찾는 것은 인간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지 무슨 정신적인 수양이나 도덕함양(涵養)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종교가 아니라도 세상 철학이나 학문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인간이 종교를 향한 마음은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인 인간의 생사와 내세(來世)와 구원을 얻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해결해 줄 분은 능력이 무한하신 하나님뿐이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기적이다. 이 기적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되심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인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다.
예수 님은 죽은 사람을 살렸을 뿐만 아니고 스스로 인간의 죄업(罪業)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죽어 장사 된지 사흘만에 살아나심으로 자신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인 삶과 죽음을 해결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 되심을 친히 그 몸으로 보여 주셨다.
세상의 어떤 종교의 창시자나 위대한 인물 중에서도 죽었다가 부활한 일이 없다. 삶과 죽음의 문제는 피조물인 인간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의 해결은 인간을 만든 조물주인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음을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서 자신이 생사(生死)를 다스리는 하나님이 되심을 명확하게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타내신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이요, 오셔서 십자가에 인간 대신 죽으신 것이요, 죽으시므로 인간의 죄업을 대신 청산하신 것이요, 죽은 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만든 인간을 위하여 대신 죽음을 맛보신 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기에 가장 큰 기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죽었던 몸이 다시 살아서 영원히 사는 몸으로 부활하신 것은 인간을 죽지 않는 부활로 인도하기 위한 것으로 인간이 다시는 죽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사망을 완전히 해결한 기적이었다.
십자가의 구원은 인간을 만든 창조주로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한 기적의 능력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장 큰 기적은 인간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으로 재창조하신 사건이다. 하나님이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를 창조 운행하시는 큰 일을 하시는 기적을 행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 중에 가장 큰 일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인간을 구원하신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에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바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 중에 하나님의 생명을 바쳐서 한 일은 십자가 구속과 부활 외에는 없다. 무슨 일이던 생명을 걸고 한 일이 가장 큰 일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생명을 바쳐서 한 일이 십자가 사건이므로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은 하나님이 하신 일 중에 가장 큰 일이요, 가장 큰 기적이요,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려야 마땅한 기적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을 증언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일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을 증거 해야할 사명이 있는 것이다.
미리 언급이 되지만 베드로의 설교와 스테판의 설교의 현격한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베드로는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을 중거 했지만 스테판은 공회원 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을 증거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가장 큰 일이요, 기적을 증거 하여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스테판은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증거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릴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렇게 설교의 내용에서도 베드로와 스테판의 차이가 크지만 설교직전에 나타난 기적과 표적에 있어서도 두 사람은 차이가 있다. 베드로가 보여준 방언표적과 앉음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은 스테판의 설교직전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스테판도 큰 기사(奇事)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고(행 6:8) 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기사를 행하였는지 기록이 없다. 베드로를 통해 나타난 기적과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성에서의 복음 전도 때에 나타난 기적은 구체적으로 기적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행 8:5-8).
그런데 스테판의 기사와 이적의 구체적인 내용이 생략되어있는 것을 보면 그 표적과 기사의 내용이 베드로나 빌립이 보여준 기적과는 다른 것이고 복음과 별로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가 짐작하게 된다. 이것은 스테판이 다른 사람들과 논쟁할 때도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는 말이 없었다는 것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설교 전에 이적을 보여주지 못한 스테판은 자신을 죽이려는 가장 완악하고 강팍한 청중인 산 헤드린 회원들 앞에서 설교했으니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설교한 것이다. 설교 전에 베드로처럼 사람들을 압도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기적을 나타냈다면 베드로처럼 죽음을 면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테반의 설교 때에는 아무런 이적이나 표적이 없었다. 다만 스테판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이 나는 표적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표적은 그 당시 청중들을 압도할만한 표적이 되지 못했다.
스테판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는데(행 6:8) 어떤 표적을 행하였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다. 다만 성령으로 말함으로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논쟁할 때에 그들이 스테판의 구변(口辯)과 지혜를 능히 당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을 뿐이고 스테판의 설교로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悔心)한 사람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스테판의 구변과 논설에 밀린 사람들의 반감만 일으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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