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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국땅에 있는 발해유적 찾아보기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 1. 21:40

               고구려의 계승국가 발해국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조 시대를 열었던 우리나라의 역사 입니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발해는 당연히 자기네 역사의 한부분이고, 고구려도 자기네 소수민족이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중국으로 들어가 유적을 살펴 보았습니다.

 

 

1. 발해의 건국 과정

   

1. 발해의 건국과정  

 

668년 : 보장왕은 평양성에서 항복을 하고, 본인과 지배층 지도자들이 당나라 영주 (지금의
            요령성 조양시)로 끌려갔음. 역사기록에 의하면 당시 끌려간 숫자가 3만호라고 하였다.

 

677년 :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이 계속 반란을 도모하므로 "요동도독 조선왕" 으로 임명하여 
            고구려 지역 민심을 다스리게 함. 보장왕이 요동성으로 돌아 올 때 고구려 백성도 일부
            돌아옴.

 

681년 : 보장왕 고구려 부흥을 꾀하다가 발각되어, 당나라 공주로 귀양 갔다가,
         서기 682년  귀양지 에서 사망 함 

 

698년 : 영주에 끌려가 있던 고구려 장수 대조영이 말갈장수 걸사비우와 함께 고구려 유민, 말갈
           유민을  이끌고 탈출 함. 그들은 동쪽으로 이동하고, 곧 당나라 군사가 쫓아 와서 천문령
           에서 한판 전투를 치루게 되고 이 전투에서 대조영이 크게 이기면서 이들은 목단강 상류
           동모산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진 이라고 함 (후에 발해로 국호를 바꿈)

           중국은 발해 공격을 포기하고 자기들 임의로 제후국으로 임명함.

 

756년 : 상경 용천부 (지금의 영안시 동경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강력한 제국을 구성하여 일본
           당나라, 신라 등과 교류하였다.

 

 

2. 발해의 귀속문제 중국 주장

   

당시 고구려족과 말갈족의 관계

 

      고구려 는 고구려 북방의 말갈족들을 일찍 복속시켜서 자기의 땅에 함께 살게 하였으며, 당나라와 싸울 때에도 고구려 군사와 말갈인들이 연합하여 싸웠다. 따라서 고구려의 지휘부에는 말갈족도 있었으며, 3만호가 당나라에 끌려갈 때 말갈족도 상당한 인원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 말갈족을 지금 중국의 만주족의 선조로 봅니다.

 

      중국은 발해의 주도 세력이 말갈족 이었으며, 대조영도 말갈족 장수로 고구려에서 공무원 생활(?) 을 하던 사람이라는 입장입니다. 또 발해에 대한 기록이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는 없고, 일본 서기나, 중국의 구당서, 신당서 등에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말갈족의 후손이라는 주장.

 

< 첫번째 수도 동모산의 유적>

 

  

동모산은 지금 길림성 돈화시(敦化)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며, 중국에서는 성산자산성 이라고 부릅니다. 현재는 수풀과 잡목이 무성할 뿐, 옛날 성이 있던 자리 라고 알아 볼 수 있는 곳은 내 눈에는 전혀 안 보입니다. (전문가는 토성의 흔적을 알아 본다고 함)

 

 

 

돈화시 남쪽 육정산에는 발해시대의 고분군이 있다. 일종의 공동묘지와 같은 곳인데 이 속에서 역사서에 등장하는 정혜공주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지역은 조선족자치주 이므로 모든 공용문서, 간판에는 조선어(북한식 한글)를 함께 표기해야 합니다.

 

 

 

돈화시 곳곳에는 이 사진과 같은 주추돌 만 남은 건물터가 15군데 발견 되었다. 그리고 모든 장소에 주추돌이 똑같은 모양으로 24개 씩 있다. 현재 이 것을 발해시기의  정부 건물로 추정한다.

 

< 두번째 수도 서고성의 유적>

 

    그후 발해는 730년경 수도를 동모산 남쪽 평지인 중경으로 옮겨 서고성을 쌓고 국가의 기틀을 잡았다. 중경은 지금의 길림성 화룡시(和龍)로서 조선족자치주 주도 연길시 서남쪽 70 Km 지점에 있다.

 

    이곳의 유적으로 서고성터, 정효공주 무덤 등이 있으며, 서고성터는 중국당국이 현재 발굴 중인 데, 내성이 가로 세로 700M로 나타나고  3개의 궁궐터가 발견되었다.

 

 

 

      정효공주의 무덤 -- 정효공주는 육정산에 있는 정혜공주의 동생이다

 

 

이 무덤은  내부에 벽화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중국 당국이 보호한다고 무덤을 둘러서 사진처럼 집을 지어 봉쇄하여 일반인은 들어가 볼 수 없다.

  

 

 

      정효공주의 무덤 내부의 벽화이다.

 

< 최고 전성기 상경 용천부의 유적>

 

     그 후 발해는 서기 756년 상경 용천부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 동래성) 로 수도를 옮기고 강력한 제국을 구성하여 일본, 당나라, 신라 등과 교류하였다. 당시 상경성은 중국 당나라의 서안의 장안성을 본떠서 지은 엄청난 크기였다.

 

 

이 상경성은 현재 발굴 복원 작업 중인데 한 20 여 년 걸쳐서 이루어질 예정이며, 현재 5개의 궁궐과 온돌시설이 발견되었다. 온돌시설이라는 것은 중국에 없는 우리나라 만의 문화이므로 이를 봐도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이다.  

 

 

       복원해 놓은 성곽의 일부 -- 너무 반듯한 새 것이라 감흥이 안 난다.

 

 

 

   발해 유적 답사단 기념사진

 

 

 

 

 

출처 : 문화유적 찾아보기
글쓴이 : 알프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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