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예수님이 행한 이적의 자취를 따라서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 19. 22:13



선지자 엘리야像
갈멜산의 엘리야상.엘리야선지자는 이곳에서 바알선지자 4백50명과 대결하여 그들을 모두 참살했다.

온국토가역사적, 종교적 유적지인 이스라엘은 지중해
연안의 텔아비브에서 동쪽 레바논 국경지대의 여리고까지 24시간 정도밖에 안 걸리는 작은 나라다.
므깃도 언덕. 그리스 말로는 아마겟돈.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바로 세계의 종말 전쟁이 일어난다는 곳이다. '종말의 전쟁터'는 과연 어떤 곳일까?
버스로 40여분 달리면 평원에 우뚝 솟은 거대한 언덕이 눈 앞에 다가온다.

무너진 성벽, 돌무더기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도성. 5천여 전부터 세워진 도성으로 그동안 24차례나 파괴된 흔적이 보인다. 솔로몬 왕 때부터 요새화된 전략적 요충지. 므깃도 언덕 주위의 이즈르엘 평야는 비옥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장악하려면 이즈르엘 평야를, 이즈르엘 평야를 장악하려면 므깃도를 장악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항상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즈르엘 평야는 지금 종말의 전쟁을 연상하기에는 너무도 평화스런 곳으로 변해 있다.
므깃도에서 나사렛 가는 중간에 타볼 산, 예수가 엘리아와 모세를 만나 얘기하면 옷이 하얗게 변했다는 타볼 산은 나무가 별로 없는 거대한 돌산이다. 산을 위돌아 포장도로를 따라가 보면 소나무 숲이 울창한 숲길 그 끝에 교회가 보인다. 2천년 전의 그 일을 생각하며 감회 어린 표정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 온다.
지금 그 자취는 없으나 흰 구름이 파도처럼 철썩이며 하늘을 향해 노를 젓고있다. 타볼 산에서 다시 버스로 30분. 작은 마을에 들어서면 바로 이곳이 나사렛이다.
산 기슭에는 2천년 전 성모 마리아가 물을 길었다는 마리아 우물 터가 있고 마을 한 가운데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택함을 입었다는 곳에 수태고지 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지하 통로로 옆의 요셉의 목공터였던 성 요셉 교회와 연결돼 있다.
예수가 땀 흘리며 목공일을 하던 것을 생각하며 신도들은 기도를 올린다.
예수가 어린 시절 율법을 읽었다는 유태교회당인 시나고그. 구걸하는 소경이 알라를 외치는 황색 2층 낡은 건물이 바로 그것이다. 단조로운 내부에는 재단이 있고 유태교 법전들이 전시돼 있다.

예수가 가장 많은 기적을 행했던 곳, 갈릴리

나사렛에서 버스로 언덕을 몇번 넘다 보면 바다같은 호수가 나온다. 시퍼런 갈릴리 호수는 둘레가 22km로 옛날부터 '갈릴리 바다'로 불리고 있기도 하다.
예수는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 가장 많은 기적을 행했다. 많은 환자의 병을 낫게 하고 귀신을 쫓아냈으며 폭풍을 잠재우고 물 위를 걸었으며 오병이어(다섯개의 떡과 두마리의 생선으로 5천명을 먹여 살림)의 기적과 산상 수훈을 설했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살던 마을. 지금은 호수 주변에 몇채의 집이 한가하게 있을 뿐 그때의 흔적은 없다.
마을에서 언덕을 넘자 멀리 호수 옆에 교회가 보였다. 그 오병이어의 교회 옆에는 베드로 수위원 교회가 있다. 예수가 부활 수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내 양을 먹이라'고 당부했던 곳이며 지금은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그 말을 듣는 조각과 예수가 친히 제자들에게 아침을 먹였다는 돌 식탁이 보존돼 있다.
타브하에서 산길을 따라 정상 쪽으로 20분쯤 오르면 팔복교회가 나온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로 시작되는 유명한 산상 수훈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은 잔디가 트인 갈릴리 호수를 배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호수의 북쪽 끝에는 가버나움이 있다. 예수는 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때로는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겠느냐,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했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지금 그 가버나움에는 베드로의 장모가 살던 집터만이 남아 있다.
갈릴리 호수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려면 여리고를 지나야 한다.
뜨겁게 달궈진 메마른 바위산에 둘러싸인 큰 구덩이. 해발 3백5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여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도시이다.
근처의 예루살렘이 해발 8백m이니 무려 1천1백50m나 아래에 있는 셈이다.
거리에는 기관단총을 설치한 이스라엘군의 지프가 돌고 있다. 주민들은 모두 팔레스타인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으로 가득차 있다 1만년 전의 주거지 델술탄이라는 곳으로 걸어가는데 땅에서 치솟는 후끈한 열기에 숨이 막힐 정도이다. 폐허같은 델술탄 유적지의 건너편에 황량하고 메마른 바위산이 있다.
유혹의 산이라고 알려진 이곳은 예수가 40일동안 단식하며 악마에게 시험 받았다는 곳.
예수를 보기 위해 키 작은 삭개오가 나무에 매달렸던 이 여리고에는 종려나무가 많다.
2천년 전에 예수는 이 삭막한 여리고를 지나 나귀를 타고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했었다. 평화의 도시란 뜻을 지닌 예루살렘은 지금 분열과 갈등이 소용돌이 치고 있다. 이스라엘 독립 후 새로 세운 시가지 말고는 수천년 전부터 살아온 성곽 안과 주변의 옛 시가지는 긴장이 감돌고 있다. 성 입구에서 실탄이 장전된 자동소총을 들고 경계를 선 이스라엘 군인. 자기 방어를 위해 디스코텍에서 자동소총을 메고 맥주를 마시는 여군들. 지나가는 관광객을 향해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아이들. 바로 이같은 모습들이 예루살렘의 옛시가지 풍경이다.
해발 8백m의 언덕에 있는 예루살렘은 도시전체가 유적지이다. 성 안은 성경에 나와 잇는 현장 그 자체이고 성 밖의 키드론 계곡에는 소경이 눈 뜬 실로암 연못, 다윗왕의 부덤,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다락방, 베드로가 예수를 세번 부인하고 통곡을 했다는 곳 등이 보존돼 있다.

[주변의 지방]이라는 뜻을 가진 갈릴리는 예수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곳으로 열두 제자중 가롯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를 배출해낸 땅이다.예수 당시 하프모양의 갈릴리호수는 연안의 교통의 요지며 아름다운 경치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었다.
땅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어업도 성해서 기름에 절인 가공류는 지금도 외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어부 베드로가 살던 가버나움 마을,물고기 두마리와 보리덕 다섯개로 기적의 만찬을 베풀었던 카부가,예수가 산상설교를 하던 팔복산은 모두 갈릴리호수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있다.
2천년전의 모습을 연상케하는 유물과 유적들이 곳곳에 널려있어 순례객들의 시선을 끈다.갈릴리호수는 예수시대의 역사를 재현이라도 하듯 잔잔했다가도 금세 성난 파도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믿음이 없던 베드로가 풍랑에 휩쓸린 곳도 바로 이곳이다.
예수의 제자중 시몬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가 갈릴리호수에서 물고기를 잡 어부였다.호수에는 2천년전 베드로가 탔던 배와 같은 모형의 선박들이 한가롭게 떠다니고 기름에 튀긴 '베드로고기'는 잠시 순례객들의 미각을 자극한다.
갈릴리호수의 명물인 베드로고기는 흑도미와 비슷한 농어로서 베드로가 예수께 대접했다는 것이다.매일 이곳을 찾는 수천명의 순례객들은 베드로고기를 맛보는 것을 지극히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기름튀긴 고기 일미
[순례객들에게 맛보일 저 많은 고기들은 어떻게 조달하느냐]는 의문은 음식점 주인의 설명으로 곧 해결이 되었다.정부에서 해마다 수백마리의 치어를 ?아붓고 있으며 어업을 하는 키부츠들이 하루에 일정량의 고기를 양심적으로 잡고있다고 했다.
갈릴리 북쪽해안에 있는 가버나움은 예수가 이적을 행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문둥병과 중풍을 고쳤으며 베드로의 장노의 열병도 고쳐주었다.(마태복음8장).
혈루증여인과 맹인에게 새삶을 열어준 곳이기도 하다.예수는 자신이 가장 많은 이적과 사랑을 베풀었음에도 불구하고 죄악으로 물들어가는 가버나움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다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소돔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태복음11장23~24절

배은망덕한 도시 가버나움은 예수의 예언처럼 종려나무들 속에 폐허더미로 남아있다.
말씀의 위력을 실감하는 곳이다.
갈릴리호숫가의 타부가에는 검은 벽돌로 지은 베드로교회가 우뚝 서있다.'주님의 식탁'이라는  뜻을 지닌 멘사 도미니라 불리는 육중한 바위위에 건립되었다.이 바위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식사했던 곳이며 베드로를 향하여 [내 양을 먹이라'고 세번 당부한 곳이다.


팔복산 정상은 평원
팔복산에 오르면 갑자기 서늘한 바람과 함께 시야가 확 트인다.수천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평원도 인상적이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갈릴리호수는 가히 환상적이다.
2천년전,수만흔 사람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 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5:3-12) 

 이 팔복(八福)의 노래는 죄악이 넘치는 이 세상에서 외면되고, 또는 상처받는 가난한 심령들, 의로운 사람들, 핍박받는 이들에게 이제껏 어디에서도, 누구에게서도, 들은 적이 없는 기쁨과 평안과 위로와 소망을 주는 하나님의 복음이다. ]라고 외치던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북서방향으로 길게 뻗은 갈멜산도 순례객들의 옷깃을 잡아끈다.[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뜻을 가진 갈멜.수풀이 울창한 갈멜산을 아가서에서는[아름다운 여인의 머리카락]으로 비유하고 있다.
아합왕 때에 엘리야선지자가 바알선지자 4백50명을 참살한 이 갈멜산에는 엘리야 수도원이 건축되었는데 옥상에 올라가보면 짙푸른 지중해와 이스르엘평원이 한눈에 들어온다.수도원 벽에는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재물을 태워 올려가는 모습,엘리야가 방ㄹ선지자들을 참살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헤롯이 로마황제 가이사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한 가이사랴.
가이사랴에는 로마시대의 야외극장과 수로 및 십자가군시대의 성채가 발굴되었다.특히 본디오 빌라도총독의 이름이 새겨진 비문은 발굴품중에서도 단연 압권으로 꼽힌다.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빌라도의 역사적 고증인 셈이다.

문헌에 의하면 빌라도는 그 시대의 다른 유다 총독처럼 지중해 연안에 있는 가이사리아를 수도로 정하고 그곳을 통치지역의 중심지로 삼았다.

지중해 연안에는 '스트라토의 탑'으로 불렸던 페니키아의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이 곳에 B.C.20년에 헤로데왕이 가이사리아 도시를 세웠다. 당대의 건축가들과 조각가들이 동원되어 12년간에 걸쳐 완공된 이 도시는 팔레스타인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이자, 당시 가장 주목 받는 항구의 하나가 되었다. 이 도시는 화려한 궁전들과 공공건물, 시장, 웅장한 대리석 신전, 원형경기장 등으로 아름답게 꾸며졌다. 헤로데왕은 이 곳에 큰 배가 안전하게 들어올 수 있도록 인공부두까지 설치하였다. 헤로데는 이 도시를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티누스 케사르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리아라 불렀다. 헤로데왕이 죽은 후 로마의 통치를 받게된 가이사리아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로마 총독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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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살았던 본시오 빌라도는 과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으로 건너갔고, 그 곳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가이사리아는 약 500년 동안 팔레스티나 지역 로마정부의 수도 역할을 담당했다. 복음 전파자인 필립보는 이 곳에서 살면서 복음을 전하였고(사도 8/40), 이방인으로 첫 번째로 개종한 고르넬리오에게 복음을 전하고(사도 10/41), 사도 바오로가 2년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아그리빠를 비롯하여 여러 높은 사람들에게 부활한 예수를 증거했던 곳도 이 곳이다(사도 26). 그리고 A.D.66년에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지원을 받은 시리아인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2만명의 유대인이 무참히 살육당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거센 유대인의 반란이 일어났지만 결과는 예루살렘과 제 2성전의 파괴로 끝났다. 69년 페스파시아누스가 이 곳에서 황제로 즉위했고, 3세기에 유명한 그리스도교 학자 오리게네스에 의해 그리스도교 학문의 중심지로 변하였다. 가이사리아는 638년부터 회교도의 지배하에 들어 갔다가 1102년에 십자군에 의해 탈환되었다. 1291년 이집트의 바이바르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이것이 가이사리아의 종말이었다.
이 도시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해변의 모래 언덕에 파묻혀 갔다. 195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고학자들은 이 곳 가이사리아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화려했던 이 도시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중 중요한 유물로는 로마 시대 때 만든 반원형 극장으로 지금은 많은 부분이 보수되어 음악회 공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19m 떨어진 산까지 연결되어 있었던 수로들이 발견되었으며, 2만명의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었던 길이 300m의 경마장과 본시오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진 돌이 발견되었다.  1961년 이탈리아 조사단에 의해 가이사리아의 헤로데 극장 터에서 부서진 비문이 하나 발굴되었다. 이 비문에는 본시오 빌라도가 티베리오 황제를 기념하고자 " 이 사원을 가이사리아 백성에게 바친다."라고 씌여져 있었다. 이것은 예수의 사형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로 남아있는 로마 총독 빌라도의 이름이 언급된 고고학상 유일한 유적이다. 이 글이 새겨진 돌은 원래는 티베리오 황제에게 헌납된 성전 벽의 주요 위치에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티베리움'이라고 불리운 그 성전의 위치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루이 9세에 의해 만들어진 성벽은 폭이 9m되는 해자와 이 해자로부터 9-14m 높이까지 올라오는 경사진 뚝으로 이루어져 있다. 십자군 시대 때 이 도시의 면적은 43,000평이었으나 로마 시대 때는 그 여섯배나 되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탔던 요바항구를 지나 [봄의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텔아브에 도착하면 이스라엘순례는 끝난다.텔아브는 순수한 유대인들의 도시로 이스라엘 건국후 급속히 인구가 늘어 났다.1950년부터 욥바와 통합되어 욥바-텔아브로 불린다.



요빠(Joffa, Joppe 

텔아비브 남쪽에 있는 이곳은 3천 6백년의 긴 역사를 가진 조그마한 항구도시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예로부터 이스라엘의 중요한 항구가 되어왔다.
 구약에 나오는 요나가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버리고 스페인으로 도망가려고 이곳에서 배를 탔다가 혼이 난 곳이며(요나 1,3), 솔로몬 왕이 성전을 짓기 위해 레바논의 송백나무 목재를 이곳 요빠에서 하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열왕기하 5, 6장) 요빠는 또 베드로 사도가 죽은 다비타(Tabitha)를 살린 기적을 행한 장소이다.(사도행전 9, 36-43)



 텔아비브(Tel-Aviv)

텔아비브는 봄의 언덕이라는 뜻으로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586-538)의 유태인 촌락의 이름이며 또한 시오니즘 운동의 지도자였던 헤르?의 주요저서 '오래된 새로운 나라'의 헤브라이어 번역에서 연유된다.
  이곳은 1909년 당초의 황량한 모래 둔덕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이스라엘 공화국 최대의 도시로 산업의 중심지이다.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이기 때문에 국방성을 제외한 모든 관청이 예루살렘에 있지만, 비즈니스 라이프는 대부분 텔아비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관청, 호텔, 박물관, 극장, 미술관, 외국 대사관 등이 집결되어 있다.

고고학이 푸는 ‘성경 수수께끼’

2000년 희년(禧年)을 맞아 로마 교황청은 축하 행사의 일환으로 8월 중순부터 2개월 동안 토리노 성의(聖衣)를 일반에게 공개했다. 1353년 프랑스에서 존재가 확인돼 이탈리아 토리노의 한 성당에 보관 중인 이 성의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려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를 매장할 때 주검을 감싼 수의라고 믿지만 1988년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에 의한 분석에 따르면 중세기에 제조된 옷감인 것으로 판명돼 논란이 계속돼왔다.로마 교황청은 성의 전시를 마친 뒤에 과학적 연구를 허용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토리노 성의의 진위 공방처럼 과학이 종교의 약점을 들춰내는 악역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고고학은 성서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큰 몫을 한다.
1961년 로마제국의 유대 총독이 집무했던 장소에서 유물을 발굴하는 도중에 1세기의 석판이 발견됐는데, 비문에는 라틴어로 빌라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유대 총독임을 확인해주는 물증인 셈이다. 이른바 ‘빌라도 석판’의 발견으로 고고학자들은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1968년 예루살렘 교외의 한 묘지동굴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20대 사내의 뼈가 보존돼 있는 돌상자가 발견됐다. 이 발견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증 찾아내 실체적 진실 밝혀

첫째, 성경에서 로마제국의 처형 방식으로 묘사된 십자가형이 사실이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이다. 요한복음에는 ‘병사들이 와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의 다리를 차례로 꺾고’(19장 32절)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 남자는 정강이뼈가 으깨지고 두 팔은 십자가에 못질을 당했으며 큰 쇠못이 양쪽 발뒤꿈치를 관통한 것으로 짐작됐다. 로마제국에서 수천명의 반역자, 강도, 포로들이 십자가형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런 유해가 한번도 발굴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 남자의 뼈는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된다.

둘째, 예수의 매장 방식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증거가 된다. 예수가 죽은 뒤 시체는 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아 동산의 새 무덤에 안치된다(요한복음 19장 38∼42절). 일부 학자들은 로마제국에서는 십자가형에 처한 죄인의 주검을 공동묘지에 내던지거나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짐승들이 뜯어먹도록 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로마의 장례풍속으로는 예수가 무덤에 묻힐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성경도 고고학의 유용한 수단

그러나 십자가형을 당한 사내의 해골이 납골당에 해당되는 상자에 보존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빌라도 총독의 허락을 받아 예수를 무덤에 매장했다는 성경 기록이 엉터리가 아님이 확인됐다고 볼 수 있다.
1990년 예루살렘 근교에 있는 1세기 경의 묘지에서 여러 개의 석회석 납골당이 발굴됐다. 이 가운데에는 60세 된 노인의 뼈가 들어 있고 ‘가야바의 아들’이라는 비문이 새겨진 것도 있다. 전문가들은 성경에서 예루살렘의 대사제로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긴 가야바가 이 뼈의 주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고학은 예수의 죽음에 관련된 증거를 발굴했을 뿐만 아니라 노아의 홍수, 출애굽기(엑소더스), 다윗왕, 시바여왕에 관한 성경 기록을 뒷받침하는 물증을 속속 찾아내고 있다.
특히 다윗왕은 구약성서의 핵심 인물이며 예수의 직계 조상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이외의 고대 문헌 어디에도 그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에 묘사된 다윗과 그의 아들 솔로몬의 황금시대는 날조된 기록이라는 지적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1993년 갈릴리의 댄(Dan)이라는 고대 이스라엘 마을의 유적에서 발굴된 기원전 9세기의 비석에 의해 다윗이 실존인물임이 확인됐다. 다윗왕조 100년 뒤에 만들어진 돌기둥에는 다윗의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는 문구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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