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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 최초의 화폐 발행을 했던 곳! 터키 사데 지역을 찾아서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1. 19. 22:14

세계 최초의 화폐 발행을 했던 곳! 터키 사데 지역을 찾아서
 


화폐를 제조하는 모습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를 막론하고 돈(화폐)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생활수단으로, 때로는 애증(愛憎)의 대상으로 인류역사와 함께 존재하여 왔다. 물론 인류 최초의 화폐는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은행권 또는 주화와 같은 돈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 최초의 동전은 어디에서 만들었을까?

 지금의 터키 사데(Sardes)지방에 리디아 왕국(BC 670-546)이 있었는데, 고대왕국 리디아에서 세계최초의 동전이 발행되어, 일렉트럼 코인(ELECTRUM COIN)으로 천연의 금과 은의 합금인 이 코인은 마치 달걀 모양의 타원형으로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화폐로 동물이 각인되었으며 그 형태는 그리이스, 로마로 전파되었다.

당시에 금화를 제조했던 건물은 아직도 작은 시내가 흐르는 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있다. ''라는 이름은 리디아 왕국 때부터 불려졌다.

 1) 사데: 리디아의 수도 (터키명:Sardes-고대 리디아의 수도였던 도시.)

이스탄불(Istanbul)에서 이즈미르(Izmir)까지는 약 565Km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즈미르에서 살리힐리(Salihli)까지는 약 110Km떨어져 있으며 이곳이 바로 사데 마을이 나온다.

사데는 트몰루스 산 기슭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지맥에 자리잡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로 헤르무스 강 유역의 중앙평원이 내려다보이는 페르시아 왕도의 서쪽 종점이었다.

BC 7세기 당시 번성했던 리디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금·화폐를 주조한 최초의 도시이기도 했다. BC 546년경 페르시아에 정복당했으며 아테네, 셀레우코스 왕조, 아탈리아에 차례로 지배를 받다가 BC 133년 로마로 넘어갔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에는 대도시권의 중심지이자 로마령 리디아 지방의 사법권 집행 중심지였다. AD 17년 지진으로 파괴되었으나 재건되어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아나톨리아의 대도시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었다.

고대 리디아의 성채와 리디아인 무덤 유적이 약 1,000개 정도가 남아 있다.

사르디스를 발굴한 결과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술했던 리디아 시대의 도시 유적보다 헬레니즘과 비잔틴 시대의 유적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

지금 현재의 사데

2) 리디아 왕국 (아나톨리아 서부의 고대 국가)

에게 해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가 헤르무스 계곡과 카이스테르 강 유역에 걸쳐 있었다.

BC 7세기 중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 잠시 소아시아를 지배하는 동안, 리디아인들은 서쪽으로 이오니아계 그리스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BC 7세기에 리디아는 킴메르족의 프리지아 파괴로 생긴 공백을 메우고, 전설적인 기게스 왕의 통치 아래 사르디스에 왕조를 세웠다.

왕국은 알리아테스 (BC 619~560) 때 전성기에 이르렀는데, 그는 메디아의 위협을 가볍게 피했고, 킴메리족밀어냈으며, 그의 영역을 이오니아까지 넓혔다.

이 왕국은 알리아테스의 아들 크로이소스 때 더 큰 규모로 성장했으나 키루스가 거느리는 페르시아인들은 리디아 왕조를 극적으로 멸망시켰다(BC 546~540).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리디아인들은 그리스인들과 비슷한 관습을 가졌으며, 상업민족으로서 영구적인 소매상점을 맨 처음 만든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발명한 금속 주화는 그리스인들이 재빨리 도입하여, BC 6세기에 그리스 문명을 변화시킨 상업혁명의 촉매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크로이소스 왕(리디아의 마지막 왕(BC 560~546 재위).

리디아의 왕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크로이소스 왕이다. 그는 리디아의 마지막 왕으로서 관대함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엄청난 부를 가진 왕으로도 유명하다. 크로이소스 이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크로이소스 같은 부자’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크로이소스 왕은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금과 은, 두 가지 다른 재료를 혼합하여 금화를 제조한 인물이다. 그의 엄청난 재산은 주로 세금과 무역으로 인한 수입과 사데 지방에서 수거한 금으로부터 축적한 것이다.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을 침공했으나 뒤이어 페르시아에 정복되었다.

메름나드 왕조의 일원인 크로이소스는 이복 형제와 싸운 뒤 아버지 알리아테스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부왕 겸 최고 사령관으로 행세했다고 한다.

서부 아나톨리아에 있는 에페소스를 비롯한 여러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이오니아 본토의 정복을 끝마쳤다.

 기원전 547년에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지배하에 있던 영토들을 침략하기 시작하면서 소아시아 역시 위협에 놓이게 되었다. 사데 역시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면서 한때는 공포의 분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막강한 군대를 가진 페르시아도 서서히 힘을 잃어가게 되었고, 이어서 등장한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소아시아와 아나톨리아의 지배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기원전 334년에 아나톨리아반도 대부분의 영토가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사데를 통치하고 있던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로부터 퇴출을 맞게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휘하 장군 중 한 사람이었던 셀레우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지 2년 뒤인 BC 321년에 바빌로니아의 총독(Satrap)이 되었다.

셀레우코스(BC 312~64) 사데의 새 통치자 되었다. 그 후 사데는 베르가마(페르가몬 Pergamon ) 왕국의 통치(기원전 180-133)를 받아 오다가 대제국인 로마의 등장으로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비잔틴 제국의 통치를 받다가 14세기초 오스만 투르크의 손으로 넘어 갔다.

오스만 터키 파타히 술탄 메르멧 시기에 발행이 된 주화

사데의 옛 도시에 들어가면 먼저 길 모퉁이에 서있는 장엄한 유대교 회당 건물이 있다.

 기원후 3세기 건물로 여겨지는 이 회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유대교 회당으로 손꼽히고 있다. 바닥은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고, 기둥은 물론 벽들도 대리석 재료를 사용했다.

유대교 회당 바로 옆에는 무너진 도시의 흔적들 속에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터키식 목욕탕인 '하맘Hamam'이 있다. 하맘 옆에는 더운물을 이용해서 사용되었던 수영장의 흔적들도 대부분 원형 그대로 보존 되어져 있다.

 

유대교 회당 옆의 체육관은 붉은색 벽돌로 쌓은 벽들이 일부 남아 있는데,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체육관의 엄청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체육관 내부의 정면에 호화롭게 장식된 대리석 기둥과 관람하는 곳은 경기를 열광적으로 좋아했던 사데 인들의 열정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체육관과 유대교 회당을 지나 사데를 관통하고 있는 주 도로는 기원전 4세기경의 대리석으로 포장 되어졌다. 비잔틴 시대에는 주 도로 주변에 30여 개의 상점들이 있었다고 한다이 도로의 건너편에는 리디아 문명의 양식에 따라 지어진 한 승려의 집이 남아있어 흘러간 비잔틴 시대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유대교 회당의 모자이크

'데모신 키벨라'라는 후에 '아르테미스'로 불려진 여신을 사데 인들은 숭배했다.

아르테미스(Artemis): 로마에서는 아르테미스가 이탈리아 및 라티움의 신인 디아나와 동일시되었다. 아르테미스는 데메테르의 딸이라는 설도 있지만, 가장 일반적으로는 아폴론의 쌍둥이 누이이며 아폴론과 마찬가지로 레토와 제우스의 딸로 간주된다. 아르테미스는 델로스에서 쌍둥이 중 먼저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레토가 아들을 낳는 것을 도왔다

아르테미스는 그리스의 야생 지역과 산악 지역, 즉 아르카디아와 스파르타, 타이게토스 산중에 있는 라코니아, 엘레이아 등지에서 숭배를 받았다.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아르테미스의 성지는 에페소스에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아르테미스가 아시아의 다산(多産)의 여신과 동일시되었다)

 

이 여신을 위하여 사데인들은 화려한 사원과 제단을 건축하였다. 아르테미스여신의 신전은 지금도 고대도시 사데에 남아있어 당시의 웅장했던 사원의 규모를 감상할 수 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주로 알렉산더대왕 시대 이후에 지어졌는데 로마 시대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건물들이 추가로 건축되면서 계속해서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사데의 사원과 제단은 전통적인 양식과는 반대로 에베소, 멘드레스, 마그네시아에 있는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들은 오래 전 아나톨리아 지역에 있었던 종교적인 양식에 따라 지어진 것이다.

사데 신전 기둥

금과 섞여있는 합금 물질들을 용해하는 방법으로 분리시키는 정제소 중앙에는 키벨라 여신에게 바쳐진 제단이 있다. 이 제단은 정제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데의 번영을 말해주는 보석 상점들도 금제품을 만드는 작업실과 가까운 곳에 있다.

 사데 사람들은 무역 전문가에 관하여 얘기할 때, 이 지역에 새로움을 가져다 준 ‘헤로도토스’라는 사람을 먼저 언급한다.

헤로도토스 (BC 484(?) 소아시아 할리카르나소스:지금의 터키 보드룸)~BC 430(~420).출생.

그리스의 역사가로 헤로도토스는 널리 여행을 다녔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대부분 지역을 방랑했고, 이집트로 가서 남쪽의 엘레판티네(아스완)까지 내려갔으며, 리비아, 시리아, 바빌로니아, 엘란 왕국의 수사, 리디아 및 프리지아도 방문했다. 또한 헬레스폰토스 해협(지금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따라 비잔티움까지 올라갔고,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로 가서 북쪽으로는 도나우 강 너머까지, 동쪽으로는 흑해의 북해안을 따라 스키티아까지 여행했으며, 돈 강 유역을 지나 좀더 내륙으로 들어갔다. 이런 여행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서 중요하고 참으로 주목할 만한 한 가지 특징은 호메로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체 역사에 대한 그의 집착과 타고난 재능이다. 이 점에서 그는 재미있는 짤막한 이야기만이 아니라 중요한 역사적 인물의 대화나 연설까지도 서술 속에 삽입했는데, 그가 시작한 이런 방법은 그 후 고대의 역사 기술 과정 전체를 통해 지속되었다.

그때 사데에는 향수들의 가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사데 인들은 향수크림을 발명하여 에게해의 전 지역에 사데 향수크림을 보급시켰다고 한다.

 사데에 들어서게 되면 이 지역에서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금이 얼마나 위력이 있고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한번 상상해 보면서 당시의 사데 인들이 얼마나 호화로운 삶을 누렸는지를 그려보기 바란다.

 그들은 저녁식사를 위해 붉은색 옷을 입고, 상아빛 신발을 신었으며, 보라색 수를 놓은 침대에는 우아함이 넘쳤다고 한다. 연회에 갈 때에는 보라색 옷을 입고, 미를 돋보이게 하는 긴 머리카락은 향수크림으로 단장했다. 또 머리에는 수 백 가지 작은 모양의 황금 장식들로 화려하게 치장을 했다.

사데 체육관

사데는 기독교 역사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고대 도시였다초대교회 당시 사도였던 요한이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가 신약성경 요한계시록 3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사데 지역은 많은 고난을 겪다가 결국 고트족의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출저:다음 미디어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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