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고 미 숙(연구공간 수유+너머)
얼마 전 오랫동안 고대하던 <열하일기> 번역본을 냈다.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공역,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그린비) 2003년에 시작했으니, 꼬박 5년이 걸린 셈이다. 나는 한문학 전공자가 아니다. 이런 주제에 <열하일기>와 이토록 깊은 인연을 맺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솔직히 박사학위를 마칠 때까지 <열하일기>에 대한 관심도 별로 없었다. 내 공부의 폭이 변변찮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기에는 대학의 분과체계도 한몫했다. 다들 아는 바이지만, 대학의 학문은 문(文).사(史).철(哲) 사이의 장벽이 높다. 하여, 그 어디에도 <열하일기>가 ‘통째로’ 소통될 수 있는 공간은 없다. 거기다 문학 안에서도 고전문학과 한문학 사이의 간극 또한 엄연하다. 그러다 보니 명색이 18세기를 전공했음에도 <열하일기>와 마주칠 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열하일기>와 대중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커서
내가 <열하일기>와 인연을 맺게 된 건 아주 이질적인 사건들이 종횡으로 얽힌 탓이다. 대학 밖에서 지식인 공동체를 만든 것, 푸코, 들뢰즈 같은 사유의 새로운 안내자들, 동아시아 중세사상사와 카프카, 보르헤스를 동시에 읽게 된 것 등등. 그 우발적 마주침의 결과가 2003년에 쓴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이었다. 그리고 이후 뜻하지 않게 열하일기 전령사가 되는 행운을 누려왔다. 아마도 한문학 전공자들은 많이들 비웃었을 터이다. 한문공부도 제대로 안한 주제에 감히 조선조 최고의 문장인 열하일기에 대해 떠들고 다니다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같은 ‘얼치기 전령사’가 가능했던 건 열하일기와 대중들 사이의 괴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있어 <열하일기>란 ‘이용후생’이라는 틀에 갇힌 ‘박제된 고전’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제대로 된 번역본 하나 없었으니 말이다. (다산저작의 번역상황에 비하면 참으로 소략한 형편이다. 연암과 다산 저작 사이의 이런 비대칭적 배치에 대해 꼭 한번 짚어볼 생각이다.)
물론 1960년대에 나온 민추본이 있긴 하다. 하지만, 이미 절판된 지 오래다. 하여, 결국 어쭙잖은 사명감으로 열하일기 번역에 착수하게 되었다. 내 깜냥으론 절대 불가능한 작업이라 한문학을 제대로 공부한 김풍기, 길진숙과 공동작업을 추진했다. 원문을 꼼꼼히 새기는 일과 우리 시대 대중(특히 청소년)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 도중에 보리출판사에서 북한판 완역본이 나왔다. 덕분에 완역의 부담에서 자유로워졌다. 하여, 전체 여행의 궤적은 오롯이 살리고, 기사체 형식으로 쓰인 글 중에 배경지식이 많이 필요한 대목은 생략하기로 했다. 대신 이김천씨의 박진감 넘치는 민화와 풍부한 시각자료를 동원하여 여행의 생동감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린비 편집팀이 보여준 정성과 노고는 실로 대단했다. 아무튼 이 책을 시발로 앞으로 더 많은 열하일기 버전들이 쏟아져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가는 지혜를 찾아
번역본에 붙은 제목 그대로 열하일기는 ‘세계 최고의 여행기’다. 여기서 여행은 스쳐 지나가는 파노라마나 이국적인 풍물의 나열이 아니라, 낯설고 이질적인 사건들의 서사다. 이 사건들 속에서 여행이 곧 삶이 되고, 삶이 곧 길이 되는 변환이 일어난다. 고원한 것과 일상적인 것, 익숙한 것과 낯선 것들이 교차하면서 예기치 않은 리듬과 강렬도를 만들어내는 유쾌한 유목일지,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드디어 ‘해외여행자 천만시대’가 도래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는 삶의 모든 국면에서 지속적으로 이주와 이동을 요구받고 있다. 말하자면, 이제 삶은 끊임없이 유동하는 ‘흐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여행의 비전, 이동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지나간 것에 붙들리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두려워하지 않는, 주어진 현재 속에서 ‘자유의 새로운 공간’을 열어가는 지혜, <열하일기>에는 바로 그 정수가 담겨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내가 지난 10여년간 주제넘게(!) <열하일기>의 전령사 역할을 자처해온 이유이기도 하다.
글쓴이 / 고미숙
· 고전평론가
· <연구공간 수유+너머 www.transs.pe.kr> 연구원
· 저서 :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그린비, 2007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 아이세움, 2007
『나비와 전사』, 휴머니스트, 2006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2004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그린비, 2003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