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종교교회 양주삼 총리사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06:59

 

1929년 통합전권위원회

 

1930년 남북감리교회 합동 총회

 

역사자료실, 양주삼 총리사 시대

 

양주삼 총리사

 

양주삼 총리사 

 

 

 

종교교회는 1910년 초대 정춘수 목사가 십자가형 교회를 지어 예배당으로 사용한 이래 세 번째 성전 건축을 하게 된다. 이후 감리교의 역사는 일제의 한국 침략과 지배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면서 민중계몽운동과 같은 민족의식 계발로부터 일제에 대한 무력저항운동에 이르는 다양한 민족운동에 참여하는 형태로 발전한다. 그리고 3.1운동과 종교교회는 그 역사적인 의미를 함께하는데 이는 5대·8대 담임 목사인 오화영 목사가 개신교 대표 중 한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민족 대표 33일 중 1인으로 참여한다. 또한 우리나라 감리교는 1920년대 말까지 미 남-북 교회가 운영하고 있었다. 이 때 국내 사역사 중심해서 단일 감리교회를 이룩하자는 합동 움직임이 활발해 졌으며 그 중심에 종교교회가 있었다.

 

순교자 양주삼 목사

 

1879년1월25일 평남 용강에서 출생했으며 중국 중서학원에서 공부하고 미국 밴더빌트 대학을 졸업하였다.  종교교회 목사와 협성신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30년 남, 북 감리교 통합에 공을 세워 제1대 총리사가 되었다.  1924년 미 남-북 교회 안에 '진흥방침연구회'를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된 미 남-북 교회의 합동 운동은 결국 1930년 12월 2일 '기독교조선감리회'라는 이름의 하나된 한국 감리교회를 탄생시킨다. 단일교단으로 새 시대를 열었던 기독교조선감리회는 창립총회에서 종교교회 4대 목사로 시무하였던 양주삼 목사를 초대 총리사(현재의 감독)로 선출하여 자치 교회 시대를 열며 감리교 역사의 큰 획을 긋는다. 얌주삼 목사는 6.25 때 8월23일에 공산군에게 납북되었다.

 

양주삼 총리사 활동 

 

1930년 양주삼 총리사 취임식

 

제1회 중, 동, 서부연회

 

1934년 제2회 총회 정동교회

 

1935년 부부연회 

 

시베리아, 만주선교 지역연회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