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종교교회 윤치호선생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07:00

 

 

남감리교의 역사

 

1871년 신미양요에 의해 한미수호조약이 체결(조선대표 신현)되고, 이로 인해 푸트공사가 조선에 주재하게 된다. 푸트공사의 통역관으로 있었던 윤치호는 갑신정변에 그의 아버지 윤웅렬이 연루돼 입장이 난처해지자 상해로 망명겸 유학길을 떠나 남감리교회가 운영한 중서서원에 수학했다. 수구파의 승리로 김옥균이 살해되자 절망한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다.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그는 귀국하여 정부요직을 맞게 되었고, 편지를 내 조선에 선교를 요청한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선교 관리감독인 핸드릭스로 하여금 중국에서 활동중인 리드(C.F.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리드 선교사가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며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캠벨 선교사, 배화학당 시작

 

이후 1897년 캠벨부인이 입국하여 1898년 내자동에 배화학당을 시작하였다. 학교내에 예배처소를 세워 정기적인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자교와 종교교회의 시작이며 태동이 되었다. 1900년 켐벨 선교사에 의해 배화학당에 예배드리던 모임이 교회를 독립하게 되어 하나는 자하교 근처에서 시작하여 자교로, 그리고 다른 하나의 모임은 종침교 근처에서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종교교회라 이름하고 지금까지 예배드려오고 있다.

 

1902년 배화학당 학생들

 

1906년 배화학당 선교사와 학생들 

 

1895년의 제물포항

 

윤치호 선생 시대

 

윤치호 가족

 

윤치호 91865-1945)

 

미국 에모리대학 재학 당시의 윤치호

 

1976년 10월 인천 송도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윤치호의 동상

 

윤치호

 

윤치호

 

윤치호

 

윤치호 활동

 

출처 : Joyful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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