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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교회 역사- 역사자료실, 종교교회사>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07:00

<종교교회 역사- 역사자료실, 종교교회사>

 

종교교회사 (1900-2004, 2005 발행)

 

역사자료실

 

역사자료실

 

역사자료실

 

역사자료실

 

역사자료실, 한국감리교회 시작과 윤치호 선생 시대

 

한국감리교회 시작 

 

한반도 선교의 시작은 미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가 1885년 정동제일교회를 세움으로 시작된다. 이어 남감리교의 리드 선교사가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함으로 한국선교가 활성화 되며 복음의 씨가 뿌려진다. 평양대부흥과 백만인 구령운동으로 한반도 부흥의 불씨를 지폈던 리드 선교사의 흔적이 남은 교회가 있다. 그곳이 바로 서울 종로구 도렴동에 있는 종교교회이다. 종교교회역사는 100년을 넘어 한국교회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또한 교회사의 족적을 크게 남기므로 그 의미가 남다른 교회로 한국 개신교에 우뚝 서 있다. 종교교회는 리드 선교사 부부에 의해 세워진 남감리교 최초의 한국 개신교 교회이다. 

 

아펜젤러 선교사(정동교회, 배배학당, 감리교 최초 선교사), 스크랜턴 선교사(상동교회), 메리 스크랜턴(이화학당)

 

 좌옹 윤치호


본관 해평(海平). 호 좌옹(佐翁). 충남 아산(牙山) 출생. 일찍부터 개화운동에 투신, 18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따라 일본에 다녀온 뒤 미국에 건너가 신학문을 배웠다. 1883년 한미수호조약(韓美修好條約) 비준 때 초대 주한(駐韓) 미국공사 L.H.푸트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개화인사라는 이유로 의심을 받게 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3년 동안 공부하며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도가 되었다. 선교사 A.J.앨런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가서 밴더빌트대학과 에모리대학에서 영어·신학·인문사회과학 등을 공부하였다. 1895년 귀국, 총리대신 비서관을 거쳐 학부협판(學部協辦)이 되었으나, 춘생문(春生門)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 그 후 서재필(徐載弼)·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1898년 독립신문사 제2대 사장, 함경도 덕원부윤(德源府尹), 천안군수 등을 지냈다. 1906년 장지연(張志淵) 등과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 회장이 되어 교육사업에 힘썼다. 1910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을 조직한 후 대성학교(大成學校) 교장으로 있다가 11년 105인사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일제강점기 말에 한때 변절, 일본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의원을 지냈다. 저서에 《우스운 소리》, 《영어문법첩경(捷徑)》 등이 있다.  윤치호와 남감리교회, 종교교회 시작에 공헌한 윤치호의 사적을 보면 수구파의 승리로 김옥균이 살해되자 절망한 윤치호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본넬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된다. 윤치호는 동학란으로 야기된 청일전쟁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그는 귀국하여 정부요직을 맞게 되었고, 편지를 내 조선에 선교를 요청한다. 남감리교회 선교본부는 윤치호의 제안을 받아들여 동양선교 관리감독인 핸드릭스로 하여금 중국에서 활동중인 리드(C.F.Reid) 선교사에게 조선을 답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리드 선교사가 1895년 10월 13일 제물포항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남감리교회 선교가 시작되며 지금의 한국은행자리에 선교부를 설치하여 선교활동이 본격화 되었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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