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교회의 초기역사 (사진, 글 출처- http://chungdong.onmam.com)
고종황제로부터 한국에서 의료사업과 교육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데 성공한 미국 감리교 선교부는 곧 한국에서 일할 선교사를 물색한다. 이에 응하여 나선 사람이 바로 의료선교사 스크랜튼과 여성선교사 스크랜튼 대부인, 그리고 아펜젤러이다. 1885년 1월 14일 드류신학교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한국을 향해 떠나는 아펜젤러를 위하여 성대한 환송예배를 올린다. 그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을 떠난 아펜젤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2월 2일 파울러 감독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한국행의 명령을 받은 것이다. 그곳에는 이미 스크랜튼 부부와 스크랜튼 대부인이 와 있었으며, 이들 일행 5인은 1885년 2월 3일에 기선 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다. 한국 선교단 일행은 2월 27일에 일본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일본 주재 선교사 메클레이를 만난다. 그리하여 이들 6인은 3월 5일 도쿄에 있는 메클레이 박사 댁에서 첫 한국선교사회의를 연다. 그런데 한국은 그 전해말 갑신정변의 후유증으로 정국이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한국 선교사 일행은 정국이 진행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다 한국 정세가 다소 호전됨에 따라 이들은 서울을 향해 출발하되 분산하여 가기로 한다. 선발대로 나선 아펜젤러 부부는 3월 23일에 한국을 향해 요코하마를 떠난다. 나카사키를 거쳐 제물포로 가는 배에는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가 함께 타고 있었다. 이들이 탄 배는 우선 부산에 닿았다가 다시 제물포로 향한다. 목적지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 곧 부활절이었다.
(출처- 정동제일교회 홈페이지, http://chungdong.onmam.com)
시병원
의료사업과 교육활동의 허락을 받고 들어 온 세 선교사들은 각기 자기분야에서 일을 시작한다. 스크랜튼은 도착하자마자 우선 장로교의 의사 알렌을 도와 광혜원에서 일했고 9월부터는 자기 집에서 진료활동을 시작한다. 1886년 봄에는 정동에 별도의 건물을 구입하여 병원으로 개조하고 그해 6월 15일에 정식으로 문을 연다. 그는 개원 8개월만에 522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고 이에 감동한 고종황제는 다음해 진료소 이름을 "시(施)병원" 일라 지어준다. 인술을 베푼다는 뜻과 함께 스크랜튼의 한국인 이름인 시란돈의 `시'를 딴 것으로 이해된다.
보구여관
1887년 스크랜튼 대부인에 의해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설립된 최초의 부인 병원인 보구여관 (保球女館)은 하워드 여의사에 이어 1890년 10월 셔우드, 홀 의사 부부가 맡아 운영하면서 크게 발전, 1892년 대중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시약소 (보구여관 동대문 분원)를 개설하고, 1899년 가을 보구여관이 옮겨오면서 1912년 한국 최대의 규모의 부인병원 건물을 완공하게 된다. 이 병원은 동대문 교회와 함께 오늘 날 이화여대 부속 병원으로 발전한다.
벧엘에서의 첫 세례식, 성만찬식
1888년도 연례보고서에서 아펜젤러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 되풀이하여 보고함으로써 그 역사적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다. 곧 벧엘 예배당에서의 첫 예배와 첫 세례식, 그리고 첫 성만찬식이 그것이다. "10월 16일. 일요일에 28세의 젊은 부인인 최씨의 아내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는 물음에 정확하게 대답했다. 아마 그는 이 땅에서 개신교 선교사에게서 첫 세례를 받은 최초의 여성일 것이다. 우리 감리교가 안방에까지 진출하게 되어 기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여성들이 또 있다. 이 첫 열매를 축복하소서."
벧엘예배당
정동제일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하나님의 집 '벧엘예배당' 입니다. 1887년 9월 14일 조선을 방문중이었던 워른감독의 승인하에 아펜젤러 목사는 정동에 사방 8*16 피트의 한옥 한채를 구입하고 이곳을 '벧엘예배당' 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벧엘예배당에서 정동제일교회 최초의 예배가 1887년 10월 9일에 봉헌되었습니다. 이 벧엘예배당이야 말로 한국감리교회의 요람이요, 정동제일교회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또한 이 예배당은 정동제일교회의 뿌리일뿐 아니라 한국감리교회, 나아가 한국기독교와 근대 이후 우리민족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은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시대적 사명을 돌아보게 하고 과거와 현재 미래속에서 생명이 넘치는 전통으로 우리들 가슴 속에 녹아있을 것입니다.
1913년 아펜젤러 목사 사후 일어난 기념사업 중 기념비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아펜젤러 기념 현판과 기념종은 결실을 맺었다.
아펜젤러 기념 현판은 1903년 8월 11일 배재학당 현관에 부착하였다. 1907년 모금을 시작한 기념종은 1913년 결실을 맺었다. 최병헌은 아펜젤러 기념종의 명칭을 “세상을 깨운다.” 혹은 “세상을 깨우친다.”는 뜻으로‘경세종’(警世鍾) 혹은 ‘각세종’(覺世鍾)이라 하였다. 이 종은 지금도 정동제일교회 문화재예배당 종탑에 걸려 있다.
정동교회와 애국청년운동
정동교회 교인의 대부분은 배재학당, 이화학당의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말하자면 청년교회요, 학생교회이다. 따라서 이외의 교회활동은 주로 청년운동에 비중이 주어져 있다. 청년운동은 두 방향으로 전개한다. 하나는 주일운동이요, 또 하나는 엡윗청년회 운동이다. 주일학교 운동은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교육을 목적하고 있는 데 비해, 엡윗청년회 운동은 신앙훈련과 함께 선교와 봉사를 목적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엡윗청년회를 지도하고 프로그램에 직접 개입한 이들이 서재필 박사와 윤치호 등 독립협회의 중심인물이라는 점이다. 서재필과 윤치호는 그들이 추천하는 민족운동의 기반을 민중과 함께 배재학당과 정동교회에 두고 있었다. 서재필은 아펜젤러의 집에 우거하면서 배재학생들에게 강의하며, 학생운동을 지도하고, 윤치호는 관직에 있으면서 배재학생들 위한 강연회를 자주 연다. 그리하여 독립문 기공식이 있은 지 열흘 만인 1896년 11월 30일에 한국 최초의 학생회인 "협성회"가 조직된다. 협성회의 목적은 학생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마음을 굳게 세워 의기와 용맹을 기르고, 학생들 사이의 동창의식을 길러 서로 권면하고 마음과 힘을 합하여 국가에 봉사하며, 배운 대로 전국동포에게 전하는 데 있었다. 독립협회는 정치적인 집단이고, 협성회는 계몽적인 집단이며, 엡윗청년회는 선교집단이다. 지도자들의 성격에 따라 그 관여도에 차이가 있지만 이들에게 공통된 정신적 기초는 신앙 위에 선 민족구국운동이다. 임원들 역시 동일한 인물들의 경우가 많지만, 협성회의 회장, 부회장 등의 임원인 양홍묵, 노병선, 유영석, 문경호 등이 또한 정동교회 엡윗선교회의 회장과 부회장으로 일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출판 인쇄소, 정동 삼문인쇄소
한국 개신교의 모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와 배재, 이화학당이 자리잡고있는 정동 34번지 일원은 기독교 문화 유적지로 한국 신문화와 신교육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기독교 문화지로 지정된 본 교회의 일원은 초대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 부부가 1885년 이곳에 와 처음 머물렀던 보구여관과 시병원 건물이 있었던 곳이며 이 두 건물이 헐린 후 이곳에는 배재식당의 기숙사와 한국 최초의 민간도서관인 종람관이 있어서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인 독립신문과 매일신문이 이 곳에서 발간되었을 뿐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이 인쇄소에서 발간되었고 이 곳 종람관(도서실)독서회에서는 이광수, 김동인, 남궁억, 주요한, 전영택, 심훈 등이 밤낮으로 모여 책을 읽고 토론함으로 한국 최초의 문예지 "백조"가 이 곳에서 발간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광수의 무정, 심훈의 상록수 등이 쓰여진 곳이기도 하다. 특히 이 곳에 있었던 배재학당 기숙사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아관파천 반대, 을사조약 반대에 이어 삼일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우국 충군 애국 지사들의 모임장소이며 대피소이기도 한 한국 독립운동의 발원지이다.
문화재 예배당과 독립운동
정동제일교회의 애국청년운동은 기미년 3.1 독립운동의 핵심으로 거사전인 2월 26일 기독측 인사 10명이 정동제일교회 담임 이필주 목사 사무실에 모여 독립선언문 초안에 동의하고, 이 자리에서 기독교측 민족대표 16명을 확정했으며 또한 3.1 독립운동 당시에는 시위대의 주동력인 배재학생 동원을 김진호 전도사가 이화학생은 하란사 교수가 맡아 주도했으며, 선언문과 격문의 등사와 전달은 정득성 전도사가 전담하는 등 거사의 주거지가 되었습니다.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민족대표 33인의 반열에 현순 목사와 손정도 목사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일을 주도하여 각각 외무차장, 의정원 부의장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의 기초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이화학당 학생이자 정동제일교회에 열심히 출석했던 유관순의 일화는 오늘 대다수의 국민들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태극기를 품에 안고 정동(문화재)예배당의 파이프 오르간 뒤에서 간절하게 기도했던 유관순의 모습에서 신앙과 조국의 운명을 끌어 안았던 정동(문화재)예배당의 기품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독립선언의 이념과 내용, 3.1 운동의 진행 방향 등이 모두 정동예배당에서 시작되었고, 정동제일교회의 정신과 함께 살아 움직였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습니다.
문화재 예배당과 민족중흥
1945년 광복을 여러 국제 정치적 관점에서 조명할 수 있겠지만 그 핵심 내면에는 신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민족을 위해 봉사했던 정동제일교회의 흔적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정동제일교회가 배출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공적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독립과 해방, 그리고 해방 직후의 정국에서 정동(문화재)예배당의 정신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1950년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과 함께 정동예배당의 절반이, 그것도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과 제단이 있던 곳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허망한 이념 때문에 동포의 가슴에 서로 총부리를 겨누어야했던 이 전쟁에서 하나님은 공산주의를 극복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당시 파괴된 정동예배당의 복구 사업은 비단 정동교회 교인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감리교 전체의 과업이었습니다. 피난 생활 후 극심한 궁핍의 상황 속에서도 수축 공사는 한국 감리교회의 지대한 관심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어 1953년도 성탄 축하 예배는 새롭게 복구된 예배당에서 성대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계속된 역사의 격동기인 조국 근대화 속에서도 정동제일교회는 중추적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앙과 교육의 병행을 목적으로 삼는 정동제일교회의 정신은 양적으로 급격하게 확대되는 한국 교회의 전반적 분위기 속에서도 그 기본 정신을 영성운동과 교육과 선교와 봉사라는 측면에서 발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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