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샘골(천곡)교회, 최용신 기념관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2.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22:01

1994년 천곡교회 4번째 성전 모습

 

<상록수공원, 최용신 선생 묘>

상록수공원

 

상록수공원, 샘골 소개비

 

상록수공원

 

상록수공원

 

상록수공원, 최용신 기념관       

 

안산시가 소설 「상록수」의 배경이자 일제 강점기 농촌계몽가였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중인 「최용신기념관」이 착공 1년여만에 드디어 완공됐다. 안산시는 지난해 6월 상록구 본오동 상록수 공원(1만2천328㎡)내에 최용신기념관 건립공사에 들어가 지난 7일 기념관 설치공사를 마쳤다고 4일 밝혔다. 총 7억1천만원이 투입된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462.8㎡(140평)규모로, 지상1층에 최 선생 활동 당시의 강습소인 「샘골강습소」를 원형 복원했으며 지하에 교육과 전시 등을 할 수 있도록 지어졌다. 시는 8월까지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는 최용신묘역, 기념비, 표석 등 12점과 안내표지판 4개소에 대하여도 일제히 정비하고, 9월까지  상록수 공원을 산뜻하게 단장해 앞으로 안산시 문화관광 유적지로서 널리 활용할 계획이다.  한편 기념관 건립에 앞서 지난 2004년 9월 최 선생의 제자 홍석필(84.안산시 본오동)씨가 『최용신 선생의 뜻과 얼을 기리고 청소년과 노인들이 공부하며 쉴 수 있는 강습소를 다시 만들어 달라』며 자신의 집을 팔아 마련한 1억5천만원을 안산시에 기탁한 바 있다. 홍씨는 1932년 최 선생이 안산시 본오동 샘골마을로 내려와 만든 강습소 에서 4년여 동안 학업을 한 강습소 2회 졸업생이다.

 

추모비       

 

최용신이 죽은지(1935년 1월 23일) 72년이 지난 오늘 2007년도의 샘골동산에는 지난 1998년에 새로 지으진 샘골(천곡)교회가 있다. 그 앞에는 두 개의 기념비가 조용히 서있는데, 하나는 루씨 동창회와 천곡교회가 합동으로 1974년 11월에 세웠다. 이 기념비에는 유달영 작사, 이홍열 작곡의 “최용신을 기리는 노래”를 적고 있다. “일제 하 처절하던 민족 수난기에 나라의 광복 위해 모든 것 버리고 농촌 계몽의 선구로 불사조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생명을 바쳤네 영원히 역사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처녀 싱그러운 처녀 민중의 가슴속에 뿌리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추모비 최용신 선생

 

최용신의 묘

 

최용신의 묘

 

최용신(좌)과 약혼자 김학준 장로의 묘(우)

 

(지금은 없어진) 강습소가 잘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강습소 바로 옆에 마련된  최용신 선생의 묘소, 소박한 최용신 선생 묘소 오른쪽에는 1926년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였던 故 김학준 교수(장로)의  묘가 있다.(최용신 선생 곁에 묻히기를 ...김학준 교수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1935년 6월 최용신선생을 모델로 한 沈薰의 소설. 常綠樹(여주인공 채영신으로)발표, 1936년 YWCA는 비석을 세워 Y정신의 실천자,  농촌사업가의 산 표본으로서의 최용신선생을 기리고  선생의 사업과 정신을 계속하기로 총회에서 결정. 1936년 9월 16일 오전 8시 상록수 저자 심훈 서울대병원에서 36세의 일기로 운명(병명 장티프스) 1964년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용신봉사상(容信奉仕賞) 제정, 1974년 11월 최용신 기념비 제막, 1975년 3월 11일 약혼자 김학준교수 타계 

 

최용신(좌)과 약혼자 김학준 장로의 묘(우) 

 

최용신(좌)과 약혼자 김학준 장로의 묘(우)

 

최용신의 묘

 

1934년 해가 저물어 가면서 그녀의 병은 극도로 악화되어 수원도립병원에 입원하였는데 그녀의 병은 “장중첩증”이었다고 한다. 창자가 창자 속으로 꼬여 들어간 것이었다. 2차에 걸친 수술이 시도되었으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화농성 복막염까지 겹치게 되었다. 이는 극도의 과로와 영양부족 탓인데다 치료를 미워왔기 때문이었다. 1935년 1월 22일 아침, 학원 이사 중에 한 사람인 안홍팔 씨의 손을 잡고 힘겨운 말문을 열었다. “...만일 제가 떠난 후에라도 학원만은 잘 살려서 여러분의 손으로 훌륭한 학원을 만들어 주세요... 제가 약혼한 지 올해가 10년이어요. 올 4월부터는 두 사람이 힘을 모아서 농촌을 위해 일하고자 곧게 약속했지요. 그런데 이대로 떠나니 그 사람에게 대단히 미안합니다... 제가 늙으신 어머니보다 먼저 떠난다면야 그것도 죄송한 일이고...  내가 죽은 후에는 학원이 잘 보이는 곳에 묻어주세요... 교회와 여러 이웃 친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은혜를 갚지 못하고 먼저 가서 죄송합니다... 아무에게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세요...” 이렇게 띄엄띄엄 한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말을 끝낸 뒤 그녀는 가끔씩 헛소리를 하기도 하였다.가끔씩 “주여! 주여!”라고 조용히 외피기도 하였다. 1935년 1월 23일 오전 0시 20분 그녀의 얼굴에 만면의 희색이 돌더니 긴 한숨을 몰아 쉬고는 고요히 영원의 깊은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그녀는 그렇게 25년 6개월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었다. 장례식은 천곡 마을장으로 학원 마당에서 온 교우와 학원의 학생, 학부형 그리고 친지들이 운집한 가운데 당시 천곡교회 전재풍 목사의 주례로 장명덕 전도사의 기도, 어린 학생들의 조가 및 조사, YWCA의 대표 황에스더 여사의 조사 순으로 이어졌다. 장례식이 마칠 무렵 현해탄을 건너 급히 달려온 약혼자 김학준 씨가 도착,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다 못 다한 사랑을 나누기라도 하려는 듯 입고 온 외투를 그녀의 관 위에 고이 덮어 주위를 더욱 숙연케 하였다. 막무가내로 관에 매달려 울부짖는 어린 제자들을 겨우 뜯어말리고서야 그녀의 시신은 그녀의 사랑과 봉사와 희생이 아로새겨진 천곡학원이 마주 보이는 산, 언덕 공동묘지에 묻혀진 것이다. 

(글 출처- 1.홍석창 목사님의 저서 <상록수 농촌 사랑>, <수원지방의 발자취- 수원지방 70년 약사>와 목사님의 미공개 논문 등   2. 2001년 YWCA주관 전국대학생 여성포럼에서 양 미강 목사 발표한 내용을 편집한 것, 샘골교회 홈페이지) 

 

묘앞에 세워진 유훈비

 

김학준 장로의 묘

 

최용신 선생 묘소 오른쪽에는 1926년 최용신 선생과 약혼자 였던 故 김학준 교수(장로)의  묘가 있다.(최용신 선생 곁에 묻히기를 ...김학준 교수의 유언에 따른것이다.

 

최용신 유훈비      

 

심훈이 '상록수'를 쓰게 된 동기


1935년 동아일보 창간 15주년을 맞이하여 장편소설 공모하였다. 상금 500원을 걸고(당시 소 한 마리 값 60원) '조선농어촌문화'에 기여 할 수 있는 소설을 모집한 것이다. 당시 심훈은 부모님이 낙향하여 충남 당진군 송악면 부곡리에 살고 있었으며 그곳에서 장질 심재영이 청년 십 여명 과 농촌계몽에 앞장서서 인근 마을까지 활동하고 있었고, 이때 샘골의 최용신의 부음 기사가 신문에 보도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회 장으로 치루어 졌으며 그녀의 업적이 소개되고 ,영원불멸의 명주, 무산아동의 자모, 선각자중의 선각자라는 글로 신문 첫줄을 장식하였다. 심훈은 샘골을 세 차례 정도 방문하여 자세히 기록 한 후 '상록수'를 썼다. 1935년 5월 4일 쓰기 시작하여 6월 26일에 탈고하고 그 해 9월 10일 석간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2월 15일 까지 127회에 걸쳐 연재 되었다. 1936년 영화화하려 했으나 일제 당국의 불허로 실패. 같은 해 8월 28일 한성도서 주식회사에 의해 책으로 발간되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책의 표지 그림은 청전 이상범(동아일보 전속 화가) 이 그렸고 서문은 벽초 홍명희가 맡았다. 1936년 소설을 영화화하려는 노력은 계속되고 9월 쟝티프스에 걸려 고열로 사망(36세)하였다. 소설'상록수' 채영신의 모델  최용신, 박동혁의 모델 장질 심재영과 약혼자 김학준, 청석골의 모델  샘골

(출처- 민족저항 시인 '상록수'의 작가 沈熏의 문학과 생애-申庚林 編著에서 발췌)

출처 : Joyful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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