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강화 교산교회, 김상임 전도사 5.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22:28

강화 기독교 선교역사


보편적으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그러했지만 특히 강화의 경우에는 복음의 수용과 전파과정에서 강화 토착인들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외지의 선교사나 전도인들이 불모지 강화에 나타나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설립되기보다는, 강화 사람이 외지에 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향을 복음화시키려는 의지에서 복음 전도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감리교회의 강화 선교 개척


한국 교회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기독교 복음이 만나서 이루어진 역사다. 민족의 역사 전통과 교회의 역사 전통이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역사 전통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기독교(개신교) 복음을 받아들인 19세기 말은 민족의 시련과 수난기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이러한 민족의 시련과 수난의 역사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강화에서 기독교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강화 기독교(개신교) 복음 선교는 거의 같은 시기에 성공회와 감리교에 의해 개척되었다.

성공회의 강화 선교는 1893년 7월에 워너 신부가 갑곶나루에 거처를 마련하고 고아들을 모아 가르친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강화에 있던 조선수사해방학당 교수로 영국인 교관들이 와서 활동하고 있어서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이 관청과 주민들로부터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20여년전, 신미양요를 통해 미국인들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던 강화 사람들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강화의 감리교 선교는 선교사들이 아닌, 토착 교인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도 가오하의 정치. 문화.행정 중심이었던 강화읍에서 시작되지 않고 강화 변두리, 서북해안 작은 마을 시루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강화 선교는 급속한 속도로 강화 전역에 확산되었으니, 강화 초기 교인들의 적극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활동의 결과였다.

 


1. 미감리회의 강화 선교

 

<江都誌>는 강화 감리교회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西曆 一千百九十八年에 合衆國 宣敎師 趙元時君이 自甲串津으로 至南門하니 守門將이 抗拒不人하는지라 回程하야 本都 東北沿岸으로 船行하야 到西寺面 橋項洞하야 金氏家族의게 傳道하야 該地에 敎會堂을 創立하고 敎務를 梢梢壙張하니 東으로 月串, 南으로 砂器里, 東幕, 西으로 注文島까지 敎旗가 遍揚하니라"

 

연도나 구체적 사건 서술은 교정 되어야 하지만 이 진술은 강화 감리교회 시작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첫째, 미감리회의 존스 선교사가 처음에는 갑곶을 통해 강화읍으로 바로 들어가려 했으나 지방 행정당국의 저지를 받고 실패 했다는점, 둘째, 결국 강화 선교는 강화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한 서사면 교항동에서 시작되어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확산되었다는 점, 셋째, 교항동의 '김씨 가족'으로 불리는 토착 교인의 개종과 입교로 강화 선교가 가능했다는 점 등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강화 선교는 선교사들의 입성과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강화 북부 토착 교인의 입교와 전도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 선교의 시작이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러한 대표적인 예를 강화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같은 사실은 선교사들의 강화 접근 실패 과정과 함께 강화 토착 교인 출현 과정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강화를 한국성공회의 '이오나'로 삼고자 강화에 강력한 선교단을 파송했던 영국성공회는 이미 1893년 봄에 코프 주교가 강화를 방문하고 선교가능성을 파악한 후 그해 7월에 워너 신부를 갑곶나루에 정착시켰다.

같은 무렵 미감리회에서도 강화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며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는 뱃길 중에 강화를 방문하였다. 특히 1892년 8월에 열린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연회에서 인천(제물포)구역 담임으로 임명받고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서해안 선교에 착수한 존스(G.H.Jones)는 이미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에 의해 마련된 선교 터전을 바탕으로 하여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 과정에서 강화는 그의 강력한 선교개척 희망지역이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튼은 이미 1892년 말 이전에 존스가 강화 여행을 시도 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스크랜튼이 본국에 보낸 1892년 12월 21일자 서한이다.  "존스 형제는 최근에 제물포로 여행하면서 강화에 들렀습니다. 강화는 [한]강어구에 있는 큰 섬입니다. 그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강화는 80평방마일 되는 곳에 인구 7만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은 선교사들에겐 처녀지(Virgin Soil)입니다." 그렇다면 존스의 1차 강화방문은 1892년 12월 21일 이전에 이루어 졌다는 말이다. 스크랜튼이 '최근에'(recently)라는 말을 쓴 것으로 미루어 1892년 11-12월 경에 이 여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존스의 여행보고를 바탕으로 해서 스크래는은 미국 선교본부에 1893년 선교보고 상황을 써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전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스크랜튼이 말한 '발판'(a Foothold)이 정확하게 무었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선교기지 확보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나름대로 강화선교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담보를 얻었음을 암시한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 '발판'이 바로 서사면의 '토착 교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존스는 이미 1892년 12월 이전에 강화 여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여행이 곧바로 강화선교와 연결되었다는 흔적은 찻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앞서 <江都誌>에서 언급했던 바, "趙元時君이 自甲串津으로 至南門하니 守門將이 抗拒不人하는지라"는 선교사 입성 거절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스 자신이 1910년에 미감리회 한국선교15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한국 선교 상황>(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 [미감리회]선교사가 제물포 사업을 개척하기 위해 내려갔던 그해에, 그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기 위해 강화를 방문했는데, 강화는 인구 5만 명으로 한강 삼각지, 제물포와 서울 중간에 위치한 큰 섬입니다. 그는 어느 날 갑곶이라 불리는 곳에 상륙하여 3마일 정도 떨어진 도성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성문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이 그를 정지시키고 최고 책임자(강화 유수)의 허락없이는 들여보낼 수 없다고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안으로 들어가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청원서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는 청원서를 손에 들고 나와서, '나는 당신네 서양 선교사들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당신들이 가져 온 것을 원하지 않소. 당신이 이 섬을 빨리 떠나면 빨리 떠날수록 우리는 좋을 것이며, 당신이 이 섬을 빨리 떠나면 빨리 떠날수록 당신한테도 좋을 것이요.' 하며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거부당한 선교사는 한강으로 다시 돌아와 이교도가 운영하는 여관에서 외롭게 이틀 낮 밤을 지낸 후 제물포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그 선교사'는 존스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존스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갑곶을 통해 강화에 상륙해서 남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강화 유수가 직접나와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갑곶나루 여관에서 이틀간 묵다가 제물포로 철수하였다. 그렇다면 존스의 첫 강화 접근 시도는 실패로 끝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스크랜튼이 존스의 강화 여행 보고를 하면서, "강화에 '발판'을 얻었다"라고 진술한 근거는 무었일까? 결국 이 '발판'은 앞서 <江都誌>에서 증언한 서사면 교향동에 있었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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