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지순례이야기

[스크랩] 강화 교산교회, 김상임 전도사 6.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22:27

2. 강화의 첫 세례교인


 <江都誌>는 존스가 강화 남문에서 입성을 시도하다가 거절당한 후 다시 뱃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강화도 서북부에 있는 '서사면 교항동'으로 가서 '김씨 집안'에 전도하여 선교 기반을 마련했다고 증언하였다. 이같은 사실을 증언하는 다른 자료가 있다. 1919년 7월, 존스가 별세했을 때 그의 생애를 기술한 기사가 <基督申報>에 실렸는데, 그 속에 강화 선교에 대한 증언이 있다. 

 "뎌간에 특별한 일은 죠목사가 강화셩에 드러가서 젼도하려고 셩 남문 밧게 안져셔 강화류수의계 통지한즉 류수가 완고하고 거만된 마음으로 드리지 아니한즉 조목사가 온유한 태도로 겸손히 물너가 셩밧길로 도라 강화군 셔사동리에 당도한즉 외인의 비방함과 핍박이 심함으로 그 동리에 쳐음 밋은 형제 몃 분을 다리고 배를 타고 바다 우에셔 세레를 베프럿스며"  이 기록은 존스가 강화성 남문에서 강화 유수에게 배척당한 일과 서사면 교항에 상륙하였다가 배척받고 그곳 '토착교인'을 배로 불러내 세례를 베푼 일을 시차없이 연결시키고 있으나 두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선 앞에서 1910년 존스 자신이 쓴 글에서, 존스는 남문에서 배척받은 후 갑곶 여관에서 이틀 머물다가 제물포로 철수하였다고 진술하고, 이어서 "토착 전도인을 한명 보내 복음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존스가 곧바로 서사면으로 올라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서사면을 방문한 것도 존스가 무작위로 그 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세례받기를 원하는 교인이 있어 그의 요청을 받고 서사면을 방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스의 서사면 방문을 이끌어 낸 '토착교인'이 내리교회 역사에서 나타난 '이승환'이다. 다시 신홍식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러나 [계원] 五十人中에 信者 二人을 엇엇스니 一人은 리승환이라 조원시氏가 江華島에 傳道하랴고 數次 가 보앗스나 傳道할 기틀을 엇지 못한 것은 丙寅洋擾에 法國 美國 兵船이 드러와 接戰하든 곳이라 西洋人을 보면 원수로 녁이고 돌로 치려하며 迎接지 아니하니 傳道할 수 업게 되엿는대 이 때 맛참 리승환氏가 自己 故鄕 江華 西社로 도라가니 그로 인연하여 江華에 傳道門이 열니며 그러케 굿세든 人心이 漸漸 감화되여 全都에 敎가 傳派되엿더라"  인천 제물포 교회(현 내리교회)초기 전도인 김기범, 이명숙이 인천 사람들의 (교회에 대해)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계를 조직했다가 깨지는 바람에 오히려 곤경에 처했는데, 다행히 계원 50명 가운데 교인 두 명을 건질 수 있었고 그 중 한 명이 강화도 서사 출신 이승환이었던 것이다.

 

이승환은 인천에서 처음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강화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으니, 스크랜튼이 언급한 강화 선교의 '발판'은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초부터 인천을 거점으로 하여 서해안 지역 여성 선교를 주관했던 헤스(M.Hess)는 '강화의 첫 세례교인'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제물포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자기 직업 때문에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몇 달 지난 후 존스 박사는 강화 북부에 있는 서사로 와서 죽을 날이 멀지 않은 한 노파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노파의 아들이 바로 술집 주인이었는데, 그는 은밀하게 술집을 정리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보다 건전한 방법인 농사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아들은 늙은 어머니에게 성경 말씀을 들려 주었고 이번에 세례 요청을 한 것도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지, 그 자신은 아직도 세례를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난폭한 반대로 tk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 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리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승환의 직업이 술장수였다는 것과, 그가 제물포에서 믿음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직업상 세례를 받지 못하였고, 직업을 정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우선 늙은 어머니에게 전도하여 믿게 한 후,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존스에게 요청하여 존스의 서사 방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때에도 서사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존스가 마을에 상륙하여 세례를 베풀지 못하고 밤중에 이승환이 어머니를 업고 교항마을을 거쳐 뒤펄개를 지나 존스가 있는 배에 올라 세례예식이 베풀어졌다는 사실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강화의 '선상세례'이고, 강화의 첫 세례교인은 이렇게 해서 배출되었다. 해스보다 앞서 인천 선교를 개척했던 밀러는 또 다른 글에서 강화의 처음 세례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존스 박사는 강화 선교사업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성공하리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첫번째로 세례받은 인물은 나이 많은 여인이었는데 그녀의 아들은 제물포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녀도 아들에게서 복음을 듣고 세례받기를 열망했다. 섬 주민들 사이에등에 업고 긴 뻘을 건너 배에 올랐고 거기에서 달빛에 예문을 비춰 읽는 가운데 여인이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존스 박사측 행위를 보고 한국인들이 감명받아 그들은 존스 박사에게 마을로 들어와 대화를 나누자는 요청을 하였다. 이 방문으로 김씨와 그의 가족 전체가 개종하게 되었다."  이 자료는 서사 주민들의 처음 반응을 보다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그 반대의 주역이었으나 후에 개종하여 가족 전체가 교인이 된 '김씨'라는 양반에 대한 흥미있는 증언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반 '김씨'는 바로 <江都誌>에서 언급되었던 서사면 교항동의 '김씨가족'을 의미하며 이승환과 함께 서사면 복음선교의 씨앗이 된 김상임(金商壬)을 말한다. 김상임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 시루미 신앙 공동체


제물포에서 믿기 시작하여 고향인 서사면 증산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존스에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과연 강화 선교의 '발판'이었다. 존스는 아직은 선교사에게 문을 열지 않는 강화에 제물포교인 이명숙을 전도인으로 삼아 파송하였으며,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강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바로 이것이 '서사교회'(西寺敎會), '교항교회'(橋項敎會),'교산교회'(橋山敎會),'양사중앙교회'(兩寺中央敎會),등으로 불리다가 현재 '강화교산교회'(江華橋山敎會)로 불리는 강화 첫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1917년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橋山敎會沿革>은 교회 시작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一八九四年 兄弟 李城完氏와 그의 母親이 主의 福音을 듯고 믿어 兩寺面 橋項里 뒷바다에서 宣敎師 趙元時氏에게 洗禮를 받음으로 福音의 傳播되기 始作하니라...仝年 長老 趙元時氏의 派送으로 仁川敎會 勸師 李明淑氏가 本郡 증산里에 往來하여 李聖完氏 自宅에서 四五人 兄弟 姉妹가 禮拜하다. 仝年 六月에 至하여 男女敎友가 五十餘名이 되니라"  

 

 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李聖完'은 지금까지 살펴본 '이승환'을 의미하며, 강화의 첫 신앙공동체가 이승환의 자택이 있는 증산(시루뫼) 마을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혀준다. 그러나 '1894년'으로 표기된 것은 수정을 요한다. 다른 자료는 이미 1893년에 증산에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우선 1893년-1894년 당시 한국 감리교 선교를 관장하고 있던 스크랜튼의 증언이다. 그는 1893년 12월 12일, 본국 선교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존스와 함께 강화에 다녀온 결과를 보고하였다. 

 

 "강화에서는 연회 이전에 한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 [사업] 개척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하루 밤낮을 지냈으며 그 주변 이웃들과도 만났는데, 그들 중 몇 명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곳은 시루미 북쪽에 있습니다.  남쪽 항구에 있는 여관 주인은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인데, 그는 이번에 학습인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기도회를 가졌고 조사를 그 곳에 두어 그를 더 가르치도록 조처하였습니다. 이 섬을 여행하는데 모든 시간을 바칠 수 있는 조사가 필요한데, 현재 우리에겐 1894년도에 이러한 조사를 채용할 재정이 없습니다." 이 자료를 통해 1893년 8월 31일에 열린 한국 선교회 연회 이전에 이미 강화 '시루미'(증산)에서 개종하고 세례받은 한 가족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강화읍 남문으로 통하는 갑곶나루의 여관집 주인이 학습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천과 강화 선교 책임자 존스도 1894년 선교 보고에서 전 해의 사업을 요약하는 중에, "제물포 사업은 아직은 두 거점에서 사업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데 제물포항과 강화도에 있는 시리미가 그 거점입니다"라고 보고한 것도 '시루미' 개척이 1893년에 이루어졌음을 증언하는 자료다. 또한 존스 부인의 1894년 보고는 '시루미'사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제물포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강화라는 섬의 시루미에서 작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봄에 그곳 마을을 세차례 여행하였으며 헬렌은 작년 한해동안 여섯차례 방문했습니다. 그곳 사업은 아주 고무적이며 인근 마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세례받은 여인이 6명, 아동 세례 5명이 있는데 이들이 비록 무식한 부류 사람들이나 자신들에게 비추인 빛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시루미에 강력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존스 부인과 백헬렌이 주도하는 여성 선교사가 큰 성과를 얻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답보상태에 빠진 인천 선교 상황에서 방물장수로 위장 침투해 들어가 인천 선교의 전기를 마련했던 전도부인 백헬렌은 강화에도 1년에 여섯 차례 여행하며 복음을 전해 1894년 이전에 여성 세례교인 여섯 명을 얻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존스 부인의 1895년 보고는 지속적인 '시루미' 사업의 내용을 증언한다. "사업을 개척한 두 선교 거점이 있으니, 제물포와 강화의 시루미입니다... 시루미에서는 한 여인이 교적부에서 제명되었으나 다른 한 여인이 추가되어 교인수는 처음과 변동없습니다. 지난 1년동안 저는 시루미를 방문할 수 없었지만 제 조사인 헬렌은 다섯 번 여행하여 모두 10주간 그곳에 머물면서 교인들을 가르치고 다른 마을들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헬렌의 보고로는 그곳 사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들을 종합해 볼 때 시루미 사업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세례고인이 이승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 인천 전도부인 백헬렌의 열성적 전도활동 등에서 시루미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즉 존스 부인의 표현대로 시루미 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무식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으나 신앙적 열정에 사로잡힌 토착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강화 감리교는 당시 사회 상황 속에서 소외당하고 억눌려 살아온 '민중'들과 접촉하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강화선교의 '발판'이 된 이승환의 직업(술집 주인), 학습을 자청한 갑곶나루 여관집 주인의 신분과 존스 부인이 '무식한 부루'라고 표현한 처음 여성 세례교인들의 신분 배경에서 감리교 선교의 민중지향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는 강화의 지식인 계층, 양반과 지방 토호를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성공회의 선교 방법과 대비를 이룬다. 그렇다고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민중 계층에만 제한되었다고 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무식자와 유식자,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공존,공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모든 계층, 모든 부류의 참여와 나눔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를 구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교회는 민중의 참여와 함께 지식인, 지도급 인사들의 참여를 요구한다. 강화 감리교회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균형있는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그러한 균형과 조화는 이미 서사면 최초 감리교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났으니, 그 계기는 교항동의 유력한 양반 김상임과 그의 가족들의 개종을 통해 이루어졌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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