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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사다(Massada)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1. 22:41

마사다(Massada)

마사다는 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이며, 사해의 서쪽 약 4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주위의 유대 광야의 산들과는 고립된, 높이 434m의 이 천혜의 절벽 요새는 정상이 길이 620m, 가장 넓은 곳의 폭이 250m, 평균 120m인 평지를 이루고 있다. 서기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Josephus)는 그의 저서 "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 를 통하여 마사다에 대한 아주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는 서기 66년 유대인들이 로마제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려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갈릴리 지방의 유대군 지휘관이었으나 나중에 로마군에 넘어간 사람이다. 그는 비록 조국에 등을 돌렸지만, 어느 역사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마사다 전투를 기록으로 남겼다. 요세프스는 마음을 움직이는 글로, 마사다에서 유대인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다 죽어간 서기 73년의 어느 봄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마사다 최후의 날

 이 바위산을 처음 요새로 만든 이는 대제사장 요나단 (Jonathan : 주전 160 ~ 143) 이었다. 그 후 유대왕 헤롯 (Herodes) 이 주전 35년에 여기에 왕궁을 짓고 성벽을 둘러 난공 불락의 요새로 만들었다. 그 무렵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로마 집정관 안토니우스에게 유대 왕국을 그녀에게 달라고 졸라대고 있었다. 로마에 기대고 있던 헤롯은 유대인의 반란과 로마의 배신을 두려위하여 마사다를 유사시의 피난처로 만들었던 것이다.

헤롯이 죽은 뒤, 서기 66년 유대전쟁이 일어나고 , 이 전쟁이 로마의 월등한 군사력으로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함락과 더불어 성전의 파괴로 끝을 맺게 되자 이에 굴복하지 않은 960여명의 "열심당원" 이라 불리는 극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이미 66년에 당시 소수의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던 마사다를 점령하며 저장된 물과 식량, 무기를 이용하여 로마에 대항하였다.

 마사다에는 엄청난 옥수수와 콩, 대추야자가 쌓여 있었고, 포도주와 기름도 넉넉했다. 과일들은 신선했고 잘 익어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메마른 날씨와 먼지가 섞이지 않은 공기 덕분에 100년이 넘도록 썩지 않고 잘 갈무리되어 있었다. 헤롯왕이 만든 물탱크에는 물이 가득했으며, 무기도 1만명이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만큼 마련되어 있었다.

 사막과 다름없는 들판을 건너오기에 지친 로마군은, 가파른 벼랑 위에서 내려다 보며 활을 쏘아대는 반란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성안에는 식량과 무기가 얼마든지 있었으므로, 마사다야말로 열심당원들이 로마군과 맞서 싸우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요새였다.

 마사다에 모여든 유대인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합쳐 960여명. 로마제국으로 볼 때는 한줌에 지나지 않는 수였다. 그러나 로마 황제는 이들을 쳐부수도록 엄명을 내렸다. 마사다는 끊임없이 로마군 진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기지로 쓰였으며, 그것은 꺼져가는 반란의 불길을 또다시 타오르게 할 염려가 있었다. 또한 로마의 총사령관 티투스(Titus)는 장차 아라비아 광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예상한 광야 전투의 훈련을 목적으로, 서기 72년 실바(Silva) 장군으로 하여금 10군단을 이끌고 이곳에 대한 대규모의 포위 작전을 실시하게 하였다.

 그는 9천에 가까운 군대와 함께 6천이 넘는 유대인 전쟁 포로들을 일꾼으로 이끌고 왔다. 실바는 마사다를 빙 둘러 벽을 쌓고 곳곳에 망루를 세웠다. 그러나 반란군은 무기와 식량이 넉넉했으므로 아무리 오래 포위하고 있어 보았자 지치는 쪽은 로마군 이었다. 로마군은 먼데서 물을 길어 왔고, 보급품도 유대광야 너머에서 날라와야 했다.

 실바는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에 공격하기로 했다. 마사다 서쪽 벼랑에는 희고 넓은 바위가 툭 튀어 나와 있었다. 실바는 '흰 곶'이라고 불리운 그 바위까지 흙과 돌을 다져 비탈을 쌓도록 했다. 비탈 길이는 200 m 로 꼭대기가 마사다 성벽보다 겨우 20  m 아래였다.

 로마군은 비탈 위로 공성탑을 만들어 올렸다. 철판을 두른 이 탑에서 로마군 들이 활을 쏘며 엄호하는 사이 다른 병사들이 공성퇴(Battening Ram)를 끌어 올렸다. 세계를 정복한 로마군의 공성퇴는 무서웠다. 공성퇴에서 날아간 20 ㎏ 이 넘는 돌들은 끝내 마사다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유대인들은 서둘러 무너진 성벽에 또다른 벽을 쌓았다. 그들은 나무 대들보들을 두겹으로 구불구불 쌓고 그 안에 흙을 넣어 돌이 날아와도 무너지지 않도록 했다. 그러자 실바는 '미사일 공격'으로 바꿨다. 불화살이 유성처럼 날아가 박히자 나무벽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고 말았다.

 실바는 기쁨에 넘쳐 그의 진지로 물러났다. 그는 다음날 아침 구름다리를 놓고 성안으로 쳐 들어 가기로 했다. 로마 병정들은 유대인들이 한 명이라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밤새 물샐틈 없이 지켰다. 그날밤 유대인들의 지도자 엘리에제르 벤 야이르(Eliezer ben Yair)는 남자들을 모두 한 군데 불러 모았다. 날이 밝으면 마사다는 무너질 것이다. 그는 비장하게 마지막 연설을 했다.

 "형제들이여, 우리는 로마와 맞서 싸운 마지막 용사들이다. 어둠이 물러가면 우리는 저들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자유로우므로 부끄럽지 않게 죽을 기회가 있다. 그것은, 우리 아내와 자식들이 치욕을 당하고 노예로 끌려가기 전에 그들을 우리 손으로 죽이고, 우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다. 자! 노예가 되기보다 자유란 이름의 수의(壽衣)를 입자."

 벤 야이르의 말이 다 끝나자 어떤 이들은 기꺼이 그 말을 따르려 했지만, 마음 약한 사람들은 아내와 자식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벤 야이르는 그들을 엄하게 꾸짖었다. "부끄럽지도 않소? 우리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길이요. 우리가 여기 모여 로마군에 맞선 뒤로 그들은 죄없는 유대인들을 닥치는대로 죽였소. 다메섹에서는 일만 팔 천명이 처자식과 함께 목이 잘렸고, 애굽에서는 육만 명이 죽었소. 우리는 험준한 요새와 넉넉한 식량을 가지고도 이 싸움에 졌소. 지금 로마군은 우리를 살려 주겠다고 꼬이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가 죽기를 바라지 않소. 우리를 사로잡아 노예로 부리고, 우리 앞에서 성경을 찢으며 승리를 노래하고 싶어 하오. 우리는 용기로써 로마에 반란을 일으켰소. 아직도 우리 손은 자유롭고, 이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소.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그 용기로 부끄럽지 않은 죽음을 맞읍시다. 우리들의 비겁한 패배가 저들의 승리를 더욱 영광스럽게 해서는 안되오.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죽음에 경탄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성을 불질러 로마인들이 아무것도 가질 수 없게 해야 하오. 그러나 식량 창고 한두 군데는 남겨 놓으시오. 우리가 먹을 것이 떨어져 죽었다고 보여서는 안되오."

 남자들은 경건한 얼굴로 흩어져 갔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아내를 부드럽게 껴안고 아이들을 감싸고 눈물이 그득한 채 긴긴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나서 아내와 아이들을 그들의 손으로 죽였다. 남자들은 다시 한 곳에 모였다. 제비를 뽑아 열 사람을 가려내고,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식구들의 주검 옆에 눕자, 열 사람은 다시 제비를 뽑아 한 사람을 골랐다. 그 마지막 한 사람이 나머지 아홉사람을 죽였다. 그는 주검을 둘러보았다. 모두 숨이 끊어 진 것을 보고 성안에 불을 놓았다. 그는 이윽고 자신의 몸에 깊숙이 칼을 찔렀다. 서기 73년 4월 15일 저녁, 죽은 사람은 모두 960명이었다.

 다음날 아침 로마군은 단단히 무장을 갖추고 성벽에 나무다리를 걸쳐 놓았다. 그러나 적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성은 무서운 고요함에 쌓여 있었다. 타다 남은 불길과 즐비한 주검들이 그들을 맞았다. 로마군은 너무나 뜻밖의 일에 어찌 할 바를 몰랐다. 비록 적군이지만 그 결단과 용기로 이루어진 죽음 앞에서 기뻐 할 수는 없었다. 로마 병사들이 고함을 지르자 두 여자가 숨어 있던 도랑에서 나왔다. 그녀들이 간밤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하자, 실바는 두 여자와 다섯 아이들을 모두 살려 주었다.

 

고고학자 야딘

 로마군은 마사다에 40년쯤 머물렀다. 500여 년 뒤 비잔틴 수도사들이 한동안 살았지만 페르샤 이슬람교도들이 유대를 정복하자 그들도 떠나갔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세우기까지 1,900년이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이, 그들의 용기와 신앙을 나타내는 마사다는 누구의 기억 속에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요세프스가 쓴 마사다 이야기는 어떤 역사 기록에도 없었으므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는 그때 마사다에 있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유대를 버리고 로마에 붙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요세프스의 기록이 진실임이 밝혀지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1838년 사해 바닷가를 여행하던 두 미국인 학자 로빈슨 (Robinson)과 스미스(Smith)가 우연히 이 장엄한 바위산 위의 폐허 흔적을 보고 망원경으로 살폈다.

1. Small bathhouse

2. Herod's palace-villa

3. Storerooms

4. Apartment building

5. Snake-path gate

6. Casemate-wall

7. Zealots' living quarters

8. Underground cistern

9. Southern bastion

10. western palace

11. Throne room

12. West gate

13. Synagogue

14. Large bathhouse

 그 뒤로 1963년 이스라엘 정부가 발굴하기까지 125년간, 많은 탐험가들이 마사다를 찾아 그 비밀을 한 꺼풀씩 벗겨 내였다.

 아랍 사람들이 아스사바 (As-Sabba : 저주 받은 땅) 라고 부르던 기묘한 바위산은, 많은 탐험가들의 손으로, 요세프스가 남긴 역사 기록 속의 마사다로 바뀌어갔다. 1963년 이스라엘 정부는 유대인 고고학자 야딘 (Yadin)에게 요세프스의 기록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발굴을 부탁했다.

1917년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야딘은 이스라엘 독립 운동에 참여하여 나중에는 참모총장까지 올랐다. 1952년 군을 떠난 야딘은 히브리 대학 고고학 교수로 일하면서 1955년부터 유대광야와 사해 근처의 여러 유적을 발굴해 왔다. 야딘은 1963년 10월부터 1964년 5월, 1964년 11월부터 1965년 4월 까지 마사다를 발굴했다. 그리고 요세프스의 기록에 거의 틀림이 없음을 샅샅이 밝혀 냈다. 야딘은 먼저 짤막한 신문 광고를 내어 발굴을 도울 지원자를 모집하였다.

 워낙 외진데다 참기 어려운 날씨가 계속되는 고이었으므로,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일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가했기 때문이다. 왕복 여비를 자기가 내고, 두 주일간 한 천막에서 열 사람이 지내며 음식도 좋지 않다는 조건이었지만, 세계 스물 여덟 나라에서 신청서가 쏟아져 들어왔다. 지원자 5 천 여명은 한번에 두주일 씩 스물 세번에 걸쳐 번갈아 일했으며, 가드나 (Gadna : 청소년 전투 부대) 학생들과 집단 농장에서 온 지원자까지 합쳐 날마다 평균 300명이 발굴을 도왔다.

 야딘은 그 옛날 로마 제 10군단장 실바의 캠프와 맞닿은 곳에 발굴 본부를 차렸는데, 내내 혹독한 날씨에 시달렸다. 아마도 세계 고고학 발굴 역사상 마사다 처럼 어려운 발굴은 없었으리라.

 남풍은 시속 100km 로 불어 천막을 갈기갈기 찢었고, 갑자기 쏟아지는 장대같은 소나기는 눈 깜짝 할 사이에 골짜기를 채우고 말라붙은 개울을 강으로 바꾸었다. 캠프와 캠프 사이를 흙탕물이 넘쳐 흐르고, 보급 물자를 헬리콥터가 날라다 준 적도 여러번이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야딘은, 헤롯왕이 만든 거대한 물탱크에 물이 찰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되었으며, 바위산 꼭대기 웅덩이들에 고이는 빗물을 옛사람들이 저장해 두었다가 잘 썼으리라고 알 수 있었다.

 

영웅들의 성지 (聖地)

 야딘은 맨 먼저 마사다 북쪽 끄트머리 벼랑에 3층으로 지어진 건물을 파냈다. 그것은 요새가 아니라 화려한 벽화와 로마식 목욕탕이 딸린 헤롯의 왕궁이었다. 대왕은 이 벼랑 꼭대기에서도 찬물,미지근한 물, 뜨거운 물을 마음대로 쓰며 사치스런 생활을 했다. 야딘은 여기서 처음으로 시체 셋을 찾아 냈다. 해골 하나는 젊은이의 것으로, 그 옆에는 갑옷에 달았던 은비늘 수백 개와 화살들이 흩어져 있었다. 다른 해골은 젊은 여자의 것으로, 까만 머리카락이 금방 손질한 듯 땋여진 채로 남아 있었고, 또 하나의 해골은 어린아이의 뼈였다.

 이 세 궁전을 발굴하느라 자원자들은 밧줄로 몸을 묶고 까마득한 낭떠러지에 매달려 거센 바람에 흔들리며 일해야 했다. 헤롯이 그처럼 위험한 곳에 궁전을 지은 까닭은, 경치 좋고 험한 요새인 점도 있었겠지만, 햇빛 드는 시간이 짧아 서늘하고 바람막이가 잘 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3층왕궁 옆에는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 무너진 이 건물을 되살리기 위해서 발굴팀은 트랙터와 기중기를 써야만 했다. 이스라엘 육군 공병대가 기중기와 트랙터를 뜯어서 올린 뒤 다시 짜맞춰 주었다. 창고에는 기름, 술, 밀가루 단지 깨어진 것들이 그득 쌓여 있었다. 또 식량이나 일거리를 나눌 때 쓰였던 토큰들도 있었다. 한두 군데는 불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일부러 남겨둔 창고였다.

창고 뒤로는 아파트와 비잔틴 수도사들이 지은 회당이 있고, 헤롯의 별장인 서궁과 커다란 수영장도 있었다. 왕은 마사다를 빙둘러 흰돌로 성벽을 쌓고 군데군데에 탑 38개를 세웠다. 탑안과 성벽에 붙여 지은 방은 모두 110개. 유대인들은 이 방들을 칸막이로 막아 여러 세대가 함께 살았다. 그밖에도 작은 궁 셋이 더 있었고, 특이한 것으로는 미크베 (Mikve) 라 불리우는 유대교의 침례의식 목욕탕이 있었다.

 발굴팀은 갖가지 항아리와 생활도구들, 그리고 '유대인의 자유'라고 씌여진 진귀한 동전, 온 세계를 통틀어 여섯 개 뿐인 은화 세 개, 가장 오래된 천 조각 따위를 찾아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소득은, 서기 73년 이전에 만들어진 두루마리 구약성서 14개였다. 그것들은 시편, 레위기, 에스겔서, 신명기 부분들과 유대민족이 해방된 기쁨을 적은 희년서와 외경인 '벤 시라의 지혜서', 그리고 사해 동굴에서 나온 에세네파의 두루마리 성경들이었다.

 열 한달 동안 야딘은 유대 반란군들이 쓴 검소하고 한 맺힌 유물들과, 헤롯왕이 세운 사치하고 화려한 유적들이 나타내는 뚜렷한 차이를 지켜 보아야 했다. 고고학상으로는 헤롯의 유물이 더 값졌지만, 정신의 고귀함은 유대 반란군의 유물에서만이 볼 수 있었다. 마사다를 '영웅들의 성지'로 만든 것은 바로 이 고귀한 정신이다. 이 정신은 오늘날까지 승화되어 마사다는 현재 이스라엘 군 장병들의 선서 식장으로 활용되고, 이곳에서 그들은 "Never Again!"을 외치면서 1948년에 독립한 조국이 다시는 외적에 의해 정복당할 수 없다는 비장의 각오를 새롭게 하고 있다.

 

 

스타투어(Star Tour)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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