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르비딤(Rephidim)의 여호와 닛시
시내산 아래에 있는 '가타리나'수도원 앞에서 시내산에서 뒤�게 내려오는 순례객 일행을 잠시 기다리는 동안 주변의 험준한 황야의 돌산들을 바라보며,시나이반도와 시내산이 기독교역사의 모태와 그 요람의 무대였다는 사실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윽고 아침 08:00시쯤 우리 일행은 모세가 출애굽하여 걸어온 길을 역으로(반대로) 달려(버스로) 르비딤(지금은 와디페이라) 변두리에 이르렀다.그 곳은 큰 야자수들이 욱어진 골짜기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 곳의 야자수 나무들은 각각 나무주인이 있다는 것이다.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땅 주인이 지상물의 소유권을 갖는데 비하여 그곳 사람들은 땅 소유보다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재산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 르비딤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1년(BC1446년경) 1월 15일에 애굽의 라암셋(Ramses)에서 출발하여(출12:37) 꼭 한 달만에 도착한 땅이다. 이곳에 마실 물이 없어 백성들이 원망하여,모세에게 돌질을 하려 함으로 모세가 지팡이로 하나님 앞에서 반석을 쳐서 물을 먹였다. 그래서 그곳을 맛사 또는 므리바 라고 불렀다.(출17:1-7,민33:14) 또 이곳 르비딤에서 출애굽 후 아말렉인과 첫 싸움이 벌어진 곳이다. 이때 모세가 '제벨 엘 다브네'산에 올라가,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아론과 홀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를 그 위에 앉게 하고 그 둘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하였고 그 날 전투지휘자였던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인을 대파하였다.(출17:8-13) 모세가 그곳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Jehovahnissi,주는 나의 기)라고 했다.(출17:15) 이곳에서 또 기억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방문하여 천부장,백부장,50부장,10부장을 세울 것을 제언하였다.
-르비딤의 세가지 사건의 메시지
첫째,물이 없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을 불신하는 므리바의 죄,즉 하나님을 시험하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마4:7)
둘째,출애굽 후 처음으로 아말렉과의 전투를 치를 때 모세가 팔을 종일 들고 있었던 것은 여호와하나님을 모시는 것(기도하는 것)을 의미했다.즉 하나님을 모실 때 반드시 이긴다는 보증이다.참으로 이 전투는 광야 40년의 수많은 전투의 서전(緖戰)이고,이곳의 승전(여호와 닛시)은 이스라엘의 광야전진의 시금석(試金石)이었다.
셋째,이드로의 선한 지혜는 모세로 하여금 40년간 지도자로 설 수 있게 했다.
[르비딤의 야자수들]
[오늘의 마라 풍경]
4)엘림과 마라의 여로(旅路
르비딤에서 신광야(Wilderness of Sin)를 지나 서남으로 내려가면 엘림(Elim)에 이른다. 엘림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두 번째 진쳤던 곳인데 당시 열 두 샘과 70주의 대추나무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그곳에 장막을 쳤다.(출15:27,민33:9) 그곳 가까운 수에즈만(일명 홍해)해안 가에서 우리 일행은 차를 멈추고 신을 벗고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리고 시원한 바닷물에 들어가서 여로(旅路)에 지친 피로를 잠시 씻었다. 엘림을 지나자 멀지 않은 지점에 마라(Marah)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지금의 큰 홍해가 아니고 바알스본 부근의 바다)를 건넌 후 수르 광야에 들어가서 사흘 길을 걸어서 도착하여 처음 진친 곳이다.(민33:8-9,출15:22-23) 이 곳의 물이 씀으로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한 나무를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다.(출15:23-26) 그 우물자리라는 부근에 몇 그루의 키큰 열대수(야자수)가 서 있고 움푹한 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이 마라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 시라는 것과 (출15:26) 나무는 모든 죄인을 고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예표라고 생각했다.마라에서는 아랍(애굽)남자들은 하얀 통옷과 머리에 터번(Turban)을 쓰고 나무그늘에서 빈둥거리는데 여인들은 작은 기념품을 들고,"원달라(One doller), 원달라"를 웨치며 추근거려 한 두 개의 기념품을 사주었다. 우리 일행은 마라에서 에담광야를 지나는 동안 오후 2시경에야 엘마로사(Elmahrosa)라는 곳에서 중식을 하고 서남 바다 끝에 있는 수에즈(Suez)운하로 향하였다. 해변에는 관광시설과 주민의 주택 건축이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스에즈만(홍해)과 지중해의 통로인 수에즈운하(Suezcanal)의 어귀에 이르러서 차를 멈추고, 운하의 제방에 서서 스에즈만(일명 홍해)에서 지중해로 올라가는 상선을 구경한 후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해저터널을 지나 카이로 길로 들어셨다.
카이로(Cairo)는 '승리의 땅'이라는 이름이고, AD969년 파티마 왕조의 수도가 된 후 오늘의 도시로 발전되어 왔다. 나일강 삼각주(the Delta)에 위치한 카이로는 현재 인구1300만의 아프리카 최대의 도시다.
우리 일행은 복잡한 카이로 중심을 뚫고 오후 6시경 카이로 변두리에 있는 기자(Giza)의 소피텔 호텔 (Sofitel Hotel)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 날은 주일(일요일)이 여서 저녁식사 후 호텔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명지고 박재천 목사님 인도)
[홍해 해변에서.(스에즈만)]
[잔잔한 홍해] [홍해의 산호와 고기]
[수에즈 운하(Suez Canal)]
▼수에즈 운하…100km 물길서 연 17억 외화벌이▼
수에즈 운하는 홍해의 수에즈에서 이스마일리아시를 거쳐 지중해의 포트 사이드에 이르는 100㎞ 남짓한 수로다. 몇 개의 호수가 중간에 있어 굴착한 길이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이 수로는 세계의 교역로를 바꾸어 놓았다.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도는 영국 런던∼싱가포르 간 항로는 2만4500㎞였지만 수에즈운하가 생기면서 무려 1만㎞ 가량이 줄어들었다. 물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카이로 동쪽 134㎞ 지점. 사막을 가로지르는 왕복 2차로 도로를 자동차로 2시간 가량 달리면 폭 200∼300m의 운하가 나타난다. 시나이 반도가 바로 건너편에 보인다. 운하 입구에 서 있는데 마침 운하로 진입하는 배 위에 ‘한진’ ‘조양’ 등 한국의 해운회사 이름이 선명한 컨테이너가 가득 쌓여 있는 것이 보여 감동적이었다.
수에즈운하는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영국과 프랑스군에 점령당하기도 했으며 중동전쟁 때에는 이스라엘군에 장악된 적도 있다. 지난해 운하 통관수입은 17억8100만달러로 이집트 외화 총수입의 15.6%. 수에즈운하의 국유화선언은 그때까지 구미 열강에 억눌려 있던 아랍권 국가에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수에즈운하 중간에 해당하는 곳이 이스마일리아시. 이곳은 휴양지로 개발돼 분위기가 여타 이집트 도시와는 다르다. 해마다 대순례(하지)철이면 메카를 찾는 이슬람신도로 붐빈다. 운하 완성자인 프랑스인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가 살았던 아름다운 유럽풍 저택도 이곳에 있다. 안내판조차 없는 옛집을 겨우 찾아갔으나 유럽계로 보이는 집주인은 정원만 보고 가라며 쌀쌀맞게 대했다. 정원에는 운하공사를 독려하며 그가 타고 다녔던 마차 한 대 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자료:동아일보.2001.02.26,월요일,제24757,A11)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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