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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꾸만 죽고 싶었을 때 나를 잡아 준 사람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9. 08:25

40대초반에  나는 자꾸 죽고 싶은 것을 참고 사는게 굴욕적이었다.

자식들과 살아 갈 앞날이 너무 힘들게 뻔히 보이고 , 일찍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가 부럽고 죽으면 끝날 것을 힘들게 살 필요가 있겠나 골돌히 생각했었다.

공기좋은 오솔길을 걷다가 생각지도 못한 낭떨어지가 나타나서 아차하는 순간에 바닥으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부부애도 모두 박살이 난 것이다.

그때는 우리 가족이 부족해서 고난이 온 것인데 내게 무심한 인척에 대한 원망으로 마음속에 독기가 스며드는 경험도 했다.

두 아이들을 앞에 앉혀 놓고 함께 죽자고 했던 비겁하고 옹졸한 에미였다.

큰아이는 눈물이 고인 눈으로 가만히 있었고 막내는 울면서 말했다.

"엄마! 나는 죽기 싫어 자장면 배달을 하더라도 살고 싶어"

정신이 번쩍 났다.

그 후 막내는 엄마가 좀 늦게 집에 오면 죽으러 갔나 생각이 들어서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고 ,군대에 다녀 온 후에야  말했다. 

 

내 인생에 가장 고통스러웠던 4~5년동안 한 통의 전화도 ,찾아 오지도 않은 가까운 인척을 지금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때 왜 그렇게 했을까? 

비슷한 고난을 극복한 인척에게 물었더니 답을 말해주었다.

" 찾아가면 개길까봐 서지"

 

그래, 전화를 하고 찾아오면 나는 분명 형편을 말하고 개겼겠지.

그런데 도움을 받을  관계니까 개길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러나 나를 불쌍히 여기고 안타깝게 여긴 시아버님과 시댁의 몇 분의 어른들과 친정 여동생때문에  죽기보다 힘든 삶을 견뎌냈다.

 

내 인생의 멘토는 시고모님들과 시누이들이었다.

"고난이 오면 그냥 지나가기를 참으면서 견디게나. 그러면 옛말하고 살 날이 오네. 아이들이 착하고 성실하지 않나?"

큰시누임은 늘 나의 하소연을 들어주었고 언제나 [미안하네. 자네가 너무 고생을 해]했다.

가슴의 고통은 화병으로,화병은 한으로 남아서 육신의 지병으로 남는다.

 

큰 시누이에게 한동안  정신없이 말하고 나면 좀 후련했다.

나는 내 마음의 감정을 주체 할수 없을 때나 삶이 고달플때, 아이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4살위의 큰시누이 형님에게 전화를 했었다.

형님은 내마음의 치료사였었다.

당신의 삶은 나보다 더 고달프면서 내색을 하지 않고 나의 넋두리를 다 들어 주었다.

 

나와 띠동갑인 막내 시누이는  27살에 결혼을 했을때 중학교 2학년이었다.

결혼 생활 32년동안 단 한번도 올케들에 대해서 험담을 한 적이 없었다.

중학교 미술교사인 막내 시누이는 아무도 안보는 데서 조심스레 봉투를 내밀며

"등록금에 보태 언니! 적어서 미안해"

하였고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많은 용돈을 주었다.

친정에 오면 언니들은 가만히 있으라고 하며 설걷이는  도맡아서 하고  커피를 타서 올케들에게 주곤 한다.

착해서 그런지 복이 많아서 성실하고 잘생긴 동갑의 신랑을 만나서 두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다. 미술교사 답게 42평아파트를 예쁘게 꾸며놓고서.

 

시고모님들.

서울 고모님.

서울에 사는 시고모님은 친정 엄마 없는 나를 측은히 여겨서 큰애를  낳을 때 난산으로 3일간 진통을 할 때 옆에서 손을 잡아주시고 간호사들과 함께 큰 애를 받으셨다.

남편의 형제 중에 3명이나 큰고모님의 작은 집에 얹혀서 몇년씩 함께 살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시할아버지가 보내주는 쌀만 받으시고 당신의 자녀도 4명이나 되는데 똒같이 대해주셨다.

나는  시고모님들의 자녀들이 한결같이 잘되고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보고

[착한 끝은 있다]는 말을 믿는다.

  

홍성 고모님.

우리는 이분을 가르개 고모님이러고도 부른다.

가르개로 시집을 가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시댁의 주소지가 외나리인데 주변의 동네가 내나리, 복당리,저드르, 이드르, 갯골, 정겨운 동네이름이다.

큰고모님은 ((90세) 갯골로 시집을 가셔서 갯골 고모라고 부른다.

 

홍성고모님은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이 교직에 계셔서 시할아버님과 시할머님을 모시고 20년을 넘게  시골집에서 생활을 하셨다.

농고를 나온 고모부님은 유식하시고 깐깐한 성격이시다.

두 분이 평생을 농사를 지어서 1남 2녀를 다 대학까지 보내신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의 어머니시다.

큰며느리가 초등학교 교사여서 홍성의 아파트단지에 다른 동에서 살고 계신다.

아들은 건강보험의 공무원이다.

큰딸은 치기공사와 결혼을 해서 잘살고 있고 막내 딸은 충남대  CC로 만난 남편이 박사 학위를 받고 시청 6급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막내딸은 수학과를 나왔고 둔산에서는 유명한 수학 공부방 선생이다.

홍성 고모님은 지금도 내게  고추 간장 짱아치, 물김치, 김치를 자주 담궈 주신다.

작년 11월에 큰시누이님이 환갑이었는데 조카딸 환갑 턱을 낸다고 수덕사 앞  음식점에서 일주일 간 알바를 하셨다.

노인 대학에도 열심히 다니고 계신다.

 

시아버님.

다섯 며느리 중에서 친정 부모도 모두 없고 장녀인 셋째 며느리인 내가   안타까우셔서  자주 전화로 위로를 해주셨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전화를 하셔서 큰 수술을 한 며느리의 건강을 걱정해 주시던 아버님.

풍지박산이 되다시피한 우리 집에 오셔서 눈에 눈물이 가득하시니 돌아서서 닦으시던 아버님.

당신이 안계셨다면 저는 그 힘든 세월을 어떻게 극복을 했을까요?

아버님의 사랑에 조금도 보답을 못하고  에비는 60이 된 나이에도 걱정을 드리고 있습니다.

매주 시골집으로 아버님을 모시고 함께 가는 것이 유일한 효도로 알고 있습니다.

제 식구들이 효도 할 수 있게 건강하게 오래 사십시요.

 

연년생인 여동생.

 

57세의 여동생은 자랄 때보다 지금이 더 가깝고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됐다.

큰아들이 서울로 유학을 가서 유일한 혈육인 이모의 반 지하 단칸방에 매주 찾아 가서 함께 자고 기숙사로 돌아 왔다.

지금은 18평 아파트를 임대로 5년을 산 후 분양을 받았고, 큰어머니가 갑자기 돌아 가시자  큰아버지는 어릴적 몇년 함꼐 살았던 여동생을 양녀로 입적을 했다.

큰아버지는 당신의 명의로 된 34평아파트를 팔아서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의 34평 아파트를 동생 명의로 사주고 그 곳으로 이사해서 살고 있다.

동생은 서울에 아파트 두 채 , 역세권에 42평 상가 하나 ,예산에 땅 1,700평의 부자가 됐다.

여동생은 백화점 식품부에 (반찬코너) 25년을 근무했다.

음식도 빨리 만들고 솜씨도 좋다.

월급 날이면 큰 아들을 데리고 맛집을 찾아 다니며 특별한 음식을  사주었다.

동생은 독신이다.

 

내가 힘들게 살 때 내가 입는 옷을 모두 사서 소포로 부쳐 주었다.

심지어 팬티와 브라자까지 보내 주었다.

오이지와 명란젓, 창란젓을 잘 포장해서 소포로 보내 주었다.

근 10년 동안을 한결같이 잘했다.

 

동생이 다섯 살때 우리 집에 오신 큰 아버지를 따라서 큰집에 가서 살다가 큰 집의 사업 실패로 10살 때 집으로 왔던 여동생.

철없던 나는 싸울 때마다 두 남동생과 한 편이 되서

"너의 집에 가라"고 해서 울렸었다.

우리 형제 중에서 여동생만 서울에 살았고 ,큰 집을 쉬는 날마다 반찬을 사가지고 갔던 여동생이 큰아버지의 상속녀가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착한 끝은 있다]라는 말을 믿는다.

평생을 언니에게 말로나 힘으로나 이긴적이 없다고 내 큰아들에게 말한 여동생은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한다.

 

나를 위해서 부모님 말고 이토록 안타까워한 사람이 어디 있었는가?

이 여동생의 영향을 많이 받고 종교를 천주교로 바꾸게 됐다.

 

가까운 인척이 사업에 실패를 했을 때 , 살만 하다면 그 인척의 자녀들의 등록금 을 내주면  자기의 자녀에게 복이 돌아간다.

마음에 상처가 심하고 외로운 사람이 하는 말을 조용히 듣는 것도 봉사이며 사랑이다.

자살을 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외토리라고 생각해서 비극적인 선택을 한다.

따뜻한 한 끼의 식사, 한 마디가 그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혀는 복을 짓기도 하고 복을 털기도 하는 요상한 것이다.

자꾸만 죽고 싶을 때 만나는 몇권의 책은 사람보다 더 큰 위로를 주기도 한다.

그 작가와  조용한 대화가 시작 되기 때문이다.

 

**안효숙의 [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구리무댁은 복도 많지],[울지 마라, 너만 슬프냐?][오일 장 통신] 이 나에게는  살고 싶은 의욕을 느끼게 했다.

 

  

나는 자꾸만 살고 싶다

구리무 댁은 복두 많지

울지마라 너만 슬프냐

 

 

살면서 다가 오는 고난은 충격적이고 피할 곳이 없어 보이지만  살펴보면 살 길은 있다.

 

그 때 다가와 도움의 손길을 준 사람들은 모두 신이 보낸 선물인 천사라고 생각한다.

 

내가 겪은 가난은 불편도 하고 무시도 당하는 처절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 고통의 다리를 건너 오지 안았으면  지금의 평화도 없었을 것이다.

 

인생이란 누구나 치열한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 숙제가 있는 것이다.

 

   

 

출처 : 모과 향기
글쓴이 : 모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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