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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개종을 하고 성당에 처음으로 가보니 ...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9. 08:33

오늘 처음으로 성당에 갔습니다..

15년간 마음 속으로 생각했던 일이라서 마음이 약간 설레였습니다.

주일 헌금은 얼마를 할까?

개신교에 다닐 때는 주일 헌금은 1,000원에서 5,000원을 하고 ,구역 예배 헌금,특별헌금, 십일조등을 했는데 천주교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남편에게 물었습니다..

"여보! 천원 짜리 있어요? 주일 헌금을 해야 하는데 오늘 처음 나가는 날이니까 10,000원을 할까?"

남편에게 묻다가 1,000원은 좀 약하고 기념이 될 날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깨끗한 돈으로 10,000원을 꺼내서 성경책 뒷 장에 다 넣었습니다.

먼저 나가서 기다린다고 남편이 나간 후에 보니, 화장대 위에 새 돈 5,000원이 있었습니다.

헌금하라고 내 논 모양이었습니다.

[남편 것도 같이 해야겠다. 몇 년 후에 나를 따라서 성당으로 갈테니까.^^]

속으로 생각을 하고 남편차를 타고 성당으로 가면서 말했습니다.

"저기 보이는 곳이 성당이야. 예쁘지. 당신두 몇년 후에 다니게 될거야."

남편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차를 돌려서 직장으로 갔습니다.

 

동생이 소포로 보내준 성경과 가톨릭 성가는 개신교의 찬송가와 많이 달랐습니다.

성경은 더 쉽게 번역돼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 익숙한 나는 [코린토1서]가 낯설었습니다.

[마가복음]은 [마르코복음서]여서 옆의 여신자 분이 예배 처음부터 일일이 성경도 찾아 주고, 성가도 찾아주었습니다..

주기도문을 암송을 해서 함께 하려니 내용은 같은데 쉽게 풀어서 번역해서 약간 틀린 부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암송하는 기도문을 듣고만 있어도 좋았습니다..

성가대는 천상의 소리같이 아름다운 화음을 내며 예배 시간 중간 중간에 성가를 불러주었습니다.

성당의 풍경이 낯설지 않았고 포근하게 나를 감싸주는 것 같았습니다..

헌금은 앞 줄부터 질서 정연하게 나가서 공손히 [헌금함]에 넣고 돌아 오는 것이 특이 했습니다.

개신교는 헌금함을 안내하는 집사님들이 들고 다니는데....

 

곧 신부님이 되실 분이라는 젊은 분이 흰가운을 입고 사회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신부님과 사회를 보는 분(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가운데 서고 왼쪽에 초등학교 남자 어린이 오른쪽에 중학생정도로 보이는 여자 어린이가 희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강단의 의자에 앉아 있었습니다.

주보에 있는대로 성경 구절도 읽고 ,성가도 부르고, 화답송도 부르고 하더니 영세받은 신자들만 일어나서 나가서 뭔가 먹고 들어 오더군요.

 나중에 동생에게 들으니 영성체라고 하면서  한꺼번에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합니다.

모두 들어 와서 앉았는데 신부님이 되실 분이 은으로 된 잔에 남은 것을 마시더니 흰행주로 깨끗하게 닦고 벽에 있는 금고 같은 데에 보관을 하더군요.

자기 자리로 돌아 오는 신자들의 표정은  겸손하고 온유하고 평화로운 인상을 받았습니다.

대체적으로 나이가 좀 드신분들이 많아 보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악한 것은 빛에서 멀어진다]는 것과 [유혹에서 구원해주십시요]로 들었습니다.

너무나 인상적인 것은 설교가 짧은 것과 교인들이 조용한 것입니다.

개신교의 설교 시간에는 설교 중간에 [아멘!].[아멘!] 을 많이 하는데 조용히 경청만하는게 저는 참 좋았습니다.

 

제가 개신교를 다니면서 제일 적응을 못한 것이 [통성기도]시간이었습니다.

너무 시끄럽고 옆사람이 악을 쓰다시피 기도를 하면 집중이 되지 않아서 나의 기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새벽 기도시간에 한 명의 여신도가 대성통곡을 하면서 기도를 하면 그 날은 그냥 시끄러운 소리만 듣고 오는 날이었습니다.

물론 그분이 얼마나 속이타고 애절하게 매달려야 했을까?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그런 기도 방법은 집에서 혼자 있을 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요.

천주교의 평화로운 조용함이 영혼을 평화롭게 해주는 성가대가 예배 중에 옆 사람과 두 손을 잡고 부르는 찬송이 나의 마음을 행복하게 했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신부님이 저를 보시며 [누구십니까?] 물어 보셨습니다.

제옆의 신자분이 [처음 나오신 분입니다]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어디에 사십니까?] 젊은 신부님은 목소리가 참 좋았습니다.

[OO에 사는 데요]제가 대답을 하자 마자 전 교인이 폭소를 터트렸습니다.

아! OO성당이니까 모두 OO에 살겠구나..

[제가 이사를 왔습니다]하며 웃으니까 모두 환영의 박수를 쳐주었습니다.

저의 마음도 급속도로 겸손해지면서 고개 숙여서 공손히 인사를 했습니다.

내 뒷자리에 앉은 부부에게도 [어디 사십니까?] 물으시니

[샘물타운에 삽니다] 이렇게 대답을 하더군요.

대전의 아파트의 이름은 모두 한글로 돼 있습니다.

[샘물타운],[진잠타운],[느리울 마을][구봉마을],[대자연마을],[원앙마을].....^^

 

광고가 끝나고 신부님과 신부 되실분과 신도회장님이 모든 좌석을 다니며 일일이 악수를 하시며 인사를 하고 다녔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인사를 하면 못하는 분이 계실까 봐 그런 것 같습니다.

 

 미사를 드리는  교인수는 약 300명정도의  작고 아담하고 예쁜 이층으로 된 성당입니다. 긴의자에 4명~5명씩 앉았고 한줄에 긴의자가 14개정도,그리고 5줄인것 같았습니다.

작년에 새로 지어서 책상 아래는 가방을 놓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사무실에 들렸습니다.

교무금(월 헌금)을 우리 은행 통장에 개인별로 입금을 하더군요.

저는 영세를 받은 후에야 교무금을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성당에 헌금도 영세를 받은 사람에게만 하게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현재 천주교 교리를 배우려는 사람이 5명인데 배울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답니다.

교리를 배우고 영세를 받을 때는 크리스마스경이 될 것 같습니다. 이르면 추수감사절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성당에서 집까지 걸어서 5분 걸렸습니다.

양쪽으로 개신교 교회가 11개가 예쁘게 서 있었습니다.

저는 성당은 한동네에 하나씩 있는 것도 좋습니다.

 

개신교 신자였었는데 교회를 나가지 않은지 16년이나  됐습니다..

마음 속으로 늘 성당에 가고 싶었으나 직업의 특성상 일요일이 더 바쁘고 ,교리를 배울 시간을 낼수가 없어서 미루어 왔던 일입니다.

작년 11월 중순 남편의 고향으로 영구 이사를 하면서 세웠던 첫번째 계획 [개종을 한다]을 오늘 실천을 한 것입니다.

하루 이틀 생각을 하고 결정을 한 것이 아니고 15년을 생각한 것이어서 이제 성실히 신앙 생활을 하렵니다.

 

부산에서의 28년은 일생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집안이 풍지박산이 돼도록 만든 사람들이 모두 개신교에 다니는 신자였습니다.

사기를 당한사람은 자기에게도 많은 책임이 있다고 어느 책에서 읽었습니다.

자기도 그걸 원해서 만들어진 결과니까요.[욕심은 죄를 낳고 죄는 사망을 낳는것]

물론 그들이 교회만 다니고 확실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인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훌륭한 개신교인이 더 많다는 것도 믿고 있습니다.

 

내 남편을 자기 남편보다 더 사랑한다고 따라 다닌 이해 할수 없는 여자도 장로의 딸이었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여자라서 맞대응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한결같이 그 여자는 아무 관계도 아니고 사업상 같이 일 할 뿐이라고 하는 말을 믿어야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두집이 경제적으로 풍지박산이 났습니다.

그 가슴 아픈 우여곡절은 생략하겠습니다.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바닥을 치고 힘겹게 극복을 하고 16년이 걸려서 고향으로 돌아 왔습니다.

16년전부터 부산을 떠나고 싶어 한 것은 남편이 더 절실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서 저는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가슴이 두근두근하는 현상이 심해서 시댁 조카들의 결혼식에도 참석을 못했었습니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조그만 조립식 개척교회가 있었습니다.

동네가 생길 때부터 있었으니까 근 10년을 목사님이 고생을 하셨지요.

영구임대 아파트가 많은 어려운 동네라서 크게 발전을 못했습니다.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인구 6만의  신도시가 형성되고 그 작은 감리교회 바로 옆에 시내에서 큰 교회가 이사를 왔습니다. 

신자가 800명이 넘는 대형 교회이고 노인 대학도 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다 짓자 부흥회를 하는데 추첨을 해서 상품을 준다고 전도를 하고 다니더군요.

라면 한박스, 가루비누, 화장지등등.....

이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작은 감리교회는 조용히 없어지고 어느 회사 창고가 됐습니다.

 

친정 집안의 겪은 불행도 큰어머니께서 이름을 말하면 모두 알수 있는  대형교회만 고집을 하시다 평생을 큰아버지와 다투시다 돌아 가신 일이 있습니다.

 가축병원을 35년을 하신 큰집은 자녀가 없고 검소한 생활을 하셔서 모은 재산이 많습니다.

큰어머니의 잘못된 신앙으로 교회에 헌금을 너무 많이 하다가 경제권을 큰아버지에게 빼았기셨습니다.

큰어머니는 큰아버지 몰래 돈을 감추었다가 헌금을 하고 동네에서 돈을 꾸어서도 했습니다.

기복신앙의 대표주자인 그 교회는 지방의 교회의 주일 낮 예배는 T V로 생중계해서 듣고 오후 예배만 담임목사님이 설교를 합니다.

큰어머니는 건설회사를 했던  그 교회의 장로에게 수 억원을 빌려주고 ,속아서 예산에 땅도 샀습니다.

자식이 없는 노부부에게  안갚아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떼먹었고 갑자기 돌아 가신 큰어머니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대형교회답게 목사님의 이름이 적힌 조화가 왔습니다.

화가 난 큰아버지가 가위로 목사의 이름이 있는 리본을 짤라 버렸습니다.

평생을 남편과 싸우면서 다닌 교회의 예배도 한번 못 받고 화장터의 한줌의 재가 된 큰어머니는 그 후로도 그교회에서 찾아 가서 예배를 드렸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 교회를 40년이상 다닌 권사인데.....

한증막의 신발장만한 임시 납골당에 실리콘으로 밀폐된 큰어머니의 유골은 훗날 국가 유공자인신 큰아버지께서 돌아 가시면 국립묘지에 합장 할 예정입니다.

 

제가 개종을 한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입니다.

시댁이 충청도 깡촌에 본가가 있는데 수덕사가 가깝고, 마음이 여리고 착한 시할머니는 머리에 쌀을 이고 밤길을 걸어서 수덕사 스님들에게 드렸다고 합니다.

시할머니가 불자가 되신 것은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어느 때는 은행나무를 이고 오셔서 스님에게 드리고 바로 돌아서 가셨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장례식을 인도하시며 여주지 스님이 말씀해 주었습니다.

시댁은 유교 집안 이고 시어머니는 감리교 권사님이고 큰형님은 집사이고 둘째형님은 수덕사 스님이 중매로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개신교를 다닐 때 크리스마스때만 불우이웃을 돕고 본당 건축문제로  재정이 늘 부족했던 개신교를 다니면서 수녀님들의 꾸준한 봉사를 보았습니다.

자기가 노출 되면 숨어 버리는 진정한 봉사를 보았습니다.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큰 아들이 예수회 재단의 대학에 진학하면서

기숙사 학사장이았던 신부님과 사감 교수수녀님에게 받은 사랑에 감동을 받아서 입니다.

너무 엄격해서 고등학교라는 별명도 있는 학교의 학사 일정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우리 아들이 그 학교에서 받은 사랑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소중한 사람이 될 것과 학교에서 받은 사랑을 돌려주는 자랑스런 졸업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대기업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남편과 가족들에게 더 잘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감히 저를 보고 이,삼년후에 우리 가족들이 모두 성당을 나가기를 바랍니다.

엄마의 한결같은 사랑을 보고 가족들이 스스로 성당에 다니겠다고 말하도록 열심히 더 진실되게 살겠습니다.

젊은 날의 상처는 부산을 떠나면서 다 잊기로 했습니다.

악연도 운명처럼 오고 겪어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이도시에서 모든 것을 조심스럽게 시작 하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신앙도 생활도,인간관계도 하겠습니다.

 

 

***이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만이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각자의 마음속에 들어 있으니까요.

 

비방,악풀은 하지 마십시요.단 논리적인 댓글은 좋습니다.

개신교를 개독교라고 쓰면 무조건 삭제합니다.

 

저는 친정 아버지께서 신의주 분이시라서 그쪽으로 들어 온 초대 장로 교회의 장로 집안에서 태어 났습니다.

6.25때 월남을 한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지 않다가 어머니를 전도하고 ,어머니는 개척교회에 다니셨습니다.

어머니가 돌아 가시자 교회장으로 전교인이 참석했고 경기도 탄현에 있는 기독교인 묘지에 모셨습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10월 발병한 결핵으로 3년을 투병을 하면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졸업후 근무한 두곳의 사립학교는 모두 장로교 재단이었습니다.

과학교사였지만 담당 업무는 교목님을 도와서 [종교담당]이었습니다.

두 분 목사님은 모두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댓글에도 썼지만 큰어머니는 타살 당했습니다.

장례 과정의 기가막힌 이야기는 쓰지 않겠습니다.

제가 천주교를 택한 것은 개신교와 같은 기독교이고 낯설지 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제글을 읽으시고 신앙심이 없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심한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시고 근 20년을 교회 건물만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 앉고 불면증과 화병이 심했습니다.

 

저는 신앙은 있으나 많이 부족한 사람이라서 과거의 일을 용서를 못하고 살다가 이제야

깨닫고 성당에 용기를 내서 찾아 갔습니다.

지난 과거의 생활을 덮는 의미 입니다.

개신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의도는 없습니다.

많은 댓글과 기도에 감사함을드립니다.

앞으로 신앙 생활에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고맙게 받겠습니다.

 

*천주교인들은 저의 첫 걸음을 축복해 주시고 한 번 기도해주세요.^^

 

 

 

출처 : 모과 향기
글쓴이 : 모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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