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와 신학 1. 메시지 예레미야를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존재로 이해할 때, 그의 생애는 한편으로는 심판을 받아야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의 대상이 된 이스라엘의 역설적인 모습이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분명히 심판의 메시지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였다. 그는 자기 백성의 맹신과 헛된 희망을 추방시켰으며, 그들이 당하는 비극은 여화으이 행위로서 민족의 죄악에 대한 여호와의 의로운 심판임을 선표하였다. 2. 심판과 구원의 관계 예레미야가 선표하고 있는 메시지의 양면성도 심판과 구원이요, 당대의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과 유다가 겪고 있는 역사적 상황도 심판과 구원으로 대별된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메시지도 당대 하나님 백성의 역설적인 운명을 주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메시지의 순서상으로도 심판이 먼저이고, 구원이 나중에 등장함이 의미 심장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서 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비극적인 종말로 그들의 운명이 결정된 것만은 아니었다. 곧 심판이 그들 역사의 궁극적인 종말이 아니었다. 회복이 불가능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주권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을 약속한 것이다. 3. 신학 예레미야서의 가장 특징적인 내용은 '새 언약'이다. 이 약속은 예레미야 당대에 편만한 '모세 언약'이나 '다윗 언약'에 근거한 단순한 회복이나 실현이 아니다. 가히 '새롭다'라는 형용사가 수반될 만큼 이전 언약에 비해 전혀 획기적인 사실이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죄악을 용서할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심령을 새롭게 창조하여 하나님을 향해 새로운 생명을 가진 자로 세우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게 할 뿐 아니라, 사죄의 은총을 내려 죄악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분명히 심판의 메시지였지만 그것은 동시에 구원의 메시지였다. 시대적 배경 예레미야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유다의 말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1. 예언서의 해석 원리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결코 반복될 수 없는 특수한 사건과 특수한 시대에 주어진 것이다. 더욱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까지 경험했거나, 혹은 경험하고 있는 사건들을 하나님의 요구와 약속에 비추어서 해석하는 말씀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예언자들의 말씀은 시대적 배경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2. 일반적 상황 예레미야는 고대 세계의 대격변기에 살았다.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의 자그마한 영토를 차지하고 있던 유다는 주변 강국의 세력 판도에 따라 국운이 좌우될 정도로 나약했으며, 재앙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한 조국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 예레미야의 사명이었다. 그가 예언 활동을 시작한 때는 앗수르 제국이 쇠망해 가는 때로서 이전의 점령지들에 대한 그들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있을 무렵이었다. 3. 출생 및 활동 시기 예레미야는 요시야 13년(B.C. 627)에 활동을 시작하여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된 B.C 587(586)년 이후 얼마 동안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그의 출생도 B.C. 645년경, 곧 므낫세(B.C 687-642)의 장기 통치 말엽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4. 그 당시 앗수르 제국의 상황 아하스의 요청을 받은 디글랏빌레셀은 B.C. 733년에 연합군을 진압하고 다메섹과 이스라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북조 이스라엘이 국토를 회복하려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디글랏빌레셀의 후계자인 살만에셀 4세(B.C. 727-722)와 사르곤 2세(B.C. 722-205)는 이스라엘의 나머지 영토를 침공하여 그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그 가운데서도 유다는 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앗수르의 속국으로 그 명령에 따라 모든 국사를 처리해야 했으며, 조공을 바쳐야 했다. 특히 아하스DML아들 히스기야(B.C. 715-687) 시대에는 산헤립(B.C. 705-681)이 앗수르의 왕이 됨으로써 사태가 더욱 악화되어 유다 왕조는 존폐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산헤립의 위협을 물리칠 수 있었다. 히스기야 사후 므낫세(B.C. 687-642) 통치 기간의 앗수르는 그 세력이 점점 강서해져 산헤립의 후계자인 에살핫돈9B.C. 681-669)과 앗수르바니팔은 애굽까지 정복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므낫세는 당연히 앗수르의 속국으로 굴종적인 정책을 시행하였다. 예레미야가 활동했던 시기는 므낫세 통치 말기로서 앗수르 제국의 절정기에서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는 시기까지였다. 5. 바벨론의 등장과 애굽 앗수르바니팔 왕이 죽은 이해 앗수르에서는 온 나라를 내란으로 몰고가는 큰 혁명이 일어났다(B.C. 627-624). 이 혁명은 결정적으로 앗수르의 파멸을 초래했다. 바벨론은 이러한 혼란 상태를 이용하여 독립을 되찾았다. 그 후 바벨론은 B.C.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를 함락시켰다. 결국 팔레스타인은 애굽과 바벨론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한 상황이 B.C. 605년까지 계속되다가 애굽은 바벨론의 느부랏네살에 의해 갈그미스 전투에서 완전히 격퇴당하였다. 이 전쟁을 계기로 바벨론은 명실공히 고대 세계의 최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6. 바벨론 왕국과 유다 왕국 팔레스타인의 세력 판도가 달라짐에 따라 느고의 봉신이었던 여호야김은 다시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B.C. 601년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왕하 24;1), 그것은 치명적인 실책이었다. 드디어 B.C. 598년 12월 바벨론의 군대가 진격했다. 그 달에 여호야김은 사망했다. 그 후 18세 된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다. 여호야긴이 왕이 된지 3개월만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 왕을 비롯한 유다 백성을 바벨론으로 추방시키고(B.C. 597), 요시야의 아들이며 여호야긴의 숙부인 시드기아를 그의 봉신으로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의 통치 기간(B.C. 597-587)은 마치 국가의 자멸을 재촉하듯 바벨론에 항거하는 반란이 계속 일어났다. 그러다가 B.C. 587년 7월 느브갓네살의 친위 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되었다. 드디어 유다 왕국은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바벨론은 그달랴의 유다 땅의 총독으로 임명하여 유다를 통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달랴는 유다 백성들의 음모로 암살당했고, 이 암살을 주도한 반란자들은 예레미야의 적극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데리고 애굽으로 도망갔다. B.C. 582 느부갓네살은 유다의 제3차 추방령을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