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祖<東明聖王>, 姓<高>氏, 諱<朱蒙>[一云<鄒□{鄒牟}> , 一云<衆解{衆牟}> ]. 先是, <扶餘>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其所御馬至<鯤淵>, 見大石, 相對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 金色蛙形.[蛙, 一作蝸.] 王喜曰: "此乃天賚我令胤乎!" 乃收而養之, 名曰<金蛙>. 及其長, 立爲太子. 後, 其相<阿蘭弗>曰: "日者, 天降我曰: '將使吾子孫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曰<迦葉原>. 土壤膏 宜五穀, 可都也.'" <阿蘭弗>遂勸王, 移都於彼, 國號<東扶餘>. 其舊都有人, 不知所從來, 自稱天帝子<解慕漱>, 來都焉. 及<解夫婁>薨, <金蛙>嗣位.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熊神山}> 下<鴨 {鴨綠}> 邊室中, 私之, 卽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炤, 引身避之, 日影又逐而炤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 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其母以物 之, 置於暖處, 有一男兒, 破殼而出, 骨表英奇. 年甫七歲, 然異常, 自作弓矢, 射之, 百發百中. <扶餘>俗語, 善射爲<朱蒙>, 故以名云. <金蛙>有七子, 常與<朱蒙>遊戱, 其伎能皆不及<朱蒙>. 其長子<帶素>言於王曰: "<朱蒙>非人所生, 其爲人也勇, 若不早圖, 恐有後患, 請除之." 王不聽, 使之養馬. <朱蒙>知其駿者, 而減食令瘦, 駑者, 善養令肥. 王以肥者自乘, 瘦者給<朱蒙>. 後, 獵于野, 以<朱蒙>善射, 與其矢小而<朱蒙> 獸甚多. 王子及諸臣又謀殺之. <朱蒙>母陰知之, 告曰: "國人將害汝. 以汝才略, 何往而不可? 與其遲留而受辱, 不若遠適以有爲." <朱蒙>乃與<鳥伊{烏伊}> ·<摩離>·<陜父>等三人爲友, 行至<淹 水>[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 欲渡無梁, 恐爲追兵所迫. 告水曰: "我是天帝子, <何伯{河伯}> 外孫{甥} . 今日逃走, 追者垂及如何?" 於是, 魚鼈浮出成橋, <朱蒙>得渡, 魚鼈乃解, 追騎不得渡. <朱蒙>行至<毛屯谷>[『魏書』云; "至<普述水>."], 遇三人: 其一人着麻衣, 一人着衲衣, 一人着水藻衣. <朱蒙>問曰: "子等何許人也, 何姓何名乎?" 麻衣者曰: "名<再思>", 衲衣者曰: "名<武骨>", 水藻衣者曰: "名<默居>", 而不言姓. <朱蒙>賜<再思>姓<克>氏; <武骨><仲室>氏; <默居><少室>氏. 乃告於衆曰: "我方承景命, 欲啓元基, 而適遇此三賢, 豈非天賜乎?" 遂揆其能, 各任以事, 與之俱至<卒本川>[『魏書』云: "至<紇升骨城>."]. 觀其土壤肥美, 山河險固, 遂欲都焉. 而未遑作宮室, 但結廬於<沸流水>上, 居之. 國號<高句麗>, 因以<高>爲氏.[一云: <朱蒙>至<卒本扶餘>, 王無子, 見<朱蒙>知非常人, 以其女妻之, 王薨, <朱蒙>嗣位.] 時, <朱蒙>年二十二歲, 是<漢><孝元帝><建昭>二年, <新羅>始祖<赫居世>二十一年甲申歲也. 四方聞之, 來附者衆. 其地連<靺鞨>部落, 恐侵盜爲害, 遂攘斥之, <靺鞨>畏服, 不敢犯焉. 王見<沸流水>中, 有菓{菜} 葉逐流下, 知有人在上流者. 因以獵往尋, 至<沸流國>. 其國王<松讓>出見曰: "寡人僻在海隅, 未嘗得見君子, 今日邂逅相遇, 不亦幸乎! 然不識吾子自何而來." 答曰: "我是天帝子, 來都於某所." <松讓>曰: "我累世爲王, 地小不足容兩主, 君立都日淺, 爲我附庸, 可乎?" 王忿其言, 因與之鬪辯, 亦相射以校藝, <松讓>不能抗.
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에는 '牟', 『三國史節要』에는 '祥'으로 되어 있다.李丙燾.李丙燾. [三國遺事].『북한본』.李丙燾. [三國遺事].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주몽[추모 혹은 중해라고도 한다.]이다. 이보다 앞서 부여왕 해부루가 늙을 때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는 산천에 제사를 드려 아들 낳기를 기원하였다. 하루는 그가 탄 말이 곤연에 이르렀는데, 말이 그곳의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려보니, 금빛 개구리[와(蛙)는 와(蝸)라고도 한다.] 모양의 어린 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며 "이 아이가 바로 하늘이 나에게 주신 아들이구나!"라고 말하고, 그를 데려와 기르며 금와라고 이름 지었다. 그가 장성하자 태자를 삼았다. 훗날 국상 아란불이 말했다.
"어느 날 하느님이 나에게 내려와 이르되 '장차 나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게 할 것이니, 너는 여기서 피하라. 동쪽 바닷가에 가섭원이라고 하는 곳이 있는데, 땅이 기름져서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니 가히 도읍을 정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아란불은 마침내 왕에게 권하여 그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하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 하였다. 그 옛 도읍에는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 하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였다.
해부루가 죽자, 금와가 왕위를 이었다. 이 때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금와가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녀를 방에 가두었는데, 그녀에게 햇빛이 비쳤고, 그녀가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한 그녀를 따라 가면서 비쳤다. 이로 인하여 태기가 있어 다섯 되들이만한 큰 알을 낳았다. 왕이 그 알을 버려 개와 돼지에게 주었으나 모두 먹지 않았으며, 다시 길 가운데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하고 밟지 않았다. 나중에는 들에 버렸으나 새가 날개로 그것을 덮어 주었다. 왕이 그것을 쪼개려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그 어머니에게 돌려 주었다. 그 어머니가 그것을 감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뜨리고 나왔다. 그의 골격과 외모가 뛰어났다. 그의 나이 7세에 보통 사람과 크게 달라서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 속담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하였기 때문에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금와에게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주몽과 함께 놀았는데, 그들의 재주가 모두 주몽을 따르지 못하였다. 그의 맏아들 대소가 왕에게 말했다. "주몽은 사람이 낳지 않았으며, 그 사람됨이 용맹하므로, 만일 일찍 처치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까 두려우니, 청컨대 그를 없애버리소서."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고,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였다. 주몽은 여러 말 중에서 빨리 달리는 말을 알아내어, 그 말에게는 먹이를 적게 주어 여위게 하고, 아둔한 말은 잘 길러 살찌게 하였다. 왕은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여윈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훗날 들에서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 하여 화살을 적게 주었다. 그러나 주몽이 잡은 짐승이 훨씬 많았다. 왕자와 여러 신하들은 주몽을 죽이려 하였다. 주몽의 어머니가 그들의 책략을 몰래 알아 내고 주몽에게 말했다. "사람들이 장차 너를 죽이려 한다. 너의 재능과 지략이라면 어디간들 살지 못하겠는가? 여기에서 주저하다가 해를 당하기보다 차라리 멀리 가서 큰 일을 도모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에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등의 세 사람과 벗이 되어, 엄호수[개사수라고도 하는데, 현재의 압록강 동북방에 있다.]에 이르렀다. 거기에서 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다리가 없었다. 그들은 추격해오는 군사들에게 붙잡힐까 걱정이 되었다. 주몽이 강을 향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는 길인데, 뒤쫓는 자들이 다가오니 어찌해야 하는가?" 이 때, 물고기와 자라가 물위로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주몽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와 자라는 곧 흩어졌으므로 뒤쫓던 기병들은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주몽이 모둔곡[[위서]에는 '보술수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러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사람은 삼베 옷을 입었고, 한 사람은 장삼을 입었고, 한 사람은 수초로 만든 옷을 입고 있었다. 주몽이 물었다. "그대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성과 이름이 무엇인가?" 삼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재사"라고 대답했으며, 장삼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무골"이라고 대답했고, 수초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은 "이름이 묵거"라고 대답하면서 성은 말하지 않았다. 주몽은 재사에게는 극씨, 무골에게는 중실씨, 묵거에게는 소실씨라는 성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곧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바야흐로 하늘의 명을 받아 나라의 기틀을 창건하려 하는데, 마침 세 분의 어진 인물을 만났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 준 사람이 아니겠는가?" 주몽은 드디어 그들의 재능을 헤아려 각각 일을 맡기고, 그들과 함께 졸본천[[위서]에는 '흘승골성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다.]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하가 준험한 것을 보고, 마침내 그곳을 도읍으로 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미쳐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가에 초막을 짓고 살았다.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이에 따라 고를 성씨로 삼았다.[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을 때, 그 곳 왕에게는 아들이 없었는??, 주몽이 비상한 사람임을 알아보고,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으며, 왕이 별세하자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에 주몽의 나이 22세였으며, 한 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신라 시조 혁거세 21년 갑신년이었다. 사방에서 소문을 듣고 와서 이곳에 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곳이 말갈부락과 인접하여 있었으므로, 그들이 침범할까 염려하여 물리쳐 버리니, 말갈이 두려워 하여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다. 왕은 비류수에 채소가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상류에 사람이 산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따라 왕은 사냥을 하며 그곳을 찾아 올라가 비류국에 이르렀다. 그 나라 임금 송양이 나와 왕을 보고 말했다. "과인이 바닷가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와서 군자를 만난 적이 없는데,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또한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 주몽은 "나는 천제의 아들로서, 모처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대답하였다. 송양이 말했다. "우리 집안은 누대에 걸쳐 왕 노릇을 하였고, 또한 땅이 비좁아 두 임금을 세울 수 없는데, 그대는 도읍을 정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속국이 되는 것이 어떤가?" 왕이 그의 말에 분노하여 그와 논쟁을 벌이다가 다시 활 쏘기로 재주를 비교하게 되었는데, 송양은 대항할 수 없었다.
○二年, 夏六月, <松讓>以國來降, 以其地爲<多勿都>, 封<松讓>爲主. <麗>語謂復舊土爲'多勿', 故以名焉.
2년 여름 6월, 송양이 나라를 바치며 항복했다. 그곳을 다물도로 개칭하고, 송양을 그곳의 군주로 봉했다. 고구려 말로 옛 땅을 회복한 것을 '다물'이라 하기 때문에 그곳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三年, 春三月, 黃龍見於< 嶺>. 秋七月, 慶雲見< 嶺>南, 其色{邑} 靑赤.
李丙燾. 舊本.
3년 봄 3월, 황룡이 골령에 나타났다.
가을 7월, 상서로운 구름이 골령 남쪽에 나타났다. 그 빛이 푸르고 붉었다.
○四年, 夏四月, 雲霧四起, 人不辨色七日. 秋七月, 營作城郭宮室.
4년 여름 4월,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일어나 7일 동안이나 사람들이 색깔을 분별하지 못했다.
가을 7월, 성곽과 궁실을 건축하였다.
○六年, 秋八月, 神雀集宮庭. 冬十月, 王命<烏伊>·<扶芬奴>, 伐<大白山{太白山}> 東南<荇人國>, 取其地, 爲城邑.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날아 들었다.
겨울 10월, 왕이 오이와 부분노에게 명하여 태백산 동남방에 있는 해인국을 치게하고,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었다.
○十(+一) 年, 秋九月, 鸞集於王臺. 冬十一月, 王命<扶尉 >, 伐<北沃沮>, 滅之, 以其地爲城邑.
趙炳舜. 『三國史節要』.
10년 가을 9월, 난새가 왕대에 모였다.
겨울 11월, 왕이 부위염에게 명하여 북옥저를 격멸하고, 그 지역을 성읍으로 만들었다.
○十四年, 秋八月, 王母<柳花>薨於<東扶餘>. 其王<金蛙>以太后禮, 葬之, 遂立神廟. 冬十月, 遣使<扶餘>饋方物, 以報其德.
14년 가을 8월,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었다. 그곳의 왕 금와가 그를 태후의 예로 장례지내고, 그의 신묘를 세웠다.
겨울 10월, 사신을 부여에 보내 토산물을 주어 그 은덕에 보답하였다.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19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瑠璃明王 유리명왕>
○<瑠璃明王>立. 諱<類利>, 或云<孺留>. <朱蒙>元子, 母<禮>氏. 初, <朱蒙>在<扶餘>, 娶<禮>氏女有娠. <朱蒙>歸後乃生, 是爲<類利>. 幼年, 出遊陌上, 彈雀誤破汲水婦人瓦器. 婦人罵曰: "此兒無父, 故頑如此." <類利>慙, 歸問母氏: "我父何人, 今在何處?" 母曰: "汝父非常人也, 不見容於國, 逃歸南地, 開國稱王. 歸時謂予曰: '汝若生男子, 則言我有遺物, 藏在七稜石上松下, 若能得此者, 乃吾子也.'" <類利>聞之, 乃往山谷, 索之不得, 倦而還. 一旦在堂上, 聞柱礎間若有聲, 就而見之, 礎石有七稜. 乃搜於柱下, 得斷劒一段. 遂持之與<屋智>·<句鄒>·<都祖>等三人, 行至<卒本>, 見父王, 以斷劒奉之. 王出己所有斷劒, 合之, 連爲一劒. 王悅之, 立爲太子, 至是繼位.
유리명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유리인데, 혹은 유류라고도 하였다. 그는 주몽의 맏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씨이다. 에전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녀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녀는 주몽이 떠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유리였다. 유리가 어렸을 때, 거리에 나가 놀면서 참새를 쏘다가 물긷는 부인의 물동이를 잘못 쏘아 깨뜨렸다. 그 부인이 꾸짖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애비가 없어서 이렇게 논다"라고 하였다. 유리가 부끄럽게 여기고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며 지금은 어디에 계십니까?"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너의 아버지는 비상한 사람이어서 나라에서 용납하지 않았기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떠날 때 나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의 유물이 칠각형의 돌 위에 있는 소나무 밑에 숨겨져 있다고 말하시오. 만일 이것을 발견하면 곧 나의 아들일 것이오'라고 말했다." 유리가 이 말을 듣고 바로 산골로 들어가 그것을 찾았으나 실패하고 지친 상태로 돌아왔다. 하루는 유리가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기둥과 주춧돌 사이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듯하여 가보니, 주춧돌이 칠각형이었다. 그는 곧 기둥 밑을 뒤져서 부러진 칼 조각을 찾아냈다. 그는 마침내 이것을 가지고 옥지·구추·도조 등의 세 사람과 함께 졸본으로 가서, 부왕을 만나 부러진 칼을 바쳤다. 왕이 자기가 가졌던 부러진 칼 조각을 꺼내어 맞추어 보니, 하나의 칼로 이어졌다. 왕이 기뻐하여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이 때에 와서 왕위를 잇게된 것이다.
○二年, 秋七月, 納<多勿>侯<松讓>之女爲妃. 九月, 西狩獲白獐. 冬十月, 神雀集王庭. <百濟>始祖<溫祚>立.
2년 가을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9월, 서쪽 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백제 시조 온조가 왕위에 올랐다.
○三年, 秋七月, 作離宮於< 川>. 冬十月, 王妃<松>氏薨. 王更娶二女{姬} 繼室, 一曰<禾姬>, < 川>人之女也, 一曰<雉姬>, <漢>人之女也. 二女爭寵, 不相和, 王於< 谷>造東西二宮, 各置之. 後, 王田於<箕山>, 七日不返. 二女{姬} 爭鬪, <禾姬>罵<雉姬>曰: "汝<漢>家婢妾, 何無禮之甚乎?" <雉姬>慙恨亡歸. 王聞之, 策馬追之, <雉姬>怒不還. 王嘗息樹下, 見黃鳥飛集, 乃感而歌曰: " 黃鳥, 雌雄相依, 念我之獨, 誰其與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가을 7월, 골천에 이궁을 지었다.
겨울 10월,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이 다시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후취를 삼았는데, 한 사람은 화희이니 골천 사람의 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치희이니 한 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는 서로 사랑을 차지하려 했으므로 화목하게 지내지 못했다. 왕은 양곡에 동궁과 서궁을 지어 각각 따로 살게 하였다. 그 후, 왕이 기산으로 사냥을 떠나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여인은 다투다가 화희가 치희를 욕하며 말했다. "네가 한인의 집에 살던 비첩으로서 어찌 무례함이 이토록 심한가?"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집으로 도망가버렸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여 쫓아 갔으나, 치희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왕이 나무 밑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꾀꼬리가 모여드는 것을 보고 느끼는 바 있어 노래를 불렀다. "꾀꼬리도 이리저리, 암수가 서로 의지하며 노는데, 외로운 나는, 누구와 함께 돌아가리."
○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王曰: "然則爲之奈何?" 答曰: "宜使人反間入彼, 僞說: '我國小而兵弱. 怯而難動' 則<鮮卑>必易我, 不爲之備. 臣俟其隙, 率精兵從間路, 依山林以望其城. 王使以羸兵出其城南, 彼必空城而遠追之. 臣以精兵走入其城, 王親率勇騎挾擊之, 則可克矣." 王從之.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王念<扶芬奴>功, 賞以食邑, 辭曰: "此王之德也. 臣何功焉." 遂不受, 王乃賜黃金三十斤·良馬一十匹.
11년 여름 4월, 왕이 여러 신하에게 말했다. "선비가 자기네 땅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려 하지 않으며, 정세가 유리하면 나와서 약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수비를 하니, 나라의 걱정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제거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장차 큰 상을 주겠노라." 부분노가 앞으로 나와 "선비는 지세가 험준하며, 사람들이 용감하고 우직하여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그들을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그렇다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물었다. 부분노가 대답했다. "거짓 간첩을 만들어 그들에게 보내어 거짓말을 하되, '우리 나라는 작고, 군대가 약하므로 겁이 나서 움직이지 못한다'고 하면, 선비가 반드시 우리를 얕잡아 보고 수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그 틈을 이용하여 정병을 거느리고 사잇길로 들어가 산림 속에 숨어서 그 성을 노리고 있겠습니다. 이 때 왕께서 약간의 군사를 적의 성 남쪽으로 출동시킨다면, 적은 틀림없이 성을 비우고 먼 곳까지 추격해올 것입니다. 그리되면 저는 정병을 거느리고 그들의 성으로 달려 들어가고, 왕께서 용감한 기병을 거느리고 그들을 양쪽에서 협공하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 의견을 따랐다. 선비는 과연 성문을 열고 군사를 출동시켜 추격해왔다. 이 때, 부분노가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달려 들어가니, 선비가 이것을 보고 크게 놀래어 다시 성안으로 달려 들어 왔다. 부분노는 성문에서 싸워 그들을 수없이 목베어 죽였다. 그 때, 왕이 깃발을 들고 북을 올리며 전진하였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이하여, 대책이 없고 힘이 다하자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 왕이 부분노의 공로를 생각하여, 상으로 식읍을 주었다. 부분노는 사양하며 "이는 왕의 덕이 훌륭한 결과입니다. 저에게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한 채, 상을 받지 않았다. 왕은 황금 30근과 좋은 말 열 필을 주었다.
○十三年, 春正月, 熒惑守心星.
13년 봄 정월, 화성이 심성 성좌에 머물렀다.
○十四年, 春正月, <扶餘>王<帶素>遣使來聘, 請交質子, 王憚<扶餘>强大, 欲以太子<都切>爲質, <都切>恐不行, <帶素> 之. 冬十(-一) 月, <帶素>以兵五萬來侵, 大雪人多凍死, 乃去.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보내와 방문하고, 인질의 교환을 요청하였다. 왕은 부여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도절이 두려워하여 가지 않자 대소가 분개하였다.
겨울 11월, 대소가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와서 침범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동사자가 많이 생기자 곧 돌아갔다.
○十九年, 秋八月, 郊豕逸, 王使<託利>·<斯卑>追之, 至<長屋>澤中得之, 以刀斷其脚筋. 王聞之怒曰: "祭天之牲, 豈可傷也?" 遂投二人坑中殺之. 九月, 王疾病, 巫曰: "<託利>·<斯卑>爲崇{ } ." 王使謝之, 卽愈.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가을 8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 났다. 왕은 탁리와 사비를 시켜 잡아오게 하였다. 그들은 장옥 늪에 이르러 돼지를 발견하고, 칼로 다리의 힘줄을 잘랐다.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했다. "하늘에 제사지낼 희생에 어찌 상처를 낼 수 있는가?" 왕은 두 사람을 구덩이 속에 던져 죽였다.
9월, 왕이 병들었다. 무당이 "탁리, 사비의 귀신이 화근이 되었다"고 하므로, 왕이 그를 시켜 귀신에게 사죄하게 하였다. 곧 왕의 병이 나았다.
○二十年, 春正月, 太子<都切>卒.
20년 봄 정월, 태자 도절이 죽었다.
○二十一年, 春三月, 郊豕逸. 王命掌牲<薛支>, 逐之. 至<國內><尉那巖>得之, 拘於<國內>人家, 養之. 返見王, 曰: "臣逐豕, 至<國內><尉那巖>,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 鹿魚鼈之産. 王若移都, 則不唯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也." 夏四月, 王田于<尉中林>. 秋八月, 地震. 九月, 王如<國內>, 觀地勢, 還至<沙勿>澤, 見一丈夫坐澤上石. 謂王曰: "願爲王臣." 王喜許之, 因賜名<沙勿>, 姓<位>氏.
21년 봄 3월, 교제에 쓸 돼지가 달아 났다. 왕이 장생 설지에게 명하여 뒤쫓게 하였다. 그는 국내 위나암에 이르러서 돼지를 붙잡아 우선 국내 사람의 집에서 기르게 하였다. 설지가 돌아와 왕에게 말했다. "제가 돼지를 따라 국내 위나암에 갔는데, 그곳 자연이 준험하고,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며, 또한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그곳으로 도읍을 옮긴다면,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 아니라, 또한 전쟁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여름 4월, 왕이 위중림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8월, 지진이 있었다.
9월, 왕이 국내에 가서 지세를 돌아 보고 오다가 사물 못에 이르러, 한 사나이가 연못 가운데의 돌 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가 왕에게 "왕의 신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흔쾌히 허락하고, 그에게 사물이라는 이름과 위씨라는 성을 주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遷都於<&國內(國內城)> , 築<尉那巖>城. 十二月, 王田于<質山>陰, 五日不返. 大輔<陜父>諫曰: "王新移都邑, 民不安堵. 宜孜孜焉, 刑政之是恤, 而不念此, 馳騁田獵, 久而不返, 若不改過自新, 臣恐政荒民散, 先王之業, 墜地." 王聞之, 震怒, 罷<陜父>職, 司官園. <陜父>憤去之<南韓>.
趙炳舜. 『三國史記』 志.
22년 겨울 10월, 왕이 국내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 북쪽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 대보 협보가 말했다. "왕께서 새로 도읍을 옮겨, 백성들이 아직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응당 열심히 사회의 안정과 정치와 백성의 구휼 사업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러한 일을 생각하지 않고, 말을 달려 사냥을 떠나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왕께서 만일 이러한 잘못을 고쳐 자신을 새롭게 하지 않는다면, 정치는 황폐하고 백성들은 흩어져 선왕의 업적이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협보의 관직을 파면하고, 관가의 장원을 관리하게 하였다. 협보가 분개하여 그 나라를 떠나 남한으로 갔다.
○二十三年, 春二月, 立王子<解明>, 爲太子, 大赦國內.
23년 봄 2월, 왕의 아들 해명을 태자를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賜姓<羽>氏, 尙王女.
24년 가을 9월, 왕이 기산의 들에서 사냥하다가 비상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있었다. 그를 조정에 등용하여 우씨 성을 주고, 왕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王太子<解明>在古都, 有力而好勇. <黃龍國>王聞之, 遣使以强弓爲贈. <解明>對其使者, 挽而折之曰: "非予有力, 弓自不勁耳." <黃龍王>慙. 王聞之怒, 告<黃龍>曰: "<解明>爲子不孝, 請爲寡人誅之." 三月, <黃龍王>遣使, 請太子相見. 太子欲行, 人有諫者, 曰: "今隣國無故請見, 其意不可則{測} 也." 太子曰: "天之不欲殺我, <黃龍王>其如我何?" 遂行. <黃龍王>始謀殺之, 及見不敢加害, 禮送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27년 봄 정월, 왕태자 해명이 옛 도읍에 남아 있었다. 그는 힘이 세고 용감하였다. 황룡국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센 활을 선사하였다. 해명이 그 사신 앞에서 활을 당겨 꺾으면서 "내가 힘이 센 것이 아니라 활 자체가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황룡왕이 부끄러워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황룡왕에게 "해명은 자식으로서 효성이 없으니, 청컨대 나를 위하여 죽여 버리라"라고 말했다.
3월, 황룡왕이 사신을 보내 태자와 만나기를 요청하였다. 태자가 가려고 하니 어떤 사람이 만류하며 간하기를 "오늘 이웃 나라에서 이유없이 만나자고 하니, 그 의도를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태자가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황룡왕이 나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드디어 떠났다. 황룡왕이 처음에는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만나보고는 감히 해치지 못하고, 예절을 갖추어 돌려 보냈다.
○二十八年, 春三月, 王遣人, 謂<解明>曰: "吾遷都, 欲安民以固邦業, 汝不我隨, 而恃剛力, 結怨於隣國, 爲子之道, 其若是乎?" 乃賜劒使自裁. 太子卽欲自殺, 或止之曰: "大王長子已卒, 太子正當爲後. 今使者一至而自殺, 安知其非詐乎?" 太子曰: "嚮, <黃龍王>以强弓遺之, 我恐其輕我國家, 故挽折而報之, 不意見責於父王. 今父王以我爲不孝, 賜劒自裁, 父之命, 其可逃乎?" 乃往<礪津><東原>, 以槍揷地, 走馬觸之而死, 時年, 二十一歲. 以太子禮, 葬於<東原>, 立廟. 號其地爲<槍原{槍京}> .
○論曰: 孝子之事親也, 當不離左右以致孝, 若<文王>之爲世子. <解明>在於別都, 以好勇聞, 其於得罪也, 宜矣. 又聞之, 傳曰: "愛子敎之以義方, 弗{不} 納於邪." 今王, 始未嘗敎之, 及其惡成, 疾之已甚, 殺之而後已. 可謂父不父, 子不子矣. 秋八月, <扶餘>王<帶素>使來讓王曰: "我先王, 與先君<東明王>相好, 而誘我臣逃至此, 欲完聚以成國家. 夫國有大小, 人有長幼, 以小事大者, 禮也, 以幼事長者, 順也. 今王若能以禮順事我, 則天必佑{祐} 之, 國祚永終, 不然則欲保其社稷, 難矣." 於是, 王自謂: 立國日淺, 民孱兵弱, 勢合忍恥屈服, 以圖後 , 乃與群臣謀, 報曰: "寡人僻在海隅, 未聞禮義. 今承大王之敎, 敢不惟命之從." 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扶餘王>聞之, 問群下. 有一老 對曰: "累卵者危也, 不毁其卵者安也." 其意曰: 王不知己危, 而欲人之來, 不如易危以安而自理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8년 봄 3월, 왕이 사람을 보내 해명에게 말했다. "내가 도읍을 옮긴 것은, 백성들을 안정시켜 국가의 위업을 다지려는 것인데, 네가 나를 따르지 않고 힘이 센 것을 믿고 이웃 나라와 원한을 맺었으니, 자식된 도리가 이와 같을 수 있는가?" 그리고 태자에게 칼을 주어 자결하게 하였다. 태자가 즉시 자결하려 하니 어떤 사람이 말리면서 말했다. "대왕의 맏아들이 이미 죽었으므로, 태자께서는 정당하게 후계자가 될 것입니다. 지금 왕의 사자가 한 번 와서 말한다 하여 자결한다면, 왕의 지시가 진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태자가 말했다. "전번에 황룡왕이 강한 활을 보냈기에, 나는 그들이 우리 나라를 업신여길까 걱정되어, 일부러 활을 잡아 당겨 꺾음으로써 답한 것인데, 뜻밖에 부왕의 견책을 당하게 되었다. 이제 부왕이 나를 불효하다고 생각하여 칼을 내려 자결케 하니, 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겠느냐?" 태자는 여진 동원으로 가서 창을 땅에 꽂아 놓고, 말을 타고 달려 그 창에 찔려 자결하였다. 이 때 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 예식으로 동원에 장사지내고, 그곳에 사당을 세웠다. 이에 따라 그 땅을 창원이라 하였다.
저자의 견해 : 효자가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는, 마땅히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으로 효도를 삼아, 마치 문왕이 세자 시절에 행동하듯 하여야 한다. 해명은 옛 도읍에 살면서 용맹을 좋아한다고 소문이 났으니, 그는 당연히 죄를 범한 것이다. 또한 전해오는 말에 "아들을 사랑하거든 옳은 방향으로 가르치고, 사악한 길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으니, 왕이 처음에는 한 번도 가르친 일이 없다가, 죄악이 이루어진 다음에 지나치게 미워하여 죽여 버리고 말았으니, 이야말로 애비는 애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가을 8월, 부여왕 대소의 사신이 와서 왕을 꾸짖으며 "우리 선왕이 그대의 선왕 동명왕과 서로 의좋게 지냈는데, 이제 우리 신하들을 이곳으로 도망하여 오도록 유인하는 것은, 백성을 모두 모아 나라를 세우려는 것이다. 나라에는 대국과 소국의 구분이 있고, 사람에도 어른과 아이의 구분이 있으니,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것은 예절이며, 아이가 어른을 섬기는 것은 순리이다. 이제 왕이 만약 예절과 순리로써 우리를 섬긴다면, 하늘이 반드시 도와 나라의 운명이 영원히 보존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직을 보존하려 해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왕은, 나라를 세운 역사가 짧으며, 백성과 군대는 약하므로, 치욕을 참고 굴복하여, 후일의 성과를 도모하는 것이 형세에 합치된다고 스스로 말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의논하여 부여왕에게 "과인이 바다 한 구석에 외따로 살아왔기에 예의에 대한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제 대왕의 교시를 받고 보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회답하였다. 이 때, 왕자 무휼은 나이가 아직 어렸다. 그가 왕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직접 부여의 사신을 보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현명하고 재주가 많았었는데, 대왕이 질투하고 모해하였고, 부왕에게 말이나 기르게 하는 직위를 주도록 참소하여 욕을 보인 까닭에 불안하여 탈출했던 것이다. 이제 대왕이 전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군사가 많은 것을 믿어 우리 나라를 멸시하고 있으니, 사신은 돌아가서 대왕에게 '이곳에 알을 쌓아 놓았으니, 만약 대왕이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내가 대왕을 섬길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못하겠다.'고 보고하라." 부여왕이 이 말을 듣고 여러 사람에게 그 뜻을 두루 물었다. 한 노파가 "쌓아놓은 알은 위태로운 것이니, 그 알을 무너뜨리지 않는 자는 편안할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노파의 말은 곧, 왕이 자신에게 위기가 왔음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남이 와서 굴복하기를 강요하고 있으니, 이는 스스로 위기를 만들지 않고 차라리 평화를 택하여 자기 나라를 먼저 잘 다스리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二十九年, 夏六月, <矛川>上有黑蛙與赤蛙群鬪, 黑蛙不勝, 死. 議者曰: "黑, 北方之色, <北扶餘>破滅之徵也." 秋七月, 作離宮於<豆谷>.
29년 여름 6월, 모천에서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떼지어 싸우다가, 검은 개구리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해설하는 사람이 "검은 것은 북방의 색깔이니, 북부여가 파멸될 징조"라고 말했다.
가을 7월, 두곡에 이궁을 지었다.
○三十一年, <漢><王莽>發我兵, 伐胡. 吾人不欲行, 强迫遣之, 皆亡出塞, 因犯法爲寇. <遼西>大尹<田譚>追擊之, 爲所殺, 州郡歸咎於我. <嚴尤>奏言: "<貊>人犯法, 宜令州郡, 且慰安之. 今猥被以大罪, 恐其遂叛. <扶餘>之屬, 必有和者, <匈奴>未克, <扶餘>·< 貊{穢貊}> 復起, 此大憂也." <王莽>不聽, 詔<尤>擊之. <尤>誘我將<延丕{侯雛}> , {斬} 之, 傳首京師.[兩<漢書>及<南北史>皆云: "誘<句麗>侯< {騶 /鄒 }>斬之.] <莽>悅之, 更名吾王爲<下句麗侯>, 布告天下, 令咸知焉. 於是, 寇<漢>邊地, 愈甚.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後漢書]. [梁書]. [北史].[북한본].
31년, 한 나라 왕망이 우리 군사를 동원하여 오랑캐를 치고자 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가기를 원하지 않으므로 강제로 협박하여 보내려 하니, 모두 변방으로 도망하여 법을 위반하고 약탈을 하였다. 요서 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죽었다. 한 나라 주와 군에서는 우리에게 잘못을 돌렸다. 엄우가 왕망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맥(貊) 사람들이 법을 위반하고 있으니, 마땅히 (요동과 현토의) 주군들로 하여금 그들을 위무토록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지금 함부로 그들에게 큰 죄를 묻게 되면, 그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된다. 부여의 족속 가운데 반드시 그들을 추종하는 자가 있을 것이니, 우리가 오랑캐를 부수지 못하고 있는 지금 다시 부여, 예맥이 일어난다면 이는 큰 걱정거리이다"라고 하였다. 왕망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엄우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엄우가 우리 장수 연비를 꾀어내어 목을 베어 한 나라 서울로 보냈다.[양[한서]와 [남북사]에는 모두 "구려후 추(騶)를 꾀어 목을 베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왕망이 기뻐하여 우리 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로 개칭하고, 이를 천하에 포고하여 모두 알게 하였다. 이로부터 한 나라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三十二年, 冬十一月, <扶餘>人來侵. 王使子<無恤>, 率師禦之. <無恤>以兵小, 恐不能敵, 設奇計, 親率軍, 伏于山谷以待之. <扶餘>兵直至<鶴盤嶺>下, 伏兵發, 擊其不意, <扶餘>軍大敗, 棄馬登山. <無恤>縱兵盡殺之.
32년 겨울 11월, 부여가 침범해왔다. 왕이 아들 무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무휼은 병력이 적어 대적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한 계책을 내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산골짜기에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부여 군사가 곧바로 학반령 아래에 이르자, 숨겼던 군사를 출동시켜 불의의 공격을 하니, 부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마필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휼이 군사를 풀어 그들을 전부 죽여 버렸다.
○三十三年, 春正月, 立王子<無恤>爲太子, 委以軍國之事. 秋八月, 王命<鳥伊{烏伊}> ·<摩離>, 領兵二萬, 西伐<梁貊>, 滅其國, 進兵襲取<漢><高句麗縣
>.[縣屬<玄 郡>.]
『북한본』.
33년 봄 정월, 왕자 무휼을 태자를 삼고, 군사와 국정에 관한 일을 맡겼다.
가을 8월, 왕이 오이와 마리에게 명하여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양맥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계속 진군하여 한 나라의 고구려현을 습격 탈취토록 하였다.[현은 현토군에 속한다.]
○三十七年, 夏四月, 王子<如津>, 溺水死. 王哀慟, 使人求屍, 不得. 後<沸流>人<祭須>得之, 以聞, 遂以禮葬於<王骨嶺>, 賜<祭須>金十斤·田十頃. 秋七月, 王幸<豆谷>. 冬十月, 薨於<豆谷>離宮. 葬於<豆谷><東原>, 號爲<琉璃明王{瑠璃明王}> .
三國史記卷第十三.
趙炳舜. 『高句麗本紀』.
37년 여름 4월, 왕자 여진이 물에 빠져 죽었다. 왕이 슬퍼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시체를 찾게 하였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 후, 비류 사람 제수가 시체를 찾았다고 알려왔으므로, 곧 예식을 갖추어 왕골령에 장사지내고,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을 주었다.
가을 7월, 왕이 두곡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두곡 이궁에서 죽었다. 두곡 동원에 장사지내고, 호를 유리명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3 끝
三國史記卷第十四 삼국사기 권 제 14
高句麗本紀第二 <大武神王>·<閔中王>·<慕本王>.
고구려본기 제 2 대무신왕, 민중왕, 모본왕.
<大武神王 대무신왕>
○<大武神王>立.[或云<大解宋留王{大解朱留王}> .] 諱<武恤>, <&琉璃王{瑠璃明王}> 第三子. 生而聰慧, 壯而雄傑有大略. <&琉璃王{瑠璃明王}> 在位三十三年, 甲戌, 立爲太子, 時年十一歲, 至是卽位. 母<松>氏, <多勿國>王<松讓>女也.
『북한본』.趙炳舜. 『高句麗本紀』.趙炳舜. 『高句麗本紀』.
대무신왕이 왕위에 올랐다.[혹은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 그의 이름은 무휼이며, 유리왕의 세째 아들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장성하여서는 호걸의 풍모를 갖추었고, 지략이 많았다. 유리왕 재위 33년 갑술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다. 당시의 나이는 11세였는데, 이제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는 송씨이니, 다물국왕 송양의 딸이다.
○二年, 春正月, 京都震. 大赦. <百濟>民一千餘戶來投.
2년 봄 정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백제의 백성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왔다.
○三年, 春三月, 立<東明王>廟. 秋九月, 王田<骨句川>, 得神馬, 名< >. 冬十月, <扶餘>王<帶素>遣使送赤烏, 一頭二身. 初, <扶餘>人得此烏獻之王, 或曰: "烏者黑也, 今變而爲赤, 又一頭二身, 幷二國之徵也, 王其兼<高句麗>乎?" <帶素>喜送之, 兼示或者之言. 王與群臣議答曰: "黑者, 北方之色, 今變而爲南方之色, 又赤烏瑞物也, 君得而不有之, 以送於我, 兩國存亡, 未可知也." <帶素>聞之, 驚悔.
3년 봄 3월,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
가을 9월, 왕이 골구천에서 사냥하다가 신마를 얻어 거루라고 이름 지었다.
겨울 10월, 부여왕 대소가 사신을 통하여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다. 그 까마귀의 머리는 하나이고 몸은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이 까마귀를 얻어서 왕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이 부여왕에게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입니다. 왕께서는 고구려를 합병함이 어떤가요?"라고 말하였다. 대소가 기뻐하며 붉은 까마귀를 고구려에 보내면서, 동시에 이 사람이 한 말도 전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고 부여왕에게 대답하기를 "검은 색은 북방의 색깔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으며,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인데,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나에게 보냈으니, 두 나라의 존망을 알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대소가 이 말을 듣고 놀라며 후회하였다.
○四年, 冬十二月, 王出師, 伐<扶餘>, 次<沸流水>上, 望見水涯, 若有女人, 鼎游 . 就見之, 只有鼎. 使之炊, 不待火自熱, 因得作食, 飽一軍. 忽有一壯夫曰: "是鼎吾家物也, 我妹失之, 王今得之, 請負以從." 遂賜姓<負鼎>氏. 抵<利勿林{理勿林}> 宿, 夜聞金聲. 向明, 使人尋之, 得金璽兵物等, 曰: "天賜也." 拜受之. 上道有一人, 身長九尺許, 面白而目有光. 拜王曰: "臣是<北溟>人<怪由>. 竊聞大王北伐<扶餘>, 臣請從行, 取<扶餘>王頭." 王悅許之. 又有人曰: "臣<赤谷>人<麻盧>, 請以長矛爲導." 王又許之.
李丙燾. 地理志.
4년 겨울 12월, 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부여를 공격하러 가는 도중에 비류수 옆에 머무르며 물가를 바라보니, 마치 어떤 여인이 솥을 들고 유희를 하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인은 없고 솥만 있었다. 왕이 그 솥에 밥을 짓게 하니, 불을 때기도 전에 솥이 저절로 뜨거워졌고, 이에 따라 밥을 짓게 되어 모든 군사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이 때 갑자기 건장한 한 사나이가 나타나 말하기를 "이 솥은 우리 집 물건이었는데, 제 누이가 잃었다가 이제 왕께서 얻었으니, 제가 이 솥을 지고 왕을 따라가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곧 그에게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주었다. 왕이 이물림에 도착하여 묵게 되었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을 무렵에 사람을 시켜 그곳을 찾는 중에 금으로 만든 옥새와 병기 등을 얻었다. 왕이 "이는 하늘이 주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절을 하고 받았다. 길을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의 키는 9척 가량이었으며, 얼굴이 희고 눈에서 광채가 빛났다. 그는 왕에게 절을 하고 "저는 북명 사람 괴유입니다. 듣건대 대왕께서 북쪽으로 부여를 친다하니 제가 따라 가서 부여왕의 머리를 베어 오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또한 어떤 사람이 "저는 적곡사람 마로입니다. 긴 창을 들고 길을 인도하게 허락하여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왕이 이를 또한 허락하였다.
○五年, 春二月, 王進軍於<扶餘國>南, 其地多泥塗{ } , 王使擇平地爲營, 解鞍休卒, 無恐懼之態. <扶餘>王擧國出戰. 欲掩其不備, 策馬以前, 陷 不能進退. 王於是揮<怪由>. <怪由>拔劍號吼擊之, 萬軍披靡, 不能支. 直進執<扶餘>王, 斬頭. <扶餘>人, 旣失其王, 氣力 折, 而猶不自屈, 圍數重. 王以糧盡士饑, 憂懼不知所爲. 乃乞靈於天, 忽大霧咫尺不辨人物七日. 王令作草偶人, 執兵立營內外, 爲疑兵. 從間道潛軍夜出. 失<骨句川>神馬, <沸流源>大鼎. 至<利勿林>, 兵飢不興, 得野獸以給食. 王旣至國, 乃會群臣飮至曰: "孤以不德, 輕伐<扶餘>. 雖殺其王, 未滅其國, 而又多失我軍資, 此孤之過也." 遂親吊死問疾, 以存慰百姓. 是以國人感王德義, 皆許殺身於國事矣. 三月, 神馬< >將<扶餘>馬百匹, 俱至<鶴盤嶺>下<車廻谷>. 夏四月, <扶餘>王<帶素>弟, 至<曷思水>濱, 立國稱王, 是<扶餘>王<金蛙>季子, 史失其名. 初, <帶素>之見殺也, 知國之將亡, 與從者百餘人, 至<鴨 谷>, 見<海頭王>出獵, 遂殺之, 取其百姓, 至此始都, 是爲<曷思王>. 秋七月, <扶餘>王從弟, 謂國人曰: "我先王身亡國滅, 民無所依, 王弟逃竄, 都於<曷思>, 吾亦不肖, 無以興復." 乃與萬餘人來投. 王封爲王, 安置< 那部>. 以其背有絡文, 賜姓<絡>氏. 冬十月, <怪由>卒. 初疾革, 王親臨存問. <怪由>言: "臣<北溟>微賤之人, 屢蒙厚恩. 雖死猶生, 不敢忘報." 王善其言, 又以有大功勞, 葬於<北溟山>陽, 命有司以時祀之.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 2월, 왕이 부여국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그곳에는 진흙 수렁이 많으므로 왕은 평지를 선택하여 병영을 만들고, 말 안장을 풀고 병사들을 쉬게 하여, 두려워 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부여왕이 전국의 군사를 동원하여 출전하였다. 그는 고구려가 대비하지 않는 틈을 노려 기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말을 급히 몰아 진군하다가 진흙 수렁에 빠져서 앞으로 갈수도 뒤로 갈 수도 없게 되었다. 왕이 이 때 괴유를 출동시켰다. 괴유가 칼을 뽑아 들고 고함을 지르며 공격해가니, 부여의 1만여 군졸들이 넘어지고 쓰러져서 버틸 수 없었다. 이 때 괴유가 곧바로 전진하여 부여왕을 붙잡아 목을 베었다. 부여 사람들은 이미 왕을 잃고 기세가 꺾였으나, 그래도 굴복하지 않고 고구려 군사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 군량이 다하고 군사들이 굶주리니 왕은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갑자기 큰 안개가 7일 동안 끼어 지척에서도 사람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었다. 왕은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고 허수아비에게 병기를 들게하여 병영 안팎에 세워서 마치 병사로 보이도록 위장하였다. 그리고 사잇길로 밤을 도와 몰래 행군하였다. 이 와중에 골구천에서 얻은 신마와 비류수 상류에서 얻은 큰 솥을 잃어 버렸다. 이물림에 이르러 군사들이 배고파 일어나지 못하므로 들짐승을 잡아 군사들에게 먹였다. 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음지(飮至)의 예식을 거행하면서 "내가 부덕하여 경솔하게 부여를 공격하였다. 비록 그 왕을 죽였으나 그 나라를 멸망시키지는 못하였으며, 또한 우리 군사와 물자를 많이 잃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전사자를 직접 조상하고, 부상당한 자를 문병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이에 백성들이 왕의 덕행과 의리에 감동되어, 나라 일에 생명을 바치기로 모두 다짐하였다.
3월, 신마 거루가 부여의 말 백 필을 가지고 학반령 아래 차회곡에 왔다.
여름 4월, 부여왕 대소의 아우가 갈사수 가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왕을 자칭하였다. 이 사람은 부여왕 금와의 막내아들인데,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처음에 대소왕이 살해되자 그는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자기를 따르는 자 백여 명을 데리고 압록곡에 이르렀다가, 사냥나온 해두왕을 죽이고 그의 백성을 빼앗았는데, 이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도읍을 정하였다. 이 사람이 곧 갈사왕이다.
가을 7월, 부여왕의 종제가 백성에게 "우리 선왕이 별세하고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고, 왕의 아우는 도망하여 갈사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나 역시 불초하여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라고 말하고, 만여 명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왕이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에 있게 하였다. 그의 등에 낙(絡) 무늬가 있다 하여 성씨를 낙(絡)으로 정하여 주었다.
겨울 10월, 괴유가 죽었다. 처음 그의 병이 위독했을 때 왕이 직접 가서 문병하였다. 그 때 괴유가 "저는 북명의 미천한 사람으로서, 왕의 두터운 은혜를 여러 번 입었습니다. 비록 죽더라도 살아서와 같이 은혜에 보답할 것을 감히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그 말을 훌륭하다고 생각하였고, 또한 그가 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북명산 남쪽에 장사지내고, 관리를 시켜 철에 따라 제사지내게 하였다.
○八年, 春二月, 拜<乙豆智>, 爲右輔, 委以軍國之事.
8년 봄 2월, 을두지를 우보로 삼아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맡겼다.
○九年, 冬十月, 王親征<蓋馬國>, 殺其王, 慰安百姓, 毋{禁} 虜掠, 但以其地爲郡縣. 十二月, <句茶國>王, 聞<蓋馬>滅, 懼害及己, 擧國來降. 由是拓地浸廣.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겨울 10월, 왕이 직접 개마국을 쳐서 그 왕을 죽이고,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왕은 자기 군사들이 백성을 약탈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 지역만 따로 군현으로 만들었다.
12월, 구다국 왕이 개마가 멸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항복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의 개척 지역이 점점 넓어졌다.
○十年, 春正月, 拜<乙豆智>, 爲左輔, <松屋句>爲右輔.
10년 봄 정월, 을두지를 좌보로 삼고, 송옥구를 우보로 삼았다.
○十一年, 秋七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王會群臣, 問戰守之計. 右輔<松屋句>曰: "臣聞恃德者昌, 恃力者亡. 今中國荒儉, 盜賊蜂起, 而兵出無名, 此非君臣定策, 必是邊將規利, 擅侵吾邦. 逆天違人, 師必無功, 憑險出奇, 破之必矣." 左輔<乙豆智>曰: "小敵之强, 大敵之禽也. 臣度大王之兵, 孰與<漢>兵之多, 可以謀伐, 不可力勝." 王曰: "謀伐若何?" 對曰: "今<漢>兵遠鬪, 其鋒不可當也. 大王閉城自固, 待其師老, 出而擊之, 可也." 王然之, 入<尉那巖>城, 固守數旬, <漢>兵圍不解. 王以力盡兵疲, 謂<豆智>曰: "勢不能守, 爲之奈何?" <豆智>曰: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氷{水} 草, 兼旨酒若干, 致 漢軍." 王從之, 貽書曰: "寡人愚昧, 獲罪於上國, 致令將軍帥百萬之軍, 暴露弊境. 無以將厚意, 輒用薄物, 致供於左右." 於是, <漢>將謂城內有水, 不可猝拔. 乃報曰: "我皇帝不以臣駑, 下令出師, 問大王之罪. 及境踰旬, 未得要領, 今聞來旨, 言順且恭, 敢不藉口以報皇帝." 遂引退.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가을 7월, 한의 요동 태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공격과 방어에 대한 계책을 물었다. 우보 송옥구가 말했다. "제가 듣건대 덕을 믿는 자는 창성하고, 힘을 믿는 자는 망한다 하였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흉년이 들어 도적들이 봉기하고 있는데, 이유없이 군사를 일으키니, 이는 조정에서 결정한 사항이 아니고, 필시 변방의 장수가 사욕을 채울 목적으로 우리 나라를 무단 침범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의 이치에 위배되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므로, 그들의 군사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우리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였다가 불시에 기습을 한다면, 적을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좌보 을두지가 말했다. "수가 적은 편이 비록 강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수가 많은 편에게 잡히게 됩니다. 제가 대왕의 군사와 한 나라 군사 중에 어느 편이 많은가를 생각하여 보았는데, 계략으로 그들을 공격할 수 있을지언정 힘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왕이 물었다. "계략으로 공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을두지가 대답했다. "지금 한 나라 군사가 멀리 와서 싸우니, 그들의 서슬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대왕은 성문을 닫고 우리의 군사를 튼튼히 하여, 적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린 후에 나아가 공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이 의견을 옳게 여기고 위나암성에 들어가서 수십일 동안 굳게 수비하였으나 한 나라 군사는 포위를 풀지 않았다. 아군의 힘이 다하고 군사가 피로해졌으므로 두지에게 물었다. "더 이상 수비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으니 어떻게 할까?" 두지가 대답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처하고 있으므로 물있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여,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궁에 처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맛 좋은 술을 준비하여 한 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이 두지의 말에 따라 편지를 보내어 말했다. "내가 우매하여 상국에 죄를 지어, 장군으로 하여금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의 황폐한 경내에서 노숙 생활을 하게 하였다. 장군의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어, 이에 보잘 것 없는 물건이나마 장군의 막하에 보낸다." 이 때 한 나라 장수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빠른 시간 내에 점령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들은 곧 회답하여 말했다. "우리 황제가 나의 어리석음을 생각하지 않고, 나에게 출사의 명령을 내려 대왕의 죄과를 묻게 하였다. 이에 따라 고구려 국경에 온지 열흘이 넘도록 행동할 바를 몰랐는데, 이제 보내 온 편지를 보니 말이 순리에 맞고 공손하니, 내가 황제에게 이 말대로 보고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는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十三年, 秋七月, <買溝谷>人<尙須>, 與其弟<尉須>及堂弟<于刀>等來投.
13년 가을 7월, 매구곡 사람 상수가 그의 아우 위수 및 사촌 우도 등을 데리고 귀순하여 왔다.
○十四年, 冬十一月, 有雷. 無雪.
14년 겨울 11월, 우레가 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
○十五年, 春三月, 黜大臣<仇都>·<逸苟>·<焚求>等三人爲庶人. 此三人爲<沸流>部長, 資貪鄙, 奪人妻妾·牛馬·財貨, {恣} 其所欲, 有不與者卽鞭之, 人皆忿{懷忿} 怨. 王聞之, 欲殺之, 以<東明>舊臣, 不忍致極法, 黜退而已. 遂使南部使者<鄒 素>, 代爲部長. < 素>旣上任, 別作大室以處, 以<仇都>等罪人, 不令升堂. <仇都>等詣前, 告曰: "吾 小人, 故犯王法, 不勝愧悔. 願公赦過, 以令自新, 則死無恨矣." < 素>引上之, 共坐曰: "人不能無過, 過而能改, 則善莫大焉." 乃與之爲友. <仇都>等感愧, 不復爲惡. 王聞之曰: "< 素>不用威嚴, 能以智懲惡, 可謂能矣." 賜姓曰<大室>氏. 夏四月, 王子<好童>, 遊於<沃沮>. <樂浪王><崔理>出行, 因見之. 問曰: "觀君顔色, 非常人, 豈非<北國><神王>之子乎?" 遂同歸, 以女妻之. 後, <好童>還國潛遣人, 告<崔>氏女曰: "若能入而國武庫, 割破鼓角, 則我以禮迎, 不然則否." 先是, <樂浪>有鼓角, 若有敵兵, 則自鳴, 故令破之. 於是, <崔>女將利刀, 潛入庫中, 割鼓面·角口, 以報<好童>. <好童>勸王襲<樂浪>. <崔理>以鼓角不鳴, 不備, 我兵掩至城下, 然後知鼓角皆破. 遂殺女子, 出降.[或云: 欲滅<樂浪>, 遂請婚, 娶其女, 爲子妻, 後使歸本國, 壞其兵物.] 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 元妃恐奪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 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論曰: 今王信讒言, 殺無辜之愛子, 其不仁不足道矣, 而<好童>不得無罪. 何則? 子之見責於其父也, 宜若<舜>之於< { }> , 小杖則受, 大杖則走, 期不陷父於不義. <好童>不知出於此, 而死非其所, 可謂執於小謹而昧於大義, 其公子<申生>之譬耶? 十二月, 立王子<解憂>爲太子. 遣使入<漢>朝貢. <光虎帝{光武帝}> 復其王號, 是<立武{建武}> 八年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資治通鑑』.趙炳舜. 『資治通鑑』.
15년 봄 3월, 대신 구도·일구·분구 등의 세 사람을 축출하여 서인으로 만들었다. 이 세 사람은 비류의 부장으로 있을 때, 자질이 탐욕스럽고 야비하여, 남의 처첩과 우마와 재물을 함부로 빼앗으며,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했었다. 만약 이를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곧 매질을 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분개하며 원망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그들을 처형하고자 하였으나 동명왕의 옛 신하들을 차마 극형에 처할 수 없다 하여 축출한 것이다. 그리고 곧 남부 사자 추발소로 하여금 그들을 대신하여 부장이 되게 하였다. 발소가 부임한 후, 별도로 큰 집을 짓고 살면서 구도 등은 죄인이라 하여 마루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구도 등이 앞에 와서 말했다. "우리들은 소인이라 왕법을 위반하였으니, 그 부끄럽고 뉘우치는 심정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원컨대 공이 우리들의 죄과를 용서하여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해준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발소가 그들을 오르게 하여 같이 앉아서 말했다. "사람이란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잘못을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없다." 발소는 그들과 더불어 벗을 삼았다. 구도 등이 수치심을 느끼고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발소는 위엄이 아닌 지혜로써 악한 사람을 바로 잡았으니 유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라 하고, 발소에게 대실씨라는 성을 주었다.
여름 4월, 왕자 호동이 옥저에서 유람하고 있었다. 그 때 낙랑왕 최 리가 그곳을 다니다가 그를 보고 물었다.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로구나. 그대가 어찌 북국신왕의 아들이 아니리오?" 낙랑왕 최 리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가서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 후, 호동이 본국에 돌아와서 남몰래 아내에게 사자를 보내 말했다. "네가 너의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부수어 버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이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다면 너를 맞아 들이지 않겠다." 옛날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었는데, 적병이 쳐들어 오면 저절로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그녀로 하여금 이를 부수어 버리게 한 것이었다. 이 때 최씨의 딸은 예리한 칼을 들고 남모르게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을 찢고 나팔의 입을 베?? 버린 후, 이를 호동에게 알려 주었다. 호동이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 리는 북과 나팔이 울지 않아 방비를 하지 않았고, 우리 군사들이 소리없이 성밑까지 이르게 된 이후에야 북과 나팔이 모두 부수어진 것을 알았다. 그는 마침내 자기 딸을 죽이고 나와서 항복하였다.[낙랑을 없애기 위하여 청혼하고,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를 삼은 다음, 그녀를 본국에 돌려 보내 그 병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설도 있다.]
겨울 11월, 왕자 호동이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 왕비인 갈사왕 손녀의 소생이었다. 그는 얼굴이 미려하여 왕이 매우 귀여워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름도 호동이라고 하였다. 첫째 왕비는 호동이 종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 것을 염려하여, 왕에게 참소하였다. "호동은 나를 무례하게 대하며, 간통하려 한다." 왕이 대답히였다. "너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 하여 미워하느냐?" 첫째 왕비는 왕이 자기를 믿지 않음을 알고, 화가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했다. "청컨대 대왕께서 가만히 엿보소서. 만약 이런 일이 없으면, 내가 죄를 받겠습니다." 이렇게 되자 대왕이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그에게 죄를 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말했다. "그대는 왜 스스로 해명하지 않는가?" 호동이 대답하였다.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왕에게 근심을 더해주는 것이니, 이를 어찌 효라 할 수 있겠는가?" 호동은 곧 칼을 품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저자의 견해 : 왕은 참소하는 말을 믿고, 죄없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였으니, 그의 어질지 못함은 말할 것도 없으나, 호동에게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자식이 아버지에게서 책망을 들었을 때는, 마땅히 순이 고수에게 하듯이 조금 때리면 맞고 많이 때리면 피하여, 아버지가 불의에 빠지지 않게 하여야 할 것이다. 호동은 이러한 행동으로 나아갈 줄을 모르고, 죽지 않을 일로 죽었으니, 가히 작은 성실을 행하기 위하여 대의에 어두웠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옛날의 공자 신생에 비유할 만하다.
12월,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았다.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광무제가 왕호를 회복시켰다. 이 때가 건무 8년이었다.
○二十年, 王襲<樂浪>, 滅之.
20년,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
○二十四年, 春三月, 京都雨雹. 秋七月, 隕霜殺穀. 八月, 梅花發.
24년 봄 3월, 서울에 우박이 내렸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8월, 매화가 피었다.
○二十七年, 秋九月, <漢><光武帝>遣兵渡海, 伐<樂浪>, 取其地, 爲郡縣, <薩水>已南{北} 屬<漢>. 冬十月, 王薨. 葬於<大獸村原{大獸林原}> , 號爲<大武神王>.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27년 가을 9월, 한 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와서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살수 이북이 한 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그를 대수촌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대무신왕이라 하였다.
<閔中王 민중왕>
○<閔中王>, 諱<解色朱{解邑朱}> , <大武神王>之弟也. <大武神王>薨, 大子{太子} 幼少, 不克卽政. 於是, 國人推戴以立之. 冬十一月, 大赦.
李丙燾. [三國遺事].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민중왕의 이름은 해색주이며, 대무신왕의 아우이다. 대무신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정사를 담당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백성들이 해색주를 추대하여 왕으로 세웠다.
겨울 11월,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三月, 宴群臣. 夏五月, 國東大水, 民饑, 發倉賑給.
2년 봄 3월, 여러 신하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다.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三年, 秋七月, 王東狩, 獲白獐. 冬十一月, 星 于南, 二十日而滅. 十二月, 京都無雪.
3년 가을 7월,왕이 동쪽지방으로 사냥을 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혜성이 남쪽에 나타났다가 20일 만에 사라졌다.
12월, 서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四年, 夏四月, 王田於<閔中原>. 秋七月, 又田, 見石窟, 顧謂左右曰: "吾死, 必葬於此, 不須更作陵墓." 九月, 東海人<高朱利>獻鯨魚目, 夜有光. 冬十月, <蠶友落部{蠶支落部}> 大家<戴升>等一萬餘家, 詣<樂浪>投<漢>.[『後漢書』云: "大加<戴升>等萬餘口."].
李丙燾. 地理志. [後漢書].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왕이 민중원에서 사냥을 하였다.
가을 7월, 다시 사냥을 하다가 석굴을 보고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여기에 장사할 것이며, 별도로 능묘를 만들지 말라!"고 하였다.
9월, 동해 사람 고주리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빛이 났다.
겨울 10월, 잠우락부의 대가 대승 등 1만여 호가 낙랑으로 가서 한 나라에 투항하였다.[[후한서]에는 '대가 대승 등 1만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五年, 王薨. 王后及群臣, 重違遺命, 乃葬於石窟, 號爲<閔中王>.
5년에 왕이 별세하였다. 왕후와 여러 신하들이 왕의 유언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지내고, 호를 민중왕이라 하였다.
<慕本王 모본왕>
○<慕本王>, 諱<解憂>[一云<解愛婁>.], <大武神王>元子. <閔中王>薨, 繼而卽位. 爲人, 暴戾不仁, 不恤國事, 百姓怨之.
모본왕의 이름은 해우[해애루라고도 한다.]이며, 대무신왕의 맏아들이다. 민중왕이 별세하자,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사람됨이 포악하고 어질지 못하여 나라 일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원망하였다.
○元年, 秋八月, 大水, 山崩二十餘所. 冬十月, 立王子<翊>爲王大子{太子} .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가을 8월, 홍수가 나서 20여 개 소의 산이 무너졌다.
겨울 10월, 왕자 익을 왕태자로 삼았다.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而<遼東>太守<蔡 {祭 }> , 以恩信待之, 乃復和親. 三月, 暴風拔樹. 夏四月, 殞霜雨雹. 秋八月, 發使賑恤國內饑民.
李丙燾. [後漢書].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의 북평·어양·상곡·태원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 태수 채동이 은혜와 신의로써 대접하므로 다시 화친하였다.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여름 4월,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국내의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四年, 王日增暴虐, 居常坐人, 臥則枕人. 人或動搖, 殺無赦, 臣有諫者, 彎弓射之.
4년, 왕이 날이 갈수록 포악하여,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누웠다. 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활을 쏘았다.
○六年, 冬十一月, <杜魯>弑其君. <杜魯>, <慕本>人, 侍王左右, 慮其見殺, 乃哭. 或曰: "大丈夫何哭爲? 古人曰: '撫我則后, 虐我則 .' 今王行虐以殺人, 百姓之 也, 爾其圖之." <杜魯>藏刀以進王前, 王引而坐. 於是, 拔力{刀} 害之. 遂葬於<慕本原>, 號爲<慕本王>.
三國史記卷第十四.
趙炳舜. 『三國史節要』.
6년 겨울 11월, 두노가 임금을 죽였다. 두노는 모본 사람으로서 왕의 근신이었는데, 자기가 해를 입을까 걱정하여 통곡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대장부가 왜 우는가? 옛 사람의 말에 '나를 사랑하면 임금이요, 나를 학대하면 원수'라고 하였다. 이제 왕이 포악한 짓을 하여 사람을 죽이니, 이는 백성의 원수이다. 그대는 왕을 처치하라"라고 하였다. 두노가 칼을 품고 왕 앞으로 가니 왕이 그를 앉게 하였다. 이 때 두노가 칼을 빼어 왕을 죽였다. 그를 모본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를 모본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4 끝
三國史記卷第十五 삼국사기 권 제 15
高句麗本紀第三 <太祖大王> ·<次大王>.
趙炳舜. 『三國史節要』.
고구려본기 제 3 태조대왕, 차대왕.
<太祖大王 태조대왕>
○<太祖大王{大祖大王}> [或云<國祖王>.], 諱<宮>, 小名<於漱>, <&琉璃王{瑠璃明王}> 子古鄒加<再思>之子也. 母大后{太后} , <扶餘>人也. <慕本王>薨, 太子不肖, 不足以主社稷, 國人迎<宮>繼立. 王生而開目能視, 幼而岐 . 以年七歲, 大后{太后} 垂簾聽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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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국조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궁이고, 아명은 어수이다. 그는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 재사의 아들이고, 어머니 태후는 부여 사람이다. 모본왕이 죽었으나, 태자가 불초하여 나라를 맡을 수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궁을 맞이하여 모본왕에 이어 왕으로 삼았다. 왕은 태어 나면서 눈을 뜨고 볼 수 있었으며, 어린 나이에도 출중한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이 때 나이 7세였기 때문에 태후가 수렴청정 하였다.
○三年, 春?j?, 築<遼西>十城, 以備<漢>兵. 秋八月, 國南, 蝗害穀.
3년 봄 2월, 요서에 10개 성을 쌓아서 한 나라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가을 8월, 남쪽 지방에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四年, 秋土{七} 月, 伐<東沃沮>, 取其土地爲城邑, 拓境東至滄海, 南至<薩水>.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가을 7월,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만들어 국경을 개척하였으니,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七年, 夏四月, 王如<孤岸淵>, 觀魚, 釣得赤翅白魚. 秋七月, 京都大水, 漂沒民屋.
7년 여름 4월, 왕이 고안연에 가서 낚시를 하다가 날개가 붉은 백어를 낚았다.
가을 7월, 서울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물에 잠기거나 떠내려 갔다.
○十年, 秋八月, 東獵, 得白鹿. 國南, 飛蝗害穀.
10년 가을 8월, 동쪽 지방에서 사냥을 하여 흰 사슴을 잡았다.
남쪽 지방에 날아다니는 메뚜기 떼가 나타나 곡식을 해쳤다.
○十六年, 秋八月, <曷思王>孫<都頭>, 以國來降. 以<都頭>爲于台. 冬十月, 雷.
16년 가을 8월, 갈사왕의 손자 도두가 항복해왔다.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
겨울 10월, 우레가 있었다.
○二十年, 春二月, 遣<貫那部>沛者<達賈>, 伐<藻那>, 虜其王. 夏四月, 京都, 旱.
20년 봄 2월, 관나부 패자 달가를 보내 조나를 치고, 그 왕을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서울에 가뭄이 들었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遣<桓那部>沛者<薛儒>, 伐<朱那>, 虜其王子<乙音>, 爲古鄒加.
22년 겨울 10월, 왕이 환나부 패자 설유를 보내 주나를 치고, 그 왕자 을음을 사로잡아 고추가를 삼았다.
○二十五年, 冬十月, <扶餘>使來, 獻三角鹿·長尾免{兎} , 王以爲瑞物, 大赦. 十一月, 京都, 雪三尺.
趙炳舜. 『三國史節要』.
25년 겨울 10월, 부여의 사신이 와서 뿔이 셋 달린 사슴과 꼬리가 긴 토끼를 바쳤다. 왕이 이를 상서로운 것이라 하여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11월, 서울에 눈이 3자 내렸다.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 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46년 봄 3월, 왕이 동쪽 책성으로 가는 도중에, 책성 서쪽 계산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도착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술을 마시면서, 책성 관리들에게 물품을 정도에 따라 하사하였다.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五十年, 秋八月, 遣使安撫<柵城>.
50년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책성의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五十三年, 春正月, <扶餘>使來, 獻虎, 長丈二, 毛色甚明而無尾. 王遣將入<漢><遼東>, 奪掠六縣. 太守<耿夔>出兵拒之, 王軍大敗. 秋九月, <耿夔>擊破<貊>人.
53년 봄 정월, 부여 사신이 와서 호랑이를 바쳤는데, 길이가 1장 2척이며, 털 빛깔은 환하고, 꼬리가 없었다. 왕이 한 나라 요동에 장수를 보내 여섯 개 현을 약탈하게 하였다. 요동 태수 경 기가 군사를 동원하여 대항하였다. 왕의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가을 9월, 경 기가 맥인을 격파하였다.
○五十五年, 秋九月, 王獵<質山>陽, 獲紫獐. 冬十月, <東海谷>守獻朱豹, 尾長九尺.
55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자줏빛 노루를 잡았다.
겨울 10월, 동해곡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그 표범의 꼬리가 아홉 자였다.
○五十六年, 春大旱, 至夏赤地. 民饑, 王發使賑恤.
56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여름이 되자 땅이 붉게 변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五十七年, 春正月, 遣使如<漢>, 賀<安帝>加元服.
57년 봄 정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안제의 성년식을 축하하였다.
○五十九年, 遣使如<漢>, 貢獻方物, 求屬<玄 >.[『通鑑』言: "是年三月, <麗>王<宮>與<穢貊>, 寇<玄 >." 不知或求屬或寇耶, 抑一誤耶?].
59년,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현토에 소속되기를 요구하였다.[[통감]에는 "이 해 3월, 고구려왕 궁이 예맥과 함께 현토를 침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속하기를 원하고, 다른 편으로는 침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어느 한 쪽이 잘못 기록한 것인가?]
○六十二年, 春三月, 日有食之. 秋八月, 王巡守南海. 冬十月, 至自南海.
62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가을 8월, 왕이 남해를 순행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남해에서 돌아왔다.
○六十四年, 春三月, 日有食之. 冬十二月, 雪五尺.
64년 봄 3월, 일식이 있었다.
겨울 12월, 눈이 다섯 자 내렸다.
○六十六年, 春二月, 地震. 夏六月, 王與<穢貊>襲<漢><玄 >, 攻<華麗城>. 秋七月, 蝗雹, 害穀. 八月, 命所司, 擧賢良孝順, 問鰥寡孤獨及老不能自存者, 給衣食.
66년 봄 2월, 지진이 있었다. 여름 6월, 왕이 예맥과 함께 한 나라 현토를 습격하여 화려성을 쳤다.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우박이 내려 곡식이 상하였다. 8월,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선량한 사람, 효성스런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천거하게 하고,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과 늙어서 자기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조사하여,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게 하였다.
○六十九年, 春, <漢><幽州>刺史<馮煥>·<玄 >大守<姚光>·<遼東>太守<蔡諷{蔡風}> 等, 將兵來侵, 擊殺<穢貊>渠帥, 盡獲兵馬財物. 王乃遣弟<遂成>, 領兵二千餘人, 逆<煥>·<光>等. <遂成>遣使詐降, <煥>等信之. <遂成>因據險以遮大軍, 潛遣三千人, 攻<玄 >·<遼東>二郡, 焚其城郭, 殺獲二千餘人. 夏四月, 王與<鮮卑>八千人, 往攻<遼隊縣{遼隧縣}> . <遼東>太守<蔡諷{蔡風} >, 將兵出於<新昌>, 戰沒. 功{兵} 曹 <龍端>·兵馬 <公孫 >, 以身 <諷>, 俱沒{歿} 於陣, 死者百餘人. 冬十月, 王幸<扶餘>, 杞{祀} 大后{太后} 廟. 存問百姓窮困者, 賜物有差. <肅愼>使來, 獻紫狐 及白鷹·白馬, 王宴勞以遣之. 十一月, 王至自<扶餘>. 王以<遂成>統軍國事.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 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李丙燾. [魏志].李丙燾. [魏志].허성도.李丙燾. [後漢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69년 봄, 한 나라 유주 자사 풍 환·현토 태수 요 광·요동 태수 채 풍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예맥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병기와 마필과 재물을 모두 약탈하였다. 왕이 아우 수성에게 군사 2천여 명을 주어서, 풍 환·요 광 등과 싸우게 하였다. 수성이 한 나라 군영에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풍 환 등은 이 말을 믿었다. 수성이 곧 험한 곳에 의지하여 대군을 막는 한편 비밀리에 군사 3천 명을 보내 현토·요동의 두 군을 공격하여, 그 성곽을 불지르고 2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 잡았다.
여름 4월, 왕이 선비의 군사 8천 명과 함께 요대현을 공격하였다. 요동 태수 채 풍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창에 나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공조연 용 단과 병마연 공손 포는 자신의 몸으로 채 풍을 엄호하다가, 채 풍과 함께 진영에서 죽었다. 이 때 사망자가 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왕이 부여에 행차하여 태후묘에 제사를 지내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백성들을 위문하고, 정도에 따라 물품을 주었다. 숙신의 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갖옷과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 연회를 베풀어 노고를 위로하여 보냈다. 11월, 왕이 부여에서 돌아왔다. 왕이 아우 수성으로 하여금 군사와 국정에 대한 일을 총괄적으로 맡아보게 하였다.
12월, 왕이 마한과 예맥의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현토성을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아들 위구태를 시켜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힘을 합쳐 대항케 하였다.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七十年, 王與<馬韓>·<穢貊>侵<遼東>, <扶餘>王遣兵救破之.[<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
70년, 왕이 마한·예맥과 함께 요동을 공격하였다. 부여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한 나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였다.[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하였다 하니, 멸망하였다가 다시 일어난 것인가?]
○七十一年, 冬十月, 以沛者<穆度婁>爲左輔, <高福 {高福章}> 爲右輔, 令與<遂成>參政事.
趙炳舜. 『三國史節要』.
71년 겨울 10월, 패자 목도루를 좌보로 삼고, 고복장을 우보로 삼아, 수성과 함께 정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七十二年, 秋九月庚申晦, 日有食之. 冬十月, 遣使入<漢>朝貢. 十一月, 京都地震.
72년 가을 9월 그믐 경신일에 일식이 있었다. 겨울 10월, 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1월, 서울에 지진이 있었다.
○八十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 與左右宴. 於是, 貫那于台<彌儒>·桓那于台< 支留>·沸流那 衣<陽 {陽神}> 等, 陰謂<遂成>曰: "初, <慕本>之薨也, 太子不肯{肖} , 群寮欲立王子<再思>, <再思>以老讓子者, 欲使兄老弟及. 今王旣已老矣, 而無讓意, 惟吾子計之." <遂成>曰: "承襲必嫡, 天下之常道也. 王今雖老, 有嫡子在, 豈敢 乎?" <彌儒>曰: "以弟之賢, 承兄之後, 古亦有之, 子其勿疑." 於是, 左輔沛者<穆度婁>, 知<遂成>有異心, 稱疾不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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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에서 사냥을 하며 좌우의 근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 때 관나부 우태 미유와 환나부 우태 어지류와 비류나조의 양신 등이 남모르게 수성에게 말했다. "초기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태자가 불초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자 재사를 왕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재사가 늙었다 하여 아들에게 양보하였다. 이는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계승케하자는 것이었다. 이제 왕이 이미 늙었으나 양위할 뜻이 없으니, 그대는 대책을 세우라." 수성이 말했다.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천하의 상도이다. 왕이 지금 비록 연로하다고 하지만 맏아들이 있는데 어찌 감히 왕위를 넘볼 수 있겠는가?" 미유가 말했다. "아우가 현명하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이 옛날에도 있었다. 그대는 이를 의심치말라." 이 때 좌보 패자 목도루는 수성이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있음을 알고, 병을 구실로 벼슬을 하지 않았다.
○八十六年, 春三月, <遂成>獵於<質>陽, 七日不歸, 戱樂無度. 秋七月, 又獵<箕丘>, 五日乃反. 其弟<伯固>諫曰: "禍福無門, 惟人所召. 今子以王弟之親, 爲百寮之首, 位已極矣, 功亦盛矣. 宜以忠義存心, 禮讓克己, 上同王德, 下得民心. 然後富貴不離於身, 而禍亂不作矣. 今不出於此, 而貪樂忘憂, 竊爲足下危之." 答曰: "凡人之情, 誰不欲富貴而歡樂者哉, 而得之者, 萬無一耳. 今吾居可樂之勢, 而不能肆志, 將焉用哉." 遂不從.
86년 봄 3월, 수성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며 7일 동안 돌아오지 않고, 즐기기만 할 뿐 행동에 절도가 없었다.가을 7월, 수성이 또 기구에 사냥가서 5일 만에 돌아왔다. 그의 아우 백고가 간했다. "화복은 들어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이 불러 들이는 것이다. 지금 형은 왕의 아우라는 친족으로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는 이미 지극히 높고, 공로도 또한 훌륭하다. 따라서 마땅히 충성과 의리를 마음에 간직하고, 예절과 겸양으로 욕망을 억제하여, 위로는 왕의 덕과 같도록 노력하고, 아래로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부귀가 형을 떠나지 않고 화란이 일어 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렇게 행동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걱정을 모르고 있으니, 형이 위태롭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수성이 대답했다. "사람의 감정으로 누구인들 부귀와 환락을 원하지 않으랴만 이것을 얻는 자는 만 명에 하나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내가 향락을 즐길 수 있는 처지에 있으니,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면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그는 끝내 백고의 말을 듣지 않았다.
○九十年, 秋九月, <丸都>地震. 王夜夢, 一豹齧斷虎尾. 覺而問其吉凶, 或曰: "虎者, 百獸之長; 豹者, 同類而小者也. 意者王之族類, 殆有謀絶大王之後者乎?" 王不悅, 謂右輔<高福章>曰: "我昨夢有所見, 占者之言如此, 爲之奈何?" 答曰: "作不善, 則吉變爲凶; 作善, 則災反爲福. 今大王憂國如家, 愛民如子, 雖有小異, 庸何傷乎?"
90년 가을 9월, 환도에 지진이 있었다. 왕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표범이 호랑이의 꼬리를 물어 끊었다. 왕이 잠을 깨어 좋은 꿈인지 나쁜 꿈인지를 물으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호랑이는 모든 짐승의 어른이며, 표범은 호랑이의 한 종류로서 작은 짐승이다. 아마도 왕의 친족 가운데 대왕의 후대를 끊으려고 획책하는 자가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왕이 기분이 좋치않아 우보 고 복장에게 "내가 어제 밤 꿈에 본 것에 대하여, 점치는 자의 말이 이러하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라고 물었다. 고 복장이 대답하였다. "안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것도 변하여 나쁜 것이 되고, 좋은 일을 하면, 재앙도 도리어 복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나라 일을 집안 일과 같이 걱정하며,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시니, 비록 사소한 이변이 있다한들 무슨 걱정거리가 되겠습니까?"
○九十四年, 秋七月, <遂成>獵於<倭山>之下, 謂左右曰: "大王老而不死, 吾齒卽將暮矣, 不可待也. 惟願左右, 爲我計之." 左右皆曰: "敬從命矣." 於是, 一人獨進曰: "向, 王子有不祥之言, 而左右不能直諫, 皆曰敬從命者, 可謂姦且諛矣. 吾欲直言, 未知尊意如何?" <遂成>曰: "子能直言, 藥石也, 何疑之有?" 其人對曰: "今大王之賢, 內外無異心, 子雖有功, 率群下姦諛之人, 謀廢明上, 此何異將以單縷, 繫萬鈞之重而倒曳乎? 雖復愚人, 猶知其不可也. 若王子改圖易慮, 孝順事上, 則大王深知王子之善, 必有揖讓之心, 不然則禍將及也." <遂成>不悅. 左右妬其直, 讒於<遂成>曰: "王子以大王年老, 恐國祚之危, 欲爲後圖, 此人妄言如此, 我等惟恐漏洩, 以致患也, 宜殺以滅口." <遂成>從之. 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大守{太守} 妻子. 冬十月, 右輔<高福章>言於王曰: "<遂成>將叛, 請先誅之." 王曰: "吾旣老矣, <遂成>有功於國, 吾將禪位, 子無煩慮!" <福章>曰: "<遂成>之爲人也, 忍而不仁. 今日受大王之禪, 則明日害大王之子孫. 大王但知施惠於不仁之弟, 不知貽患於無辜之子孫(+乎) , 願大王熟計之."(+王不聽) 十二月, 王謂<遂成>曰: "吾旣老, 倦於萬機. 天之曆數在汝躬, 況汝內參國政, 外摠軍事, 久有社稷之功, 允塞臣民之望, 吾所付託, 可謂得人. 作{汝} 其卽位, 永孚于休!" 乃禪位, 退老於別宮, 稱爲<大祖大王>.[『後漢書』云: "<安帝><津光{建光}> 元年, <高句麗>王<宮>死, 子<遂成>立. <玄 >太守<姚光>上言: 欲因其喪, 發兵擊之. 議者皆以爲可許. 尙書<陳忠>曰: '<宮>前桀 , <光>不能討, 死而擊之, 非義也. 宜遣吊問, 因責讓前罪, 赦不加誅, 取其後善.' <安帝>從之. 明年, <遂成>還<漢>生口." 案『海東古記』: "<高句麗><國祖王><高宮>以<後漢><津武{建武}> 二十九年, 癸巳{癸丑} 卽位, 時年七歲, 國母攝政. 至<孝桓帝><本初>元年丙戌, 遜位讓母弟<遂成>, 時, <宮>年一百歲, 在位九十四年, 則<建光>元年, 是<宮>在位第六十九年." 則『漢書』所記, 與『古記』抵 不相符合. 豈<漢書>所記誤耶?]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今西龍.『북한본』.李丙燾.
[북한본].
94년 가을 7월, 수성이 왜산 아래서 사냥하면서 좌우의 근신들에게 말했다.
"대왕이 늙었으나 죽지 않고, 나도 나이가 많으니 기다릴 수 없다. 그대들은 나를 위하여 계책을 꾸미기 바란다." 근신들이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누군가가 혼자 나서서 "조금 전에 당신은 자신에게 결코 상서롭지 않은 말을 하였는데, 근신들이 올바른 말로 말리지 않고, 모두 삼가 명령에 따르겠다고 하였으니, 이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직언을 하려 하는데, 당신의 뜻이 어떠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 수성이 "그대가 직언을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약이 될 터인데, 무엇을 의심하는가?"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이 대답하였다. "우리 대왕이 현명하여, 안팎으로 반역할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당신이 비록 국가에 공로가 있다고 하지만, 간사스럽고 아첨하는 아랫 사람들을 데리고, 현명한 임금을 폐위시키려고 하니, 이것이 한 오라기의 실로 1만 균의 물건을 매어놓고 거꾸로 끌어당겨 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충효와 공손함으로 대왕을 섬기면, 대왕께서는 당신의 어진 마음을 깊이 헤아려, 반드시 당신에게 양위할 마음을 가질 것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화가 미칠 것이다." 수성은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좌우의 근신들이 그의 정직함을 질투하여 수성에게 참소하였다. "대왕이 나이 많아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울까를 염려하여, 후일에 대한 계책을 도모하려는 것인데, 이 사람이 이와 같이 망녕된 말을 하니, 우리는 이러한 사실이 누설되어 후환을 초래할까 염려된다. 따라서 이 사람을 죽여 입을 닫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수성이 그 말을 따랐다.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 나라 요동 서쪽 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의 수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빼앗아 돌아왔다.
겨울 10월, 우보 고 복장이 왕에게 말하였다. "수성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청컨대 먼저 그를 처형하소서." 왕이 말했다. "내가 이미 늙었고, 수성은 나라에 공이 있으니, 내가 그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 그대는 염려하지 말라!" 복장이 말했다. "수성은 사람됨이 잔인하고 어질지 못합니다. 아마도 오늘 대왕의 왕위를 물려 받는다면, 내일은 대왕의 자손을 해칠 것입니다. 대왕은 다만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만 알고, 죄없는 자손들에게 후환이 미칠 것을 알지 못하니,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소서."
12월, 왕이 수성에게 말했다. "내가 이미 늙어서 모든 일이 힘들구나. 하늘의 운수가 너에게 있으며, 또한 네가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에 대한 일을 총괄하여, 오랫 동안 나라에 공로를 쌓아 신하와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였으니, 내가 의지하고 일을 맡길 적임자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왕위에 올라 길이 경사를 누릴지어다!" 왕은 곧 왕위를 내어주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이를 태조대왕이라 하였다.[[후한서]에는 "안제 건광 원년에 고구려왕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이 때 현토 태수 요광이 왕이 죽은 것을 기회로 삼아 군사를 출동하여 치고 싶다고 안제에게 말하니 모두가 찬성하였다.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전에는 궁이 훌륭하고 영명하여 요광이 칠 수 없었는데, 그가 죽었다 하여 치는 것은 의로운 일이 아니다. 마땅히 사자를 보내 조문하고, 예전의 죄과를 묻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두었다가, 후일을 도모함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니, 안제가 이 말대로 하였다. 이듬해에 수성이 한 나라 포로를 돌려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해동고기]에는 "고구려 국조왕 고궁은 후한 건무 29년 계사에 즉위하니, 이 때 나이가 7세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가 섭정하였다. 효환제 본초 원년 병술에 이르러, 동복 아우 수성에게 왕위를 내어주니 이 때 궁의 나이가 1백세로서, 재위 94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건광 원년은 곧 궁의 재위 69년에 해당한다. [한서]의 기록과 고기의 기록이 서로 다르니, 혹시 [한서]의 기록이 틀린 것이 아닌가?]
<次大王 차대왕>
○<次大王>, 諱<遂成>, <太祖大王>同母弟也. 勇壯有威嚴, 小仁慈. 受<大祖大王>推讓, 卽位, 時年七十六.
차대왕의 이름은 수성이며 대조왕의 동복 아우이다. 그는 용감하고 체격이 건장하여 위엄이 있었으나 인자한 마음은 적었다. 태조대왕이 물려 준 자리를 받아 즉위하엿다. 이 때 나이 76세였다.
○二年, 春二月, 拜貫那沛者<彌儒>爲左輔. 三月, 誅右輔<高福章>. <福章>臨死嘆曰: "痛哉, 寃乎! 我當時爲先朝近臣, 其可見賊亂之人, 默然不言哉? 恨先君不用吾言, 以至於此. 今君甫陟大位, 宜新政敎以示百姓, 而以不義殺一忠臣. 吾與其主{生} 於無道之時, 不如死之速也." 乃卽刑. 遠近聞之, 莫不憤惜. 秋七月, 左輔<穆度婁>稱疾退老, 以□那于台{桓那于台} < 支留{ 支留}> 爲左輔, 加爵爲大主簿. 冬十月, <沸流那><陽神>爲中畏大夫, 加爵爲于台, 皆王之故舊. 十一月, 地震.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관나 패자 미유를 좌보로 임명하였다.
3월, 우보 고 복장을 죽였다. 복장이 죽을 때 탄식하며 말했다. "슬프고 원통하다! 내가 전일에 선왕의 근신이었으니, 어찌 반역을 도모하는 자를 보고도 묵묵히 말을 하지 않으랴? 전 왕이 나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이 한스럽다. 이제 임금이 왕위에 올랐으니 마땅히 새로운 정치와 교화를 백성에게 보여야 할 것인데도, 정의에 어긋나게 한 사람의 충신을 죽이려 한다. 내가 이와 같은 무도한 시대에 사느니,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고 복장은 곧 형을 받았다. 원근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분노하고 애석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7월, 좌보 목도루가 병을 구실로 퇴직하자 환나부 우태 어지류를 좌보로 삼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라 하였다.겨울 10월, 비류나부 양신을 중외 대부로 삼고, 작위를 올려 우태라 하니, 그들은 모두 왕의 옛친구였다.11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夏四月, 王使人, 殺<太祖大王{太祖大王}> 元子<莫勤>, 其弟<莫德>恐禍連及, 自縊.
○論曰: 昔<宋><宣公>不立其子<與夷>, 而立其弟<繆公{穆公}> , 小不忍, 亂大謀, 以致累世之亂, 故『春秋』 '大居正'. 今<太祖王>不知義, 輕大位以授不仁之弟, 禍及一忠臣·二愛子, 可勝歎耶.
秋七月, 王田于<平儒原>, 白狐隨而鳴. 王射之不中. 問於師巫, 曰: "狐者, 妖獸非吉祥, 白其色, 尤可怪也. 然天不能諄諄其言, 故示以妖怪者, 欲令人君恐懼修省以自新也. 君若修德, 則可以轉禍爲福." 王曰: "凶則爲凶, 吉則爲吉, 爾旣以爲妖, 又以爲福, 何其誣耶?" 遂殺之.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左傳].
3년 여름 4월, 왕이 사람을 시켜 태조대왕의 맏아들 막근을 죽이자, 그의 아우 막덕은 화가 자기에게도 미칠까 두려워 스스로 목매어 자결하였다.
저자의 견해 : 옛날 송 선공이 그의 아들 여이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아우 목공을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작은 인정에 이끌려 국가의 대계를 어지럽힌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여러 세대에 걸친 환란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춘추에서는 "정도(正道)에 처하는 것을 가장 크게 여기라"라고 말하였다. 이제 태조왕이 정의를 알지 못하고, 중대한 왕위를 가볍게 여겨 어질지 못한 아우에게 넘김으로써, 화란이 한 명의 충신과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으랴?
가을 7월, 왕이 평유원에서 사냥하는데, 흰 여우가 따라 오면서 울었다. 왕이 여우를 쏘았으나 맞추지 못하였다. 왕이 사무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다. "여우는 원래 요사스럽고, 상서롭지 못한 짐승인데, 더구나 그 빛깔이 희니 더욱 괴이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간절한 뜻을 말로 전할 수 없으므로 요괴한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니, 이는 임금으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 알고 반성할 줄 알게 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덕을 닦으면,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흉하면 흉하다 하고, 길하면 길하다 할 것이지, 이미 요사스러운 것이라고 말해놓고 다시 복이 된다고 하니, 이 무슨 거짓말인가?" 왕은 마침내 그를 죽였다.
○四年, 夏四月丁卯晦, 日有食之. 五月, 五星聚於東方. 日者畏王之怒, 誣告{王} 曰: "是君之德也, 國之福也." 王喜. 冬十二月, 無氷.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여름 4월 그믐 정묘일에 일식이 있었다.5월, 오성이 동방에 모였다. 천기를 맡은 관원이 왕이 노할까 두려워 하여 거짓으로 "이는 임금의 덕이며, 나라의 복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기뻐하였다.
겨울 12월, 얼음이 얼지 않았다.
○八年, 夏六月, 隕霜. 冬十二月, 雷, 地震. 晦, 客星犯月.
8년 여름 6월, 서리가 내렸다. 겨울 12월, 우뢰와 지진이 있었고, 그믐날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星 于北斗. 夏五月甲戌晦, 日有食之.
13년 봄 2월, 혜성이 북두에 나타났다. 여름 5월 그믐 갑술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年, 春正月晦, 日有食之. 三月, <太祖大王>薨於別宮, 年百十九歲. 冬十月, 椽那 衣<明臨答夫>, 因民不忍, 弑王. 號爲<次大王>.
20년 봄 정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3월, 태조대왕이 별궁에서 별세하니, 나이 119세였다.
겨울 10월, 연나부 조의 명림답부가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하여 왕을 죽였다. 호를 차대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5 끝
三國史記卷第十六 삼국사기 권 제 16
高句麗本紀第四 <新大王>·<故國川王>·<山上王>.
고구려본기 제 4 신대왕, 고국천왕, 산상왕.
○<新大王>, 諱<伯固>[固, 一作句.], <大祖大王>之季弟. 儀表英特, 性仁恕. 初, <次大王>無道, 臣民不親附, 恐有禍亂, 害及於己, 遂遯於山谷. 及<次大王>被弑, 左輔< 支留>與群公議, 遣人迎致. 及至, < 支留> 獻國璽曰: "先君不幸棄國, 雖有子, 不克有國家. 夫{天} 人之心, 歸于至仁, 謹拜稽首, 請卽尊位." 於是, 俯伏三讓而後卽位. 時年七十七歲.
趙炳舜. 『三國史節要』.
신대왕의 이름은 백고['고(固)'를 '구(句)'라고도 한다.]이며, 태조대왕의 막내 아우이다. 의표가 영특하고 성품이 인자하며 너그러웠다. 선왕인 차대왕이 무도하여 신하와 백성들이 가까이 하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고는 환란이 생기면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염려하여, 산골짜기로 도망했었다. 차대왕이 살해되자 좌보 어지류가 여러 대신들과 의논하여 사람을 보내 백고를 모셔오게 하였다. 백고가 돌아오자 어지류가 무릎을 꿇고 옥새를 바치면서 말했다. "선왕이 불행하게 돌아가시고, 비록 그 아들이 있으나 나라를 맡길 수 없으며, 인심이 인자하신 당신에게 돌아가므로,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오니, 청컨대 존위에 오르소서." 이에 백고는 엎드려 세 번 사양한 뒤에 즉위하였다. 이 때 나이가 77세였다.
○二年, 春正月, 下令曰: "寡人生 王親, 本非君德, 向屬友于之政, 頗乖貽厥之謨. 畏害難安, 離群遠遯, 聞凶計{訃} , 但極哀 . 豈謂百姓樂推, 群公勸進? 謬以 未{末} , 據于崇高, 不敢遑寧, 如涉 {淵} 海. 宜推恩而及遠, 遂與衆而自新, 可大赦國內." 國人旣聞赦令, 無不歡呼慶 , 曰: "大哉, 新大王之德澤也!" 初, <明臨 天{明臨答夫}> 之難, <次大王>太子<鄒安>逃竄, 及聞嗣王赦令, 卽詣王門, 告曰: "嚮, 國有災禍, 臣不能死, 遯于山谷, 今聞新政, 敢以罪告. 若大王據法定罪, 棄之市朝, 惟命是聽, 若賜以不死, 放之遠方, 則生死肉骨之惠也, 臣所願也, 非敢望也." 王卽賜<狗山瀨>·<婁豆 {婁豆谷}> 二所, 仍封爲<讓國君>. 拜< 夫{答夫}> 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
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북한본』.
2년 봄 정월에 왕이 명령을 내려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도 왕의 근친으로 태어났으나, 본래 임금의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앞서 형제 사이에 정권을 맡긴 것은 왕위를 자손에게 전하는 법도에 대단히 어긋나는 것이었다. 나는 화를 입을까 두려워 마음이 편치 못했으며, 이에 따라 사람 사는 곳을 떠나 먼 곳에 은둔했다가, 선왕의 흉보를 듣고 슬픈 심정을 억누를 수 없었으니, 오늘 백성들이 나를 즐거이 추대하며 여러 대신들이 왕위를 권할 줄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으랴? 그릇되게도 못난 자격으로 거룩한 자리에 앉게 되니, 편치 못함이 마치 깊은 물 깊은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도다. 마땅히 은혜를 먼 곳까지 펴야 할 것이며, 대중들과 더불어 나를 새롭게 해야 할 것이니, 전국의 죄수들을 대사하라!" 백성들이 대사령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경하하여 "크도다! 새 임금의 은덕이여!"라고 말하였다. 애초에 명림답부의 난이 일어났을 때, 차대왕의 태자 추안이 도망하였다가 새 왕의 대사령을 듣고 곧 궐문에 이르러 고하였다. "지난번 나라에 재난이 있을 때, 제가 죽지 못하고 산곡으로 도망하였다가, 이제 새로운 정치가 베풀어졌다는 말을 듣고 감히 저의 죄를 말씀드립니다. 만약 대왕께서 법에 의하여 죄를 정하여 주시면, 시체를 저자에 버리는 형벌이라도 받겠으며, 만약 죽음을 면하게 하여 먼 곳으로 추방하신다면, 죽을 사람을 살리는 은혜이니, 이는 저의 원하는 바이나 감히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왕이 그에게 구산뢰·누두어 두 곳을 주고, 양국군으로 봉하였다. 답부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패자로 삼아, 내외의 병마사를 맡게 하고, 동시에 양맥 부락을 다스리게 하였다. 좌보와 우보를 국상으로 고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杞{祀} 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趙炳舜. 『三國史節要』.
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겨울 10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漢><玄 郡>大守{太守} <耿臨>來侵, 殺我軍數百人, 王自降乞屬<玄 >.
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한 나라 현토군 태수 경 림이 침입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자, 왕이 자진하여 항복하고 현토에 속하기를 요청하였다.
○五年, 王遣大加<優居>·主簿<然人>等, 將兵助<玄 >大守{太守} <公孫度>, 討<富山>賊.
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왕이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현토 태수 공손 도를 도와 부산의 적을 치게 하였다.
○八年, 冬十一月, <漢>以大兵嚮我. 王問群臣, 戰守孰便. 衆議曰: "<漢>兵恃衆輕我, 若不出戰, 彼以我爲怯, 數來. 且我國山險而路隘, 此所謂一夫當關, 萬夫莫當者也. <漢>兵雖衆, 無如我何, 請出師禦之." < 夫{答夫}> 曰: "不然. <漢>, 國大民衆. 今以强兵遠鬪, 其鋒不可當也. 而又兵衆者宜戰, 兵少者宜守, 兵家之常也. 今<漢>人千里轉糧, 不能持久. 若我深溝高壘, 淸野以待之, 彼必不過旬月, 饑困而歸. 我以勁卒薄之, 可以得志." 王然之, 城固守. <漢>人攻之不克, 士卒饑餓引還. < 夫{答夫}> 帥數千騎追之, 戰於<坐原>, <漢>軍大敗, 匹馬不反. 王大悅, 賜< 夫{答夫}> <坐原>及<質山>, 爲食邑.
『북한본』.『북한본』.『북한본』.
8년 겨울 11월, 한 나라에서 대병을 일으켜 우리를 향하여 왔다. 왕이 군신들에게 공격과 수비의 어느 쪽이 좋은가를 물었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했다.
"한 나라 군사들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적은 우리를 겁쟁이라 하여 자주 침입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명이 문을 지키면 만 명이 와도 막아낼 수 있는 격입니다. 따라서 한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을지라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니, 군사를 출동시켜 방어하소서."
그러나 답부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 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습니다. 이제 그들이 강병으로 멀리까지 쳐들어 오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또한 병력이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병력이 적은 자는 수비해야한다는 것이 병가의 법도입니다. 이제 한 나라는 천리길이나 되는 먼 곳에서 군량미를 수송해야 하므로, 오래 버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성밖에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성밖의 들판에 곡식 한 알, 사람 하나없이 비워 놓고 기다리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열흘 혹은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림과 피곤으로 인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 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써 육박하면 뜻대로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이를 옳게 여겨 성을 닫고 굳게 수비하였다. 한 나라의 군사들이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장수와 졸병들이 굶주리다 못하여 퇴각하였다. 이 때 답부가 수천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에서 전투를 벌리니, 한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十二年, 春正月, 群臣請立太子. 三月, 立王子<男武>爲王太子.
12년 봄 정월, 군신들이 태자를 정할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3월, 왕자 남무를 왕태자로 삼았다.
○十四年, 冬十月丙子晦, 日有食之.
14년 겨울 10월 그믐 병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五年, 秋九月, 國相< 天{答夫}> 卒, 年百十三歲. 王自臨慟, 罷朝七日. 乃以禮葬於<質山>, 置守墓二十家. 冬十二月, 王薨, 葬於<故國谷>, 號爲<新大王>.
『북한본』.
15년 가을 9월, 국상 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직접 가서 애도를 표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다.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례를 지내고, 20여 호의 묘지기를 두었다.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곡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신대왕이라 하였다.
<故國川王 고국천왕>
○<故國川王>[或云<國襄>.], 諱<男武>[或云<伊夷謨{伊夷模}> .], <新大王><伯固>之第二子. <伯固>薨, 國人以長子<拔奇>不肖, 共立<伊夷謨>爲王. <漢><獻帝><建安>初, <拔奇>怨爲兄而不得立, 與<消奴加{涓奴加}> , 各將下戶三萬餘口, 詣<公孫康>降, 還住<沸流水>上. 王身長九尺, 姿表雄偉, 力能 鼎, 事聽斷, 寬猛得中.
李丙燾. [魏志].李丙燾. [魏志].
고국천왕[혹은 국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라고도 한다.]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예전에 백고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추대하여 왕을 삼았다. 한 헌제 건안 초기에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 태수 공손 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 왕은 키가 9척이오, 풍채가 웅장하며 힘이 세었고, 일의 처리에 있어서 관용과 예리함을 알맞게 겸비하였다.
○二年, 春二月, 立妃<于>氏爲王后. 后, 提那部{ 那部} <于素>之女也. 秋九月, 王如<卒本>, 杞{祀} 始祖廟.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왕비 우씨를 왕후로 삼으니, 그는 제나부 우소의 딸이다.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四年, 春三月甲寅夜, 赤氣貫於太微, 如蛇. 秋七月, 星 于太微.
4년 봄 3월 갑인일 밤에 붉은 기운이 태미 성좌를 관통하였는데, 그 형상이 뱀과 같았다.
가을 7월, 혜성이 태미 성좌에 나타났다.
○六年, <漢><遼東>太守興師, 伐我. 王遣王子<喬須>拒之, 不克. 王親帥精騎往, 與<漢>軍戰於<坐原>, 敗之. 斬首山積.
6년, 한 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 나라를 공격하였다. 왕이 왕자 계수를 파견하여 대항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왕이 직접 정예 기병을 거느리고 한 나라 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적의 머리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八年, 夏四月乙卯, 熒惑守心. 五月壬辰晦, 日有食之.
8년 여름 4월 을묘에 형혹성이 심성 성좌에 머물렀다.
5월 그믐 임진일에 일식이 있었다.
○十二年, 秋九月, 京都雪六尺. 中畏大夫沛者<於沸留>·評者<左可慮>, 皆以王后親戚, 執國權柄. 其子弟幷恃勢驕侈, 掠人子女, 奪人田宅, 國人怨憤. 王聞之, 怒欲誅之. <左可慮>等與四椽那謀叛.
12년 가을 9월, 서울에 눈이 여섯 자 내렸다.
중외대부 패자 어비류와 평자 좌가려는 모두 왕후의 친척으로서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 자제들이 모두 그 세도를 믿고 교만하고 사치하였으며, 다른 사람의 딸을 겁탈하고, 남의 토지와 주택을 갈취하였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개하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노하여 그들을 처형하려 하니, 좌가려 등이 네 연나와 함께 모반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左可慮>等) 聚衆, 攻王都. 王徵幾{畿} 內兵馬, 平之. 遂下令日{曰} : "近者, 官以寵授, 位非德進, 毒流百姓, 動我王家, 此寡人不明所致也. 令汝四部(郡} , 各擧賢良在下者!" 於是, 四部共擧東部{都} <晏留>. 王徵之, 委以國政. <晏留>言於王曰: "微臣庸愚, 固不足以參大政. 西<鴨 谷><左勿村><乙巴素>者, <琉璃王>大臣<乙素>之孫也, 性質剛毅, 智慮淵深, 不見用於世, 力田自給. 大王若欲理國, 非此人則不可." 王遣使, 以卑辭重禮聘之, 拜中畏大夫, 加爵爲于台, 謂曰: "孤 承先業, 處臣民之上, 德薄才短, 未濟於理. 先生藏用晦明, 窮處草澤者久矣, 今不我棄, 幡然而來, 非獨孤之喜幸, 社稷生民之福也. 請安承敎, 公其盡心!" <巴素>意雖許國, 謂所受職不足以濟事. 乃對曰: "臣之駑蹇, 不敢當嚴命, 願大王, 選賢良, 授高官, 以成大業." 王知其意, 乃除爲國相, 令知政事. 於是, 朝臣國戚, 謂<素>以新閒舊, 疾之. 王有敎曰: "無貴賤, 苟不從國相者, 族之." <素>退而告人曰: "不逢時則隱, 逢時則仕, 士之常也. 今上待我以厚意, 其可復念舊隱乎?" 乃以至誠奉國, 明政敎, 愼賞罰, 人民以安, 內外無事. 冬十月, 王謂<晏留>曰: "若無子之一言, 孤不能得<巴素>以共理. 今庶績之疑{凝} , 子之功也." 乃拜爲大使者.
○論曰: 古先哲王之於賢者也, 立之無方, 用之不惑, 若<殷><高宗>之<傅說>, <蜀>先主之<孔明>, <秦><符堅{ 堅}> 之<王猛>, 然後賢在位, 能在職, 政敎修明而國家可保. 今王決然獨斷, 拔<巴素>於海濱, 不撓衆口, 置之百官之上, 而又賞其擧者, 可謂得先王之法矣.
李丙燾.『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13년 여름 4월, 좌가려가 무리를 모아 서울을 침공했다. 왕은 서울 부근의 병마를 징발하여 그들을 진압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근자에 관직이 정실에 따라 주어지고, 직위는 덕행에 의하여 승진되지 않아서 해독이 백성들에게 미치고 나의 왕실을 동요시키고 있다. 이는 내가 총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의 4부에 명령하노니, 각각 자기 하부에 있는 현명한 자들을 천거하라!"
이에 4부에서는 모두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다. 왕이 안류를 불러 국정을 맡겼다. 안류가 왕에게 말했다.
"미천한 저는 용렬하고 어리석어 실로 중대한 국정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서쪽 압록곡 좌물촌에 사는 을파소라는 사람은 유리왕의 대신이었던 을소의 자손인데, 성질이 강직하고 지혜로우며 사려깊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등용되지 못하고 농사로 생계를 삼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만약 나라를 잘 다스리려 하신다면 이 사람을 등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왕이 사신을 보내 겸손한 말과 후한 예로써 을파소를 초빙하여 중외 대부로 임명하고 우태의 작위를 주고 말했다.
"내가 외람되게 선대의 왕업을 이어 신하와 백성의 윗자리에 처하였으나, 덕과 재주가 없어 정치를 잘 할 수 없었다. 선생은 재능과 총명을 감추고, 초야에 있은 지 오래였는데, 이제 나를 버리지 않고 마음을 돌려 이곳에 왔으니, 이는 나의 기쁨일 뿐 아니라 사직과 백성의 행복이다. 그대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니, 그대는 진정을 다하여 주기바란다."
파소는 비록 나라에 공헌하고 싶었으나, 맡은 직위가 일을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대답하였다.
"우둔한 저로서는 감히 왕의 엄명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왕께서는 현량한 사람을 선택하여 높은 관직을 주어 위업을 달성하게 하소서."
왕이 그 뜻을 알고, 곧 국상으로 임명하여 정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에 조신과 외척들은, 을파소가 새로 들어와 옛 대신들을 이간질한다 하여 미워하였다. 왕이 교서를 내려 말했다.
"귀한 자나 천한 자를 막론하고 만약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친족까지 징벌하리라."
을파소가 물러나와 사람들에게 "때를 만나지 못하면 숨고, 때를 만나면 벼슬을 하는 것은 선비의 도이다. 이제 왕께서 나를 후의로 대하시니, 어찌 다시 전일의 은거를 생각하랴!"라고 말하고, 지성으로 나라에 봉사하여 정치와 교화를 밝히고 상벌을 신중하게 처리하니, 백성들이 편안하고, 나라 안팎이 무사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안류에게 말하기를 "만일 그대의 말이 아니었다면, 내가 을파소를 데리고 나라를 함께 다스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모든 일이 정리된 것은 그대의 공로이다"라 하고, 그를 대사자로 임명하였다.
저자의 견해 : 옛날의 명철한 임금들은 현명한 자를 등용함에 상례를 따지지 않았으며, 등용한 후에는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은 나라 고종은 부열에게, 촉 나라 유비는 공명에게, 진 나라 부견은 왕맹에게 그러하였다. 이러한 연후에야 직위에서 현명함과 능력이 발휘되어 정치가 개선되고 교화가 이루어져 국가를 보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왕이 결연히 혼자 용단을 내려 을파소를 바닷가에서 발탁하고, 중론에 구애받지 않고 그를 백관의 윗자리에 임용하였으며, 또한 천거한 자에게까지 상을 주었으니, 가히 옛 임금들의 법도를 체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十六年, 秋七月, 墮{隕} 霜殺穀. 民饑, 開倉賑給. 冬十月, 王 于<質>陽, 路見坐而哭者, 問: "何以哭爲?" 對曰: "臣貧窮, 常以傭力養母. 今歲不登, 無所傭作, 不能得升斗之食, 是以哭耳." 王曰: "嗟呼! 孤爲民父母, 使民至於此極, 孤之罪也." 給衣食以存撫之. 仍命內外所司, 博問鰥寡孤獨老病貧乏不能自存者, 救恤之, 命有司, 每年自春三月至秋七月, 出官穀, 以百姓家口多少, 賑貸有差, 至冬十月還納, 以爲恒式, 內外大悅.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이 죽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길 가에 앉아 우는 자를 보고 우는 이유를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제가 빈궁하여 항상 품팔이로 어머님을 봉양하였는데, 금년에는 흉년이 들어 품팔이 할 곳이 없으므로, 한 되나 한 말의 곡식도 얻을 수 없기에 우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아아! 내가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으로 하여금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는 나의 죄이다"라 하고, 그에게 옷과 음식을 주어 위로하였다. 이어서 서울과 지방의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늙고 병들고 가난하여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는 자들을 널리 탐문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매년 봄 3월부터 가을 7월까지 관곡을 풀어, 백성들의 식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있게 구제곡을 빌려 주었다가, 겨울 10월에 상환하게 하는 것을 법규로 정하였다. 모든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十九年, <中國>大亂, <漢>人避亂來投者甚多, 是<漢><獻帝><建安>二年也. 夏五月, 王薨. 葬于<故國川原>, 號爲<故國川王>.
19년, 중국에 큰 난리가 일어나, 피난하여 귀순하는 한 나라 백성들이 매우 많았다. 이 때가 한 헌제 건안 2년이었다.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천 언덕에 장사 지내고, 호를 고국천왕이라 하였다.
<山上王 산상왕>
○<山上王>, 諱<延優>[一名<位宮>], <故國川王>之弟也. 『魏書』云: "<朱蒙>裔孫<宮>, 生而開目能視, 是爲<大祖{太祖}> . 今王是<大祖{太祖}> 曾孫, 亦生而視人, 似曾祖<宮>. <高句麗>呼'相似'爲'位', 故名<位宮>云." <故國川王>無子, 故<延優>嗣立. 初, <故國川王>之薨也, 王后<于>氏, 秘不發喪, 夜往王弟<發岐>宅, 曰: "王無後, 子宜嗣之." <發岐>不知王薨, 對曰: "天之曆數有所歸, 不可輕議. 婦人而夜行, 豈禮云乎?" 后慙, 便往<延優>之宅. <優>起衣冠, 迎門入座宴飮. 王后曰: "大王薨, 無子, <發岐>作{年} 長當嗣, 而謂妾有異心, 暴慢無禮. 是以見叔." 於是, <延優>加禮, 親自操刀割肉, 誤傷其指. 后解裙帶 其傷指. 將歸, 謂<延優>曰: "夜深恐有不虞, 子其送我至宮." <延優>從之, 王后執手入宮. 至翌日質明, 矯先王命, 令群臣, 立<延優>爲王. <發岐>聞之大怒, 以兵圍王宮, 呼曰: "兄死弟及, 禮也. 汝越次簒奪, 大罪也, 宜速出. 不然則誅及妻 ." <延優>閉門三日. 國人又無從<發岐>者. <發岐>知難, 以妻子奔<遼東>. 見大守{太守} <公孫度{公孫康}> , 告曰: "某, <高句麗>王<男武>之母弟也. <男武>死, 無子, 某之弟<延優>與嫂<于>氏謀, 卽位以廢天倫之義. 是用憤 , 來投上國, 伏願假兵三萬, 令擊之, 得以平亂." <公孫度>從之. <延優>遣弟<喬須>, 將兵禦之, <漢>兵大敗. <喬須>自爲先鋒追北, <發岐>告<喬須>曰: "汝今忍害老兄乎?" <喬須>不能無情於兄弟, 不敢害之, 曰: "<延優>不以國讓, 雖非義也, 爾以一時之憤, 欲滅宗國, 是何意耶? 身沒之後, 何面目以見先人乎?" <發岐>聞之, 不勝慙悔, 奔至<裴川>, 自刎死. <喬須>哀哭, 收其屍, 草葬訖而還. 王悲喜, 引<喬須>內中宴, 見以家人之禮, 且曰: "<發岐>請兵異國, 以侵國家, 罪莫大焉. 今子克之, 縱而不殺, 足矣, 及其自死, 哭甚哀, 反謂寡人道乎?" <喬須> 然銜淚而對曰: "臣今請一言而死." 王曰: "何也?" <喬須>曰: "王后雖以先王遺命立大王, 大王不以禮讓之, 曾無兄弟友恭之義. 臣欲成大王之美, 故收屍殯之, 豈圖緣此, 逢大王之怒乎? 大王若以仁忘惡, 以兄喪禮葬之, 孰謂大王不義乎? 臣旣以言之, 雖死猶生. 請出受誅有司." 王聞其言, 前席而坐, 溫顔慰諭曰: "寡人不肖, 不能無惑, 今聞子之言, 誠知過矣. 願子無責." 王子拜之, 王亦拜之, 盡歡而罷. 秋九月, 命有司, 奉迎<發岐>之喪, 以王禮葬於<裴嶺>. 王本因<于>氏得位, 不復更娶, 立<于>氏爲后.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魏志].
산상왕의 이름은 연우[위궁이라고도 한다.]이며 고국천왕의 아우이다.
[위서]에는 "주몽의 후손 궁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었는데 이가 태조이다. 지금 왕은 태조의 증손으로서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을 알아 보는 것이 증조 궁과 같았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같다는 말을 '위(位)'라고 하므로, 위궁으로 이름을 지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국천왕이 아들이 없으므로, 연우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처음 고국천왕이 별세하였을 때, 왕후 우씨는 왕이 죽은 사실을 비밀로 하여 발표하지 않고, 밤에 왕의 아우 발기의 집에 가서 말했다.
"왕이 아들이 없으니 그대가 왕의 뒤를 이어야겠다."
발기는 왕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대답하였다.
"하늘의 운수는 가는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것이니 경솔하게 논의할 수 없다. 더구나 부인으로서 밤에 출입하는 것이 어찌 예절에 맞는다 하리오."
왕후가 부끄러워하며 곧 연우의 집으로 갔다. 연우는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문에 나와 왕후를 맞아들여 자리에 앉히고 잔치를 베풀었다. 왕후가 말했다.
"대왕이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없으니, 발기가 맏아우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되겠으나, 그는 나에게 딴 마음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무례하고 오만하며 예절없이 대하였다. 이에 따라 아주버니에게 온 것이다."
이 때 연우는 예절을 더욱 극진히 하여 직접 칼을 들고 왕후에게 고기를 베어주다가 잘못하여 손가락을 다쳤다. 왕후가 허리띠를 풀어 그의 다친 손가락을 감싸주었다. 왕후가 환궁하려 할 때 연우에게 "밤이 깊어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길가 염려되니, 그대가 나를 대궐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연우가 그렇게 하였다. 왕후는 연우의 손을 잡고 대궐로 들어갔다. 이튿날 날이 샐 무렵에 왕후가 선왕의 유명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군신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삼게 하였다. 발기가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로 왕궁을 포위하고 외쳤다. "형이 죽으면 아우에게 왕위가 돌아가는 것이 예이거늘, 네가 차례를 어기고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큰 죄악이니 빨리 나오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처자들까지 죽이겠다."
연우는 3일 동안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백성들도 발기를 따르는 자가 없었다. 발기는 성사되기 어려움을 알고, 처자들과 함께 요동으로 도주하였다. 그는 요동 태수 공손 도를 보고 말했다.
"나는 고구려왕 남무의 동복 아우이다. 남무가 죽고 아들이 없는데, 나의 아우 연우가 형수 우씨와 공모하여 왕위에 올라 천륜의 대의를 어겼다. 나는 이에 분개하여 상국으로 귀순하여 왔다. 원컨대 군사 3만 명을 빌려주어 연우를 치게 하면, 고구려의 분란을 평정할 수 있겠다."
공손 도가 그 말을 들어 주었다. 연우가 아우 계수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에서 오는 군사를 막으니, 한 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계수가 스스로 선봉이 되어 도망가는 군사를 추격하였다. 발기가 계수에게 말했다.
"네가 오늘 감히 늙은 형을 죽이겠는가?"
계수가 형제간의 정의를 버릴 수 없어 감히 그를 죽이지 못하고 말했다.
"연우가 왕위를 사양하지 않은 것은 비록 정의로운 행동은 아니지만, 형이 일시의 분한 생각을 못이겨 나라를 멸망시키려함은 무슨 뜻인가? 죽은 후에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 대하려는가?"
발기가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이길 수 없어 배천으로 도주하여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계수가 슬피 울고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을 하고 돌아왔다. 왕은 슬퍼하면서도 일면 기뻐하며, 계수를 궐내로 불러 들여 잔치를 베풀고, 형제의 예로 대하면서 말했다.
"발기가 타국에 청병하여 국가를 침범하였으니, 죄가 이보다 더 클 수 없다. 이제 그대가 이기고도, 발기를 풀어주어 죽이지 않은 것만 하여도 족한 일인데, 그가 자결한 것을 대단히 애통해하니, 그대는 도리어 나를 무도하다고 생각하는것이 아닌가?"
계수가 서글프게 눈물을 머금으며 대답하였다.
"제가 지금 한 마디 말을 하고 죽기를 청합니다."
왕이 "무슨 말인가?"하고 물으니 계수가 말했다.
"왕후가 비록 선왕의 유명으로 대왕을 즉위하게 하였으나, 대왕께서는 예로써 사양하지 않았으니, 이미 형제간에 우애하고 공손해야 한다는 의리는 없어진 것입니다. 저는 대왕의 미덕을 이루고자, 짐짓 발기의 시체를 거두어 초빈을 한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대왕의 노여움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대왕께서 만약 어진 마음을 베풀어 발기의 죄악을 잊어 버리고, 형에 대한 상례를 갖추어 장례지내 주신다면, 누가 대왕이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제가 이미 이 말을 하였으니 죽음을 당하여도 사는 것과 같습니다. 청컨대 나아가 형리의 처형을 받겠습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앞으로 다가 앉으며, 따뜻한 표정으로 위로하여 말했다.
"내가 불초하여 미혹됨이 없을 수 없었는데, 이제 너의 말을 들으니, 진실로 나의 잘못을 알게 되었구나. 너는 나를 탓하지 말라."
동생이 왕에게 절하고, 왕도 그에게 또한 절을 하여 마음껏 즐기다가 헤어졌다.
가을 9월, 관리에게 명하여 발기의 상례를 지내되, 왕례로써 배령에 장사하게 하였다.
왕이 원래 우씨에 의하여 왕위를 얻게 되었으므로, 다시 장가들지 않고 우씨를 왕후로 삼았다.
○二年, 春二月, 築<丸都城>. 夏四月, 赦國內二罪已下.
2년 봄 2월, 환도성을 쌓았다.
여름 4월, 전국의 사형수 이하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三年, 秋九月, 王 于<質>陽.
3년 가을 9월, 왕이 질산 남쪽에서 사냥하였다.
○七年, 春三月, 王以無子, 禱於山川, 是月十五夜夢, 天謂曰: "吾令汝少后生男, 勿憂." 王覺語群臣曰: "夢天語我, 諄諄如此, 而無少后, 奈何?" <巴素>對曰: "天命不可測, 王其待之." 秋八月, 國相<乙巴素>率{卒} , 國人哭之慟. 王以<高優婁>爲國相.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3월, 왕이 아들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였는데, 이 달 15일 밤 꿈에 하늘이 왕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의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잠을 깨어 군신에게 말하기를 "꿈에 하늘이 나에게 이와 같이 간곡하게 말하였는데, 소후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은가?" 하니, 을파소가 대답하였다. "천명이란 헤아릴 수 없으니 왕께서는 기다리소서."
가을 8월, 국상 을파소가 죽으니 온 백성이 통곡하였다. 왕이 고우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十二年, 冬十(-一) 月, 郊豕逸. 掌者追之, 至<酒桶村>, 不能捉{獲} . 有一女子, 年二十許, 色美而艶, 笑而前執之, 然後追者得之. 王聞而異之, 欲見其女, 微行夜至女家. 使侍人說之, 其家知王來不敢拒. 王入室, 召其女, 欲御之. 女告曰: "大王之命, 不敢避, 若幸而有子, 願不見遺." 王諸{諾} 之. 至丙夜, 王起還宮.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2년 겨울 11월, 교제에 잡을 돼지가 달아났다. 관리하는 자가 쫓아가 주통촌에 이르렀는데, 돼지가 이리저리 달뛰어 잡지 못하였다. 이 때 나이가 20세 가량 되고 얼굴이 아름다운 한 여자가 웃으면서 앞으로 걸어와 돼지를 잡아주어 쫓던 자가 돼지를 얻을 수 있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겼다. 왕은 그 여자가 보고 싶어 평복을 입고, 밤에 여자의 집에 갔다. 시종을 시켜 말하니, 그 집에서 왕이 온 줄 알고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왕이 방으로 들어가 그 여자를 불러 동침하려 하였다. 그 여자가 말하기를 "대왕의 명령을 감히 피할 수 없으니, 만약 아이가 있게되면 버리지 말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승낙하였다. 자정이 되자 왕이 일어나 환궁하였다.
○十三年, 春三月, 王后知王幸<酒桶村>女, 妬之, 陰遣兵士殺之. 其女聞知, 衣男服逃走. 追及欲害之, 其女問曰: "爾等今來殺我, 王命乎, 王后命乎? 今妾腹有子, 實王之遺體也. 殺妾身可也, 亦殺王子乎?" 兵士不敢害, 來以女所言告之. 王后怒, 必欲殺之, 而未果. 王聞之, 乃復幸女家, 問曰: "汝今有娠, 是誰之子?" 對曰: "妾平生不與兄弟同席, 況敢近異姓男子乎. 今在腹之子, 實大王之遺體也." 王慰藉贈與, 甚厚. 乃還告王后, 竟不敢害. 秋九月, <酒桶>女生男. 王喜曰: "此天賚予嗣胤也." 始自郊豕之事, 得以幸其母, 乃名其子曰<郊 >, 立其母爲小后. 初, 小后母孕未産, 巫卜之曰: "必生王后." 母喜, 及生, 名曰<后女>. 冬十月, 王移都於<九都{丸都}> .
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봄 3월, 왕이 주통촌 여자에게 갔던 사실을 왕후가 알고, 그 여자를 질투하여 남몰래 군사를 보내 죽이려 하였으나, 그 여자가 이 소문을 듣고 남장을 하고 도주하였다. 병사들이 그 여자를 추격하여 죽이려 하니, 그 여자가 물었다.
"너희들이 지금 나를 죽이려 하니, 이것이 왕의 명령이냐, 왕후의 명령이냐? 이제 나의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이 아이는 왕의 혈육이다. 나를 죽이는 것은 좋으나 왕자도 죽일 것인가?"
병사들이 그 여자를 감히 죽이지 못하고 돌아와, 그 여자의 말을 보고하였다. 왕후가 노하여 기어코 죽이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곧 다시 그 여자의 집에 가서 묻기를 "네가 지금 임신한 것이 누구의 아이냐?"라 하니, 그 여자가 대답하기를 "제가 평생에 형제와도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는데, 황차 성이 다른 남자와 가까이 했겠습니까? 지금 저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진실로 대왕의 혈육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여자를 위로하고 선물을 후하게 주었다. 그리고 곧 돌아와 왕후에게 말하니 왕후가 끝내 그 여자를 죽이지 못하였다.
가을 9월, 주통촌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후계자이다"라고 하였다. 교제에 잡을 돼지로 말미암아 그 어머니를 사랑할 수 있었다 하여, 그 아이의 이름을 교체라 하고, 아이의 어머니를 소후로 삼았다. 처음 소후의 어머니가 그녀를 배었을 때 무당이 점을 치고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으리라"하여 어머니가 기뻐하였고, 아이를 낳게 되자 후녀라고 이름지었었다.
겨울 10월, 왕이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十七年, 春正月, 立<郊 >王大子{太子} .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교체를 왕태자로 삼았다.
○二十一年, 秋八月, <漢><平州>人<夏瑤>, 以百姓一千餘家來投, 王納之, 安置<柵城>. 冬十月, 雷, 地震. 星學{ } 于東北.
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가을 8월, 한 나라 평주 사람 하요가 백성 1천여 호를 데리고 귀순해왔다. 왕이 그를 받아 들여 책성에 배치하였다. 겨울 10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二十三年, 春二月壬子晦, 日有食之.
23년 봄 그믐 임자일에 일식이 있었다.
○二十四年, 夏四月, 異鳥集于王庭.
24년 여름 4월, 이상한 새들이 대궐에 모였다.
○二十八年, 王孫<然弗>生.
28년, 왕의 손자 연불이 태어났다.
○三十一年, 夏五月, 王薨. 葬於<山上陵>, 號爲<山上王>.
三國史記卷第十六.
31년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산상릉에 장례지내고, 호를 산상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6 끝
三國史記卷第十七 삼국사기 권 제 17
高句麗本紀第五.
<東川王>·<中川王>·<西川王>·<烽上王>·<美川王>.
고구려본기 제 5
동천왕, 중천왕, 서천왕, 봉상왕, 미천왕.
<東川王 동천왕>
○<東川王>[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 >,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 . 王還曰: "馬無 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동천왕[동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우위거이며, 아명은 교체이고, 산상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주통촌 사람으로서 산상왕의 소후가 되었는데, 사기에는 그의 가족과 성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왕은 전왕 17년에 태자가 되었고, 이 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왕은 성격이 너그럽고 인자하였다. 왕후가 왕의 심정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왕이 유람하러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잘랐다. 왕이 돌아와서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라고 말하였다. 왕후가 또한 시종으로 하여금 밥상을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을 엎지르게 하였는데, 왕은 역시 성내지 않았다.
○二年, 春二月, 如<卒本>, 祀始祖廟. 大赦. 三月, 封<于>氏爲王太后.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3월, 우씨를 왕태후로 봉했다.
○四年, 秋七月, 國相<高優婁>卒, 以于台<明臨於漱>爲國相.
4년 가을 7월, 국상 고우루가 죽었다. 우태 명림 어수를 국상으로 삼았다.
○八年, <魏>遣使和親. 秋九月, 大后{太后} <于>氏薨. 大后{太后} 臨終遺言日{曰} : "妾失行, 將何面日{目} 見<國壤>於地下? 若群臣不忍 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川上{山上}> , 不勝憤 ,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위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가 죽을 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내가 행실이 좋지 않았으니,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왕을 보겠는가? 만약 여러 신하들이 계곡이나 구덩이에 나의 시신을 차마 버리지 못하겠거든, 나를 산상왕릉 옆에 묻어 달라."
태후의 유언대로 장사하였다. 무당이 말했다.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씨와 다투었다. 내가 돌아와 생각하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하여도 차마 백성들을 대할 수 없구나. 네가 조정에 이를 알려서, 나의 무덤을 가리는 시설을 하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국양왕의 능 앞에 일곱 겹으로 소나무를 심었다.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10년 봄 2월, 오 나라의 왕인 손 권이 사신 호 위를 보내 화친을 청하였다. 왕이 그 사신을 억류했다가, 가을 7월에 그의 목을 베어 위 나라에 전하였다.
○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
11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위의 연호가 개정된 것을 축하하였다. 이 때가 경초 원년이었다.
○十二年, <魏>太傅{太尉} <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李丙燾. [魏志].
12년, 위 나라 태부 사마 선왕이 군사를 동원하여 공손 연을 토벌했다. 왕이 주부 대가로 하여금 군사 1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돕게 하였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16년,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격파하였다.
○十七年, 春正月, 立王子<然弗>爲王太子, 赦國囚{內} .
趙炳舜. 『三國史節要』.
17년 봄 정월, 왕자 연불을 왕태자로 삼고, 국내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19년 봄 삼월,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쳤다. 왕이 그를 후궁으로 맞이 하였다.
겨울 10월,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다.
○二十年, 秋八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 >來侵. 王將步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魏>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魏>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鐵騎五千, 進而擊之. <儉>爲方陣, 決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 原>. 冬十月, <儉>攻陷<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 >, 追王. 王奔<南 沮{南沃沮}> ,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密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決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僅得} 脫而去, 依山谷, 聚散卒自衛, 謂曰: "若有能取<密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往焉." 遂於戰地, 見<密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 沮{南沃沮}> , <魏>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往 <魏>軍, 因伺隙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決勝矣." 王曰: "諾." <紐由>入<魏>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濱,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 之物, 爲從者羞." <魏>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 拔刀刺<魏>將胸, 與之俱死, <魏>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魏>軍擾亂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功, 以<密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靑木谷>, 賜<屋句><鴨 >·<杜訥河原>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魏>將到<肅愼>南界, 刻石紀功,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 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括地志』云: "<不耐城>卽<國內城>也, 城累石爲之." 此卽<丸都山>與<國內城>相接. 『梁書』: "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 襲<西安平>, <毋丘儉>來侵." 『通鑑』: "以<得來>諫王, 爲王<位宮>時事." 誤也.]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密友紐由傳.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가을 8월, 위 나라가 유주 자사 관구 검으로 하여금 1만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침공하게 하였다. 왕이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다시 군사를 이끌어 양맥 골짜기에서 전투를 벌여, 역시 적군을 쳐부수고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하였다. 왕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했다.
"위 나라의 대병력이 오히려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 검이란 자는 위 나라의 명장이지만, 오늘날에는 그의 목숨이 나의 손에 달려 있구나."
왕은 곧 철기 5천 명을 거느리고 진격하였다. 관구 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싸우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사망자가 1만 8천여 명이었다. 왕이 기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원으로 도주하였다.
겨울 10월, 관구 검이 환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도륙하였다. 그리고 곧 장군 왕 기를 보내 왕을 추격하였다. 왕은 남옥저로 도주하다가 죽령에 이르렀다. 군사들은 흩어져 거의 모두 없어지고, 다만 동부의 밀우가 혼자 왕의 옆에 있다가 왕에게 말했다.
"지금 추격해오는 적병이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므로, 이를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제가 결사적으로 적군을 방어하면, 왕께서는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드디어 결사대를 모아 그들과 함께 적에게 달려들어 전력을 다하여 싸웠다. 왕은 사잇길로 가다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호위토록 하였다. 왕은 군사들에게 말했다.
"만약 밀우를 찾아 올 수 있는 자가 있으면 후한 상을 주겠다."
하부 유옥구가 앞으로 나와서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곧 전장으로 가서 땅에 쓰러져 있는 밀우를 발견하고 등에 업어 왔다. 왕은 자신의 다리위에 밀우를 눕혔다. 밀우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생하였다. 왕은 다시 사잇길을 전전하며 남옥저에 이르렀다. 그러나 위 나라 군사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왕은 적절한 계책도 없고 형세가 어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동부 사람 유유가 나와 말했다.
"형세가 위급하다고 하여 헛되이 죽을 수는 없습니다. 저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습니다. 제가 음식을 가지고 가서 위 나라 군사를 위로하다가, 기회를 보아 적장을 찔러 죽이고자 합니다. 만약 저의 계책대로 되면, 그 때 왕께서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이 "좋다"고 말하였다. 유유가 위 나라 군중에 들어가서 항복을 가장하고 말했다.
"우리 임금이 대국에 죄를 짓고 바닷가로 도망하였으나, 이제 왕은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장차 귀국의 진영에 항복하여 귀국의 법관에게 죽음을 맡기려 하는데, 저를 먼저 보내 변변치 못한 음식으로 군사들을 대접하게 하였습니다."
위 나라 장수가 이 말을 듣고 그의 항복을 받으려 하였다. 이 때 유유가 식기에 칼을 감추어 가지고 나아가서 칼을 뽑아 위 나라 장수의 가슴을 찌르고 그와 함께 죽었다. 위 나라 군사는 곧 혼란에 빠졌다. 왕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급습하였다. 위 나라 군사들은 혼란 속에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마침내 낙랑에서 퇴각하였다. 왕은 귀국하여 공적을 평가하였다. 밀우와 유유는 1등이었다.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주고, 옥구에게는 압록과 두눌하원을 주어 식읍으로 삼게하고, 유유에게는 구사자를 추증하고, 또한 유유의 아들 다우를 대사자로 삼았다.이 전쟁 시에 위 나라 장수가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돌에 전공을 새겨 기념하고, 또한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에 기념비를 새기고 돌아갔다.
예전에, 왕의 신하 득래는, 왕이 중국을 침략하고 배반하는 것을 보고 이를 중단하기를 수차례 간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득래는 탄식하며 "머지 않아 이 땅이 쑥대밭이 되는 것을 보게될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위 나라 장수 관구 검이 군사들로 하여금 그의 무덤을 헐지 말며 무덤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하고, 그의 처자들을 찾아 모두 풀어 주도록 명령하였다.[[괄지지]에는 "불내성은 곧 국내성이다. 그 성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환도산과 국내성이 서로 접해 있기 때문이다. [양서]에는 "사마 의가 공손 연을 치자, 고구려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였으므로, 관구 검이 와서 침노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통감]에는 "득래가 왕에게 간한 것은 고구려왕 위궁 때의 사실이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잘못된 기록이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儉>.
21년 봄 2월, 왕은 환도성이 난리를 겪었으므로, 다시 도읍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평양성을 쌓아 백성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라는 지방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지였다. 어떤 사람은 왕이 왕검성에 도읍을 정했다라고도 말한다.
○二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結和.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 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 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
22년 봄 2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원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동천왕이라 하였다. 백성들이 왕의 은덕을 생각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근신 중에는 자살하여 순장되기를 바라는 자가 많았으나, 새로 등극한 왕이 예가 아니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례일에 왕의 무덤에 와서 자결한 자가 아주 많았다. 백성들이 섶을 베어 그들의 시체를 덮어 주었기 때문에 그 곳을 시원이라고 불렀다.
<中川王 중천왕>
○<中川王>[或云<中壤>.], 諱<然弗>, <東川王>之子. 儀表俊爽, 有智略. <東川>十七年, 立爲王太子. 二十二年, 秋九月, 王薨, 太子卽位. 冬十月, 立< >氏爲后. 十一月, 王弟<預物>·<奢句>等, 謀叛伏誅.
중천왕[혹은 중양이라고 한다.]의 이름은 연불이며, 동천왕의 아들이다. 외모가 준수하고 지략이 많았다. 동천왕 17년에 왕태자가 되었다. 22년 가을 9월에 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겨울 10월, 연씨를 왕후로 삼았다.
11월, 왕의 아우 예물·사구 등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형 당하였다.
○三年, 春二月, 王命相<明臨於漱>, 兼知內外兵馬事.
3년 봄 2월, 왕이 국상 명림어수로 하여금 내외의 군사에 관한 사무를 동시에 맡아 보도록 명하였다.
○四年, 夏四月, 王以<貫那>夫人置革囊, 投之西海. <貫那>夫人, 顔色佳麗, 髮長九尺, 王愛之, 將立以爲小后. 王后< >氏, 恐其專寵, 乃言於王曰: "妾聞西<魏>求長髮, 購以千金. 昔我先王, 不致禮於<中國>, 被兵出奔, 殆喪社稷. 今王順其所欲, 遣一個行李, 以進長髮美人, 則彼必欣納, 無復侵伐之事." 王知其意, 默不答. 夫人聞之, 恐其加害, 反讒后於王曰: "王后常罵妾曰: '田舍之女, 安得在此. 若不自歸, 必有後悔.' 意者后欲伺大王之出, 以害於妾, 如之何?" 後, 王獵于<箕丘>而還, 夫人將革囊迎哭曰: "后欲以妾盛此, 投諸海, 幸大王賜妾微命, 以返於家, 何敢更望侍左右乎?" 王問知其詐, 怒謂夫人曰: "汝要入海乎?" 使人投之.
4년 여름 4월, 왕이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에 던지게 하였다. 원래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머리털의 길이가 9척이나 되어, 왕이 사랑하였고, 장차 소후를 삼으려 하였다. 왕후 연씨는 그가 왕의 사랑을 독차지할 것을 걱정하여 왕에게 말했다.
"제가 듣건대 서쪽 위 나라에서 긴 머리털을 천금을 주고 산다고 합니다. 옛적에 우리 선대 임금은 중국에 예물을 보내지 않아 병란을 당하여 쫓겨 다녔으며, 나라를 잃을 뻔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하니 이제 왕께서는 위 나라가 원하는 대로 사신을 보내 머리털 긴 미인을 진상하면, 그들은 반드시 흔쾌히 받아들일 것이며, 다시는 침범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녀가 말하는 의도를 짐작하고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다. 관나부인이 이 말을 듣고 자기에게 해가 미칠까 겁을 내어 도리어 왕에게 왕후를 참소하여 말했다.
"왕후가 항상 나를 욕하여 '시골 계집이 어찌 여기에 있느냐? 만약 스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리라'라고 합니다. 대왕이 나가시는 기회를 이용하여 왕후가 나를 해칠 것 같은 생각이 드니 어찌하오리까?"
그 후 왕이 기구에서 사냥을 하고 돌아오자, 관나부인이 가죽 주머니를 들고 나와 왕을 맞이하며 울면서 말했다.
"왕후가 나를 여기에 담아 바다에 버리려 하니, 대왕께서 미천한 목숨을 돌보아 집으로 돌아가게 하여 주신다면, 어찌 이 이상 대왕을 옆에서 모시기를 감히 바라겠습니까?"
왕은 그것이 거짓말임을 알고 노하여 부인에게 말했다.
"네가 바다에 들어 가기를 원하느냐?"
그리고 사람을 시켜 바다에 던지게 하였던 것이다.
○七年, 夏四月, 國相<明臨於漱>卒, 以<沸流>沛者<陰友>爲國相. 秋七月, 地震.
7년 여름 4월, 국상 명림어수가 사망하자, 비류 패자 음우를 국상으로 임명하였다.
가을 7월, 지진이 있었다.
○八年, 立王子<藥盧>爲王太子, 赦國內.
8년에 왕자 약로를 왕태자로 삼았다. 국내에 사면령을 내렸다.
○九年, 冬十一月, 以 那<明臨笏覩>, 尙公主, 爲駙馬都尉. 十二月, 無雪. 大疫.
9년 겨울 11월, 연나부의 명림 홀도에게 공주를 주어 혼인시켜서, 부마도위를 삼았다.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十二年, 冬十二月, 王 于<杜訥>之谷. <魏>將<&尉遲{尉遲楷}> [名犯<長陵>諱.]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
李丙燾.
12년 겨울 12월, 왕이 두눌곡에서 사냥을 하였다.
위 나라 장수 울지해[이름이 장릉의 이름에 저촉되었다.]가 군사를 동원하여 침입하였다. 왕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선발하여, 양맥 골짜기에서 싸워 이기고, 8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十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1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十五年, 秋七月, 王獵<箕丘>, 獲白獐. 冬十一月, 雷, 地震.
15년 가을 7월, 왕이 기구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겨울 11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葬於<中川>之原, 號曰<中川王>.
23년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중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중천왕이라 하였다.
<西川王 서천왕>
○<西川王>[或云<西壤>.], 諱<藥盧>[一云<若友>.], <中川王>第二子. 性聰悟而仁, 國人愛敬之. <中川王>八年, 立爲太子. 二十三年, 冬十月, 王薨, 太子卽位.
서천왕[혹은 서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약로[약우라고도 한다.]이며, 중천왕의 둘째 아들이다. 성격이 총명하고 어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를 아끼고 존경하였다. 중천왕 8년에 태자가 되었고, 23년 겨울 10월에 왕이 별세하였다. 태자가 즉위하였다.
○二年, 春正月, 立西部大使者<于漱>之女, 爲王后. 秋七月, 國相<陰友>卒. 九月, 以<尙婁>爲國相. <尙婁>, <陰友>子也. 冬十二月, 地震.
2년 봄 정월, 서부 대사자 우수의 딸을 왕후로 삼았다.
가을 7월, 국상 음우가 죽었다.
9월, 상루를 국상으로 삼았다. 상루는 음우의 아들이었다.
겨울 12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夏四月, 隕霜害麥. 六月, 大旱.
3년 여름 4월, 서리가 내려 보리가 피해를 입었다.
6월, 큰 가뭄이 들었다.
○四年, 秋七月丁酉朔, 日有食之. 民饑, 發倉賑之.
4년 가을 7월 초하루 정유일에 일식이 있었다.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七年, 夏四月, 王如<新城>[或云: <新城>, 國之東北大鎭也.], 獵獲白鹿. 秋八月, 王至自<新城>. 九月, 神雀集宮庭.
7년 여름 4월, 왕이 신성[어떤 사람은 '신성은 동북 지방에 있는 큰 진(鎭)'이라고 말한다.]에 가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가을 8월, 왕이 신성에서 돌아왔다. 9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모였다.
○十一年, 冬十月, <肅愼>來侵, 屠害邊民{氓} . 王謂群臣曰: "寡人以 未{末} 之軀, 謬襲邦基, 德不能綏, 威不能震, 致此 敵, 猾我疆域. 思得謀臣猛將, 以折遐衝, 咨爾群公, 各擧奇謀異略才堪將帥者." 群臣皆曰: "王弟<達賈>, 勇而有智略, 堪爲大將." 王於是, 遣<達賈>往伐之. <達賈>出奇掩擊, 拔<檀盧城>, 殺酋長, 遷六百餘家於<扶餘>南<烏川>, 降部落六七所, 以爲附庸. 王大悅, 拜{封} <達賈>爲<安國君>, 知內外兵馬事, 兼統<梁貊>·<肅愼>諸部落.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겨울 10월, 숙신이 침입하여 변방 백성들을 죽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미미한 몸으로 외람되게 왕위를 이었으나, 나의 덕은 백성들을 편하게 할 수 없고, 위엄은 먼 곳에 떨치지 못하여, 인근의 적들이 우리 강토를 침범하게 하였다. 이제 지략있는 신하와 용감한 장수를 얻어 외적을 부수고자 하니, 너희들은 각각 특출한 계략을 지녀 장수가 될만한 인재를 천거하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했다.
"왕의 아우 달가는 용맹스럽고 지략이 있어 대장이 될만 합니다."
왕은 곧 달가를 보내 숙신을 치게 하였다. 달가가 뛰어난 계략으로 적을 기습하여 단로성을 빼앗고, 추장을 죽이고, 주민 6백 여 호를 부여 남쪽 오천으로 옮기고, 6·7개소의 부락을 항복하게 하여 부용으로 삼았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달가를 안국군으로 삼고, 서울과 지방의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으며, 겸하여 양백·숙신 등의 여러 부락을 통솔하게 하였다.
○十七年, 春二月, 王弟<逸友>·<素勃>等二人, 謀叛, 詐稱病, 往溫湯, 與黨類, 戱樂無節, 出言悖逆. 王召之, 僞許拜相, 及其至, 令力士執而誅之.
17년 봄 2월, 왕의 아우인 일우·소발 등의 두 사람이 모반하여, 병을 핑계대며, 온탕으로 가서 자기 무리들과 방종하게 놀며, 불온한 언사를 퍼뜨렸다. 왕이 국상을 시키겠다고 거짓말을 하여 그들을 불렀다. 그들이 도착하자 왕이 역사를 시켜 죽였다.
○十九年, 夏四月, 王幸<新城>. <海谷>太守獻鯨魚目, 夜有光. 秋八月, 王東狩, 獲白鹿. 九月, 地震. 冬十一月, 王至自<新城>.
19년 여름 4월, 왕이 신성에 갔다. 해곡 태수가 고래의 눈을 바쳤는데 밤에도 광채가 났다.
가을 8월, 왕이 동쪽 지방에서 사냥하다가 흰 사슴을 잡았다. 9월, 지진이 있었다.
겨울 11월, 왕이 신성에서 돌아왔다.
○二十三年, 王薨, 葬於<西川>之原, 號曰<西川王>.
23년, 왕이 별세하였다. 서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서천왕이라 하였다.
<烽上王 봉상왕>
○<烽上王>[一云<雉葛>.], 諱<相夫>[或云< 矢婁>.], <西川王>之太子也. 幼驕逸多疑忌. <西川王>二十三年, 薨, 太子卽位.
봉상왕[치갈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상부[혹은 삽시루라고도 한다.]이며, 서천왕의 태자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가 많았다. 23년에 서천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元年, 春三月, 殺<安國君達賈>. 王以<賈>在諸父之行, 有大功業, 爲百姓所瞻望, 故疑之謀殺. 國人曰: "微<安國君>, 民不能免<梁貊>·<肅愼>之難. 今其死矣, 其將焉託?" 無不揮涕相弔. 秋九月, 地震.
원년 봄 3월, 왕이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왕은, 달가가 아버지의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으며 백성들이 존경하므로, 그를 의심하여 모살한 것이다. 백성들이 말했다.
"안국군이 아니었다면 백성들이 양맥과 숙신의 환난을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우리는 장차 누구에게 의지할 것인가?" 백성들이 눈물을 뿌리며 서로 위로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 지진이 있었다.
○二年, 秋八月, <慕容 >來侵. 王欲往<新城>避賊, 行至<鵠林>, <慕容 >知王出, 引兵追之. 將及, 王懼. 時, <新城>宰北部小兄<高奴子>, 領五百騎迎王, 逢賊奮擊之, < >軍敗退. 王喜, 加<高奴子>爵爲大兄, 兼賜<鵠林>爲食邑. 九月, 王謂其弟< 固>有異心, 賜死. 國人以< 固>無罪哀慟之. < 固>子<乙弗>出遯於野.
2년 가을 8월, 모용 외가 침노하였다. 왕은 신성으로 가서 적을 피하고자 하였다. 왕이 곡림에 이르렀을 때, 모용 외가 왕이 나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해왔다. 그들이 거의 도달하려 하자 왕은 이를 두려워 하였다. 그 때 신성 태수인 북부 소형 고노자가 기병 5백 명을 거느리고 왕을 맞으러 나갔다가 적군과 만나 전투를 벌렸다. 모용 외의 군사가 패배하여 퇴각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고노자의 작위를 대형으로 높이고, 또한 곡림을 그의 식읍으로 주었다.
9월, 왕이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하여 자결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돌고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의 죽음을 애통하게 생각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은 시골로 도주하였다.
○三年, 秋九月, 國相<尙婁>卒. 以南部大使者<倉助利>爲國相, 進爵爲大主簿.
3년 가을 9월,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 대사자 창조리를 국상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대주부로 올렸다.
○五年, 秋八月, <慕容 >來侵,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役者有暴死者, 亦聞壙內有樂聲, 恐有神乃引退. 王謂群臣曰: "<慕容>氏, 兵馬精强, 屢犯我疆 , 爲之奈何?" 相國{國相} <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高奴子>爲<新城>大守{太守} . 善政有威聲, <慕容 >不復來寇.
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가을 8월, 모용 외가 침입하여 고국원에 이르렀다. 그는 서천왕의 무덤을 보고 사람을 시켜 파게 하였다. 그런데 일하는 사람 중에 갑자기 사망자가 생기고 또한 광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그는 귀신이 있는 것으로 알고 겁을 내어 곧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모용씨는 군대가 강?쪄臼? 우리 강토를 여러 차례 침범하였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만약 적을 방어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 한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만한 자가 없을 것입니다."
왕이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았다. 고노자는 선정을 베풀어 명성이 높았다. 모용 외는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다.
○七年, 秋九月, 霜雹殺穀, 民饑. 冬十月, 王增營宮室, 頗極侈麗, 民饑且困, 群臣驟諫, 不從. 十(-一) 月, 王使人索<乙弗>, 殺之不得.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가을 9월, 서리와 우박이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0월, 왕이 극도로 사치하고 화려하게 궁실을 증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피로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신하들이 공사의 중단을 여러번 간하였다.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11월, 왕이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죽이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八年, 秋九月, 鬼哭于<烽山>. 客星犯月. 冬十二月, 雷, 地震.
8년 가을 9월, 귀신이 봉산에서 울었다.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 우레와 지진이 있었다.
○九年, 春正月, 地震. 自二月至秋七月不雨, 年饑, 民相食. 八月, 王發國內男女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倉助利>諫曰: "天災 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驅饑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 比 有强梗之敵, 若乘吾 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 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國相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復} 言." <助利>知王之不悛, 且畏及害, 退與群臣同謀, 廢之, 迎<乙弗>爲王. 王知不免, 自經, 二子亦從而死. 葬於<烽山>之原, 號曰<烽上王>.
李丙燾.
9년 봄 정월, 지진이 있었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았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서로 잡아 먹었다.
8월, 왕이 국내의 15세 이상의 남녀를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게 하였다. 백성들은 식량의 결핍과 부역의 고통으로 인하여 사방으로 유랑하였다. 창조리가 왕에게 간하였다.
"천재가 연속하여 발생하고,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은 살 곳을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노약자들은 계곡과 구렁텅이를 헤매고 있으니,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걱정하여 근신하고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은 이러한 사정을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굶주리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나무를 깎고 돌을 나르는 부역으로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는 왕이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대단히 어긋나는 일입니다. 더구나 주위에는 강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우리가 피폐한 기회를 이용하여 침범해 온다면, 사직과 백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이를 깊이 생각하소서"
왕이 이를 듣고 노하여 말했다.
"임금이란 백성들이 위로 받드는 자리이다. 그러므로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중함을 내보일 수 없는 것이다. 지금 국상은 아마도 나를 비방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듣고자 하는 것 같구려."
조리가 말했다.
"임금이 백성을 걱정하지 않으면 어진 것이 아니고, 신하가 임금에게 충간하지 않으면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국상이라는 어려운 자리를 이었으니 말을 아니할 수 없는 것이지, 어찌 감히 백성의 칭송을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으려는가? 이후로는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리는 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였다. 그는 왕 앞에서 물러나와 군신들과 의논하여 왕을 폐위시키고 을불을 왕으로 세웠다. 왕은 화를 면할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의 두 아들도 따라 죽었다. 봉산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봉상왕이라 하였다.
<美川王 미천왕>
○<美川王>[一云<好壤王>.], 諱<乙弗>[或云<憂弗>.], <西川王>之子古鄒加< 固>之子. 初, <烽上王>疑弗{弟} < 固>有異心, 殺之, 子<乙弗>畏害出遁. 始就<水室村>人<陰牟>家傭作. <陰牟>不知其何許人, 使之甚苦. 其家側草澤, 蛙鳴, 使<乙弗>夜投瓦石, 禁其聲, 晝日督之樵採, 不許暫息, 不勝艱苦, 周年, 乃去. 與<東村>人<再牟>販鹽. 乘舟抵<鴨 >, 將鹽下寄江東<思收村>人家. 其家老 請鹽, 許之斗許, 再請不與. 其 恨 , 潛以 置之鹽中. <乙弗>不知, 負而上道. 追索之, 誣以 , 告<鴨 >宰. 宰以 直, 取鹽與 , 決笞放之. 於是, 形容枯槁, 衣裳藍縷, 人見之, 不知其爲王孫也. 是時, 國相<倉助利>將廢王, 先遣北部<祖弗>·東部<蕭友>等, 物色訪<乙弗>於山野. 至<沸流河>邊, 見一丈夫在船上, 雖形貌憔悴, 而動止非常. <蕭友>等疑是<乙弗>, 就而拜之曰: "今國王無道, 國相與群臣陰謀, 廢之. 以王孫操行儉約, 仁慈愛人, 可以嗣祖業, 故遣臣等奉迎." <乙弗>疑曰: "予野人, 非王孫也, 請更審之." <蕭友>等曰: "今上, 失人心 {久} 英{矣} , 固不足爲國主, 故群臣望王孫甚勤, 請無疑." 遂奉引以歸. <助利>喜, 致於<鳥陌{烏陌}> 南家, 不令人知. 秋九月, 王獵於<侯山>之陰, 國相<助利>從之. 謂衆人曰: "與我同心者, 我." 乃以蘆 {葉} 揷冠, 衆人皆揷之. <助利>知衆心皆同, 遂其廢王, 幽之別室, 以兵周衛. 遂迎王孫, 上璽綬, 卽王位. 冬十月, 黃霧四塞. 十一月, 風從西北來, 飛砂走石六日. 十二月, 星 于東方.
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趙炳舜. 『顯宗實錄字本』.李丙燾. [東國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미천왕[호양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을불[혹은 우불이라고도 한다.]이고, 서천왕의 아들 고추가 돌고의 아들이다. 예전에 봉상왕은 그의 아우 돌고가 모반할 생각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그를 죽였다. 그의 아들 을불은 자기에게도 해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도망했었다. 처음에는 수실촌 사람 음모의 집에서 머슴 생활을 하였다. 음모는 을불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고 힘든 일을 시켰다. 그 집 옆의 연못에서 개구리가 울면, 음모는 개구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을불로 하여금 밤마다 기와 조각과 돌을 던지게 하였고, 낮이면 나무를 해오라고 독촉하여, 잠시도 쉬지 못하게 했다. 을불은 고생을 이기지 못하고 일년만에 그 집을 떠났다. 을불은 동촌 사람 재모와 함께 소금 장사를 하였다. 배를 타고 압록에 가서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의 동쪽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었다. 그 집 노파가 소금을 요구하여, 한 말 가량 주었다. 그러나 그 노파는 그 이상 주기를 요청하였다. 을불은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가 그를 미워하여 몰래 자기의 신발을 소금 속에 묻었다. 을불은 이를 모르고 소금을 지고 길을 떠났다. 노파가 쫓아와 신발을 찾아들고, 을불이 자기의 신발을 감추었다고 거짓으로 압록 성주에게 고발하였다. 성주는 신발 값으로 소금을 빼앗아 노파에게 주고, 을불에게 매를 때린 후 석방하였다. 이리하여 을불은 얼굴이 여위고 의복이 남루하여, 누구든 그가 왕손임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 국상 창조리가 장차 왕을 폐하고자 하여, 먼저 북부 조불과 동부 소우 등을 파견하여, 온 나라에서 을불을 찾게 하였다. 그들이 비류하 물가에 도착하였을 때, 한 사나이가 배에 있었는데 얼굴은 비록 초췌하였으나, 행동 거지가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소우 등은 이 사람이 을불이 아닌가 생각하고, 그 앞에 나아가 절을 하고 말했다.
"지금 국왕이 무도하므로 국상이 군신들과 함께 왕을 폐하려고 합니다. 왕손께서는 행동이 검소하고 인자하며 사람을 사랑하므로, 조상의 유업을 이을 수 있다 하여, 저희들을 보내 맞아 오게 하였습니다."
을불이 의심하여 말했다.
"나는 평민이오 왕손이 아닙니다. 달리 알아 보시오."
소우 등이 말했다.
"지금 왕이 인심을 잃은지 오래여서, 실로 나라의 주인이 되기에 부족합니다.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이 왕손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곧 을불을 받들어 돌아왔다. 조리가 기뻐하며 을불을 조맥 남쪽 인가에 머물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가을 9월에 왕이 후산 북쪽에서 사냥할 때 국상 조리가 따라갔다. 조리가 여러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와 마음이 같은 자는 내가 하는 대로 하라."
그는 곧 갈대잎을 모자에 꽂았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그를 따라 갈대잎을 꽂았다. 조리는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같다는 것을 알고, 드디어 그들과 함께 왕을 폐하여 별실에 가두고, 군사들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곧 왕손을 맞아 옥새를 올려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겨울 10월, 누런 안개가 사방에 끼었다.
11월, 바람이 서북에서 불어와 6일간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렸다.
12월, 혜성이 동쪽에 나타났다.
○三年, 秋九月, 王率兵三萬, 侵<玄 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3년 가을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토군을 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12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4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 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5년 봄 정월,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공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攻破<玄 城>, 殺獲甚衆. 秋八月, 星 于東北.
16년 봄 2월, 현토성을 격파하였다. 적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
가을 8월, 혜성이 동북방에 나타났다.
○二十年, 冬十二月, <晉><平州>刺史{刺使} <崔毖>來奔. 初, <崔毖>陰說我及<段>氏·<宇文>氏, 使共攻<慕容 >, 三國進攻<棘城>. < >閉門自守, 獨以牛酒, <宇文>氏. 與國疑<宇文>氏與< >有謀, 各引兵歸. <宇文>大人<悉獨官>曰: "二國雖歸, 吾當獨取之." < >使其子< >與長史<裴 >, 將精銳爲前鋒, 自將大兵繼之, <悉獨官>大敗, 僅以身免. <崔毖>聞之, 使其兄子<燾>詣<棘城>僞賀. < >臨之以兵, <燾>懼首服, < > 遣<燾>歸. 謂<毖>曰: "降者, 上策; 走者, 下策也." 引兵隨之. <毖>與數十騎, 棄家來奔, 其衆悉降於< >. < >以其子<仁>, 鎭<遼東>官府, 市里案堵如故. 我將<如 >據于<河城>, < >遣將軍<張統>掩擊擒之, 其衆千餘家, 歸于<棘城>. 王數遣兵寇<遼東>, <慕容 >遣<慕容翰>·<慕容仁>, 伐之, 王求盟, <翰>·<仁>乃還.
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겨울 12월, 진 나라 평주 자사 최 비가 도망해왔다. 예전에 최 비는 비밀리에 우리 나라·단씨·우문씨를 회유하여, 모용 외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세 나라가 극성으로 진공하였다. 모용 외는 성문을 닫고 수비하면서 우문씨에게 쇠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였다. 다른 두 나라는 우문씨와 모용 외 사이에 남모르는 계략이 있다고 의심하여, 각각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우문 대인 실독관이 말했다.
"두 나라는 비록 돌아갔으나, 내가 혼자 힘으로 극성을 빼앗을 수 있다."
모용 외가 그의 아들 황으로 하여금 장사 배 억과 함께 정예 부대를 이끌고 선봉에 서게 하고, 자신은 대부대를 거느리고 뒤를 이었다. 실독관은 대패하고 몸만 간신히 빠져 나갔다. 최 비가 이 말을 듣고 형의 아들 도로 하여금 극성에 가서 거짓으로 승리를 치하하였다. 모용 외가 군사를 옆에 세우고 도를 접견하였다. 도는 이를 보고 겁을 내어 자복하였다. 모용 외는 곧 도를 돌려 보내면서 최 비에게 말했다.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오, 도주하는 것은 하책이다." 모용 외는 군사를 이끌고 도의 뒤를 따랐다. 최 비는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집을 버리고 우리에게 도망해왔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모용 외에게 항복하였다. 모용 외는 그의 아들 인으로 하여금 요동 관부에 진을 치게 하였다. 시장과 마을이 예전과 같이 평안하였다. 우리 장수 여노가 하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모용 외가 장군 장 통을 보내 습격하여 사로잡고, 주민 1천여 호를 포로로 잡아 극성으로 돌아갔다. 왕은 여러번 군사를 파견하여 요동을 침공하였고, 모용 외는 모용 한과 모용 인을 시켜 우리를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왕은 동맹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한과 인이 바로 돌아갔다.
○二十一年, 冬十二月, 遣兵寇<遼東>, <慕容仁>拒戰破之.
21년 겨울 12월, 군사를 보내 요동을 침공하였다. 모용 인이 항전하여 우리가 패배하였다.
○三十一年, 遣使<後趙><石勒>, 致其 矢.
31년, 후조의 석륵에게 사신을 보내 싸리나무 화살을 주었다.
○三十二年, 春二月, 王薨, 葬於<美川>之原, 號曰<美川王>.
三國史記卷第十七.
32년 봄 2월, 왕이 별세하였다. 미천 언덕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미천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7 끝
三國史記卷第十八 삼국사기 권 제 18
高句麗本紀第六
<故國原王>·<小獸林王>·<故國壤王>·<廣開土王>·<長壽王>.
고구려본기제 6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
<故國原王 고국원왕>
○<故國原王>[一云<國 上王>.], 諱<斯由>[或云<劉{釗}> .]. <美川王>十五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春, 王薨, 卽位.
李丙燾. 百濟蓋鹵王寄魏主書. [魏書] 高句麗傳.
고국원왕[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사유[혹은 소라고도 한다.]이다. 미천왕 15년에 태자가 되었고, 32년 봄에 왕이 별세하자,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巡問百姓, 老病賑給. 三月, 至自<卒本>.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늙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였다.
3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秋八月, 增築<平壤城>. 冬十二月, 無雪.
4년 가을 8월, 평양성을 증축하였다.
겨울 12월, 눈이 내리지 않았다.
○五年, 春正月, 築國北<新城>. 秋七月, 隕霜殺穀.
5년 봄 정월,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가을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六年, 春三月, 大星流西北. 遣使如<晉>, 貢方物.
6년 봄 3월, 큰 별이 서북방으로 날아갔다.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九年, <燕>王< >來侵, 兵及<新城>. 王乞盟, 乃還.
9년, 연 나라 임금 황이 침입하여 그의 군사가 신성까지 이르렀다. 왕이 동맹을 요청하자 그들이 곧 돌아갔다.
○十年, 王遣世子, 朝於<燕>王< >.
10년, 왕이 연 나라 임금 황에게 세자를 보내 예방케 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修葺<瓦都城{丸都城}> , 又築<國內城>. 秋八月, 移居<丸都城>. 冬十月, <燕>王< >遷都<龍城>. 立威將軍<翰>請: 先取<高句麗>, 後滅<宇文>, 然後中原可圖. <高句麗>有二道, 其北道平闊, 南道險狹, 衆欲從北道. <翰>曰: "虜以常情料之, 必謂大軍從北道, 當重北而輕南. 王宜帥銳兵, 從南道擊之, 出其不意, 北都{丸都} 不足取也. 別遣偏師, 出北道, 縱有蹉跌, 其腹心已潰, 四支無能爲也." < >從之. 十一月, < >自將勁兵四萬, 出南道. 以<慕容翰>·<慕容覇>爲前鋒, 別遣長史<王 >等, 將兵萬五千, 出北道以來侵. 王遣弟<武>, 帥精兵五萬, 拒北道, 自帥羸兵, 以備南道. <慕容翰>等先至戰, < >以大衆繼之, 我兵大敗. 左長史<韓壽>, 斬我將<阿佛和度加>, 諸軍乘勝, 遂入<丸都>. 王單騎走入<斷熊谷>, 將軍<慕輿 >, 追獲王母<周>氏及王妃而歸. 會, <王 >等戰於北道, 皆敗沒. 由是, < >不復窮追, 遣使招王, 王不出. < >將還, <韓壽>曰: "<高句麗>之地, 不可戍守. 今, 其主亡民散, 潛伏山谷, 大軍旣去, 必復鳩聚, 收其餘燼, 猶足爲患.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 < >從之. 發<美川王>廟{墓} , 載其尸, 收其府庫累世之寶, 虜男女五萬餘口, 燒其宮室, 毁<丸都城>而還.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 晉紀].
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12년 봄 2월,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쌓았다.
가을 8월, 왕이 환도성으로 옮겨 왔다.
겨울 10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용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입위 장군 한이 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였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고, 다음에 우문씨를 멸해야만 중원을 도모할 수 있다.' 고구려에는 두 길이 있었다. 북쪽 길은 평탄하고 넓으며, 남쪽 길은 험하고 좁다. 따라서 사람들은 항상 북쪽 길을 선택하였다. 한이 말했다. "적국은 일반적으로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 대군이 반드시 북쪽 길로 오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따라서 북쪽 길을 중시하고 남쪽 길을 가볍게 취급할 것입니다. 왕께서 응당 정예 부대를 이끌고 남쪽 길로 가서 불의의 공격을 하면, 북쪽 도성은 공격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별도로 소부대를 북쪽 길로 보내면 다소 차질이 있더라도, 그들의 심장부가 이미 무너졌으므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황은 이 말을 따랐다.
11월, 연 나라 임금 황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였다. 모용 한과 모용 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 우 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게 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왕은 아우 무로 하여금 정예 부대 5만을 이끌고 북쪽 길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이 때 모용 한 등이 먼저 와서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황의 대군이 도착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 좌장사 한 수가 우리 장수 아불??도가를 죽이자, 모든 적들이 승기를 타고 드디어 환도성으로 쳐들어왔다. 왕은 단기로 단웅곡으로 도주하였다. 연 나라 장군 모여니가 따라와서 왕모 주씨와 왕비를 잡아 돌아갔다. 이 때 연 나라 장군 왕 우 등은 북쪽 길에서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모두 전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황은 더 이상 추격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 왕을 불렀다. 왕은 가지 않았다. 황이 돌아가려 할 때 한 수가 말했다.
"고구려 땅은 우리가 남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그들의 임금이 도주하고 백성들이 흩어져 산골짜기에 잠복하였으나, 우리 대군이 철수한 뒤에는, 틀림없이 다시 모여 나머지 군사를 수습할 것입니다. 이는 족히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구려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싣고, 그의 생모를 사로잡아 돌아갔다가, 고구려 왕이 제 발로 와서 사죄하기를 기다린 후에 돌려주어, 은혜와 신의로써 무마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황이 그 말에 따라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 버리고 돌아갔다.
○十三年, 春二月, 王遣其弟, 稱臣入朝於<燕>, 貢珍異以千數. <燕>王< >乃還其父尸, 猶留其母爲質. 秋七月, 移居<平壤><東黃城>, 城在今<西京>東<木覓山>中. 遣使如<晉>朝貢. 冬十一月, 雪五尺.
13년 봄 2월, 왕이 아우를 연 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면서 예방케 하고, 1천 건에 달하는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 연 나라 임금 황이 곧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 보내고, 왕모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가을 7월, 왕이 평양의 동황성으로 옮겨 왔다. 동황성은 지금의 서경 동쪽 목멱산에 있다.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눈이 다섯 자 내렸다.
○十五年, 冬十月, <燕>王< >使<慕容恪>來攻, 拔<南蘇>, 置戍而還.
15년 겨울 10월, 연 나라 임금 황이 모용 각으로 하여금 침공케 하여 남소를 함락시킨 후 수비군을 두고 돌아갔다.
○十九年, 王送前東夷護軍<宋晃>于<燕>. <燕>王<雋>赦之, 更名曰<活>, 拜爲中尉.
19년, 왕이 이전의 동이 호군 송 황을 연 나라에 돌려 보냈다. 연 나라 임금 준이 그의 죄를 용서하고, 이름을 활이라고 고쳐서 중위로 임명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立王子<丘夫>爲王太子. 冬十二月, 王遣使詣<燕>, 納質修貢, 以請其母. <燕>王<雋>許之, 遣殿中將軍<刀龕{ 龕}> , 送王母<周>氏歸國. 以王爲征東大將軍<營州>刺使, 封<樂浪>公, 王如故.
李丙燾. [資治通鑑].
25년 봄 정월, 왕자 구부를 왕태자로 삼았다.
겨울 12월, 왕이 연 나라에 사신을 보내 볼모와 공물을 바치고, 왕모를 돌려 보내기를 요청하였다. 연 나라 임금 준이 이를 허락하고, 전중 장군 도 감으로 하여금 왕모 주씨를 호송하여 귀국하게 하였다. 왕에게 정동대장군영주자사의 작호를 주고, 낙랑공으로 봉하였으니, 이전과 동일하게 되었다.
○三十九年, 秋九月, 王以兵二萬, 南伐<百濟>, 戰於<雉壤>, 敗續{績} .
趙炳舜. 『三國史節要』.
39년 가을 9월, 왕이 군사 2만을 보내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였으나 치양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四十年, <秦>王<猛>, 伐<燕>破之. <燕>大傅<慕容評>來奔, 王執送於<秦>.
40년, 진 나라 왕 맹이 연 나라를 격파하였다. 연 나라 태부 모용 평이 우리 나라로 쫓겨왔다. 왕이 이를 붙잡아 진 나라에 보냈다.
○四十一年, 冬十月, <百濟>王 {帥} 兵三萬, 來攻<平壤城>. 王出師拒之, 爲流矢所中. 是月二十三日, 薨. 葬于<故國>之原.[<百濟><蓋鹵王>表<魏>曰: "梟斬釗首." 過辭也.]
趙炳舜. 『三國史節要』.
41년 겨울 10월,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방어하다가 화살에 맞았다. 이 달 23일에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 언덕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이 위 나라에 보낸 표문에 '소의 머리를 베었다'고 한 것은 지나친 말이다.]
<小獸林王 소수림왕>
○<小獸林王>[一云<小解朱留王>.], 諱<丘夫>, <故國原王>之子也. 身長大有雄略. <故國原王>二十五年, 立爲太子. 四十一年, 王薨, 太子卽位.
소수림왕[소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구부이며, 고국원왕의 아들이다. 그는 신체가 장대하고 웅대한 지략이 있었다. 고국원왕 25년에 태자가 되었다. 41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재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夏六月, <秦>王<符堅{ 堅}> , 遣使及浮屠<順道>, 送佛像·經文. 王遣使廻謝, 以貢方物. 立大學, 敎育子弟.
李丙燾.
今西龍.
2년 여름 6월, 진 나라 왕 부 견이 사신과 중 순도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 왔다. 왕이 사신을 보내 답례로 토산물을 바쳤다. 태학을 세워 자제들을 교육하였다.
○三年, 始頒律令.
3년, 처음으로 법령을 반포하였다.
○四年, 僧<阿道>來.
4년, 중 아도가 왔다.
○五年, 春二月, 始創<肖門寺{省門寺}> , 以置<順道>; 又創<伊弗蘭寺>, 以置<阿道>. 此海東佛法之始. 秋七月, 攻<百濟><水谷城>.
李丙燾. [海東高僧傳].
5년 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창건하여 순도로 하여금 이 절을 주관하게 하였다. 또한 이불란사를 창건하여 아도로 하여금 이 절을 주관하게 하니, 이것이 해동 불법의 시초가 되었다.
가을 7월, 백제의 수곡성을 공격하였다.
○六年, 冬十一月, 侵<百濟>北鄙.
6년 겨울 11월, 백제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七年, 冬十月, 無雪, 雷, 民疫. <百濟>將兵三萬, 來侵<平壤城>. 十一月, 南伐<百濟>. 遣使入<符{ }秦> 朝貢.
今西龍.
7년 겨울 10월, 눈이 오지 않았다. 우레가 있었다. 민간에 전염병이 돌았다. 백제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와서 평양성을 침공하였다.
11월, 남쪽으로 백제를 쳤다. 진 나라 왕 부 견에게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旱, 民饑相食. 秋九月, <契丹>犯北邊, 陷八部落.
8년,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 먹었다.
가을 9월,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시켰다.
○十三年, 秋九月, 星 于西北.
13년 가을 9월, 혜성이 서북쪽에 나타났다.
○十四年, 冬十一月, 王薨. 葬於<小獸林>, 號爲<小獸林王>.
14년 겨울 11월, 왕이 별세하였다. 소수림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소수림왕이라 하였다.
<故國壤王 고국양왕>
○<故國壤王>, 諱<伊連>[或云<於只支>.], <小獸林王>之弟也. <小獸林王>在位十四年, 薨, 無嗣, 弟<伊連>卽位.
고국양왕의 이름은 이연[혹은 어지지라고 한다.]이며, 소수림왕의 아우이다. 소수림왕이 재위 14년에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우 이련이 왕위에 올랐다.
○二年, 夏六月, 王出兵四萬, 襲<遼東>. 先是, <燕>王<垂>命<帶方>王<佐>, 鎭<龍城>. <佐>聞我軍襲<遼東>, 遣司馬< 景>, 將兵救之, 我軍擊敗之, 遂陷<遼東>·<玄 >, 虜男女一萬口而還. 冬十(-一) 月, <燕><慕容農>將兵來侵, 復<遼東>·<玄 >二郡. 初, <幽>·<冀>流民, 多來投, <農>以<范陽><龐淵>, 爲<遼東>太守, 招撫之. 十二月, 地震.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여름 6월, 왕이 군사 4만을 출동하여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에 앞서 연 나라 임금 수가 대방 왕 좌로 하여금 용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좌는 우리 군사가 요동을 습격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마 학 경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군사가 이들을 격파하고 마침내 요동과 현토를 쳐부수고 남녀 1만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겨울 11월, 연 나라 모용 농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요동과 현토 두 군을 회복하였다. 예전에 유주·기주 등지의 유랑민 다수가 우리에게 투항했었는데, 모용 농이 범양의 방연을 요동 태수로 삼아 그들을 무마하였다.
12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春正月, 立王子<談德>爲太子. 秋八月, 王發兵, 南伐<百濟>. 冬十月, 桃李華. 牛生馬, 八足二尾.
3년 봄 정월, 왕자 담덕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남쪽으로 백제를 쳤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소가 말을 낳았는데 발이 여덟, 꼬리가 두 개였다.
○五年, 夏四月, 大旱. 秋八月, 蝗.
5년 여름 4월, 크게 가물었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六年, 春, 饑人相食, 王發倉賑給. 秋九月, <百濟>來侵, 掠南鄙部落而歸.
6년 봄,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으므로, 왕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였다.
가을 9월, 백제가 침입하여 남쪽 변경 부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七年, 秋九月, <百濟>遣達率<眞嘉謨>, 攻破<都押城>, 虜二百人以歸.
7년 가을 9월, 백제가 달솔 진가모를 시켜 도압성을 쳐부수고, 주민 2백 명을 생포하여 돌아갔다.
○九{八} 年春, 遣使<新羅>修好, <新羅>王遣姪<實聖>爲質. 三月, 下敎: 崇信佛法求福. 命有司, 立國社, 修宗廟. 夏五月, 王薨. 葬於<故國壤>, 號爲<故國壤王>.
李丙燾, 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
9년 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를 약속하였다. 신라왕이 자기의 조카 실성을 볼모로 보내왔다.
3월, 불교를 숭배하여 복을 받게 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관리들에게 명하여 사직단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고국양에 장례를 지내고, 호를 고국양왕이라고 하였다.
<廣開土王 광개토왕>
○<廣開土王>, 諱<談德>, <故國壤王>之子. 生而雄偉, 有倜 之志. <故國壤王>三年, 立爲太子. 九{八} 年, 王薨, 太子卽位.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 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趙炳舜. 廣開土大王碑銘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이며,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가 되었다. 9년에 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9월,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생포하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었다. 왕이 일곱 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 점령하였다.
○二年,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創九寺於<平壤>.
2년 가을 8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하자,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三年, 秋七月, <百濟>來侵. 王率精騎五千, 逆擊敗之, 餘寇夜走. 八月,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
3년 가을 7월, 백제가 침략하였다. 왕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그들을 쳤다. 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지역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四年, 秋八月, 王與<百濟>, 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4년 가을 8월, 왕이 패수에서 백제와 싸웠다. 왕은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목베었다.
○九年, 春正月, 王遣使入<燕>朝貢. 二月, <燕>王<盛>, 以我王禮慢, 自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慕容熙>, 爲前鋒, 拔<新城>·<南蘇>二城, 拓地七百餘里, 徙五千餘戶而還.
9년 봄 정월, 왕이 연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연 나라 임금 성이 우리 왕의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직접 군사 3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 대장군 모용 희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남소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7백여 리의 땅을 점령하여 그들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11년, 왕이 군사를 보내 연 나라의 수비군을 공격하였다. 연 나라 평주 자사 모용 귀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十三年, 冬十一月, 出師侵<燕>.
13년 겨울 11월, 군사를 출동시켜 연 나라를 공격하였다.
○十四年, 春正月, <燕>王<熙>來攻<遼東城>. 且陷, <熙>命將士: "毋得先登, 俟 平其城, 朕與皇后, 乘轝而入." 由是, 城中得嚴備, 卒不克而還.
14년 봄 정월, 연 나라 임금 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희가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에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면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 가리라."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삼엄한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침내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十五年, 秋七月, 蝗, 旱. 冬十二月, <燕>王<熙>襲<契丹>, 至< 北>, 畏<契丹>之衆, 欲還. 遂棄輜重, 輕兵襲我. <燕>軍行三千餘里, 士馬疲凍, 死者屬路. 攻我<木底城>, 不克而還.
15년 가을 7월, 메뚜기 떼가 생기고 가뭄이 들었다.
겨울 12월, 연 나라 임금 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경북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군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경병으로 우리 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 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군사와 말이 피로하였다. 동사자가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을 공격하다가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十六年, 春二月, 增修宮闕.
16년 봄 2월, 궁궐을 증축 수리하였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 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 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
今西龍.
17년 봄 3월, 북연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정의를 나누었다. 북연의 임금 운이 시어사 이 발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조부 고 화는 고구려의 방계인데, 자칭 고양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 보가 태자가 되었을 때, 운이 무예가 뛰어나다 하여 동궁을 모셨는데, 모용 보가 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었다.
○十八年, 夏四月, 立王子<巨連>, 爲太子. 秋七月,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八月, 王南巡.
18년 여름 4월, 왕자 거연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동쪽 지방에 독산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왕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22년 겨울 10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광개토왕이라 하였다.
<長壽王 장수왕>
○<長壽王>, 諱<巨連>[一作<璉>.], <開土王>之元子也. 體貌魁傑, 志氣豪邁. <開土王>十八年, 立爲太子. 二十二年, 王薨, 卽位.
장수왕의 이름은 거연['連'을 '璉'이라고 쓰기도 한다.]이며, 광개토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체격이 장대하고, 의기가 호방하였다. 광개토왕 18년에 태자가 되었다. 22년에 왕이 별세하자, 왕위에 올랐다.
○元年, 遣長史<高翼>, 入<晉>奉表, 獻 白馬. <安帝>封王<高句麗>王<樂安郡>{<樂浪郡>} 公.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장사 고 익을 진 나라에 보내 표문을 올리고, 붉고 흰 말을 바쳤다. 진 나라 안제가 왕을 고구려왕 낙안군공으로 봉하였다.
○二年, 秋八月, 異鳥集王宮. 冬十月, 王 于<蛇川>之原, 獲白獐. 十二月, 王都, 雪五尺.
2년 가을 8월,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 들었다.
겨울 10월, 왕이 사천 벌에서 사냥하다가 흰 노루를 잡았다.
12월, 서울에 눈이 다섯 자 내렸다.
○七年, 夏五月, 國東大氷{水} , 王遣使存問.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여름 5월, 동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왕이 사람을 보내 위문하였다.
○十二年, 春二月, <新羅>遣使修聘, 王勞慰之特厚. 秋九月, 大有年, 王宴群臣於宮.
12년 봄 2월,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예방하였다. 왕이 그를 후하게 예우하였다.
가을 9월, 큰 풍년이 들자 왕이 궁중에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연회를 베풀었다.
○十三年, 遣使如<魏>貢.
13년,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五年, 移都<平壤>.
15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다.
○二十三年, 夏六月, 王遣使入<魏>朝貢, 且請國諱. <世祖>嘉其誠款, 使錄帝系及諱以與之. 遣員外散騎侍郞<李敖>, 拜王爲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秋, 王遣使入<魏>謝恩. <魏>人數伐<燕>, <燕>日危蹙. <燕>王<馮弘>曰: "若事急, 且東依<高句麗>, 以國{圖} 後擧." 密遣尙書<陽伊>, 請迎於我.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여름 6월, 왕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역대 황제의 이름을 알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위 나라 세조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서 제실의 계보와 이름을 기록하여 보내게 하였으며, 원외 산기 시랑 이 오를 보내 왕을 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랑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에 왕이 사?탔? 위 나라에 보내 사은하였다.
위 나라 사람들이 연 나라를 자주 공격하였기 때문에 연 나라의 형세가 나날이 위급해졌다. 연 나라 임금 풍 홍이 "만일 사태가 위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잠시 의탁하며, 훗날을 도모하겠다"라고 말하고, 비밀리에 상서 양 이를 우리 나라에 보내 받아주기를 요청하였다.
○二十四年, <燕>王遣使入貢于<魏>, 請送侍子. <魏>主不許, 將擧兵討之, 遣使來告諭. 夏四月, <魏>攻<燕><白狼城>, 克之. 王遣將<葛盧>·<孟光>, 將衆數萬, 隨<陽伊>至<和龍>, 迎<燕>王. <葛盧>·<孟光>入城, 命軍脫弊褐, 取<燕>武庫精仗, 以給之, 大掠城中. 五月, <燕>王率<龍城>見戶東徙, 焚宮殿, 火一旬不滅. 令婦人被甲居中, <陽伊>等勒精兵居外, <葛盧>·<孟光>帥騎殿後, 方軌而進, 前後八十餘里. <魏>主聞之, 遣散騎常侍<封撥>來, 令送<燕>王. 王遣使入<魏>奉表, 稱當興{與} <馮弘>, 俱奉王化. <魏>主以王違詔, 議擊之, 將發< 右>騎卒, <劉 >·<樂平王><丕>等諫之, 乃止.
趙炳舜. 『三國史節要』.
24년, 연 나라 임금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시자를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위 나라 임금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군사를 동원하여 연 나라를 공격하려 하면서, 우리 나라에 사신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여름 4월, 위 나라가 연 나라의 백낭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왕은 장수 갈로와 맹광으로 하여금 군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연 나라 사신 양 이를 따라 화룡에 가서 연 나라 임금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갈로와 맹광이 연 나라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헌 옷을 벗게 하고, 연 나라 무기고에 있는 정장을 내주어 입게 하였다. 그들은 대규모로 성을 약탈하였다.
5월, 연 나라 임금이 용성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옮기고, 궁전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열흘 동안 꺼지지 않았다. 이동하는 부녀자들에게는 갑옷을 입혀 행렬의 복판에 서게 하고, 양 이 등은 정병을 거느리고 행렬의 바깥 쪽에 서게 하였으며,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후미에 서서 수레를 나란히 몰아 진군하였다.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위 나라 임금이 이 소문을 듣고, 산기 상시 봉 발을 고구려에 보내 연 나라 임금을 압송하라고 하였다. 왕이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바치면서, 연 나라 임금 풍 홍과 함께 위 나라 임금의 교화를 받들겠다고 하였다. 위 나라 임금은 고구려 왕이 자기의 소칙을 어겼다는 이유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논의하였다. 그는 농우 지방의 기병을 출동시키려 하였으나, 유 혈·낙평·비 등이 간하여 이를 중지하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25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 春三月, 初, <燕>王<弘>至<遼東>. 王遣使勞之曰: "<龍城>王<馮>君, 爰適野次, 士馬勞乎!" <弘>慙怒, 稱制讓之. 王處之<平郭>, 尋徙<北 >. <弘>素侮我, 政刑賞罰, 猶如其國. 王乃奪其侍人, 取其太子<王仁>爲質. <弘>怨之, 遣使如<宋>, 上表求迎. <宋><太祖>遣使者<王白駒>等迎之, 幷令我資送. 王不欲使<弘>南來, 遣將<孫漱>·<高仇>等, 殺<弘>于<北 >, 幷其子孫十餘人. <白駒>等帥所領七千餘人, 掩討<漱>·<仇>, 殺<仇>, 生擒<漱>. 王以<白駒>等專殺, 遣使執送之. <太祖>以遠國, 不欲違其意, 下<白駒>等獄, 已而原之.
26년 봄 3월, 처음, 연 나라 임금 풍 홍이 요동에 당도했을 때, 왕이 사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용성왕 풍군이 이곳에 와서 야숙을 하고 있으니, 군사와 말이 피곤하겠소." 풍 홍은 부끄러워 하면서도 분노하여, 법도를 들먹이며 왕을 꾸짖었다. 왕은 풍 홍을 평곽에 있게 하다가, 얼마 후에 다시 북풍으로 옮겼다. 풍 홍은 원래 우리를 업수이 여기고, 정치와 법제도와 상벌을 자기 나라와 동일하게 하려고 하였다. 왕은 곧 그의 시종을 빼앗고, 그의 태자 왕인을 볼모로 삼았다. 풍 홍이 이를 원망하여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자기를 맞아가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송 태조가 사신 왕 백구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치송하게 하였다. 왕은 풍 홍이 남쪽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장수 손 수·고 구 등으로 하여금 북풍에서 풍 홍과 그의 자손 10여 명을 죽이도록 하였다. 송의 사신 왕 백구 등은 풍 홍이 지휘하던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 장수 손 수와 고 구를 습격하여, 고 구를 죽이고 손 수를 생포하였다. 왕은 왕 백구 등이 고 구를 마음대로 죽였다는 이유로, 그를 잡아 사신편에 송 나라로 보냈다. 송 태조는 먼 곳에 있는 나라인 고구려의 뜻을 어기지 않게 위하여 왕 백구 등을 옥에 가두었으나, 얼마 후에 석방하였다.
○二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入<魏>朝貢. 十二月, 遣使入<魏>朝貢.
27년 겨울 11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三} 十八年, <新羅>人襲殺邊將. 王怒, 將擧兵討之, <羅>王遣使謝罪, 乃止.
趙炳舜. 新羅本紀 訥祗王 34年條 참조.
28년, 신라인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습격하여 죽였다. 왕이 노하여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하려 하였으나,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와 사죄하였으므로 이를 중단하였다.
○四十二年, 秋七月, 遣兵侵<新羅>北邊.
42년 가을 7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다.
○四十三年, 遣使入<宋>朝貢.
43년,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50년 봄 3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一年, <宋><世祖><孝武皇帝>策王爲車騎大將軍開府儀同三司.
51년, 송 나라 세조 효무 황제가 왕을 거기대장군개부의동삼사로 책봉하였다.
○五十三{二} 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53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四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魏><文明大后{太后} >, 以<顯祖>六宮未備, 敎王令薦其女. 王奉表云: "女已出嫁." 求以弟女應之, 許焉, 乃遣<安樂王><眞>·尙書<李敷>等, 至境送幣. 或勸王曰: "<魏>昔與<燕>婚姻, 旣而伐之, 由行人具知其夷險故也. 殷鑑不遠, 宜以方便辭之." 王遂上書, 稱女死. <魏>疑其矯詐, 又遣假散騎常侍<程駿>, 切責之: "若女審死者, 聽更選宗淑." 王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會, <顯祖>崩, 乃止.
趙炳舜. 『三國史節要』.
54년 봄 3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위 나라 문명 태후가 현조의 6궁이 미비하다 하여, 우리 왕에게 지시하여 왕의 딸을 바치라고 하였다. 왕이 표문을 올려 "딸은 이미 출가하였다"고 말하고, 아우의 딸을 대신 바치기를 요청하였다. 위 나라에서 이를 인정하고 곧 안락왕 진과 상서 이 부 등을 국경으로 파견하여 폐백을 보내왔다. 이 때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기를 "위 나라가 이전에 연 나라와 혼인한 후 얼마 안되어 연 나라를 쳤으니, 이는 사신들이 지리적 상황을 상세히 조사해갔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머지않은 시기에 이러한 교훈을 얻었으니, 적당한 방법으로 거절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곧 위 나라에 편지를 보내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말했다. 위 나라에서는 이것이 거짓이라고 의심하여, 다시 대리산기상시 정 준을 보내 엄중히 질책하여, "만약 딸이 정말 죽었다면, 다시 종실의 다른 여자를 선택하는 것을 인정하겠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말했다. "만약 천자가 나의 전일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삼가 지시대로 따르겠다." 그 때 마침 현조가 죽었으므로 이 일은 중단되었다.
○五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55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六年, 春二月,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城>.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56년 봄 2월, 왕이 말갈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실직주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百濟>兵侵入南鄙.
57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백제의 군사가 남쪽 변경에 침입하였다.
○五十八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58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十九年, 秋九月, <民奴各{民奴久}> 等奔降於<魏>, 各賜田宅. 是<魏><高祖><延興>元年也.
李丙燾. [魏書] 高祖紀.
59년 가을 9월, 민노각 등이 위 나라에 도망가 항복하였다. 위 나라는 그들에게 각각 토지와 주택을 주었다. 이 때가 위 고조 연흥 원년이었다.
○六十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自此已後, 貢獻倍前, 其報賜, 亦稍加焉.
60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 때부터 공물의 수량이 종전에 비하여 배로 늘었으며, 보답으로 위 나라에서 주는 물량도 다소 증가하였다.
○六十一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61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二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遣使入<宋>朝貢.
62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송 나라에도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王帥兵三萬, 侵<百濟>, 陷王所都<漢城>, 殺其王<扶餘慶>, 虜男女八千而歸.
63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하여, 백제왕의 도읍지 한성을 점령한 후, 백제왕 부여 경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생포하여 돌아왔다.
○六十四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遣使入<魏>朝貢.
64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65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六年, 遣使入<宋>朝貢. <百濟><燕信>來投.
66년, 송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의 연신이 투항하였다.
○六十七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67년 봄 3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十八年, 夏四月, <南齊><太祖><蕭道成>, 策王爲驃騎大將軍. 王遣使<餘奴>等, 朝聘<南齊>, <魏><光州>人, 於海中得<餘奴>等, 送闕. <魏><高祖>詔責王曰: "<道成>親弑其君, 竊位{號} 江左. 朕方欲興滅國於舊邦, 繼絶世於<劉>氏, 而卿越境外交, 遠通簒賊, 豈是藩臣守節之義? 今不以一過掩卿舊款, 卽送還藩, 其感恕{恩} 思愆, 祗承明憲, 輯寧所部, 勤{動} 靜以聞."
李丙燾. [魏書] 高句麗紀.李丙燾. 新本.趙炳舜. 『三國史節要』.
68년 여름 4월, 남제 태조 소 도성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남제에 사신 여노 등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는데, 위 나라 광주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 나라 대궐에 송치하였다. 위 나라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 "소 도성은 직접 자기 임금을 시해하고 강남에서 왕으로 자칭하고 있다. 나는 이제 멸망한 나라를 옛 터에서 다시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유씨에게 이어주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국경을 넘어서 외부와 접촉하며, 자기 임금을 죽인 역적과 내통하고 있다. 이것이 어찌 번신의 절개를 지키는 도리이겠는가? 나는 이제 한 가지 과오 때문에 그대의 옛 정성을 무시하지 않기 위하여 여노를 즉시 돌려 보낸다. 나의 관대한 조치에 감동하여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법도를 지킬 것이며, 다스리는 지역의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그대의 동정을 보고하라."
○六十九年, 遣使<南齊>朝貢.
69년, 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二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時, <魏>人謂我方强, 置諸國使邸, 齊使第一, 我使者次之.
72년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 때, 위 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이제 강성하다고 보고, 여러 나라 사신들의 사관을 둠에 있어서, 제 나라 사신을 첫번째, 우리 나라 사신을 두 번째에 두었다.
○七十三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73년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四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74년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五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75년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六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秋閏八月, 遣使入<魏>朝貢.
76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윤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夏六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兵侵<新羅>北邊, 陷<狐山城>.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77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6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호산성을 점령하였다.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八年, 秋七月, 遣使入<魏>朝貢. 九月, 遣使入<魏>朝貢.
78년 가을 7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十九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王薨. 年九十八歲, 號<長壽王>. <魏><孝文>聞之, 制素委貌·布深衣, 擧哀於東郊. 遣謁者僕射<李安上>, 策贈車騎大將軍太傅<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諡曰<康>.
三國史記卷第十八.
79년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그의 나이 98세였다. 호를 장수왕이라 하였다. 위 나라 효문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흰 색의 위모관를 쓰고, 베로 만든 심의를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한 후, 알자 복야 이 안상을 보내와 왕을 거기대장군태부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18 끝
三國史記卷第十九 삼국사기 권 제 19
高句麗本紀第七 <&文咨王{文咨明王}> ·<安藏王>·<安原王>·<陽原王>·<平原王>.
『북한본』.
고구려본기 제 7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文咨明王 문자명왕>
○<文咨明王>[一云<明治好王>.], 諱<羅雲>, <長壽王>之孫. 父, 王子古鄒大加<助多>, 早死, <長壽王>養於宮中, 以爲太孫. <長壽>在位七十九年薨, 繼立.
문자명왕[명치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나운이며,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장수왕의 아들 고추 대가 조다였다.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나운을 궁중에서 길러 장손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에 죽자, 나운이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元年, 春(-正月) 三月, <魏><孝文帝>遣使拜王, 爲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郞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賜衣冠·服物·車旗之飾. 又詔王遣世子入朝, 王辭以疾, 遣從叔<升干>, 隨使者詣闕. 夏六月, 遣使入<魏>朝貢.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원년 봄 3월, 위 나라 효문 황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 도독 요해 제군사 정동 장군 령호 동이 중랑장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삼고, 왕에게 의관·복식·수레깃발 등의 장식물을 주었다. 또한 왕에게 세자를 보내 예방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은 세자가 병이 들어 가지 못한다고 하고, 종숙 승간으로 하여금 사신을 따라 위 나라 황제를 예방하게 하였다.
여름 6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年, 冬十月, 地震.
2년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二月, <扶餘>王及妻 , 以國來降. 秋七月, 我軍與<新羅>人, 戰於<薩水>之原. <羅>人敗, 保<犬牙城>, 我兵圍之, <百濟>遣兵三千, {救 /援 }<新羅>, 我兵引退. <齊>帝策王爲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 遣使入<魏>朝貢. 冬十月, 桃李華.
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은 '援'으로 교감하였다.
3년 봄 정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부여왕이 처자를 데리고 와서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가을 7월, 우리 군사가 신라 군사와 살수 벌판에서 싸웠다. 신라 군사가 패배하여 견아성으로 들어가 수비하였다. 우리 ?본怜? 이를 포위하였다. 백제에서 군사 3천 명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자 우리 군사가 퇴각하였다.
제 나라 임금이 왕을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2주정동대장군낙랑공으로 봉하였다.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 꽃이 피었다.
○四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大旱.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七月, 南巡狩, 望海而還. 八月, 遣兵圍<百濟><雉壤城>, <百濟>請救於<新羅>. <羅>王命將軍<德智>, 率兵來援, 我軍退還.
4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큰 가뭄이 들었다.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왕이 남쪽 지방으로 순행하여, 바다에 망제를 지내고 돌아왔다.
8월, 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의 치양성을 포위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신라왕이 장군 덕지로 하여금 백제를 구원하게 하므로 우리 군사가 퇴각하였다.
○五年, <齊>帝進王爲車騎將軍. 遣使入<齊>朝貢. 秋七月, 遣兵攻<新羅><牛山城>, <新羅>兵出擊<泥河>上, 我軍敗北.
5년, 제 나라 임금이 왕을 거기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제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군사가 니하에서 반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六年, 秋八月, 遣兵攻<新羅><牛山城>, 取之.
6년 가을 8월, 왕이 군사를 보내 신라의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七年, 春正月, 立王子<興安>爲太子. 秋七月, 創<金剛寺>. 八月, 遣使入<魏>朝貢.
7년 봄 정월, 왕의 아들 흥안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금강사를 창건하였다.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百濟>民饑, 二千人來投.
8년, 백제 백성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2천 명이 투항해왔다.
○九年, 秋八月, 遣使入<魏>朝貢.
9년 가을 8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遣使入<魏>朝貢.
10년 봄 정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一年, 秋八月, 蝗. 冬十月, 地震, 民屋倒墮, 有死者. <梁><高祖>卽位. 夏四月, 進王爲車騎大將軍. 冬十一月, <百濟>犯境. 十二月, 遣使入<魏>朝貢.
11년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겨울 10월, 지진으로 인하여 가옥이 쓰러졌다. 사망자도 있었다. 양 나라 고조가 즉위하였다.
여름 4월에 양 나라 고조가 왕을 거기 대장군으로 승진시켰다.
겨울 11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였다.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二年, 冬十一月, <百濟>遣達率<優永>, 率兵五千, 來侵<水谷城>.
12년 겨울 11월, 백제가 달솔 우영으로 하여금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수곡성을 침공하게 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世宗>引見其使<芮悉弗>於東堂. <悉弗>進曰: "小國係誠天極, 累葉純誠, 地産土毛, 無愆王貢. 但黃金出自<扶餘>, 珂則<涉羅>所産. <扶餘>爲<勿吉>所逐, <涉羅>爲<百濟>所幷, 二品所以不登王府, 實兩賊是爲." <世宗>曰: "<高句麗>世荷上奬{將} , 專制海外, 九夷 虜, 悉得征之, 甁 , 誰之咎也? 昔, 方貢之愆, 責在連率. 卿宜宣朕志於卿主, 務盡威懷之略, 披害群, 輯寧東裔. 使二邑, 還復舊墟, 土毛無失常貢也."
李丙燾. [魏書].
13년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위 나라 세종이 우리 사신 예 실불을 동당에서 접견하였다. 예실불이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우리 나라가 황제를 섬기기로 약속한 것을 누대에 걸쳐 성실하게 지켰으며,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도 어긴 적이 없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생산되고, 옥은 섭라에서 생산되는데, 부여는 물길에게 쫓기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합되었으니, 두 가지 물품이 왕의 창고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적국의 탓이다."
세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대대로 상국의 도움을 받아, 해외를 다스리고 오랑캐의 교활한 무리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물이 적어졌으니, 이는 우리의 수치인데, 이는 누구의 허물인가? 지난 날 조공이 충실하지 못한 것은 책임이 지방관에게 있다. 그대는 나의 뜻을 그대의 왕에게 전달하여, 그로 하여금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잘 사용하여 나쁜 자들을 없애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부여와 섭라로 하여금 각각 옛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토산물의 공납을 어기지 않도록 하라."
○十五年, 秋八月, 王獵於<龍山>之陽, 五日而還. 九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一月, 遣將伐<百濟>, 大雪, 士卒凍 而還.
15년 가을 8월, 왕이 용산 남쪽에서 사냥하다가 5일 만에 돌아왔다.
9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백제를 공격했으나, 큰 눈이 내리고 군사들에게 동상이 걸려 되돌아왔다.
○十六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王遣將<高老>, 興{與} <靺鞨>謀, 欲攻<百濟><漢城>, 進屯於<橫岳>下, <百濟>出師逆戰, 乃退.
趙炳舜. 『三國史節要』.
16년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장수 고로를 파견하여 말갈과 함께 백제의 한성을 치려는 계획을 세우고, 횡악 아래에 주둔하였다. 백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마주 싸우자 곧 퇴각하였다.
○十七年, <梁><高祖>下詔曰: "<高句麗>王<樂浪郡>公某, 乃誠款著, 貢驛相尋, 宜 {隆} 秩命, 式弘朝典, 可撫軍[一作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月, 遣使入<魏>朝貢.
李丙燾. [梁書].
17년, 양 나라 고조가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고구려왕낙랑군공 아무개는 약속을 성실히 지켜 조공이 끊어지지 않았다. 마땅히 관작을 높여 조정의 전범을 넓게 펴야겠으므로, 그에게 무군['군(軍)'을 '동(東)'으로도 쓴다.]대장군개부의동삼사의 관작을 준다."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八年,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18년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九年, 夏閏六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一{二} 月, 遣使入<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19년 여름 윤 6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一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秋九月, 侵<百濟>, 陷<加弗>·<圓山>二城, 虜獲(-一) 男女一千餘口.
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봄 3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백제를 침공하여 가불·원산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았다.
○二十二年, 春正月, 遣使入<魏>朝貢. 夏五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二) 月, 遣使入<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22년 봄 정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三年, 冬十一月, 遣使入<魏>朝貢.
23년 겨울 11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四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24년 겨울 10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五年,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25년 여름 4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26년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七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三月, 暴風拔木, 王宮南門自毁. 夏四月, 遣使入<魏>朝貢. 五月, 遣使入<魏>朝貢.
27년 봄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으며, 왕궁의 남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여름 4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5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八年, 王薨. 號爲<文咨明王>. <魏><靈大后{太后} >擧哀於東堂, 遣使策贈車騎大將軍. 時, <魏><肅宗>年十歲, 太后臨朝稱制.
趙炳舜. 『三國史節要』.
28년,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문자명왕이라 하였다. 위 나라 영 태후가 동당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사신을 보내 왕에게 거기대장군을 추증하였다. 이 때 위 나라 숙종의 나이가 10세였다. 태후가 조정에 나와 황제의 정사를 대리하였다.
<安?筑? 안장왕>
○<安臧王{安藏王}> , 諱<興安>, <文咨明王>之長子. <文咨>在位七年, 立爲太子. 二十八年, 王薨, 太子卽位.
허성도. 『三國史記』 목록과 『三國史記』 19卷의 제목에는 '安藏王'으로 되어 있으며, 『三國史記』 19卷의 본문 및 高句麗本紀에는 '安臧王'으로 되어 있다. 『國史大事典』에는 '安藏王'으로 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安藏王'으로 쓴다.
안장왕의 이름은 흥안이며, 문자명왕의 맏아들이다. 문자명왕이 재위 7년에 태자가 되었다. 28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梁>朝貢. 二月, <梁><高祖>封王爲寧東將軍都督<營>·<平>二州諸軍事<高句麗>王, 遣使者<江注盛{江法盛}> , 賜王衣冠劒佩, <魏>兵就海中執之, 送<洛陽>. <魏>封王爲安東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秋九月, 入<梁>朝貢.
李丙燾. [魏書]. [資治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정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양 나라 고조가 왕을 영동장군도독영평이주제군사고구려왕으로 봉하고, 사신 강 주성을 보내 의관·칼·패물 등을 전하게 하였다. 위 나라 군사가 바다에서 양 나라 사신을 붙잡아 낙양으로 보냈다. 위 나라에서 왕을 안동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9월, 양 나라에 가서 조공하였다.
○三年, 夏四月, 王幸<卒 {卒本}> ,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所經州邑貧乏者, 賜 { 三斛 / 人一斛 .}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
3년 여름 4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5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의 주·읍의 가난한 자들에게 한 사람마다 곡식 한 섬씩을 주었다.
○五年春, 旱. 秋八月, 遣兵侵<百濟>. 冬十月, 饑, 發倉賑救. 十一月, 遣使 {如} {<魏>} , 進良馬十匹.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5년 봄에 가뭄이 들었다.
가을 8월, 군사를 보내 백제를 침공하였다.
겨울 10월, 기근이 들자 창고를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11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좋은 말 열 필을 바쳤다.
○八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8년 봄 3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九年, 冬十一月, 遣使入{如} {<梁>} 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겨울 11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一年, 春三月, 王 於 城<{黃城}> 之東. 冬十月, 王與<百濟>戰於<五谷>, 克之, 殺獲二千餘級.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봄 3월, 왕이 황성 동쪽에서 사냥을 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와 오곡에서 싸워 승리하였다. 2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十三年, 夏五月, 王薨, 號爲<安臧王{安藏王} >. [是<梁><中大通>三年, <魏><普泰>元年也. 『梁書』云: "<安臧王{安藏王} >在位第八年, <普通>七年卒." 誤也.]
허성도.허성도.
13년 여름 5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안장왕이라 하였다.[이 때는 양 나라 중대통 3년이오, 위 나라 보태 원년이다. [양서]에는 '안장왕이 재위 8년, 보통 7년에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安原王 안원왕>
○<安原王>, 諱<寶延>, <安臧王{安藏王} >之弟也. 身長七尺五寸, 有大量, <安臧{安藏} >愛友之. <安臧{安藏} >在位十三年, 薨, 無嗣子, 故卽位. <梁><高祖>下詔襲爵.
허성도.허성도.허성도.
안원왕의 이름은 보연이며, 안장왕의 아우이다. 키가 7척 5촌이며, 도량이 커서 안장왕이 그를 사랑하였다. 안장왕이 재위 13년에 죽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보연이 왕위에 올랐다. 양 나라 고조가 조서를 내려 전왕의 작위를 계승케 하였다.
○二年, 春三月, <魏>帝詔策使持節散騎常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賜衣冠·車旗之飾. 夏四月, 遣使入<梁>朝貢. 六月, 遣使入<魏>朝貢.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2년 봄 3월, 위 나라 황제가 왕을 사지절산기상시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의관과 거기 등의 장식품을 주었다.
여름 4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6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年, 春正月, 立王子<平成>爲太子. 二月, 遣使入<魏>朝貢.
3년 봄 정월, 왕의 아들 평성을 태자로 삼았다.
2월, 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四年, <東魏>詔加王驃騎大將軍, 餘悉如故. 遣使入<魏>朝貢.
4년, 동위에서 조서를 보내 왕에게 표기대장군의 작위를 더하여 주고, 다른 관직은 모두 종전과 같게 하였다. 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年, 春二月, 遣使入<梁>朝貢. 夏五月, 國南大水, 漂沒民屋, 死者二百餘人. 冬十月, 地震. 十二月, 雷, 大疫.
5년 봄 2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5월, 남쪽 지방에 홍수가 나서 가옥이 유실되었다. 사망자가 2백여 명이었다.
겨울 10월, 지진이 있었다.
12월, 우레가 있었다.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六年, 春夏, 大旱. 發使撫恤饑民. 秋八月, 蝗. 遣使入<東魏>朝貢.
6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사신을 보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가을 8월, 메뚜기 떼가 나타났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三月, 民饑, 王巡撫賑救.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7년 봄 3월, 백성들에게 기근이 들었다. 왕이 순행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
겨울 12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九年, 夏五月, 遣使入<東魏>朝貢.
9년 여름 5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年, 秋九月, <百濟>圍<牛山城>, 王遣精騎五千, 擊走之. 冬十月, 桃李華. 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10년 가을 9월,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하자 왕이 정예 기병 5천 명을 보내 그들을 물리쳤다.
겨울 10월, 복숭아와 오얏꽃이 피었다.
12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一年, 春三月, 遣使入<梁>朝貢.
11년 봄 3월, 양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二年, 春三月, 大風拔木飛瓦. 夏四月, 雹.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12년 봄 3월, 바람이 크게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왓장이 날았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겨울 12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冬十一月, 遣使入<東魏>朝貢.
13년 겨울 11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四年, 冬十一月, 遣使入<東魏>朝貢.
14년 겨울 11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五年, 春三月, 王薨, 號爲<安原王>.[是<梁><大同>十一年, <東魏><武定>三年也. 『梁書』云: "<安原>以<大淸>二年卒, 以其子爲寧東將軍<高句麗>王<樂浪>公." 誤也.]
15년 봄 3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안원왕이라 하였다.[이 때가 양 나라 대동 11년 동위 무정 3년이다. [양서]에 '안원왕이 대청 2년에 죽으니, 그의 아들을 영동장군고구려왕낙랑공으로 삼았다'고 기록한 것은 잘못이다.]
<陽原王 양원왕>
○<陽原王>[或云<陽崗上好王>.], 諱<平成>, <安原王>長子. 生而聰慧, 及壯, 雄豪過人, 以<安原>在位三年, 立爲太子. 至十五年, 王薨, 太子卽位. 冬十二月, 遣使入<東魏>朝貢.
양원왕[양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평성이며, 안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해서는 남달리 호방하였다. 안원왕 재위 3년에 태자가 되었다. 15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겨울 12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一{二} 年, 春二月, 王都梨樹連理. 夏四月, 雹. 冬十一{二} 月, 遣使入<東魏>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년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가 있었다.
여름 4월, 우박이 내렸다.
겨울 11월,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三年, 秋七月, 改築<白巖城>, 葺<新城>. 遣使入<東魏>朝貢.
3년 가을 7월, 백암성을 개축하고, 신성을 수리하였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四年, 春正月, 以<濊>兵六千, 攻<百濟><獨山城>, <新羅>將軍<朱珍>來援, 故不克而退. 秋九月, <丸都>進嘉禾. 遣使入<東魏>朝貢.
4년 봄 정월, 예의 군사 6천 명으로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주진이 백제를 도왔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가을 9월, 환도에서 상서로운 벼이삭을 바쳤다.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年, 遣使入<東魏>朝貢.
5년, 동위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六年, 春正月, <百濟>來侵, 陷<道薩城>. 三月, 攻<百濟><金峴城>. <新羅>人乘間取二城. 夏六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北齊>封王, 爲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領護東夷校尉<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6년 봄 정월, 백제가 침입하여 도살성을 함락시켰다.
3월, 백제의 금현성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두 성을 빼앗았다.
여름 6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북제가 왕을 사지절시중표기대장군영호동이교위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七年, 夏五月, 遣使入<北齊>朝貢. 秋九月, <突厥>來圍<新城>, 不克, 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 領兵一萬, 拒克之, 殺獲一千餘級. <新羅>來攻, 取十城{郡} .
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여름 5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 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신라가 침공하여 열 개의 성을 빼앗았다.
○八年, 築<長安城>.
8년, 장안성을 쌓았다.
○十年, 冬, 攻<百濟><熊川城>, 不克. 十二月晦, 日有食之. 無氷.
10년 겨울, 백제의 웅천성을 공격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12월 그믐날, 일식이 있었다. 물이 얼지 않았다.
○十一年, 冬十月, 虎入王都, 擒之. 十一月, 大白{太白} 晝見. 遣使入<北齊>朝貢.
趙炳舜. 『三國史節要』.
11년 겨울 10월, 호랑이가 도성 안에 들어와 생포하였다.
11월, 낮에 금성이 나타났다.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立王子<陽成>爲太子, 遂宴群臣於內殿. 冬十月, <丸都城><干朱理>叛, 伏誅.
13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양성을 태자로 삼았다. 여러 신하들을 위하여 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겨울 10월, 환도성의 간주리가 모반하여 처형되었다.
○十五年, 春三月, 王薨, 號爲<陽原王>.
15년 봄 3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양원왕이라 하였다.
<平原王 평원왕>
○<平原王>[或云<平崗上好王>.], 諱<陽成>[『隋唐書』作湯.], <陽原王>長子. 有膽力, 善騎射. <陽原王>在位十三年, 立爲太子. 十五年, 王薨, 太子卽位.
평원왕[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양성[[수당서]에는 탕(湯)으로 되어 있다.]이며, 양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담력이 크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다. 양원왕 재위 13년에 태자가 되었다. 15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北齊>廢帝封王, 爲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 王幸<卒本>, 祀始祖廟. 三月, 王至自<卒本>, 所經州郡, 獄囚除二死, 皆原之.
2년 봄 2월, 북제의 폐제가 왕을 사지절영동이교위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3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의 주, 군의 죄수들 중에서 사형수를 제외하고 모두 사면하였다.
○三年, 夏四月, 異鳥集宮庭. 六月, 大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3년 여름 4월, 이상한 새가 대궐에 모여 들었다.
6월, 홍수가 났다.
겨울 11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四年, 春二月, <陳><文帝>詔授王寧東將軍.
4년 봄 2월, 진 나라 문제가 조서를 보내 왕에게 영동장군이라는 관작을 주었다.
○五年, 夏, 大旱, 王減常膳, 祈禱山川.
5년 여름, 큰 가뭄이 들었다. 왕이 평시의 음식을 줄이고, 산천에 기도하였다.
○六年, 遣使入<北齊>朝貢.
6년,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正月, 立王子<元>爲太子. 遣使入<北齊>朝貢.
7년 봄 정월, 왕자 원을 태자로 삼았다.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冬十二月, 遣使入<陳>朝貢.
8년 겨울 1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二年, 冬十一月, 遣使入<陳>朝貢.
12년 겨울 11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陳>朝貢. 秋七月, 王 於<浿河>之原, 五旬而返. 八月, 重修宮室, 蝗旱, 罷役.
13년 봄 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 왕이 패하 벌판에서 사냥하다가 50일 만에 돌아왔다.
8월, 궁실을 중수하는 도중에 메뚜기 떼가 생기고 날씨가 가물어 공사를 중단하였다.
○十五年, 遣使入<北齊>朝貢.
15년,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六年, 春正月, 遣使入<陳>朝貢.
16년 봄 정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九年, 王遣使入<周>朝貢, <周><高祖>拜王爲開府儀同三司大將軍<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19년, 왕이 주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주 나라 고조가 왕을 개부의동삼사대장군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임명하였다.
○二十三年, 春二月晦, 星隕如雨. 秋七月, 霜雹殺 . 冬十月, 民饑, 王巡行撫恤. 十二月, 遣使入<隋>朝貢, <高祖>授王大將軍<遼東郡>公.
23년 봄 2월 그믐날, 유성이 비오듯 떨어졌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죽였다.
겨울 10월, 백성들이 굶주렸으므로 왕이 순행하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구제하였다.
12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수 나라 고조가 왕에게 대장군요동군공이라는 관작을 주었다.
○二十四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冬十一月, 遣使入<隋>朝貢.
24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二月, 下令: 不急之事, 發使郡邑勸農桑. 夏四月, 遣使入<隋>朝貢. 冬, 遣使入<隋>朝貢.
25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왕이 급하지 않은 부역을 줄이고, 군읍에 사신을 파견하여 농사와 양잠을 권장토록 하였다.
여름 4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六年春, 遣使入<隋>朝貢. 夏四月, <隋><文帝>宴我使者於<大興殿>.
26년 봄,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수 나라 문제가 우리의 사신을 위하여 대흥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二十七年, 冬十二月, 遣使入<陳>朝貢.
27년 겨울 12월, 진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28년, 장안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三十二年, 王聞<陳>亡, 大懼, 理{治} 兵積 , 爲拒守之策. <隋><高祖>賜王璽書, 責以: "雖稱藩附, 誠節未盡." 且曰: "彼之一方, 雖地狹人少, 今若黜王, 不可虛置, 終須更選官屬, 就彼安撫. 王若 心易行, 率由憲章, 卽是朕之良臣, 何勞別遣才彦? 王謂<遼水>之廣, 何如<長江>; <高句麗>之人, 多少<陳>國. 朕若不存含育, 責王前愆, 命一將軍, 何待多力? 殷勤曉未{示} , 許王自新耳." 王得書惶恐, 將奉表陳謝而未果, 王在位三十二年, 冬十月, 薨. 號曰<平原王>.[是<開皇>十年. 『隋書』及『通鑑』書: "<高祖>賜璽書於<開皇>十七年." 誤也.]
三國史記卷第十九.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32년, 진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왕은 대단히 두려워 하였다. 왕은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비축하여 국방을 강화할 대비책을 세웠다. 수 나라 고조는 왕에게 조서를 보내 "비록 스스로 번방이라고 하면서도, 성의와 예절을 다하지 않는다"라고 책망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대의 나라가 비록 국토가 좁고 인구도 적지만, 이제 내가 만약 왕을 쫓아낸다면 그대로 비워둘 수는 없을 것이므로, 결국은 다시 관리를 선택하여, 그곳을 안정시켜야 할 것이다. 왕이 만약 마음을 씻고 행동을 고쳐서 우리의 법도를 따른다면, 그 때는 곧 나의 좋은 신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왜 힘들여 다른 인재를 보내겠는가? 요수의 넓이가 장강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고구려 인구가 진 나라와 비교하여 어떠한지를 왕은 말하여 보라. 내가 왕을 용서하려는 심정이 없고, 왕의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기로 한다면, 한 사람의 장군에게 정벌을 명령해도 될 것이니, 어찌 큰 힘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간곡한 말로 타이르는 뜻은, 왕이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는 데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이를 보고 황공하여 표문을 올려 사의를 표하려다가 실행하지 못하고, 재위 32년 겨울 10월에 죽었다. 호를 평원왕이라 하였다.[이 때는 수 나라 문제 개황 10년이다. [수서]와 [통감]의 '고조가 개황 17년에 조서를 주었다'는 기록은 잘못이다.]
삼국사기 권 제 19 끝
三國史記卷第二十 삼국사기 권 제 20
高句麗本紀第八 <拏陽王>·<建武王{榮留王}> .
趙炳舜.
고구려본기 제 8 영양왕, 건무왕(영류왕).
26대 <拏陽王 영양왕> 재위28년
수문왕,양왕 부자의 대규모공격을 물리침
대장군 강이식,을지문덕의 활약이 돋보임
○<拏陽王>[一云<平陽>.], 諱<元>[一云<大元>.], <平原王>長子也. 風神俊爽, 以濟世安民自任. <平原王>在位七年, 立爲太子. 三十二年, 王薨, 太子卽位. <隋><文帝>遣使拜王, 爲上開府儀同三司, 襲爵<遼東郡>公, 賜衣一襲.
영양왕[평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원[대원이라고도 한다.]이며,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풍채가 준수하고 쾌활하였으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안정시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였다. 평원왕 재위 7년에 태자가 되었다. 32년에 왕이 별세하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수 나라 문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상개부의동삼사로 임명하고, 전왕의 요동군공의 관직을 계승케 하고, 옷 한 벌을 주었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隋>, 奉表謝恩進奉, 因請封王, 帝許之. 三月, 策封爲<高句麗>王, 仍賜車服. 夏五月, 遣使謝恩.
2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사은하고 선물을 바친 다음, 왕으로 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문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3월, 왕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복식을 주었다.
여름 5월, 왕이 사신을 보내 사은하였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3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夏五月, 遣使入<隋>朝貢.
8년 여름 5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九年, 王率<靺鞨>之衆萬餘, 侵<遼西>, <營州>摠管<韋 >擊退之. <隋><文帝>聞而大怒, 命<漢>王<諒>·<王世績{王世積}> 爲元帥, 將水陸三十萬來伐. 夏六月, 帝下詔黜王官爵. <漢>王<諒>軍出臨< 關>, 値水 , 轉不繼, 軍中乏食, 復遇疾疫. <周羅 >自<東萊>泛海, 趣<平壤城>, 亦遭風, 舡多漂沒. 秋九月, 還師, 死者十八九. 王亦恐懼, 遣使謝罪, 上表稱<遼東>糞土臣某. 帝於是罷兵, 待之如初. <百濟>王<昌>遣使奉表, 請爲軍導. 帝下詔: 諭以<高句麗>服罪, 朕已赦之, 不可致伐. 厚其使而遣之. 王知其事, 侵掠<百濟>之境.
李丙燾. [隋書]. [資治通鑑].
9년, 왕이 말갈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공하였으나, 영주 총관 위 충이 우리 군사를 물리쳤다. 수 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한왕 양과 왕 세적 등을 모두 원수로 임명하여, 수륙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여름 6월, 문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한왕 양의 군대가 유관에 도착하였을 때, 장마로 인하여 군량미의 수송이 계속되지 못했다. 이에 따라 군중에 식량이 떨어지고 또한 전염병이 돌았다. 주 나후는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평양성으로 오다가 풍파를 만나 선박이 거의 모두 유실되거나 침몰되었다. 가을 9월, 이들이 돌아갔으나, 그들 중의 대부분이 죽었다. 왕은 이를 두려워 하여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문을 올렸다. 표문에서 자신을 "요동의 분토(糞土)에 사는 신하 아무개"라고 자칭하였다. 문제가 그 때서야 군대를 철수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백제왕 창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고구려로 가는 수 나라 군사의 향도가 되기를 자청하였다. 문제가 백제왕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내가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그들을 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백제의 국경을 침공하였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隋>朝貢. 詔: 太學博士<李文眞>, 約古史爲『新集』五卷. 國初始用文字時, 有人記事一百卷, 名曰『留記』, 至是刪修.
11년 봄 정월,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태학 박사 이 문진으로 하여금 옛 사기를 요약하여 [신집(新集)] 다섯 권을 만들도록 명령하였다. 건국 초기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했을 때, 어떤 사람이 사적을 기록한 책 1백권을 쓰고, 이것를 [유기]라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이를 정리하고 수정하였다.
○十四年, 王遣將軍<高勝>, 攻<新羅><北漢山城>, <羅>王率兵, 過<漢水>. 城中鼓 相應, <勝>以彼衆我寡, 恐不克而退.
14년, 왕이 장군 고 승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신라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를 건너왔다. 그 때 북한산성의 신라군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신라군의 함성과 호응하였다. 고 승이 상대의 군사는 많고 우리 군사는 적어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
○十八年, 初, <煬帝>之幸<啓民>帳也, 我使者在<啓民>所. <啓民>不敢隱, 與之見帝. 黃門侍郞<裴矩>說帝曰: "<高句麗>本<箕子>所封之地, <漢>·<晋>皆爲郡縣. 今乃不臣, 別爲異城, 先帝欲征之久矣. 但<楊諒>不肖, 師出無功. 當陛下之時, 安可不取, 使冠帶之境, 遂爲蠻貊之鄕乎? 今其使者, 親見<啓民>, 擧國從化, 可因其恐懼, 脅使入朝." 帝從之, <牛弘>宣旨曰: "朕以<啓民>誠心奉國, 故親至其帳, 明年當往< 郡>. 爾還日語爾王, 宜早來朝, 勿自疑懼, 存育之禮, 當如<啓民>, 苟或不朝, 將帥<啓民>, 往巡彼土." 王懼: 藩禮頗闕, 帝將討之. <啓民>, <突厥>可汗也. 夏五月, 遣師攻<百濟><松山城>, 不下, 移襲<石頭城>, 虜男女三千而還.
18년, 초기 수 나라 양제가 계민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마침 계민에게 가 있었다. 계민이 우리 사신을 감히 숨길 수 없어, 우리 사신과 함께 양제를 배알하였다. 이 때 황문 시랑 배 구가 양제에게 말했다.
"고구려는 원래 기자에게 봉하였던 땅이며, 한 나라와 진 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하의 나라로 행동하지 않고, 별도의 지역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선제께서는 오랫 동안 그들을 정벌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 량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으나, 그가 불초하여 공을 세우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는 폐하의 시대이니, 어찌 그들을 정벌하지 않고, 예절의 땅이 오랑캐의 소굴로 변하도록 방치할 것입니까? 오늘 고구려 사신은, 계민이 나라를 바쳐 왕화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 그가 우리를 두려워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가 우리에게 조공하도록 위협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양제가 이에 따라 고구려 사신에게 자기의 뜻을 전하도록 우 홍에게 명령하였다.
"계민은 성심으로 중국을 받들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계민의 막부에 온 것이며, 명년에는 응당 탁군으로 갈 것이다. 너는 돌아가는 날로 너의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라. 마땅히 빠른 시간 내에 입조하되,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리하면 내가 너의 왕을 보호하기를 계민과 같이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입조하지 않는다면, 계민을 거느리고 너의 땅을 토벌하리라."
왕이 이 말을 듣고, 번방으로서의 예절을 하지 않았으므로, 양제가 장차 토벌하러 올 것을 걱정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 즉 추장이었다.
여름 5월, 왕이 군사를 보내 백제의 송산성을 공격하다가 항복받지 못하고, 군사를 석두성으로 옮겨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
○十九年, 春二月, 命將襲<新羅>北境, 虜獲八千人. 夏四月, 拔<新羅><牛鳴山城>.
19년 봄 2월, 장수에게 신라의 북쪽 국경을 습격하도록 명령하여, 8천 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여름 4월, 신라의 우명산성을 빼앗았다.
○二十二年, 春二月, <煬帝>下詔, 討<高句麗>. 夏四月, 車蓋至< 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 郡>.
22년 봄 2월, 수 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에 도착하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二十三年, 春正月王午{壬午} , 帝下詔曰: "<高句麗>小醜, 迷昏不恭, 崇聚<勃{渤}> ·<碣>之間, 食<遼>·<濊>之境. 雖復<漢>·<魏>誅戮, 巢穴暫傾, 亂離多阻, 種落還集. 萃川藪於往代, 播寔繁以訖{ } 今. 彼華壤, 爲夷類, 歷年永久, 惡稔旣盈. 天道禍淫, 亡徵已兆. 亂常敗德, 非可勝圖, 掩慝懷姦, 唯曰{日} 不足. 移告之嚴, 未嘗面受; 朝覲之禮, 莫肯躬親. 誘納亡叛, 不知紀極; 充斥邊垂, 勞烽候. 關柝以之不靜, 生人爲之廢業. 在昔薄伐, 已漏天網, 旣緩前禽之戮, 未卽後服之誅, 曾不懷恩, ?悳?惡, 乃兼<契丹>之黨, 處劉海戍, 習<靺鞨>之服, 侵 <遼西>. 又<靑丘>之表, 咸修職貢, 碧海之濱, 同 正朔, 遂復 攘琛責{ } , 絶往來. 虐及弗辜, 誠而遇禍. 車奉使, 爰 海東, 旌節所次, 途經藩境, 而擁塞道路, 拒絶王人, 無事君之心, 豈爲臣之禮? 此而可忍, 孰不可容! 且法令苛酷, 賦斂煩重, 强臣豪族, 咸執國鈞, 朋黨比周, 以之成俗. 賄貨如市, 寃枉莫申. 重以仍歲災凶, 比屋饑饉, 兵戈不息, 役無期, 力竭轉輸, 身塡溝壑. 百姓愁苦, 爰誰適從? 境內哀惶, 不勝其弊. 廻首面內, 各懷性命之圖, 黃髮稚齒, 咸興酷毒之歎. 省俗觀風, 爰 幽朔, 弔人問罪, 無俟再駕. 於是, 親摠六師, 用申九伐, 拯厥 危, {協} 從天意, 殄玆逋穢, 剋嗣先謨. 今宜授律啓行, 分麾 路, 掩<渤海>而雷震, 歷<扶餘>以電掃. 比干{戈} 按甲誓旅而後行, 三令{先} 五申必勝而後戰. 左十二軍, 出<鏤方>·<長岑>·<溟海>·<蓋馬>·<建安>·<南蘇>·<遼東>·<玄 >·<扶餘>·<朝鮮>·<沃沮>·<樂浪>等道; 右十二軍, 出< 蟬>·<含資>·<渾彌>·<臨屯>·<候城>·<提奚>·<踏頓>·<肅愼>·<碣石>·<東 >·< 方{帶方}> ·<襄平>等道. 絡驛{繹} 引途, 摠集<平壤>." 凡一百十三萬三千八百人, 號二百萬. 其 輸者倍之. 宜杜{社} 於南<桑乾水>上, 類上帝於<臨朔宮>南, 祭馬祖於< 城>北. 帝親授節度, 每軍上將·亞將各一人, 騎兵四十隊. 隊百人, 十隊爲團. 步卒八十隊, 分爲四團, 團各有偏將一人, 其鎧胄·纓拂·旗 , 每團異色. 日遣一軍, 相去四十里, 連營漸進, 終四十日發, 乃盡. 首尾相繼, 鼓角相聞, 旌旗亘九百六十里. 御營內, 合十二衛·三臺·五省·九寺, 分隸內外·前後·左右六軍, 次後發, 又亘八十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二月, 帝御師進至<遼水>, 衆軍摠會, 臨水爲大陣. 我兵阻水拒守, <隋>兵不得濟. 帝命工部尙書<宇文愷>, 造浮橋三道於<遼水>西岸, 旣成, 引橋趣東岸, 短不及岸丈餘. 我兵大至, <隋>兵驍勇者, 爭赴水接戰, 我兵乘高擊之, <隋>兵不得登岸, 死者甚衆. <麥鐵杖>躍登岸, 與<錢士雄>·<孟叉{孟(+金)叉}> 等, 皆戰死, 乃斂兵引橋, 復就西岸. 更命少府監<何稠>接橋, 二日而成. 諸軍相次繼進, 大戰于東岸. 我兵大敗, 死者萬計. 諸軍乘勝, 進圍<遼東城>, 則<漢>之<襄平城>也. 車駕到{度} <遼>, 下詔赦天下, 命刑部尙書<衛文昇>等, 撫<遼>左之民, 給復十年, 建置郡縣, 以相統攝. 夏五月, 初, <(+隋)> 諸將之東下也, 帝戒之曰: "凡軍士進止, 皆須奏聞待報, 無得專擅." <遼東>數出戰不利, 乃 城固守. 帝命諸軍攻之, 又 諸將, <高句麗>若降, 則宜撫納, 不得縱兵. <遼東城>將陷, 城中人輒言請降, 諸將奉旨, 不敢赴期{機} , 先令馳奏. 比報至, 城中守禦亦備, 隨出拒戰. 如此再三, 帝終不悟, 旣而城久不下. 六月己未, 帝幸<遼東城>南, 觀其城池形勢, 因召諸將, 詰責之曰: "公等自以官高, 又恃家世, 欲以暗懦待我邪? 在都之日, 公等皆不願我來, 恐見病敗耳. 我今來此, 正欲觀公等所爲, 斬公輩爾, 公今畏死, 莫肯盡力, 謂我不能殺公邪?" 諸將咸戰懼失色. 帝因留止城西數里, 御<六合城>, 我諸城堅守不下. 左翊衛(-大) 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數百里, 浮海先進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與我軍相遇, 進擊大破之. <護兒>欲乘勝趣其城, 副摠管<周法尙>止之, 請俟諸軍至俱進. <護兒>不聽, 簡精甲數萬, 直造城下. 我將伏兵於羅郭內空寺中, 出兵與<護兒>戰, 而僞敗. <護兒>逐之入城, 縱兵 掠, 無復部伍. 伏兵發, <護兒>大敗, 僅而獲免,
士卒還者, 不過數千人. 我軍追至舡所, <周法尙>整陣待之, 我軍乃退. <護兒>引兵還屯海浦, 不敢復留應接諸軍. 左翊衛大將軍<宇文述>, 出<扶餘>道; 右翊衛大將軍<于仲文>, 出<樂浪>道; 左驍衛大將軍<荊元恒>, 出<遼東>道; 右翊衛大將軍<薛世雄>, 出<沃沮>道; 右屯衛將軍<辛世雄>, 出<玄 >道; 右禦衛將軍<張瑾>, 出<襄平>道; 右武侯將軍<趙孝才>, 出<碣石>道; < 郡>太守檢校左武衛將軍<崔弘昇>, 出<遂城>道; 檢校右禦衛虎賁郞將<衛文昇>, 出<增地>道, 皆會於<鴨 {鴨綠}水> 西. <述>等兵, 自<瀘河>·<懷遠>二鎭, 人馬皆給百日糧, 又給排甲槍 幷衣資戎具火幕, 人別三石已上, 重莫能勝致. 下令軍中: "遺棄米粟者斬!" 士卒皆於幕下, 掘坑埋之, 行及中路, 糧已將盡. 王遣大臣<乙支文德>, 詣其營詐降, 實欲觀虛實. <子仲文{于仲文}> 先奉密旨: "若遇王及<文德>來者, 必擒之." <仲文>將執之, 尙書右丞<劉士龍>, 爲慰撫使, 固止之. <仲文>遂聽, <文德>還, 旣而悔之, 遣人 <文德>曰: "更欲有言, 可復來." <文德>不顧, 濟<鴨 {鴨綠}水> 而去. <仲文>與<述>等, 旣失<文德>, 內不自安. <述>以糧盡欲還. <仲文>議以精銳追<文德>, 可以有功, <述>固止之. <仲文>怒曰: "將軍仗十萬之衆, 不能破小賊, 何顔以見帝? 且<仲文>此行, 固知無功. 何則? 古之良將, 能成功者, 軍中之事, 決在一人. 今人各有心, 何以勝敵?" 時, 帝以<仲文>有計劃, 令諸軍諮稟節度, 故有此言. 由是, <述>等不得已而從之, 與諸將, 渡水追<文德>. <文德>見<述>軍士有饑色, 故欲疲之, 每戰輒走. <述>一日之中, 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 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 擊, <述>等且戰且行.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 水{鴨綠水}> , 行四百五十里. 將軍<天水><王仁恭>爲殿, 擊我軍却之. <來護兒>聞<述>等敗, 亦引還. 唯<衛文昇>一軍獨全. 初, 九軍到{度} <遼>, 凡三十萬五千, 及還至<遼東城>, 唯二千七百人, 資儲器械巨萬計, 失亡蕩盡. 帝大怒, 鎖擊{繫} <述>等, 癸卯引還. 初, <百濟>王<璋>遣使, 請討<高句麗>. 帝使之 我動靜, <璋>內與我潛通. <隋>軍將出, <璋>使其臣<國知牟{國智牟}> , 入<唐{隋}> 請師期. 帝大悅, 厚加賞賜, 遣尙書起部郞<席律>, 詣<百濟>, 告以期會. 及<隋>軍渡<遼>, <百濟>亦嚴兵境上, 聲言助<隋>, 實持兩端. 是行也, 唯於<遼水>西, 拔我<武 邏>, 置<遼東郡>及<通定鎭>而已.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북한본].『북한본』.李丙燾. [隋書].李丙燾. [隋書].『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隋書].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隋書]. [資治通鑑].李丙燾. [資治通鑑].『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북한본』.『북한본』.李丙燾. [隋書].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濟紀.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정월 임오일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말했다.
"고구려의 미물들이 어리석고 불손하게도 발해와 갈석 사이에 모여 요와 예의 땅을 잠식하여 왔다. 비록 한 나라와 위 나라의 거듭된 토벌로 그 소굴이 잠시 허물어졌으나,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나니, 그 족속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지난 세대에는 내와 늪의 물고기나 새처럼 조금씩 모였던 것이 이제는 퍼지고 번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동·현토·낙랑 등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모두 오랑캐의 땅이 되었고, 세월이 오래되니 죄악이 이미 가득하였다. 천도는 사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나니, 그들이 패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그들이 도덕을 손상시키는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으며, 드러나지 않은 흉악한 행동과 속에 품은 간사한 생각이 넘치고 있다. 조칙으로 내리는 엄명을 (왕이) 한 번도 직접 받는 일이 없으며, 입조하는 의식에도 (왕이) 직접 오기를 꺼려 하였다. 중국의 반역자들을 수없이 유혹하고, 변방에 척후를 놓아 우리의 봉후들을 자주 괴롭혔다. 이로 말미암아 치안은 안정되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생업을 버리게 되었다. 지난날 문제의 정벌 시에 그들은 천망에서 빠져 나갔다. 이전에 사로잡았을 때에는 죽이지 않은 채 놓아 주었고, 뒷날 항복하였을 때도 처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저질러 거란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바다의 우리 수비병들을 살해하였으며, 말갈의 행동을 본받아 요서를 침략하였다. 또한 온 동방의 나라가 모두 조공 술직하며, 해변지역의 모든 나라가 하나같이 신년이 되면 축하의 사절을 중국에 보내거늘, 고구려는 이 때 조공하는 물품을 탈취하고, 다른 나라의 사절이 내왕하는 길을 막고 있다. 그들은 죄없는 자를 학대하며 성실한 자를 해치고 있다. 천자의 사신이 탄 수레가 해동에 갈 때, 칙사의 행차는 속국의 국경을 통과하게 되는데, 고구려는 도로를 차단하고 우리의 사신을 거절하니, 이는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를 어찌 신하의 예절이라 하겠는가? 이런 행동을 용??한다면, 어떤 행동인들 용서하지 못하랴! 또한 고구려는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과중하며, 권력있는 신하들과 세도있는 벌족들이 나라의 권력을 잡고, 당파끼리 결탁하는 것이 습속으로 되어 있다. 이들이 뇌물로 주고 받는 재화가 시장을 이루니, 백성들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곳이 없다. 해마다 재변과 흉년이 거듭 들어 집집마다 굶주리며, 전쟁은 그치지 않고 부역은 기한없이 계속되어, 전쟁 물자를 나르는 일에 힘을 다 쓰니, 지친 몸이 계곡에 쓰러져 간다. 이러한 백성들의 근심과 고통을 누가 제거해줄 것인가? 고구려의 전 지역이 이와 같이 슬픔과 공포에 잠겨 있으니,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머리를 돌려 백성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그들은 각각 생명이나 보존하기를 도모하며, 늙은이와 어린이들까지도 모두 정치의 혹독함을 한탄하고 있다. 나는 지방의 풍속을 살피기 위하여 북방에 왔으니,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 있는 자에게 죄를 물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할 것이다. 이에 나는 육사(六師)를 거느리고, 구벌(九伐)을 밝혀서 위급한 자를 구해주며, 하늘에 순종하여 이 역적을 무찔러 선조의 뜻을 이어갈 것이다. 이제 마땅히 군율에 따라 행군을 개시하되, 대오를 나누어 목적지로 향할지니, 발해를 뒤덮어 우레같이 진동케 하고, 부여를 짓밟아 번개처럼 휩쓸 것이다. 병기와 갑마를 정돈하고 부대를 경계한 후에 행군할 것이며, 재삼재사 훈시하여 필승을 꾀한 후에 전투를 시작할 것이다. 좌 12군은 누방·장잠·명해·개마·건안·남소·요동·현토·부여·조선·옥저·낙랑 방면으로 진군할 것이오, 우 12군은 점선·함자·혼미·임둔·후성·제해·답돈·숙신·갈석·동이·대방·양평 방면으로 진군하되, 진군로를 서로 연락하여 전부 평양으로 집합하게 하라."
군사의 총수는 1백13만 3천8백 명이였는데, 외형적으로는 2백만 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군량 수송을 맡은 자의 수는 배가 되었다. 수 나라에서는 남쪽 상건수에서 토지 신령께 제사지내고, 임삭궁 남쪽에서 상제께 제사지내고, 계성 북쪽에서 마조에게 제사지냈다. 양제는 직접 지휘관을 임명하여, 각 군에 상장·아장 각 1명과 기병 40대를 두었다. 1대는 1백 명이며, 10대가 1단이다. 보병은 80대였는데, 4단으로 나누어, 단마다 각각 편장 1명을 두었으며, 단의 갑옷과 투구의 끈과 깃발의 빛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 파송하되, 상호 거리가 40리씩 되게 하였다. 각 군영이 연속적으로 출발하였다. 40일 만에 출발이 모두 끝났다. 한 대열의 뒤와 다음 대열의 앞이 서로 연결되고, 북과 나팔 소리가 연이어 들렸으며, 깃발은 9백 60리에 뻗쳤다. 황제의 진영에는 12위·3대·5성·9시가 있는데, 내외·전후·좌우의 6군을 나누어 배속시켜 뒤따라 출발하였다. 이 대열이 또한 80리에 뻗쳤다. 근고 이래 군사의 출동이 이와 같이 성대한 적이 없었다.
2월, 양제가 군사를 이끌고 요수에 도착하였다. 모든 군사가 모여 강 앞에 큰 진을 쳤다. 우리 군사들은 물을 사이에 두고 방어하였기 때문에 수 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양제가 공부 상서 우문 개에게 명하여, 요수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를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된 후, 부교를 끌어 동쪽 언덕으로 잇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교가 1장 정도 짧아서 언덕까지 닿지 못하였다. 이 때 우리 군사가 크게 공격하였다. 수 나라 군사들 가운데 날쌔고 용맹한 자들이 물로 뛰어들어 접전을 하였으나, 우리 군사들은 높은 곳에서 공격하였으므로, 수 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였다. 수 나라 군사 중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맥 철장이 언덕으로 뛰어 올랐다가, 전 사웅·맹 차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기 때문에 수나라 군사는 곧 부교를 걷어 다시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양제가 다시 소부감 하 조에게 명하여 부교를 길게 늘이도록 하였다. 부교는 이틀 만에 완성되었다. 모든 부대가 차례로 건너와 동쪽 언덕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우리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1만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수 나라의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곧 한 나라 때의 양평성이다. 양제가 요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전국의 죄수를 사면하고, 형부 상서 위 문승 등을 시켜 요수의 왼쪽 지방 백성들을 위무하였으며, 그들에게 10년 간의 부역을 면제시키고, 그곳에 군현을 설치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수 나라 장수들이 동쪽으로 오는 초기에 양제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주의를 주었다. "모든 군사들의 진퇴를 반드시 나에게 보고하고, 나의 지시를 기다릴 것이며,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이 때 요동의 우리 군사는 자주 싸우는 것이 해롭다 하여, 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었다. 양제는 여러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요동성을 치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고구려가 만일 항복하면, 그들을 무마하여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들에게 방종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될 지경이 되면, 성 안 사람들은 번번이 항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 나라 장수들은 양제의 지시로 말미암아 적시에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먼저 양제에게 보고를 띄웠다. 그러나 회보가 올 때마다 성의 방비가 갖추어져서 수시로 나와 항거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두세 번 계속되었으나, 양제는 끝내 알아채지를 못하고, 성은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았다.
6월 기미일에 양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가서 성곽과 연못의 형세를 관찰하고, 곧 여러 장수들을 불러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들은 벼슬이 높다거나 또한 가문과 세도를 믿고 나를 어리석은 자로 대하려 하는가? 전일 내가 서울에 있을 때 그대들이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을 원하지 않은 것은, 그대들의 단점이 들어날까 두려워 한 것이로구나. 이제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행동을 보아 그대들의 목을 베려는 것인데, 그대들은 지금 죽는 것이 무서워 힘을 다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그대들을 죽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가?"
여러 장수들이 모두 실색을 하고 무서워 떨었다. 양제는 성의 서쪽으로 몇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육합성을 엿보고 있었으나 우리의 모든 성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좌익위 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실은 수백 리에 달하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를 통하여 패수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우리 군사와 조우하자 그들이 진격하여 우리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총관 주 법상이 만류하며, 여러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하자고 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예병 수만 명을 선발하여 곧장 성밑까지 왔다. 이 때 우리 장수는 외성에 있는 빈 절간에 군사를 숨겨 놓고, 군사를 출동시켜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는 체 하였다. 내호아가 성 안으로 쫓아 들어와 군사들을 풀어 백성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며, 미쳐 대오를 정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 우리의 숨었던 군사들이 출동하니 내호아가 대패하였다. 내호아는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하였고, 살아서 돌아간 군사는 수천명에 불과하였다. 우리 군사는 선창까지 추격하였다. 그러나 수 나라 장수 주 법상이 진을 정비하여 대비하고 있으므로 우리 군사는 곧 물러 나왔다. 내호아는 군사들을 데리고 바닷가로 돌아가서 주둔하며, 다시는 감히 다른 군사들과 호응하고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좌익위 대장군 우문 술은 부여로 출동하고, 우익위 대장군 우 중문은 낙랑으로 출동하고, 좌효위 대장군 형 원항은 요동으로 출동하고, 우익위 대장군 설 세웅은 옥저로 출동하고, 우둔위 장군 신 세웅은 현토로 출동하고, 우어위 장군 장 근은 양평으로 출동하고, 우무후 장군 조 효재는 갈석으로 출동하고, 탁군 태수 검교 좌무위 장군 최 홍승은 수성으로 출동하고, 검교 우어위 호분 낭장 위 문승은 증지로 출동하여 모두 압록강 서쪽에 집결하였다. 우문 술 등의 군사가 노하·회원 두 진 지역에서 군사와 말에게 각각 백일분의 식량을 주고, 또한 갑옷·짧은 창·긴 창·옷감·전투 기재·장막 등을 주었다. 이에 따라 군사마다 3섬 이상의 짐을 지게 되어 그 무게를 당해낼 수 없었다. 우문 술은 군사들에게 명을 내려 "도중에서 곡식을 버리는 자는 참수한다"고 하였다. 군졸들은 모두 장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에 따라 겨우 중간 쯤 행군하였을 때, 군량은 이미 거의 떨어졌다. 이 때 왕은 대신 을지 문덕을 수 나라 군영으로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의 실력 유무를 알아 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우 중문은 양제로부터 만일 고려왕이나 을지 문덕이 오는 기회가 있거든 꼭 사로잡으라는 비밀 지시를 받고 있었으므로 우 중문은 을지 문덕을 잡으려 하였다. 그러나 상서 우승 유 사룡이 위무사로 와있다가 강력히 이를 말렸다. 우 중문은 마침내 이 말을 듣고 을지 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우 중문은 곧 이를 후회하여 사람을 보내 을지 문덕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다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또 와도 좋다." 그러나 을지 문덕은 뒤돌아보지 않고 압록강을 건넜다. 우 중문과 우문 술 등은 을지 문덕을 놓치고 내심 불안하였다. 우문 술은 군량이 떨어졌다 하여 돌아가려 하였다. 우 중문이 우문 술에게, 정예 부대로 문덕을 추격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니 우문 술이 강하게 말렸다. 중문이 성을 내어 말하기를 "장군이 십만 대병을 거느리고도 적은 적군을 깨뜨리지 못하고, 무슨 낯으로 황제를 보려는가? 그리고 나는 이번의 정벌에 공이 없을 줄 미리부터 짐작하였다. 왜냐 하면 옛날 명장들이 공을 이룬 것은, 군사에 관한 일이 한 사람에 의하여 결정되었기 때문인데, 지금 우리는 사람마다 각각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箚? 하였다. 당시 양제는 중문이 계교와 전략이 훌륭하다하여, 모든 부대로 하여금 지휘 사항을 자문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 술 등이 마지 못하여 우 중문의 말대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을지 문덕을 추격하였다. 을지 문덕은 우문 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피로하게 하기 위하여 싸울 때마다 도주하였다. 우문 술은 하루에 일곱 번 싸워서 일곱 번을 모두 이겼다. 그들은 여러번 이겼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 또한 여러 사람들의 의견에 밀려서, 곧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를 건넜다. 그들은 평양성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산을 의지하고 진을 쳤다. 을지 문덕이 다시 사람을 보내 거짓 항복하는 체하고 우문 술에게 청하기를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아 간다면, 왕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으로 가서 예방하겠다"고 하였다. 우문 술은 자기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알고 있었고, 또한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우리의 거짓말을 곧이 듣고 돌아갔다. 우문 술은 방진을 치면서 행군하였다. 그 때, 우리 군사가 사면으로 공격하였다. 우문 술 등은 한편으로 싸우며 한편으로 행군하였다.
가을 7월, 우문 술의 군사가 살수에 이르러 강을 절반쯤 건널 때, 우리 군사가 후방에서 그들의 후속 부대를 공격하였다. 적장 우둔위 장군 신 세웅이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그러자 여러 부대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걷잡을 수가 없었다. 장수와 군졸이 뛰어 도주하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강까지 4백5십 리를 행군하였다. 수 나라 장군 천수 사람 왕 인공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사를 막아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 술이 패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퇴각하였다. 다만 위 문승의 군대만이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동에 도착했을 때는 총수가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갔을 때는 다만 2천 7백명 뿐이었고, 수만에 달하는 군량과 군사 기재들이 탕진되었다. 양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 술 등을 쇠사슬로 묶어 계묘일에 돌아갔다.
애초에, 백제왕 장이 수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치자고 요청했을 때, 양제는 백제로 하여금 우리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으나, 이 때 백제왕 장은 비밀리에 우리와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수 나라 군사가 출동할 때, 백제왕 장이 그의 신하 국지모로 하여금 수 나라에 가서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양제는 크게 기뻐하여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 기부랑 석률을 백제에 보내 양국 군사가 만날 기일을 알려 주었다. 수 나라 군사가 요수를 건너오게 되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서 군사를 정비하고 수 나라에 협조한다는 것을 성명하였으나, 실제로는 양 쪽을 모두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 번 싸움에서 수 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의 무려라 지역을 빼앗아 요동군과 통정진을 설치하였을 뿐이었다.
○二十四年, 春正月, 帝詔徵天下兵, 集< 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二月, 帝謂侍臣曰: "<高句麗>小虜, 侮慢上國. 今, 拔海移山, 猶望克果, 此虜乎?" 乃復議代{伐} . 左光祿大夫<郭榮>諫曰: "戎狄失禮, 臣下之事. 千鈞之弩, 不爲 鼠發機. 奈何親辱萬乘, 以敵小寇乎?" 帝不聽. 夏四月, 車駕度<遼>, 遣<宇文述>與<楊義臣>, 趣<平壤>. <王仁恭>出<扶餘>道, 進軍至<新城>. 我兵數萬拒戰, <仁恭>帥勁騎一千, 擊破之. 我軍 城固守. 帝命諸將攻<遼東>, 聽以便宜從事. 飛樓 ·雲梯·地道, 四面俱進, 晝夜不息. 我應變拒之, 二十餘日不拔. 主客死者甚衆. 衝梯竿長十五丈, 驍果<沈光>升其端, 臨城與我軍戰, 短兵接殺十數人. 我軍競擊之, 而墜未及地, 適遇竿有垂 , <光>接而復上. 帝望見壯之, 卽拜朝散大夫. <遼東城>久不下, 帝遣造布囊百餘萬口, 滿貯士{土} , 欲積爲魚梁大道, 闊三十步, 高與城齊, 使戰士登而攻之. 又作八輪樓車, 高出於城, 夾魚梁道, 欲俯射城內. 指期將攻, 城內危蹙. 會, <楊玄感>叛書至, 帝大懼. 又聞達官子弟皆在<玄感>所, 益憂之. 兵部侍郞<斛斯政>, 素與<玄感>善, 內不自安, 來奔. 帝夜密召諸將, 使引軍還. 軍資器械攻具, 積如丘山, 營壘帳幕, 案堵不動, 衆心 懼, 無復部分, 諸道分散. 我軍卽時覺之, 然不敢出, 但於城內鼓 . 至來日午時, 方漸出外, 猶疑<隋>軍詐之. 經二日, 乃出數千兵追 , 畏<隋>軍之衆, 不敢逼, 常相去八九十里. 將至<遼水>, 知御營畢度, 乃敢逼後軍. 時, 後軍猶數萬人, 我軍隨而 擊, 殺 數千人.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4년 봄 정월, 수 나라 양제가 조서를 내려 전국 군사들을 탁군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를 만들고,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2월, 양제가 근신들에게 "고구려와 같이 하찮은 것들이 상국을 무시하고 있다. 오늘 날 우리의 국력이 바다물을 뽑아내고 산을 옮길 수 있거늘 하물며 이런 따위의 적이야 무엇이 문제이겠는가?"라고 말하고,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 때 좌광록 대부 곽 영이 간하여 말하기를 "오랑캐로서 예절을 지키지 못한 것은 신하로서의 일입니다. 천근 무게의 큰 활은 생쥐를 잡기 위하여 사용하지 않는 법이니, 어찌하여 직접 천자의 자리를 더럽혀 작은 도적을 대적하려 하십니까?"라고 하였으나, 양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여름 4월, 양제는 요수를 건넜다. 그는 우문 술과 양 의신으로 하여금 평양으로 진격하게 하고, 왕 인공은 부여를 경유하여 신성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우리 군사 수만 명이 이들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인공의 강병 1천여 명에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성을 굳게 지켰다. 양제가 모든 장수에게 명령하여 요동을 치게하고, 그들로 하여금 사태에 따라 명령을 기다리지 말고 적절하게 조치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비루동·운제·지도를 이용하여 사면에서 동시에 밤낮으로 공격하였다. 그러나 우리도 그때마다 적절히 대응하였기 때문에 20여 일이 지나도록 성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양 편 모두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수 나라에서 길이가 열댓 길 되는 성곽 공격용 사다리를 세우고, 효과 심 광이 그 끝에 올라서서 성을 내려다 보며 우리 군사와 단병으로 접전하여 10여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들이 앞다투어 그를 밀었는데, 그는 땅에 채 닿기 전에 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줄을 잡고 다시 올라갔다. 양제가 이를 바라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그에게 조산 대부 벼슬을 주었다. 요동성이 오래도록 함락되지 않자, 양제는 1백여 만 개의 푸대를 만들어 보냈다. 그는 푸대에 흙을 채운 후에, 넓이가 30보이며, 성과 높이가 동일한 큰 뚝길을 쌓게 하고, 군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서서 성 안을 공격하게 하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또 한편으로 높이가 성보다 훨씬 높은 팔륜누거를 만들어, 새로 만든 큰 뚝길에 세워 성 안을 내려다 보며 활을 쏘게 하는 방법도 구상하였다. 장차 날짜를 정하여 이러한 방법으로 공격하려 하자, 성 안에서는 위협을 느끼고 위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때마침 수 나라에서 양 현감이 반역하였다는 보고가 오자, 양제는 크게 두려워 하였다. 또한 고관들의 자제가 모두 현감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이 때 수 나라 병부 시랑 곡 사정이 본래부터 현감과 친한 사이였으므로, 내심 불안하게 생각하여 우리에게 도망해왔다. 양제는 밤에 여러 장수들을 조용히 불러 군사를 인솔하고 돌아가도록 하였다. 군수 기재와 공격용 도구들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병영과 보루, 장막들도 자리에 둔 채 그대로 있었으나, 군사들의 마음은 흉흉하여 다시 부대를 정비하지 못하고,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가 이를 즉시 알았으나, 감히 나가지는 못하고 성 안에서 북을 울리며 떠들고 있다가 이튿날 오시에야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오히려 수 나라 군사가 우리를 속이는 것으로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나서야 수천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추적해 갔다. 그러나 수 나라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8·9십리의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 거의 요수에 이르러서야 양제의 친병이 모두 건너간 것을 알고, 곧 그들의 후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에도 후군의 수가 수만 명이었는데, 우리 군사가 따라 가면서 끝까지 공격하여 대략 수천 명을 죽였다.
○二十五年, 春二月, 帝詔百寮, 議伐<高句麗>, 數日無敢言. 詔復徵天下兵, 百道俱進. 秋七月, 車駕次<懷遠鎭>. 時, 天下已亂, 所徵兵多失期不至, 吾國亦困弊. <來護兒>至<卑奢城>, 我兵逆戰. <護兒>擊克之, 將趣<平壤>. 王懼, 遣使乞降, 因{囚} 送<斛斯政>. 帝大悅, 遣使持節, 召<護兒>還. 八月, 帝自<懷遠鎭>班師. 冬十月, 帝還<西京>, 以我使者及<斛斯政>, 告太廟, 仍徵王入朝, 王竟不從. 將帥嚴裝, 更圖後擧, 竟不果行.
李丙燾. [隋書]. [資治通鑑].
25년 봄 2월, 양제가 백관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는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으나, 수일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양제가 조서를 내려 다시 전국 군사를 소집하여 모든 방면의 길로 일시에 진공하게 하였다.
가을 7월, 양제가 회원진으로 행차하였다. 이 때 수 나라는 나라 전체가 이미 혼란하여, 소집한 군사의 대부분이 기일을 어기고 오지 않았고, 우리 나라도 역시 피폐된 상태였다. 수 나라 장군 내호아가 비사성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나아가 싸웠으나 호아가 승리하고 곧 평양으로 진격하려 하였다. 왕이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곡사정을 돌려 보냈다. 양제가 크게 기뻐하여 신임표 가진 사절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 양제가 회원진에서 군사를 거두었다.
겨울 10월, 양제가 서경에 돌아가서 우리의 사신과 곡사정에 대한 일을 태묘에 고하고, 또한 우리 왕에게 수 나라 조정에 들어와 예방하라고 하였으나 왕이 끝내 듣지 않았다. 양제가 장수들에게 엄밀하게 대비할 것을 명하고, 다시 공격할 것을 기도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二十九年, 秋九月, 王薨, 號曰< 陽王>.
29년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호를 영양왕이라 하였다.
<榮留王 영류왕>
○<榮留王>, 諱<建武>[一云成.], < 陽王>異母弟也. < 陽>在位二十九年薨, 卽位.
영류왕의 이름은 건무[무를 성이라고도 한다.]이며, 영양왕의 이복 아우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건무가 왕위에 올랐다.
○二年, 春二月, 遣使如<唐>朝貢. 夏四月, 王幸<卒本>,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2년 봄 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 지냈다.
5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四年, 秋七月, 遣使如<唐>朝貢.
4년 가을 7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五年, 遣使如<唐>朝貢. <唐><高祖>感<隋>末戰士多陷於此, 賜王詔書曰: "朕恭膺寶命, 君臨率土, 祗順三靈, 懷柔萬國, 普天之下, 情均撫字, 日月所炤, 咸使乂安. 王統攝<遼>左, 世居藩服, 思稟正朔, 遠循職貢. 故遣使者, 跋涉山川, 申布誠懇, 朕甚嘉揖{焉} . 方今, 六合寧晏, 四海淸平, 玉帛旣通, 道路無壅, 方申緝{輯} 睦, 永敦聘好, 各保疆 , 豈非盛美? 但<隋>氏季年, 連兵構難, 攻戰之所, 各失其泯{氓} , 遂使骨肉乖離, 室家分析, 多歷年歲, 怨曠不申. 今, 二國通和, 義無阻異. 在此所有<高句麗>人等, 已令追括, 尋卽遣送, 彼處所有此國人者, 王可放還, 務盡綏{撫} 育之方, 共弘仁恕之道." 於是, 悉搜括華人以送之, 數至萬餘. <高祖>大喜.
李丙燾. [舊唐書].李丙燾. [舊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
5년,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나라 고조가 수 나라 말기에 많은 군사들이 우리 나라에 붙잡혀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내가 공손히 천명을 받아 천하에 군림하고, 삼가 천·지·인의 삼령에 순응하여 만국을 회유하니, 천하 백성들이 모두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은 어디나 모두 편안하게 될 것이다. 왕은 요동의 동쪽 지역을 통치하면서, 대대로 번방의 자격으로 중국의 정삭을 받들며, 오랜 동안 술직과 조공의 직무를 수행하여, 사신을 보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정성을 보여왔으니, 이를 나는 매우 가상히 여긴다. 지금은 바야흐로 천지사방이 편안하며 사해가 무사하니, 예물이 내왕하되 길이 막힘이 없으며, 서로 화목하고 우호의 정을 길이 굳건히 하면서 각각 자기의 영역을 보호하고 있으니, 어찌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 나라 말년에 연이어 전쟁을 하였으니, 전쟁의 땅에는 어디에나 유랑민이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 갈라져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을 맺으니, 우리의 정의는 동일하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인은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 보내기로 하였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도 왕이 돌려 보내어, 백성들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여,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서로 넒혀 나가자."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 있는 중국인들을 전부 찾아 모아 돌려 보냈다. 그 수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六年, 冬十二月, 遣使如<唐>朝貢.
6년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七年, 春二月, 王遣使如<唐>, 請班曆. 遣刑部尙書<沈叔安>, 策王爲上枉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 命道士, 以天尊像及道法, 往爲之講『老子』, 王及國人聽之. 冬十二月, 遣使入<唐>朝貢.
7년 봄 2월,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책력을 반포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 나라에서 형부 상서 심 숙안을 보내 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도사에게 명하여 천존의 화상과 도교를 가지고 고구려에 가서 [노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백성들이 이 강의를 들었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八年, 王遣使入<唐>, 求學佛·老敎法, 帝許之.
8년, 왕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교와 노자의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요청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九年, <新羅>·<百濟>遣使於<唐>, 上言: "<高句麗>閉道, 使不得朝, 又屢相侵掠." 帝遣散騎侍郞<未子奢{朱子奢}> , 持節諭和. 王奉表謝罪, 請與二國平.
趙炳舜. 『三國史節要』.
9년, 신라와 백제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고 예방하지 못하게 하며, 또한 자주 침략한다"라고 말하였다. 당 나라 황제가 산기 시랑 주 자사에게 황제의 신임표를 주어 보내며, 세 나라가 화친하기를 권하였다. 왕이 당 나라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고, 신라·백제 두 나라와 화친하겠다고 하였다.
○十一年, 秋九月, 遣使入<唐>, 賀<太宗>擒<突厥>< 利>可汗, 兼上封域圖.
11년 가을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태종이 돌궐의 힐리 가한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를 올렸다.
○十二年, 秋八月, <新羅>將軍<金庾信>, 來侵東邊, 破<娘臂城>. 九月, 遣使入<唐>朝貢.
12년 가을 8월, 신라 장군 김 유신이 동쪽 변경을 침범하여 낭비성을 함락시켰다.
9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四年, <唐>遣<廣州>司馬<長孫師>, 臨 <隋>戰士骸骨, 祭之, 毁當時所立京觀. 春二月, 王動衆築長城, 東北自<扶餘城>, 東{西} 南至海千有餘里, 凡一十六年畢功.
李丙燾. [舊唐書].
14년, 당 나라에서 광주 사마 장 손사를 보내 수 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곳에 제사지내고, 당시에 세웠던 경관을 헐어 버렸다.
봄 2월, 왕이 백성을 동원하여 장성을 쌓았다. 그 성의 동북 쪽은 부여성에서 시작하여 동남 쪽으로 바다까지 1천여 리가 되었다. 이 성은 16년 만에 준공되었다.
○二十一年, 冬十月, 侵<新羅>北邊<七重城>. <新羅>將軍<閼川>逆之, 戰於<七重城>外, 我兵敗 .
21년 겨울 10월, 신라 북쪽 변경에 있는 칠중성을 침공하였다. 신라 장군 알천이 칠중성 밖에서 우리와 싸웠다.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二十三年, 春二月, 遣世子<桓權>, 入<唐>朝貢. <太宗>勞尉{慰} , 賜賚之特厚. 遣王子弟入<唐>, 請入國學. 秋九月, 日無光, 經三日復明.
趙炳舜. 『三國史節要』.
23년 봄 2월, 당 나라에 세자 환권을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수고를 위로하고 특별히 후하게 예물을 주었다. 왕이 당 나라에 자제들을 보내 국학에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가을 9월, 햇빛이 없어졌다가 사흘 후에 다시 밝아졌다.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回{因} 奉使 國虛實, 吾人不知. <大德>還奏, 帝悅. <大德>言於帝曰: "其國聞<高昌>亡, 大懼, 館候之勤, 加於常數." 帝曰: "<高句麗>本四郡地耳. 吾發卒數萬, 攻<遼東>, 彼必傾國救之. 別遣舟師出<東萊>, 自海道趨<平壤>, 水陸合勢, 取之不難. 但<山東>州縣, 凋 未復, 吾不欲勞之耳."
趙炳舜. 『三國史節要』.
24년, 당 나라 임금이 우리 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 낭중 진 대덕을 보내 왔다. 대덕이 우리 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니,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니,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 나라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는 중국인으로서 수 나라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니,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왕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 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 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대덕은 황제에게 "고구려는, 고창이 멸망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들의 숙소 접대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는 "고구려는 본래 중국의 4군이었던 곳이다. 내가 군사 수만을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면, 그들?? 반드시 온 국력을 기울여 요동을 구원하러 나올 것이다. 이 때 별도로 수군을 동래에서 출발시켜 바다로부터 평양을 향하게 하여 수륙군이 합세하면 고구려를 점령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산동의 주현에 전쟁의 상처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으니, 내가 그들을 수고롭게 하기를 원하지 않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二十五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王命西{東} 部大人<蓋蘇文>, 監長城之役. 冬十月, <蓋蘇文>弑王. 十一月, <太宗>聞王死, 擧哀於苑中, 詔贈物三百段, 遣使持節吊祭.
三國史記卷第二十.
李丙燾. 列傳.
趙炳舜. [三國史節要].
25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이 서부 대인 개소문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 당 나라 태종은 왕이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원중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3백 단의 폐백을 부의로 보내도록 하였으며, 지절사를 보내 조문하고 제사에 참여하게 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0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一 삼국사기 권 제 21
高句麗本紀第九 <寶臧王{寶藏王}> 上.
고구려본기 제 9 보장왕(상)
허성도.『三國史記』 목록의 21권조와 22권조, 『三國史記』 21卷 高句麗本紀 9권의 제목과 본문에는 '寶臧王'으로 되어 있으나, 『三國史記』 22卷 高句麗本紀 10권의 제목에는 '寶藏王'으로 되어 있다. 趙炳舜은 이를 근거로 ''寶臧王'이 옳다고 보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國史大事典 등에 입각하여 '寶藏王'으로 기록한다.
<寶藏王(上) 보장왕(상)>
○王, 諱<臧{藏} >[或云<寶臧{寶藏} >.], 以失國故無諡. <建武王>弟<大陽王>之子也. <建武王>在位第二十五年, <盖蘇文{蓋蘇文} >弑之, 立<臧>繼位. <新羅>謀伐<百濟>, 遣<金春秋>乞師, 不從.
허성도.허성도.李丙燾.
왕의 이름은 장[혹은 보장이라고도 한다.]이다. 그는 나라를 잃은 까닭에 시호가 없다. 그는 건무왕의 아우인 대양왕의 아들이다. 건무왕 재위 25년에 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장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치기 위하여 김 춘추를 보내 구원병을 청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二年, 春正月, 封父爲王. 遣使入<唐>朝貢. 三月, <蘇文>告王曰: "三敎譬如鼎足, 闕一不可. 今儒釋 興, 而道敎未盛, 非所謂備天下之道術者也. 伏請遣使於<唐>, 求道敎以訓國人." 大王深然之, 奉表陳請. <太宗>遣道士<叔達>等八人, 兼賜<老子>『道德經』. 王喜, 取僧寺館之. 閏六月, <唐><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而專國政, 誠不可忍. 以今日兵力, 取之不難, 但不欲勞百姓, 吾欲使<契丹>·<靺鞨>擾之, 何如?" <長孫無忌>曰: "<蘇文>自知罪大, 畏大國之討, 嚴設守備. 陛下姑爲之隱忍, 彼得以自安, 必更驕惰, 愈肆其惡, 然後討之, 未晩也." 帝曰: "善." 遣使持節備禮冊命, 詔曰: "懷遠之規, 前王令典, 繼世之義, 列代舊章. <高句麗>國王<臧{藏} >, 器懷韶{昭} 敏, 識宇詳正, 早習禮敎, 德義有聞. 肇承藩業, 誠款先著, 宜加爵命, 允玆故實, 可上柱國<遼東郡>公{王} <高句麗>王." 秋九月, <新羅>遣使於<唐>, 言: <百濟>攻取我四十餘城, 復與<高句麗>連兵, 謀絶入朝之路. 乞兵救援. 十五日, 夜明不見月, 衆星西流.
허성도.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 [冊府元龜].
2년 봄 정월, 왕이 자기의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 개소문이 왕에게 말했다.
"유교·불교·도교의 삼교는, 솥의 다리에 비유되나니, 어느 하나도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흥하고 있으나 도교가 성하지 않으니 천하의 도술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청하건대 당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왕이 이 말을 매우 옳게 여겨 당 나라에 표문을 올려 이 뜻을 알렸다. 태종이 도사 숙달 등 여덟 명을 보내고, 동시에 노자 도덕경을 주었다. 왕이 기뻐하며, 사찰에 그들의 숙소를 정해 주었다.
윤 6월, 당 나라 태종이 물었다.
"개소문은 자기 임금을 죽이고 국정을 휘두르고 있으니, 이는 실로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오늘 우리의 병력으로 고구려을 빼앗기는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으니, 거란과 말갈로 하여금 그들을 치게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장손 무기가 대답하였다.
"소문은 자기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토죄할가 두려워 견고한 수비를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우선 참고 계시면 그는 방심하게 될 것이며, 또한 반드시 교만하고 나태해져서 그의 죄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이렇게 된 연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는 "옳다"라고 대답하고, 지절사를 보내 예를 갖추어 왕을 책봉하는 조칙을 주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방을 포섭하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도이며, 세대를 계승케 하는 것은 역대의 오래된 규칙이다. 고구려 국왕 장은 사람됨이 밝고 명민하며, 식견이 상세하고 바르며, 일찍부터 예교를 배워 덕망과 의리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였다. 이제 처음으로 번방의 왕위를 계승하여, 성실과 정성이 이미 드러나고 있으니, 마땅히 작위를 주어야 할 것이므로, 전례에 의하여 상주국 요동군공고구려왕으로 봉함이 가할 것이다."
가을 9월, 신라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백제가 우리의 40여 성을 점령하고, 다시 고구려와 연합하여 조공하는 길을 막으려 한다."고 말하면서,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15일, 밤이 밝기는 하였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으며, 뭇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命司農丞<相里玄奬>, 齎璽書賜王曰: "<新羅>委質國家, 朝貢不乏, 爾與<百濟>, 各宜 兵. 若更攻之, 明年發兵, 擊爾國矣." <玄奬>入境, <蓋蘇文>已將兵擊<新羅>, 破其兩城. 王使召之, 乃還. <玄奬>諭以勿侵<新羅>, <蓋蘇文>謂<玄奬>曰: "我與<新羅>, 怨隙已久. 往者, <隋>人入寇, <新羅>乘 , 奪我地五百里, 其城邑皆據有之. 自非歸我侵地, 兵恐未能已." <玄奬>曰: "旣往之事, 焉可追論? 今<遼東>諸城, 本皆<中國>郡縣, <中國>尙且不言, <高句麗>豈得必求故地?" 莫離支竟不從. <玄奬>還, 具言其狀. <太宗>曰: "<蓋蘇文>弑其君, 賊其大臣, 殘虐其民, 今又違我詔命, (+侵暴 國) 不可以不討." 秋七月, 帝將出兵, <洪>·<饒>·<江>三州, 造舡四百 , 以載軍糧. 遣<營州>都督<張儉>等, 帥<幽>·<營>二都督兵, 及<契丹>·<奚>·<靺鞨>, 先擊<遼東>, 以觀其勢. 以大理鄕{大理卿} <韋挺>, 爲饋輸使, 自<河北>諸州, 皆受<挺>節度, 聽以便宜從事. 又命小卿<蕭銳>, 轉<河南>諸州糧入海. 九月, 莫離支貢白金於<唐>. <楮遂良>曰: "莫離支弑其君, 九夷所不容. 今將討之, 而納其金, 此 鼎之類也, 臣謂不可受." 帝從之. 使者又言: "莫離支遣官五十, 入宿衛." 帝怒謂使者曰: "汝曹皆事<高><武>, 有官爵, 莫離支弑逆, 汝曹不能復 , 今更爲之遊說, 以欺大國, 罪孰大焉?" 悉以屬大理. 冬十月, <平壤>雪{雨} 色赤. 帝欲自將討之, 召<長安>耆老, 勞曰: "<遼東>, 故<中國>地, 而莫離支賊殺其主, 朕將自行經略之. 故與父老納{約} , 子若孫從我行者, 我能 循之, 無容恤也." 則厚賜布粟. 群臣皆勸帝毋行. 帝曰: "吾知之矣, 去本以趣末; 捨高以取下; 釋近而之遠, 三者爲不祥, 伐<高句麗>, 是也. 然<蓋蘇文>弑君, 又戮大臣以逞, 一國之人, 延頸待救, 議者顧未亮耳." 於是, 北輸粟<營州>, 東儲粟<古大人城>. 十一月, 帝至<洛陽>. 前<宜州>刺史<鄭天璹>, 已致仕, 帝以其嘗從<隋><煬帝>伐<高句麗>, 召詣行在問之. 對曰: "<遼東>道遠, 糧轉艱阻, 東夷善守城, 不可猝下." 帝曰: "今日非<隋>之比, 公但聽之." 以刑部尙書<張亮>, 爲<平壤>道行軍大摠管, 帥<江>·<淮>·<嶺>·< >兵四萬, <長安>·<洛陽>募士三千, 戰艦五百 , 自<(+東)萊州> 泛海, 趣<平壤>. 又以太子詹事左衛率<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帥步騎六萬, 及<蘭>·<河>二州降胡, 趣<遼東>. 兩軍合勢, 大集於<幽州>. 遣行軍摠管<江行本{姜行本}> ·少監<丘行淹>, 先督衆士, 造梯衝於<安羅山{安蘿山}> . 時, 遠近勇士應募, 及獻攻城器械者, 不可勝數. 帝皆親加損益, 取其便易. 又手詔諭天下: "以<高句麗><蓋蘇文>, 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 >,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爲勞費." 且言: "昔, <隋><煬帝>殘暴其下, <高句麗>王, 仁愛其民. 以思亂之軍, 擊安和之衆, 故不能成功. 今略言必勝之道有五: 一曰, 以大擊小; 二曰, 以順討逆; 三曰, 以理乘亂; 四曰, 以逸敵勞; 五曰, 以悅當怨, 何憂不克? 布告元元, 勿爲疑懼." 於是, 凡頓舍供備之具, 者太半. 詔諸軍及<新羅>·<百濟>·<奚>·<契丹>, 分道擊之.
李丙燾. [資治通鑑].『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冊府元龜].李丙燾. [資治通鑑].
3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황제가 사농승 상리 현장을 보내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신라는 인질을 보낸 나라이며 조공을 계속하는 나라이다. 그대와 백제는 군사를 철수하여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내년에는 군사를 출동시켜 그대의 나라를 칠 것이다."
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두 성을 점령하였다. 왕이 사자를 보내 개소문을 소환하자, 그가 돌아왔다. 현장이 개소문에게 신라를 침공하지 말 것을 권유하자, 개소문이 현장에게 말했다.
"우리와 신라는 원한으로 사이가 벌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지난 날 수 나라가 침입하였을 때, 신라는 그 기회를 노려 우리 땅 5백 리를 빼앗았고, 그 성읍을 모두 점거하고 있다. 그들이 스스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싸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현장이 말했다.
"지난 일을 어찌 재론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에서는 이를 따지지 않고 있는데 어찌 고구려만 반드시 옛 땅을 찾으려 하는가?"
그러나 막리지는 결국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현장이 귀국하여 이러한 실정을 모두 보고하니 태종이 말했다.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치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이제는 또한 나의 명령을 듣지 않으니, 그를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7월, 당 나라 태종은 군사를 출동시키기로 하고, 홍주·요주·강주의 3주에 명령하여 배 4백 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 도독 장 검 등을 파견하여 유주·영주의 두 도독의 군사와, 거란·해·말갈 등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공격하여 형세를 관찰하게 하였다. 대리경 위 정을 궤수사로 삼아서 하북의 여러 주를 모두 그의 지휘하에 두고, 그로 하여금 명령없이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대처하도록 하였다. 또한 소경 소예에게 명령하여 하남 여러 주의 양곡을 운반하여 해로로 들어오게 하였다.
9월, 막리지가 당 나라에 백금을 바쳤다. 저 수량이 말했다.
"막리지가 자기 임금을 시해한 죄는 동방의 모든 오랑캐들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를 토벌하려 하면서 금을 받는다면, 이는 곡정( 鼎)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고구려의 사신이 또한 "막리지가 관리 50명을 궁중 숙위로 보내려 한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했다.
"너희들이 모두 고구려의 건무를 섬겨 관작을 받았는데, 막리지가 임금을 죽여도 복수하지 않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함으로써 대국을 속이려 하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있겠는가?"
황제는 말을 마치고 사신들을 모두 형관에게 맡겼다.
겨울 10월, 평양에 붉은 색의 눈이 내렸다.
당 나라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수도 장안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위로하며 말했다.
"요동은 옛날 중국의 국토이고, 또한 막리지가 그의 임금을 죽였으므로, 내가 직접 가서 그들을 다스리려 한다. 따라서 그대들에게 약속하건대, 나를 따라 종군하는 자손들은 내가 잘 위무할 것이니 근심하지 말라."
황제는 그들에게 옷감과 곡식을 후하게 주었다. 여러 신하들은 모두 황제가 원정에 참가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나도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향하며, 높은 곳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나아가며, 가까운 곳을 버리고 먼 곳으로 가는 세 가지는 모두 상서로운 행위가 아니다. 고구려를 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임을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개소문이 임금을 죽였고, 또한 대신들을 함부로 도륙하고 있으니, 온 백성들이 고개를 들고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나에게 가지 않기를 권하는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리하여 북으로는 영주로 군량을 수송케 하고, 동으로는 고대인성에 군량을 비축하였다.
11월,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 자사 정 천숙은 이미 관직을 물러나 있었다. 황제는 그가 이전에 수 양제를 따라 고구려 정벌에 참가한 적이 있다하여, 황제가 있는 곳으로 불러 상황을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요동은 길이 멀어서 군량의 수송에 문제가 많으며, 동이 사람들은 성을 잘 수비하기 때문에 조기에 항복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지금은 수 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대는 나의 의견을 따르라."
황제는 형부상서 장 량을 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강·회·영·협의 군사 4만 명과 장안·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 전함 5백 척을 거느리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진군하도록 계획하였다. 또한 태자첨사좌위솔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하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도록 계획하였다. 두 부대는 합세하여 유주에 대대적으로 집합하였다. 황제는 행군총관 강 행본과 소감 구 행엄으로 하여금 우선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여 안라산에서 운제와 충거를 만들게 하였다. 이 때 원근의 용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모였으며, 성곽 공격용 기자재를 바치는 자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황제가 이 전투 기자재들을 직접 살피고, 그 중 편리한 것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친필로 천하에 조서를 발표하였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인정상 이를 어찌 참을 수 있으랴? 이제 유주·계주 등지를 순행하며, 요동과 갈석에서 죄를 물으려 하나니, 행군 도중의 군영이나 숙소에서는 백성에게 수고를 끼치거나 백성의 재물을 낭비하지 말라."
조서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전에 수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며, 고구려왕은 백성들을 사랑하였다. 이는, 반란을 도모하는 군대를 거느려 평화로운 무리를 공격한 격이므로 수 양제가 성공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필승의 조건이 다섯 가지가 있다.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큰 것으로 작은 것을 치는 것이며, 둘째는 순리로 반역을 토벌하는 것이며, 세째는 정돈된 나라로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는 것이며, 네째는 편안한 군사로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기쁨에 충만된 군사로 원한에 쌓인 군사와 맞서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어찌 승리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백성들에게 포고하노니, 의심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라!"
이에 모든 숙소, 공급과 설비에 따르는 도구를 절반이나 삭감하였다. 모든 군단과 신라·백제·해·거란 등에 명하여 길을 나누어 고구려를 치게 하였다.
○四年, 春正月, <李世勣>軍, 至<幽州>. 三月, 帝至<定州>, 謂侍臣曰: "<遼東>本<中國>之地, <隋>氏四出師, 而不能得. 朕今東征, 欲爲<中國>報子弟之 , <高句麗>雪君父之恥耳. 且方隅大定, 唯此未平, 故及朕之未老, 用士大夫餘力, 以取之." 帝發<定州>, 親佩弓矢, 手結雨衣於鞍後.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遠鎭>者, 而潛師北趣甬道, 出我不意. 夏四月, <世勣>自<通定>, 濟<遼水>, 至<玄 >, 我城邑大駭, 皆閉門自守. 副大摠管江夏王<道宗>, 將兵數千, 至<新城>, 折衝都尉<曹三良>, 引十餘騎, 直壓城門, 城中驚(+懼) , 無敢出者. <營州>都督<張儉>, 將胡兵爲前鋒, 進度<遼水>, 趨<建安城>, 破我兵, 殺數千人. <李世勣>·江夏王<道宗>, 攻<盖牟城>, {拔} 之, 獲一{二} 萬人·糧十萬石, 以其地爲<盖州>. <張亮>帥舟師, 自<東萊>度海, 襲<卑沙城>. 城四面懸絶, 惟西門可上. <程名振>引兵夜至, 副摠管<王大度>先登. 五月, 城陷, 男女八千口沒焉. <李世勣>進至<遼東城>下. 帝至<遼>澤, 泥 二百餘里, 人馬不可通. 將作大匠<閻立德>, 布土作橋, 軍不留行, 度澤東. 王發<新城>·<國內城>步騎四萬, 救<遼東>. 江夏王<道宗>, 將四千騎逆之, 軍中皆以爲衆寡懸絶, 不若深溝高壘, 以待車駕之至. <道宗>曰: "賊恃衆有輕我心, 遠來疲頓, 擊之必敗. 當淸路以待乘輿, 乃更以賊遺君父乎?" 都尉<馬文擧>曰: "不遇勍敵, 何以顯壯士?" 策馬奔擊, 所向皆靡. 衆心稍安, 旣合戰, 行軍摠管<張君乂>退走, <唐>兵敗 . <道宗>收散卒, 登高而望見, 我軍陣亂, 與驍騎數千衝之. <李世勣>引兵助之, 我軍大敗, 死者千餘人. 帝度<遼水>, 撤橋以堅上{士} 卒之心, 軍於<馬首山>. 勞賜江夏王<道宗>, 超拜<馬文擧>中郞將, 斬<張君乂>. 帝自將數百騎, 至<遼東城>下, 見士卒負土塡塹, 帝分其尤重者, 於馬上持之, 從官爭負土置城下. <李世勣>攻<遼東城>, 晝夜不息, 旬有二日. 帝引精兵會之, 圍其城數百重{里} , 鼓 聲振天地. 城有<朱蒙>祠, 祠有鎖甲 矛. 妄言前<燕>世天所降. 方圍急, 飾美女以婦神, 巫言: "<朱蒙>悅, 城必完." <勣>列砲車, 飛大石過三百步, 所當輒潰. 吾人積木爲樓, 結 罔{網} , 不能拒, 以衝車撞 屋碎之. 時, <百濟>上金 鎧, 丈{又} 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帝與<勣>會, 甲光炫日. 南風急, 帝遣銳卒, 登衝竿之未{末} , 其西南樓. 火延燒城中, 因揮將士登城. 我軍力戰不克, 死者萬餘人. 見捉勝兵萬餘人, 男女四萬口, 糧五十萬石, 以其城爲<遼州>. <李世勣>進攻<白巖城{白崖城}> 西南, 帝臨其西北. 城主<孫代音{孫伐音}> , 潛遣腹心請降, ?睍膣?{投} 刀鉞爲信, {曰} : "奴願降, 城中有不從者." 帝以<唐>幟與其使曰: "必降者, 宜立之城上." <代音>立幟, 城中人以爲<唐>兵已登城, 皆從之. 帝之克<遼東>也, <白巖城>請降, 旣而中悔. 帝怒其反覆, 令軍中曰: "得城, 當悉以人物, 賞戰士." <李世勣>見帝將受其降, 帥甲士數十人, 請曰: "士卒所以爭冒矢石, 不顧其死者, 貪虜獲耳. 今城垂拔, 奈何更受其降, 孤戰士之心?" 帝下馬謝曰: "將軍言是也, 然縱兵殺人, 而虜其妻 , 朕所不忍. 將軍麾下有功者, 朕以庫物賞之, 庶因將軍贖此一城." <世勣>乃退, 得城中男女萬餘口, 臨水設幄, 受其降, 仍賜之食, 八十已上, 賜帛有差. 他城之兵在<白巖>者, 悉慰諭給糧仗, 任其所之. 先是, <遼東城>長史, 爲部下所殺, 其省事奉其妻子, 奔<白巖>. 帝憐其有義, 賜帛五匹, 爲長史造靈輿, 歸之<平壤>. 以<白巖城>爲<巖州>, 以<孫代音>爲刺史. 初, 莫離支遣<加尸城>七百人, 戍<盖牟城>, <李世勣>盡虜之. 其人請從軍自效. 帝曰: "汝家皆在<加尸>, 汝爲我戰, 莫離支必殺汝妻子. 得一人之力, 而滅一家, 吾不忍也." 皆稟賜遣之. 以<盖牟城>爲<蓋州>. 帝至<安市城>, 進兵攻之. 北部 薩<高延壽>·南部 薩<高惠眞>, 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 救<安市>. 帝謂侍臣曰: "今爲<延壽>策有三. 引兵直前, 連<安市城>爲壘, 據高山之險, 食城中之粟, 縱<靺鞨>掠吾牛馬, 攻之不可猝下, 欲歸則泥 爲阻, 坐困吾軍, 上策也; 拔城中之衆, 與之宵遯, 中策
也; 不度智能, 來與吾戰, 下策也. 卿曹觀之, 彼必出下策, 成擒在吾目中矣." 時, 對盧<高正義>年老習事, 謂<延壽>日{曰} : "<秦>王內芟 雄, 外服戎狄, 獨立爲帝, 此命世之才. 今據{擧} 海內之衆而來, 不可敵也. 爲吾計者, 莫若頓兵不戰, 曠日持久, 分遣奇兵, 斷其糧道. 糧食旣盡, 求戰不得, 欲歸無路, 乃可勝." <延壽>不從, 引軍直進, 去<安市城>四十里. 帝恐其低徊不至, 命大將軍<阿史那杜 {阿史那社 }> , 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僞走, <延壽>曰: "易與耳." 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陣. 帝悉召諸將問計. <長孫無忌>對曰: "臣聞: '臨敵將戰, 必先觀士卒之情.' 臣適行經諸營, 見士卒聞<高句麗>至, 皆拔刀結 , 喜形於色. 此必勝之兵也. 陛下未冠, 身親行陣. 凡出奇制勝, 皆上稟聖謀, 諸將奉成 耳. 今日之事, 乞陛下指 ." 帝笑曰: "諸公以此見讓, 朕當爲諸公商度." 乃與<無忌>等, 從數百騎, 乘高望之, 觀山川形勢, 可以伏兵及出入之所. 我軍與<靺鞨>合兵爲陣, 長四十里. 帝望之, 有懼色. 江夏王<道宗>曰: "<高句麗>傾國以拒王師, <平壤>之守必弱. 願假臣精卒五千, 覆其本根, 則數十萬之衆, 可不戰而降." 帝不應. 遣使 <延壽>曰: "我以爾國强臣弑其主, 故來問罪, 至於交戰, 非吾本心. 入爾境, 芻粟不給, 故取爾數城, 俟爾國修臣禮, 則所失必復矣." <延壽>信之, 不復設備. 帝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 陣於西嶺, <長孫無忌>·<牛進達>, 將精兵萬一千, 爲奇兵, 自山北出於狹谷, 以衝其後, 帝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山. 帝 諸軍, 聞鼓角, 齊出奮擊. 因命有司, 張受降幕於朝堂之側. 是夜, 流星墜<延壽>營. &日一{旦} 曰{日} , <延壽>等, 獨見<李世勣>軍少, 勒兵欲戰. 帝望見<無忌>軍塵起, 命作鼓角, 擧旗幟, 諸軍鼓 進. <延壽>等懼, 欲分兵禦之, 而其陣已亂. 會, 有雷電, <龍門>人<薛仁貴>, 著奇服, 大呼陷陣, 所向無敵, 我軍披靡. 大軍乘之, 我軍大潰, 死者三{二} 萬餘人. 帝望見<仁貴>, 拜遊擊將軍. <延壽>等將餘衆, 依山自固. 帝命諸軍圍之, <長孫無忌>悉撤橋梁, 斷其歸路. <延壽>·<惠眞>, 帥其衆三萬六千八百人, 請降, 入軍門, 拜伏請命. 帝簡 薩已下官長三千五百人, 遷之內地, 餘皆縱之, 使還<平壤>, 收<靺鞨>三千三百人, 悉坑之. 獲馬五萬匹·牛五萬頭·明光鎧萬領, 器械稱是. 更名所幸山, 曰<駐 山>. 以<高延壽>爲鴻 卿, <高惠眞>爲司農卿.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 <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村{材} 勇, 莫離支之亂,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因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少, 若出其不意, 攻之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 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 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將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帝曰: "以公爲將, 安得不用公策, 勿誤吾事!" <世勣>遂攻<安市>. <安市>人望見帝旗蓋, 輒乘城鼓 , 帝怒. <世勣>請克城之日, 男子皆坑之. <安市>人聞之, 益堅守, 攻久不下. <高延壽>·<高惠眞>請於帝曰: "奴旣委身大國, 不敢不獻其誠. 欲天子早成大功, 奴得與妻子相見. <安市>人顧惜其家, 人自爲戰, 未易猝拔. 今, 奴以<高句麗>十餘萬衆, 望旗沮潰, 國人膽破. <烏骨城> 薩老 , 不能堅守, 移兵臨之, 朝至夕克, 其餘當道小城, 必望風奔潰. 然後收其資糧, 鼓行而前, <平壤>必不守矣." 群臣亦言: "<張亮>兵在<沙城>, 召之, 信宿可至. 乘<高句麗> 懼, 倂力拔<烏骨城>, 度<鴨綠水>, 直取<平壤>, 在此擧矣." 帝將從之, 獨<長孫無忌>以爲天子親征, 異於諸將, 不可乘危 倖, 今<建安>·<新城>之虜衆, 猶十萬, 若回{向} <烏骨>, 皆 吾後, 不如先破<安市>, 取<建安>, 然後長驅而進, 此萬全之策也. 帝乃止. 諸將急攻<安市>. 帝聞城中 聲, 謂<世勣>曰: "圍城積久, 城中 {烟} 火日微, 今鷄 甚喧, 此必饗士, 欲夜出襲我, 宜嚴兵備之." 是夜, 我軍數百人, 城而下. 帝聞之, 自至城下, 召兵急擊. 我軍死者數十人
, 餘軍退走. 江夏王<道宗>, 督衆第{築} 土山於城東南隅, 侵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 以拒之. 士卒分番, 交戰日六七合. 衝車· 石, 壞其樓堞, 城中隨立木柵, 以塞其缺. <道宗>傷是{足} , 帝親爲之針. 築山, 晝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頂去城數丈, 下臨城中. <道宗>使果毅<傅伏愛>, 將兵屯山頂, 以備敵. 山頹壓城, 城崩. 會, <伏愛>私離所部, 我軍數百人, 從城缺出戰, 遂奪據土山, 塹而守之. 帝怒, 斬<伏愛>以徇, 命諸將攻之, 三日不能克. <道宗>徒跣詣旗下, 請罪. 帝曰: "汝罪當死, 但朕以<漢><武>殺<王恢>, 不如<秦><穆>用<孟明>, 且有破<盖牟>·<遼東>之功, 故特赦汝耳." 帝以<遼>左早寒, 草枯水凍, 士馬難久留, 且糧食將盡, 班師. 先拔<遼>·<盖>二州戶口, 度<遼>, 乃耀兵於<安市城>下而旋, 城中皆屛跡不出. 城主登城拜辭, 帝嘉其固守, 賜 百疋, 以勵事君. 命<世勣>·<道宗>, 將步騎四萬爲殿, 至<遼東>度<遼水>. <遼>澤泥 , 車馬不通. 命<無忌>, 將萬人, 草塡道, 水深處, 以車爲梁, 帝自繫薪於馬 , 以助役. 冬十月, 帝至<蒲蒲{蒲溝}> 駐馬, 督塡道. 諸軍度<渤錯水>, 暴風雪, 士卒沾濕多死者. 燃火於道以待之. 凡 <玄 >·<橫山>·<盖牟>·<磨米>·<遼東>·<白巖>·<卑沙>·<夾谷>·<銀山>·<後黃>十城, 徙<遼>·<盖>·<巖>三州戶口, 入<中國>者七萬人. <高延壽>自降後, 常憤歎, 尋以憂死, <惠眞>竟至<長安>. <新城>·<建安>·<駐 >三大戰, 我軍及<唐>兵馬死亡者, 甚衆. 帝以不能成功, 深悔之. 嘆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論曰: <唐><太宗>, 聖明不世出之君. 除亂比於<湯>·<武>, 致理幾於<成>·<康>. 至於用兵之際, 出奇無窮, 所向無敵. 而東征之功, 敗於<安市>, 則其城主, 可謂豪傑非常者矣. 而史失其姓名, 與<楊子>所云: "<齊>·<魯>大臣, 史失其名." 無異. 甚可惜也.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舊唐書].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通鑑].李丙燾. [舊唐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兩唐書에는 '白崖城', [冊府元龜]와 [唐書] 및 [資治通鑑]에는 '白巖城'으로 되어 있음.李丙燾. [冊府元龜]와 兩唐書에는 '孫伐音'으로, [資治通鑑]에는 '孫代音'으로 되어 있다.趙炳舜. 『三國史節要』.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資治通鑑].李丙燾.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4년 봄 정월, 이 세적의 군대가 유주에 도착하였다.
3월, 황제가 정주에 도착하여 시신들에게 말했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국토인데, 수 나라가 네 번이나 군사를 출동시켰으나 이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내가 지금 동방을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전사한 자제들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며, 고구려를 위해서는 죽은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일 뿐이다. 또한 사방이 평정되었는데, 오직 고구려만이 평정되지 않았으니, 내가 늙기 전에 사대부의 여력을 빌어 이 땅을 찾으려는 것이다."
황제가 정주를 떠나면서 직접 활과 화살을 차고, 안장 뒤에 비옷을 자기 손으로 매달았다. 이 세적의 군사는 유성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을 향하는 것으로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하였다.
여름 4월, 이 세적이 통정에서 요수를 건너 현토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에서는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수비태세로 들어갔다. 부대총관 강하왕 도종은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렀고, 절충도위 조 삼량은 기병 10여 명을 데리고 직접 성문을 위압하였다. 성 안 사람들이 놀라서 감히 나오려는 자가 없었다.
영주 도독 장 검이 오랑캐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와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죽였다. 이 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을 쳐서 빼앗고, 1만 명을 생포하였으며, 양곡 10만 석을 탈취한 후, 개모성을 개주로 개칭하였다. 장 량은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로부터 바다를 지나 비사성을 습격하였다. 성은 사면이 절벽으로 되어있고, 다만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다. 이 때 정 명진이 군사를 데리고 밤에 도착하였는데, 부총관 왕 대도가 먼저 성에 올랐다.
5월, 성이 함락되고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이 세적이 요동성 아래까지 진격하였다. 황제는 요의 늪 지대에 이르렀는데, 진흙이 2백여 리나 펼쳐져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 대장 염 입덕이 흙을 퍼부어 다리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지 않고 늪 지대 동쪽으로 통과하였다. 왕이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동원하여 요동을 구원하려 하였다. 강하왕 도종은 4천 명의 기병으로 이에 대항하려 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은 모두 병력의 차이가 현격하다 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다. 도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군사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경시하고 있으나, 그들은 멀리서 왔기 때문에 피곤한 상태이므로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 이렇게 하여 길을 깨끗이 닦아놓고 황제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어찌하여 황제 앞에 적을 넘겨 드리려 하는가?"
도위 마 문거가 말했다.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서야 어떻게 장사의 능력을 드러내겠느냐?"
그는 말을 마치자,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가 공격하였다. 그가 가는 곳마다 우리 군사가 쓰러졌다. 이에 당 나라 군사들의 마음이 약간 안정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자 행군 총관 장 군예가 퇴주하고 당 나라 군사가 패배하였다. 도종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섰다. 그는 우리 군대의 진영이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기병 수천 명을 이끌어 돌격해왔다. 그 때 이 세적이 군사를 이끌고 협공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군사가 크게 패배하니, 사망자가 1천여 명이었다.
황제는 요수를 건넌 다음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에 진을 쳤다. 황제는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상을 주고, 마 문거를 몇 급 올려 중랑장으로 삼고, 장 군예의 목을 베었다. 황제는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밑에 가서, 군사들이 흙을 지고 참호를 쌓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직접 제일 무거운 것을 자기 말에 실었다. 이에 시종들이 다투어 흙을 운반하여 성 밑에 쌓았다.
이 세적은 밤낮없이 12일 간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정예 부대를 이끌고 이 세적에게 와서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였다. 북소리와 함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었고, 이 사당에는 쇠사슬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녕되게도 이전 연 나라 시대에 하늘이 내려 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 태세가 긴박해지자, 미인을 부신으로 분장시켜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보전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세적이 포차를 열지어 놓고, 큰 돌을 3백 보 이상 날려 보냈다. 돌이 맞는 곳마다 모두 허물어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누대를 만들고 그물을 쳤으나 돌을 막을 수 없었다. 당 나라 군사는 충거로 성 위의 집을 부수었다. 이 때 백제가 황색 칠을 한 쇠 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군사들에게 입혀 종군하였다. 황제가 이 세적과 만나자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남풍이 세게 불자 황제가 민첩한 군사로 하여금 장대의 꼭대기에 올라가서 성의 서남루를 불사르게 하였다. 불이 성 안으로 타들어가자 황제는 곧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에 오르게 하였다. 우리 군사들은 사력을 다하여 싸웠으나 승리하지 못했고, 사망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 나라는 군사 1만여 명과 남녀 주민 4만 명을 생포하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하였으며, 요동성을 요주로 개칭하였다. 이 세적은 백암성 서남 쪽을 공격하고, 황제는 서북쪽으로 갔다. 백암성 성주 손 대음이 비밀리에 심복을 보내 항복하기를 청하고, 성에 나와 칼과 도끼를 던지는 것으로 신호를 삼겠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당 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틀림없이 항복하겠으면 이 깃발을 성 위에 세우라"고 하였다. 대음이 그 깃발을 세우니 성 안 사람들은 당 나라 군사가 이미 성에 올랐다고 생각하여, 모두 손 대음을 따라 항복하였다.
황제가 요동을 공격하여 승리하였을 때,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는 후회하였다. 황제는 그들의 변심을 보고 노하여 군사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을 빼앗으면 마땅히 빼앗은 사람과 물건을 모두 전사들에게 상으로 주리라."
이 때 이 세적은 황제가 백암성의 항복을 받으려는 것을 알아채고, 갑병 수십 명을 데리고 와서 황제에게 말했다.
"사졸들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것은, 노획물을 탐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이 거의 함락되어 가는데 어찌하여 항복을 받음으로써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합니까?"
황제가 말에서 내려와 사과하며 말했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함부로 풀어 사람을 죽이고, 그들의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내가 차마 저지를 수 없는 행위이다. 장군의 부하로서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내가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것이다. 장군으로 인하여 이 성이 속죄받기를 원한다."
세적은 물러나와 성 안의 남녀 1만여 명을 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런 후에 곧 먹을 것을 주고, 80세의 노인에게는 정도에 따라 비단을 주었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와있던 자들은 전부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군기를 주어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서 요동성 장사가 부하에게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었다. 그 성의 성사 한 사람이 장사의 처자들을 데리고 백암성으로 도망해왔었다. 황제는 그의 의리를 가상히 여겨 비단 다섯 필을 주고, 장사의 상여를 만들어 평양으로 보냈다. 백암성을 암주로 개칭하고, 손 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애초에 막리지는 가시성의 군사 7백 명을 파견하여 개모성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이 세적은 그들을 모두 생포하였다. 그들은 당 나라 군사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기를 요청하였다. 황제가 말했다.
"너희들의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다. 그러나 너희들이 나를 위하여 싸우게 되면 막리지가 반드시 너희들의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기 위하여 한 집안을 멸망하게 하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가 없다."
황제는 그들에게 모두 곡식을 주어 돌려 보냈다. 개모성을 개주로 개칭하였다.
황제가 안시성에 도착하여 성을 공격하자, 북부 욕살 고 연수와 남부 욕살 고 혜진은 우리 군사와 말갈군 15만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들에게 말했다.
"지금 연수에게 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 째는, 군사를 이끌고 직접 앞으로 나가서, 안시성과 연결되는 보루를 쌓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에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면서 말갈군을 풀어 우리의 마소를 약탈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공격한다고 해도 빨리 항복받을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늪지가 장애가 될 것이므로, 우리 군사들은 앉아서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된다. 이것이 상책이다. 둘 째는, 성 안의 군사를 데리고 야간 도주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책이다. 셋 째는, 자기의 지혜와 재능을 모르고, 우리와 대적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책이다. 그대들은 두고 보라. 그가 필히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게 되는 작전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질 것이다."
이 때, 나이 많고 경험이 풍부한 대노 고 정의가 연수에게 말했다.
"진왕은, 안으로는 여러 영웅들을 쳐 없애고, 밖으로는 오랑캐들을 굴복시켜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니, 이는 세상을 제도하라는 천명을 받은 인재이다. 지금 그가 전국의 군사를 이끌고 왔으므로 이에 대적할 수는 없다. 나의 계책은, 군사를 정비하되 싸우지 않고, 여러 날을 두고 지구전을 펴면서 기습병을 보내 그들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저들은 군량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싸울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갈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 때만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때이다."
그러나 연수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군사를 거느리고 안시성 밖 40리까지 진군하였다. 황제는 연수가 주저하고 진군해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대장군 아사나 두이에게 명하여 돌궐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그를 유인하게 하였다. 첫 교전에서 당 나라 군사가 패주하는 척하자, 연수는 "다루기가 쉽구나"라고 말하며, 앞을 다투어 진격하였다. 그는 안시성 동남방 8리 지점에 이르러서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들을 전부 불러 놓고 계책을 물으니 장손 무기가 대답하였다.
"'적을 만나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군사?湧? 심정을 살펴야 한다'고 저는 들었습니다. 제가 마침 여러 병영을 다니는데, 군사들이 고구려 군사가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칼을 뽑아 들고 깃발을 달면서 얼굴에 희색이 도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반드시 승리할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면류관을 벗어놓고 직접 진지에 나섰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뛰어난 전술로 승리를 거듭한 것은, 모두 위로 폐하의 책략을 받들어 모든 장수들이 성공을 이루어낸 것 뿐입니다. 오늘 일도 폐하께서 직접 지휘하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제공들이 이 일을 나에게 사양하니, 내가 제공들을 위하여 방법을 구상하겠노라."
황제는 곧 무기 등과 함께 수백 명의 기병을 데리고 고지에 올라 산천의 형세 가운데 복병시킬 수 있는 곳과 병력의 출입이 가능한 곳을 관찰하였다. 이 때 우리 군사는 말갈군과 연합하여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진의 길이는 40리에 달했다. 황제가 이를 관찰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나타났다. 강하왕 도종이 말했다.
"고구려는 전력을 다하여 천자의 군대를 방어하고 있으니, 틀림없이 평양의 수비에는 약점이 있을 것입니다. 저에게 정예군 5천 명을 주시어, 그들의 근본을 뒤엎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싸우지 않고도 수십만 군사를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는 이를 듣지 않고, 사신을 보내 연수에게 거짓으로 말했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니, 우리가 서로 전투를 하게 된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나라 경내에 들어오니 마초와 양식이 충분하지 않아 몇 개 성을 빼앗기는 하였으나,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절을 지킨다면 잃었던 성은 반드시 돌려 줄 것이다."
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수비 태세를 더 갖추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계책을 의논한 다음, 이 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 무기와 우 진달에게 정예군 1만 1천 명을 주어 기습병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우리 군사의 후면을 공격하게 하고, 황제는 직접 보병과 기병 4천명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황제는 모든 군대에게 북과 나팔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맹공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또한 관리에게는 항복받을 장막을 조회당 옆에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날 밤, 유성이 연수의 병영에 떨어졌다. 아침에 연수 등은 이 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만 보고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하려 하였다. 황제는 무기의 부대에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깃발을 들게 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하였다. 연수 등은 두려워하며 군사를 나누어 방어하려 하였다. 그러나 진영은 이미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그 때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당 나라 용문 사람 설 인귀가 기이한 복장을 하고, 고함을 치면서 우리의 진영으로 깊숙히 들어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어 우리 군사가 쓰러졌다. 당 나라의 대군이 이 때를 이용하여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는 큰 혼란에 빠지고, 3만여 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황제는 멀리서 인귀를 바라보다가 그를 유격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연수 등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자체 수비를 강화하였다. 황제가 모든 부대에 명령하여 우리 군사를 포위하게 하고, 장손 무기에게는 교량을 전부 철거하여 우리 군사의 귀로를 차단하게 하였다. 연수와 혜진은 자기 군사 3만 6천8백 명을 이끌고 항복을 청하면서, 당 나라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었다. 황제는 욕살 이하의 관장 3천 5백 명을 선발하여 당 나라 지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여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 3백 명은 전부 생매장 하였다. 말 5만 필·소 5만 두·명광 갑옷 1만 벌을 노획하였으며, 기타의 기자재도 이 정도 노획하였다. 황제가 갔던 산의 명칭을 주필산으로 개명하고, 고 연수를 홍려경, 고 혜진을 사농경에 임명하였다.
황제가 백암성을 공격하여 승리했을 때, 이 세적에게 말했다.
"내가 듣건대, 안시성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며, 그 성주가 용맹스러워,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으며,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그를 굴복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성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건안성은 병력이 약하고 군량미도 적다. 따라서 만약 불시에 그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라. 건안성이 항복하면 안시성은 이미 우리의 손 안에 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 가운데는 공격해서는 안될 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이 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는데, 우리의 군량은 전부 요동에 있습니다. 이제 안시성를 지나 건안성을 공격하다가 만약 고구려인들이 우리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면 어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안시성이 항복하면, 당당하게 북을 울리며 행군하여 건안성을 빼앗을 수 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내가 그대를 장군으로 삼았으니, 어찌 그대의 계책을 따르지 않겠느냐? 부디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말라!"
세적은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이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바라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니 황제가 분노하였다. 세적은, 성이 함락되는 날 안시성의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 버릴 것을 황제에게 요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더욱 굳게 수비하였다. 당 나라 군사가 오랫동안 공격하였으나 안시성을 함락시킬 수 없었다. 고 연수·고 혜진 등이 황제에게 말했다.
"저희들이 이미 대국에 몸을 맡겼으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빨리 큰 공을 이루어 우리가 처자와 만나게 하여 주기를 원합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의 가족들을 생각하여 자진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에 빨리 함락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희들은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깃발을 보는 것만으로 사기가 꺾여 허물어졌으며, 백성들의 간담이 서늘하였습니다. 오골성의 욕살은 늙어서 수비가 견실할 수 없으니, 군사를 옮겨 그곳을 공격한다면,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는 승리할 것이며, 도중에 있는 여타의 작은 성들은 위풍만 보고도 반드시 허물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연후에 그곳의 자재와 군량을 거두어 북을 울리며 전진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평양을 지켜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 신하들이 또 말했다.
"장 량의 군사가 사성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이면 올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 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장 량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강을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일에 달렸습니다."
황제가 이 말을 따르려 하자 장손 무기가 홀로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천자의 원정은 보통 장수들의 정벌과는 다르다. 따라서 모험을 하면서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무리가 아직도 10만이나 되는데, 우리가 만약 오골성으로 간다면, 고구려 군사들이 반드시 우리의 뒤를 추격할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안시성을 점령하고 건안성을 취한 후에 군사를 먼 곳으로 진군시키는 것이 옳다. 이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장손 무기의 말을 듣고 황제는 곧 앞서의 계획을 중지하였다.
모든 장수들이 안시성을 급히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들리는 닭과 돼지의 소리를 듣고 세적에게 말했다.
"성을 포위한지 오래되어, 성 안에는 밥짓는 연기가 나날이 줄어들고 있는데, 지금 닭과 돼지 소리가 요란하니, 이는 틀림없이 군사들을 잘 먹인 후에 야습하려는 것이다. 군사를 단속하여 이에 대비하라."
이날 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왔다. 황제가 이 말을 듣고 직접 성 밑에 와서 군사를 소집하여 재빨리 공격하였다. 우리 군사 중에 사망자가 수십 명이나 되었고, 나머지는 도주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의 동남 쪽에 토산을 쌓아 점점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게 쌓아 굳게 방어하였다. 군사들은 당번을 정하여 하루에도 6, 7회씩 교전하였다. 당 나라 군사의 충거와 포석이 누대와 성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 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황제가 직접 침을 놓아 주었다. 당 나라 군사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을 쌓았다. 이 작업에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
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기 때문에 성 안을 내려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 부복애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정에 주둔하여 적을 대비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에 산이 허물어지면서 성을 덮치는 바람에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바로 이 때, 복애는 사사로운 이유로 수비하던 곳을 떠나 있었다. 우리 군사 수백 명이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토산을 탈취하여 그곳에 참호를 파고 수비하였다. 황제가 노하여 복애의 목을 베어 조리를 돌리고,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흘이 지나도 이길 수 없었다. 도종이 맨발로 황제의 깃발 아래 가서 죄를 청했다. 황제가 말했다.
"너의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나는 한 무제가 왕회를 죽인 것이 진 목공이 맹명을 등용한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또한 너는 개모성과 요동을 점령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특별히 용서한다."
황제는, 요동 지방은 일찍 추워지므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을 것이므로, 군사와 말을 오래 머무르게 할 수 없으며, 또한 군량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대의 철수를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개주 두 주의 주민을 선발하여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는 군사를 동원하여 시위를 하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다.
성주는 성에 올라가 절을 하며 작별하였다. 황제는 그가 성을 굳게 지킨 것을 가상히 여기면서, 겹실로 짠 비단 1백 필을 주어,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격려하였다. 황제는 세적과 도종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후군으로 서게 하였다. 그들이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 습지의 진흙 때문에 수레와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황제는 무기에게 명령하여 1만 명의 군사로 하여금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로 삼아 건너도록 하였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와 주었다.
겨울 10월, 황제가 포구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진흙길 메우는 작업을 독려하였다. 모든 군사가 발착수를 건넜다. 바람과 눈이 휘몰아쳐서 군사들의 옷이 젖고 동사자가 많이 생겼다. 황제는 길가에 불을 피워놓고 군사를 기다리도록 하였다. 현토·횡산·개모·마미·요동·백암·비사·협곡·은산·후황 등 10개 성을 철폐하고, 요주·개주·암주 3개 주에서 7만 명의 주민을 중국으로 옮겨 갔다. 고 연수는 항복한 뒤로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홧병으로 죽고, 고 혜진은 결국 장안에 도착하였다.
신성·건안성·주필산의 세 차례의 큰 싸움에서 우리 군대와 당 나라 군사 중에 사망자가 많았으며, 마필도 아주 많이 죽었다. 황제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면서 "만일 위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으리라."라고 말하였다.
저자의 견해 : 당 태종은 어질고 명철한 불세출의 임금이다. 난을 평정하기는 탕과 무왕에 견줄만 하고, 이치에 통달하기는 성왕·강왕과 비슷하였으며, 병법에는 기묘한 전술이 무궁하였으니, 가는 곳마다 적수가 없었다. 그러나 동방 정벌의 공이 안시성에서 무너졌으니, 그 성주는 가히 비상한 호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기는 그의 성명을 전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양자가 이른바 "제·노의 대신은 역사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다름이 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五年, 春二月, <太宗>還京師, 謂<李靖>曰: "吾以天下之衆, 困於小夷, 何也?" <靖>曰: "此, <道宗>所解." 帝顧問, <道宗>具陳: 在<駐 >時, 乘虛取<平壤>之言. 帝 然曰: "當時悤悤, 吾不憶也." 夏五月, 王及莫離支<蓋金>, 遣使謝罪, 幷獻二美女. 帝還之, 謂使者曰: "色者人所重, 然憫其去親戚以傷乃心, 我不取也." <東明王>母塑像, 泣血三日. 初, 帝將還, 帝以弓服賜<盖蘇文>, 受之不謝, 而又益驕恣. 雖遣使奉表, 其言率皆詭誕, 又待<唐>使者倨傲, 常窺伺邊隙. 屢 令不攻<新羅>, 而侵凌不止. <太宗>詔勿受其朝貢, 更議討之.
三國史記卷第二十一.
5년 봄 2월, 태종이 서울로 돌아가서 이 정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군사를 가지고도 작은 오랑캐에게 곤욕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 정이 대답했다.
"이는 도종이 풀어드릴 것입니다."
황제는 도종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평양이 빈 틈을 이용하여 그 곳을 점령하자고 한 말을 상세하게 진술하였다. 황제가 한탄하며 말했다.
"당시에는 내가 정신이 없었기에 생각 나지 않는다."
여름 5월, 왕과 막리지 개금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두 명의 미인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 보내며 사신에게 말했다.
"색은 사람이 중히 여기는 것이지만, 그들이 친척과 떨어져 애태우는 것이 딱하니 내가 이를 받지 않겠다."
동명왕 어머니의 소상이 사흘 동안 피를 흘리며 울었다.
애초에, 당 태종이 돌아가려 할 때 개소문에게 활과 의복을 주었었다. 개소문은 이를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졌다. 비록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렸으나, 그의 말은 거의 거짓이고 황당하였다. 그는 또한 당 나라 사신을 거만하게 대하였으며,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고 있었다. 당 나라에서는 여러번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게 하였으나, 이를 업신여기고 침공을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고구려의 조공을 받지 못하게 하고, 고구려를 칠 것을 다시 논의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 21 끝
三國史記卷第二十二 삼국사기 권 제 22
高句麗本紀第十 <寶藏王>下.
고구려본기 제 10 보장왕(하)
○六年, <太宗>將復行師, 朝議以爲: "<高句麗>依山爲城, 不可猝拔. 前大駕親征, 國人不得耕種, 所克之城, 實收其 , 繼以旱災, 民太半乏食. 今若數遣偏師, 更迭擾其疆 , 使彼疲於奔命, 釋 入堡, 數年之間, 千里蕭條, 則人心自離, <鴨 >之北, 可不戰而取矣." 帝從之, 以左武衛大將軍<牛進達>,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李海岸>副之, 發兵萬餘人, 乘樓舡, 自<萊州>, 泛海而入, 又以太子詹事<李世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右武衛將軍<孫貳郞>等副之, 將兵三千人, 因<營州>都督府兵, 自<新城>道入. 兩軍, 皆選習水善戰者, 配之. <李世勣>軍旣度<遼>, 歷<南蘇>等數城, 皆背城拒戰, <世勣>擊破之, 焚其羅郭而還. 秋七月, <牛進達>·<李海岸>入我境, 凡百餘戰, 攻<石城>拔之, 進至<積利城>下. 我兵萬餘人出戰, <李海岸>擊克之, 我軍死者三千人{二千級} . <太宗> <宋州>刺史<王波利>等, 發<江南>十二州工人, 造大舡數百 , 欲以伐我. 冬十二月, 王使第二子莫離支<任武>, 入謝罪, 帝許之.
李丙燾. [資治通鑑].
6년, 당 나라 태종이 다시 원정을 하려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다음과 같았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조기에 함락시킬 수 없다. 앞서 황제가 직접 원정했을 때,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짓지 못했으며, 우리가 정복한 성에서는 곡물들을 수확하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제 만약 적은 군사를 자주 보내, 그 영역을 번갈아 침략하여 그들로 하여금 방어에 지치게 하고, 쟁기를 놓고 싸움터로 나가게 한다면, 수년 내에 천리의 들판은 적막해질 것이며, 민심은 저절로 이반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압록강 이북은 싸우지 않고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황제가 이에 따라, 좌무위 대장군 우 진달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이 해안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1만여 명을 출동시켜, 누선을 타고 내주로부터 해로로 진격케 하고, 또한 태자 첨사 이 세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 장군 손 이랑 등을 보좌관으로 하여,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 도독부의 군사와 함께 신성에서 진격하게 하였다. 이 두 부대에는 모두 수전에 익숙하고 전투에 능한 자들을 선발하여 배속시켰다. 이 세적의 군사가 요수를 건너 남소 등의 몇 성을 지났는데, 그 성이 모두 성을 등지고 싸웠으므로, 세적이 이들을 격파하고 외성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 우 진달·이 해안 등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1백여 차례 싸웠다. 그들은 석성을 격파하고, 적리성 아래까지 진격해왔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나가 싸웠다. 그러나 이 해안이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사망한 우리 군사가 3천명이었다. 태종은 송주 자사 왕 파리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어 우리를 공격하려 하였다.
겨울 12월, 왕이 둘째 아들 막리지 임무로 하여금 당 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황제가 이를 받아들였다.
○七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帝詔右武衛大將軍<薛萬徹>, 爲<靑丘>道行軍大摠管, 右衛將軍<裴行方>副之, 將兵三萬餘人, 及樓舡戰艦, 自<萊州>, 泛海來擊. 夏四月, <烏胡鎭>將<古神感>, 將兵浮海來擊, 遇我步騎五千, 戰於<易山>, 破之. 其夜, 我軍萬餘人, 襲<神感>舡, <神感>伏發, 乃敗. 帝謂我困弊, 議以明年發三十萬衆, 一擧滅之. 或以爲大軍東征, 須備經歲之糧, 非畜乘所能載, 宜具是{舟} 艦, 爲水轉. <隋>末<劒南>, 獨無寇盜, 屬者<遼東>之役, <劒南>復不預及. 其百姓富庶, 宜使之造舟艦. 帝從之. 秋七月, 王都女産子, 一身兩頭. <大宗{太宗}> 遣左領左右府長史<强偉>於<劒南道>, 伐木造舟艦. 大者或長百尺, 其廣半之. 別遣使行水道, 自<巫峽>, 抵<江>·<楊>, 趣<萊州>. 九月, 群獐渡河西走, 群狼向西行, 三日不絶. <太宗>遣將軍<薛萬徹>等來伐. 渡海入<鴨 >, 至<泊灼城>南四十里, 止營. <泊灼>城主<所夫孫>, 帥步騎萬餘, 拒之, <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 領步卒及諸軍乘之, 我兵潰. <行方>等進兵圍之, <泊灼城>因山設險, 阻<鴨 水>以爲固, 攻之不拔. 我將<高文>, 率<烏骨>·<安地>諸城兵三萬餘人, 來援, 分置兩陣, <萬徹>分軍以當之, 我軍敗潰. 帝又詔<萊州>刺史<李道裕>, 轉糧及器械, {貯} 於<烏胡島>, 將欲大擧.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7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조서를 내려 우무위 대장군 설 만철을 청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그를 보좌케 하여 장병 3만여 명과 누선 및 전함을 가지고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 우리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오호진 장수 고 신감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공격하였다. 그는 우리의 보병, 기병 5천명과 역산에서 조우하여 우리 군사를 이겼다. 그날 밤, 우리 군사 1만여 명이 신감의 배를 습격하다가 신감의 복병이 출동하여 패배하였다. 태종은 우리가 피폐되었다고 판단하고, 다음 해에 30만 대군을 출동시켜 일거에 멸망시킬 것을 논의에 붙였다. 누군가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말했다.
'대군이 동방으로 원정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1년의 군량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군량을 마소나 수레에 실을 수는 없으니, 마땅히 선박을 준비하여 수로로 운반해야 할 것이다. 수 나라 말기에 검남 지방만은 도적의 침입이 없었고, 지난 번의 요동 정벌 때에도 검남이 참여하지 않았으니, 그곳의 부유한 백성들로 하여금 선박을 만들게 해야할 것이다.'
태종이 이 말을 따랐다.
가을 7월, 서울 여자가 아이를 낳았는데, 몸뚱이는 하나이고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 좌우부 장사 강 위를 검남도에 파견하여, 나무를 베어 선박을 만들게 하였다. 큰 배 중에는, 길이가 1백 척, 넓이가 오십 척이 되는 것이 있었다. 이 배들은 따로 사신을 파견하여 수로를 통하여 무협에서 강남과 양주를 거쳐 내주로 가게 하였다.
9월, 노루가 떼를 지어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고, 이리도 떼를 지어 사흘 동안 서쪽으로 갔다.
태종이 장군 설 만철 등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 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만철이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하여금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케 하자 우리 군사가 무너졌다. 배 행방 등이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였으며,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 문이 오골성·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구원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태종이 또한 내주 자사 이 도유에게, 군량과 기계를 운반하여 오호도에 비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장차 대정벌을 일으키려는 것이었다.
○八年, 夏四月, <唐><太宗>崩. 遺詔罷<遼東>之役.
○論曰: 初, <太宗>有事於<遼東>也, 諫者非一. 又自<安市>旋軍之後, 自以不能成功, 深悔之. 歎曰: "若使<魏徵>在, 不使我有此行也." 及其將復伐也, 司空<房玄齡>病中上表, 諫以爲: "『老子』曰: '知足不辱, 知止不殆.' 陛下威名功德, 旣云足矣, 拓地開疆, 亦可止矣. 且陛下每決一重囚, 必令三復五奏, 進素膳, 止音樂者, 重人命也. 今驅無罪之士卒, 委之鋒刃之下, 使肝腦塗地, 獨不足憫乎? 嚮使<高句麗>違失臣節, 誅之可也; 侵擾百姓, 滅之可也; 他日能爲<中國>患, 除之可也. 今無此三條, 而坐煩<中國>, 內爲前代雪 , 外爲<新羅>報 , 豈非所存者小, 所損者大乎? 願陛下許<高句麗>自新, 焚凌波之舡, 罷應募之衆. 自然華夷慶賴, 遠肅邇安." <梁公>將死之言, 諄諄若此, 而帝不從, 思欲丘墟東域而自快, 死而後已. 史論曰: "好大喜功, 勤{勒} 兵於遠者." 非此之謂乎? <柳公權>小說曰: "<住 {駐 }> 之役, <高句麗>與<靺鞨>合軍, 方四十里, <太宗>望之, 有懼色." 又日{曰} : "六軍爲<高句麗>所乘, 殆將不振. 候者告<英公>之麾, 黑旗被圍, 帝大恐." 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及<司馬公>『通鑑』, 不言者, 豈非爲國, 諱之者乎?
今西龍.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8년 여름 4월, 당 나라 태종이 사망하였다. 태종은 조칙을 내려 요동 정벌을 중지하게 하였다.
저자의 견해 : 처음에 태종이 요동 원정을 할 때, 이를 말리는 자가 한 사람 뿐이 아니었다. 또한 안시성으로부터 군사를 철수한 뒤에는, 자기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한탄하며, "만약 위 징이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번 원정을 못하게 하였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다시 고구려를 치려 할 때 사공 방 현령이 병중에 있으면서도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간했다.
"노자는 '만족함을 알면 욕을 당하지 않으며,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폐하의 위대한 명성과 공덕은 이미 만족할만 하며, 국토를 넓히는 일도 역시 멈출만한 정도가 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한 명의 중죄인을 처형할 때도 언제나 필히 세 번 심사하고 다섯 번 변명할 기회를 주었으며, 검소한 식사를 올리게 하고, 풍류를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는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일 터인데, 이제 무죄한 사졸들을 몰아다가 칼날 밑에 맡겨 참혹히 죽게 하는 것만은 왜 불쌍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지난날, 고구려가 신하의 절차를 어겼다면 벌주는 것이 옳으며, 우리 백성들을 침략하였다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으며, 후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된다면 제거하여 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와 같은 세 가지 조건이 하나도 갖추어져 있지 않은데, 공연히 중국 자신을 괴롭히면서, 안으로는 선대의 치욕을 씻고, 밖으로는 신라의 복수를 한다하니, 이야말로 어찌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새로 태어나도록 허락하시어, 창파에 띄운 선박을 불태우고, 징발해온 군사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중국에는 경사가 깃들고, 오랑캐들은 우리를 믿을 것이며, 먼 곳은 조용하고 가까운 곳은 평안해질 것입니다."
양공이 죽음을 앞두고 한 말이 이와 같이 간곡하였다. 그러나 황제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동방을 폐허로 만드는 것을 자기 만족으로 삼으려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말하는 바 "큰 것을 즐기고, 공명을 좋아하여, 먼 곳으로 군사를 내몰았다"는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유 공권의 소설에서는 "주필산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연합하니, 그 군사가 바야흐로 40리나 뻗쳤다. 태종이 이를 보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또한 "황제의 6군이 고구려 군사에게 제압되어 거의 꼼작 못하였네. 영공의 휘하에 있는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척후병이 보고하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 하였네."라고 하였다. 비록 나중에 몸은 탈출했으나 그와 같이 겁을 내었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통감]에 이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체면 때문에 말하기를 기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九年, 夏六月, <盤龍寺><普德>和尙, 以國家奉道, 不信佛法, 南移<完山><孤大山>. 秋七月, 霜雹害 , 民饑.
9년 여름 6월, 반룡사의 보덕 화상은, 나라에서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하여, 남쪽에 있는 완산 고대산으로 옮겨 갔다.
가을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에 해가 미치고, 백성들이 굶주렸다.
○十一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11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三年, 夏四月, 人或言: "於<馬嶺>上, 見神人, 曰: '汝君臣, 奢侈無度, 敗亡無日(+矣) .'" 冬十月, 王遣將<安固>出師, 及<靺鞨>兵, 擊<契丹>. <松漠>都督<李窟哥>禦之, 大敗我軍於<新城>.
趙炳舜. 『三國史節要』.
13년 여름 4월, 어떤 사람이 말했다.
"마령에서 신령스런 사람을 보았는데, 그는 '너의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스럽기 한이 없으니 패망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장수 안고로 하여금 말갈군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게 하였다. 송막 도독 이 굴가가 대항하여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대패시켰다.
○十四年, 春正月, 先是, 我與<百濟>·<靺鞨>, 侵<新羅>北境, 取三十三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於<唐>求援. 二{三} 月, <高宗>遣<營州>都督<程名振>·左(+右) 衛中郞將<蘇定方>, 將兵來擊. 夏五月, <程名振>等, 渡<遼水>. 吾人見其兵少, 開門度<貴湍水{貴端水}> , 逆戰. <名振>等奮擊, 大克之, 殺獲千餘人, 焚其外郭及村落而歸.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兩唐書. [冊府元龜]. [資治通鑑].
趙炳舜. [三國史節要].
14년 봄 정월, 이보다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과 더불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여 33개 성을 점령하였는데, 신라왕 김 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2월, 당 나라 고종이 영주 도독 정 명진과 좌위 중랑장 소 정방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5월, 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 오자, 우리 군사는 상대방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를 건너가 전투를 벌였다. 명진 등은 우리를 맹공하여 크게 이기고, 우리 군사 1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우리의 외성과 촌락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十五年, 夏五月, 王都雨鐵. 冬十二月, 遣使入<唐>, 賀冊皇太子.
15년 여름 5월, 서울에 쇳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겨울 12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였다.
○十七年, 夏六月, <唐><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右領軍中郞將<薛仁貴>, 將兵來攻, 不能克.
17년 여름 6월, 당 나라 영주 도독 겸 동이 도호 정 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를 공격하였으나 이길 수 없었다.
○十八年, 秋九月, 九虎一時入城食人, 捕之不獲. 冬十一月, <唐>右領軍中郞將<薛仁貴>等, 與我將<溫沙門>, 戰於<橫山>, 破之.
18년 가을 9월,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 먹었으나, 이들을 잡지 못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 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 사문과 횡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패배시켰다.
○十九年, 秋七月, <平壤>河水血色, 凡三日. 冬十一月, <唐>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爲<浿江>道行軍大摠管; 左武衛大將軍<蘇定方>, 爲<遼東>道行軍大摠管; 左驍衛將軍<劉伯英>, 爲<平壤>道行軍大摠管; <蒲州>刺史<程名振>, 爲<鏤方>道摠管, 將兵分道來擊.
19년 가을 7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 핏빛으로 변했다.
겨울 11월, 당 나라에서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을 패강도행군대총관, 좌무위 대장군 소 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 좌효위 장군 유 백영을 평양도행군대총관, 포주 자사 정 명진을 누방도총관으로 삼아 각각 다른 길로 군사를 이끌고 와서 우리를 공격했다.
○二十年, 春正月, <唐>募<河南·北>·<淮南>六十七州兵, 得四萬四千餘人, 詣<平壤>·<鏤方>行營, 又以鴻 卿<蕭嗣業>, 爲<扶餘>道行軍摠管, 帥<回紇>等諸部兵, 詣<平壤>. 夏四月, 以<任雅相>, 爲<浿江>道行軍摠管; <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摠管; <蘇定方>, 爲<平壤>道行軍摠管, 與<蕭嗣業>及諸胡兵凡三十五軍, 水陸分道 進. 帝欲自將大軍, <蔚州>刺史<李君球>立言: "<高句麗>小國, 何至傾<中國>事之有? 如<高句麗>旣滅, 必發兵以守. 小發則威不振, 多發則人不安, 是天下疲於轉戍. 臣謂: 征之未如勿征, 滅之未如勿滅." 亦會<武后>諫帝, 乃止. 夏五月, 王遣將軍<惱音信>, 領<靺鞨>衆, 圍<新羅><北漢山城>, 浹旬不解, <新羅>餉道絶, 城中危懼. 忽有大星落於我營, 又雷雨震擊, <惱音信>等, 疑駭引退. 秋八月, <蘇定方>破我軍於<浿江>, 奪<馬邑山>, 遂圍<平壤城>. 九月, <蓋蘇文>遣其子<男生>, 以精兵數萬, 守<鴨 {鴨綠}> , 諸軍不得渡. <契苾何力>至, 値氷大合, <何力>引衆乘氷度{渡} 水, 鼓 而進, 我軍潰奔. <何力>追數十里, 殺三萬人. 餘衆悉降, <男生>僅以身免. 會, 有詔班師, 乃還.
『북한본』.趙炳舜. 『三國史節要』.
20년 봄 정월, 당 나라가 하남·하북·회남 등의 67개 주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4만 4천여 명을 평양과 누방 군영으로 가게 하고, 또한 홍려경 소 사업을 부여도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 등 제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군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임 아상을 패강도행군총관,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총관, 소 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소 사업과 모든 오랑캐 군사 35군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동시에 진군하였다. 이 때 황제가 직접 대군을 통솔하려 하였다. 울주 자사 이 군구가 말했다.
"고구려는 소국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국력을 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 때 군사를 적게 출동시키면 위신이 서지 않을 것이오, 많이 출동시킨다면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는 온 나라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아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토벌하는 것이 토벌하지 않는 것만 못하며,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때에 또한 무후도 말렸으므로 황제가 중지하였다.
여름 5월, 왕이 장군 뇌 음신으로 하여금 말갈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였다. 열흘이 되도록 포위를 풀지 않았다. 신라의 군량 수송이 차단되어 성안에서는 위험과 공포를 느꼈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의 병영에 떨어지고 우레가 치며 비가 오고 벼락이 쳤다. 뇌 음신 등은 의심스럽고 놀라서 퇴각하였다.
가을 8월, 소 정방이 패강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마읍산을 탈취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 개소문이 그의 아들 남생에게 정병 수만 명을 주어 압록강을 수비케 하였다. 당 나라의 모든 부대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설필 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하였을 때는 강에 얼음이 얼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얼음 위로 강을 건너 북을 두드리고 함성을 지르며 공격해왔다. 우리 군사가 패주하였다. 하력이 수십 리를 추격하며 우리 군사 3만명을 죽였다. 남은 군사는 모두 항복하였고, 남생은 간신히 자기 몸만 피하여 달아났다. 이즈음, 당 나라에서 군사를 철수하라는 조서가 있었으므로 그들은 곧 돌아갔다.
○二十一年, 春正月, <(+唐)> 左驍衛將軍<白州>刺史< 沮{沃沮}> 道摠管<龐孝泰>, 與<蓋蘇文>戰於<蛇水>之上, 擧軍沒, 與其子十三人, 皆戰死. <蘇定方>圍<平壤>, 會大雪, 解而退. 凡前後之行, 皆無大功而退.
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 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 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이리하여 당 나라는 전후의 정벌에서 매번 큰 성과없이 물러갔다.
○二十五年, 王遣太子<福男>[『新唐書』云<男福>.]入<唐>, 侍祠<泰山>. <蓋蘇文>死, 長子<男生>代爲莫離支. 初, 知國政, 出巡諸城, 使其弟<男建>·<男産>, 留知後事. 或謂二弟曰: "<男生>惡二弟之逼, 意欲除之, 不如先爲計." 二弟初未之信. 又有告<男生>者, 曰: "二弟恐兄還奪其權, 欲拒兄不納." <男生>潛遣所親, 往<平壤>伺之. 二弟收掩得之, 乃以王命召<男生>, <男生>不敢歸. <男建>自爲莫離支, 發兵討之. <男生>走據<國內城>, 使其子<獻誠>, 詣<唐>求哀. 六月, <高宗>命左驍衛大將軍<契苾何力>, 帥兵應接之, <男生>脫身奔<唐>. 秋八月, 王以<男建>爲莫離支, 兼知內外兵馬事. 九月, 帝詔<男生>, 授特進<遼東>都督兼<平壤>道安撫大使, 封<玄 郡>公. 冬十二月, <高宗>以<李勣>, 爲<遼東>道行軍大摠管兼安撫大使, 以司列少常<伯安陸>·< 處俊>副之. <龐同善>·<契苾何力>, 爲<遼東>道行軍副大摠管兼安撫大使. 其水陸諸軍摠管, 轉糧使<竇義積>·<獨孤卿雲>·<郭待封>等, 受<勣>處分. <河北>諸州租賦, 悉詣<遼東>, 給軍用.
25년, 왕이 태자 복남[[신당서]에는 남복이라 하였다.]을 당 나라에 파견하여 황제가 지내는 태산의 봉선에 참가케 하였다.
개소문이 죽고 그의 맏아들 남생이 부친을 대신하여 막리지가 되었다. 처음 정사를 맡아 여러 성을 순행하면서, 그의 두 아우 남건과 남산으로 하여금 조정에 남아 뒷 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어떤 자가 두 아우에게 말했다.
"남생은 두 아우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당신들을 처치하려 합니다. 먼저 계책을 세워 도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두 아우가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다. 어떤 자가 남생에게 또 말했다.
"두 아우가, 형이 돌아오면 자기들의 권세를 빼앗을까 두려워 하여 형에게 대항하여 조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
남생은 남몰래 자기의 심복을 평양으로 보내, 두 아우의 동정을 살피게 하였다. 두 아우가 이를 알고 남생의 심복을 체포하고, 곧 왕명으로 남생을 소환하였다.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남생을 토벌하였다. 남생이 국내성으로 도주하여 그곳에 웅거하면서, 그의 아들 헌성을 당 나라에 보내 구해줄 것을 애원하였다.
6월, 고종이 좌효위 대장군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맞이하게 하였다. 남생은 탈출하여 당 나라로 도주하였다.
가을 8월, 왕이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내외의 군사에 대한 직무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9월, 고종이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요동 도독 겸 평양도 안무 대사로 특진시키고, 현토군공으로 책봉하였다.
겨울 12월, 고종이 이 적을 요동도행군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사열소상 백 안육과 학 처준으로 하여금 이들을 보좌케 하며, 방 동선과 설필 하력을 요동도행군부대총관 겸 안무 대사로 삼고, 기타 수륙군 모든 부대의 총관들과 전량사인 두 의적·독고 경운·곽 대봉 등은 모두 이 적의 지휘를 받게 하고, 하북 여러 주의 조세는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사용으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二十六年, 秋九月, <李勣>拔<新城>, 使<契苾何力>守之. <勣>初渡<遼>, 謂諸將曰: "<新城>, <高句麗>西邊要害, 不先得之, 餘城未易取也." 遂攻之. 城人<師夫仇>等, 縛城主, 開門降. <勣>引兵進擊, 一十六城皆下. <龐同善>·<高侃>尙在<新城>, <泉男建>遣兵襲其營, 左武衛將軍<薛仁貴>, 擊破之. <侃>進至<金山>, 與我軍戰敗. 我軍乘勝逐北, <薛仁貴>引兵橫擊之, 殺我軍五萬餘人, 拔<南蘇>·<木 >·<蒼 >三城, 與<泉男生>軍合. <郭待封>以水軍, 自別道, 趣<平壤>. <勣>遣別將<馮師本>, 載糧仗以資之, <師本>舡破失期, <待封>軍中飢窘. 欲作書與<勣>, 恐爲他所得, 知其虛實, 乃作離合詩, 以與<勣>. <勣>怒曰: "軍事方急, 何以詩爲? 必斬之." 行軍管記通事舍人<元萬頃>, 爲釋其義, <勣>乃更遣糧仗赴之. <萬頃>作檄文曰: "不知守<鴨 >之險?" <泉男建>報曰: "謹聞命矣." 卽移兵據<鴨 津>, <唐>兵不得度. <高宗>聞之, 流<萬頃>於<嶺南>. < 處俊>在<安市城>下, 未及成列, 我軍三萬掩至, 軍中大駭. <處俊>據胡床, 方食乾 , 簡精銳, 擊敗之.
26년 가을 9월, 이 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설필 하력으로 하여금 그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이 적이 처음에 요수를 건너올 때 모든 장수들에게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이곳을 먼저 얻지 않으면 다른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그는 드디어 신성을 공격하였다. 신성 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결박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였다. 이 적이 군사를 이끌고 계속 진격하자 16개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이 때 방 동선과 고 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으므로, 천 남건이 군사를 보내 그들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좌무위 장군 설 인귀가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고 간이 금산으로 나와서 우리 군사와 싸워 패배하였다. 우리 군사는 승세를 타고 패배한 군사를 추격하였다. 설 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을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여 명을 죽이고, 남소·목저·창암 등 3성을 함락시킨 후, 천 남생의 군사와 합세하였다.
곽 대봉은 수군을 이끌고 다른 길을 통하여 평양으로 왔다. 이 적은 별장 풍사본을 파견하여 곽 대봉에게 군량과 병기를 공급케 하였는데, 사본의 배가 파괴되어 약속 기일을 놓쳤으므로 대봉의 진영에서 군사들이 굶주렸다. 이에 따라 그가 이 적에게 편지를 보내려다가, 만일의 경우 적에게 발견되어 내부의 허실이 알려질까 두려워 이합시를 지어서 이 적에게 보냈다. 이 적이 이를 보고 노하여 말하기를 "군사의 일이 바야흐로 위급한데 시가 도대체 무엇인가? 필히 목을 베겠다."라고 하였다. 행군 관기 통사 사인 원 만경이 그 시의 뜻을 해석하여 주었다. 이 적은 그 때서야 다시 군량과 병기를 대봉에게 보냈다. 만경이 격문을 써서 말하기를 "압록의 요충지를 지킬 줄 모르는가?"라고 하였다. 천 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령을 듣겠다"라 하고, 즉시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 진을 쳤다. 이에 따라 당 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만경을 영남으로 유배하였다. 학 처준은 안시성 아래에 있었다. 그가 아직 군사 대열을 짓지 못하였을 때, 우리 군사 3만 명이 엄습하니 그 군사들이 크게 당황하였다. 처준이 의자에 앉아서 한참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우리 군사를 격파하였다.
○二十七年, 春正月, 以右相<劉仁軌>, 爲<遼東>道副大摠管, < 處俊>·<金仁問>副之. 二月, <李勣>等, 拔我<扶餘城>. <薛仁貴>旣破我軍於<金山>, 乘勝, 將三千人, 將攻<扶餘城>, 諸將以其兵少, 止之. <仁貴>曰: "兵不必多, 顧用之何如耳." 遂爲前鋒以進, 與我軍戰, 勝之, 殺獲我軍, 遂拔<扶餘城>, <扶餘川{扶餘州}> 中四十餘城, 皆請服. 侍御史<賈言忠>奉使, 自<遼東>還. 帝問: "軍中云何?" 對曰: "必克. 昔, 先帝問罪, 所以不得志者, 虜未有 也. 諺曰: '軍無媒, 中道回.' 今<男生>元{兄} 弟 , 爲我嚮導, 虜之情僞, 我盡知之, 將忠士力, 臣故曰必克. 且<高句麗>『秘記』曰: '不及九百年, 當有八十大將, 滅之.'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 <勣>年八十矣. 虜仍 饑, 人常{相} 掠賣, 地震裂, 狼狐入城, 穴於門, 人心危駭, 是行不再擧矣." <泉男建>復遣兵五萬人, 救<扶餘城>, 與<李勣>等, 遇於<薛賀水>, 合戰, 敗死者三萬餘人. <勣>進攻<大行城>. 夏四月, 彗星見於畢·昴之間. <唐><許 宗{許敬宗}> 曰: "彗見東北, <高句麗>將滅之兆也." 秋九月, <李勣>拔<平壤>. <勣>旣克<大行城>, 諸軍出他道者, 皆與<勣>會, 進至<鴨 >柵. 我軍拒戰, <勣>等敗之, 追奔二百餘里, 拔<辱夷城>, 諸城遁逃及降者, 相繼. <契苾何力>先引兵, 至<平壤城>下, <勣>軍繼之, 圍<平壤>月餘. 王<臧{藏} >遣<泉男産>, 帥首領九十八人, 持白幡, 詣<勣>降, <勣>以禮接之. <泉男建>猶閉門拒守, 頻遣兵出戰, 皆敗. <男建>以軍事委浮圖<信誠>. <信誠>與小將<烏沙>·<饒苗>等, 密遣人詣<勣>, 請爲內應. 後五日, <信誠>開門, <勣>縱兵登城, 鼓 焚城. <男建>自刺不死. 執王及<男建>等. 冬十月, <李勣>將還, <高宗>命: 先以王等獻于<昭陵>, 具軍容, 奏凱歌, 入京師, 獻于大廟. 十二月, 帝受 于<含元殿>. 以王政非己出, 赦以爲司平太常伯員外同正; 以<泉男産>爲司宰少卿; 僧<信誠>爲銀靑光祿大夫; <泉男生>爲右衛大將軍. <李勣>已下, 封賞有差, <泉男建>流<黔州>. 分五部, 百七十六城, 六十九萬餘戶, 爲九都督府, 四十二州, 百縣, 置安東都護府於<平壤>, 以統之. 擢我將帥有功者, 爲都督·刺史·縣令, 與<華>人 理. 以右威衛大將軍<薛仁貴>, 檢校安東都護, 摠兵二萬人, 以鎭撫之. 是<高宗><摠章>元年戊辰歲也. 二年, 己巳二月, 王之庶子<安勝>, 率四千餘戶, 投<新羅>. 夏四月, <高宗>移三{二} 萬八千三百戶於<江>·<淮>之南, 及<山南>·<京西>諸州空曠之地. 至<咸亨>元年庚午歲, 夏四月, <劒牟岑>欲興復國家, 叛<唐>, 立王外孫<安舜>[『羅紀』作勝.]爲主. <唐><高宗>遣大將軍<高侃>, 爲<東州>道行軍摠管, 發兵討之. <安舜>殺<劒牟岑>, 奔<新羅>. 二年辛未歲, 秋七月, <高侃>破餘衆於<安市城>. 三年壬申歲, 十二月, <高侃>與我餘衆, 戰于<白氷山{白水山}> , 破之. <新羅>遣兵救我, <高侃>擊克之, 虜獲二千人. 四年癸酉歲, 夏閏五月, <燕山道>管大將軍<李謹行>, 破我人於<瓠瀘河>, 獲數千人. 餘衆皆奔<新羅>. <儀鳳>二年丁丑歲, 春二月, 以降王爲<遼東州>都督, 封<朝鮮>王, 遣歸<遼東>, 安輯餘衆. 東人先在諸州者, 皆遣與王俱歸,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王至<遼東>, 謀叛, 潛與<靺鞨>通. <開曜{開耀}> 元年, 召還< 州>, 以<永淳>初死. 贈衛尉卿, 詔送至京師, 葬< 利>墓左, 樹碑其阡, 散徙其人於<何南{河南}> ·< 右>諸州. 貧者留<安東城>傍舊城, 往往沒於<新羅>, 餘衆散入<靺鞨>及<突厥>. <高>氏君長遂絶. <垂拱>二年, 以降王孫<寶元>, 爲<朝鮮郡>王, 至<聖曆>初, 進左鷹揚衛大將軍, 更封忠誠國王, 賜{使} 統安東舊部, 不行. 明年, 以降王子<德武>, 爲安東都督, 後稍自國, 至<元和>十三年, 遣使入<唐>, 獻樂工.
○論曰: <玄 >·<樂浪>, 本<朝鮮>之地, <箕子>所封. <箕子>敎其民, 以禮義·田蠶·織作, 設禁八條. 是以其民不相盜, 無門戶之閉, 婦人貞信不淫, 飮食以 豆, 此仁賢之化也. 而又天性柔順, 異於三方. 故<孔子>悼道不行, 欲浮 於海以居之, 有以也夫. 然而『易』之 "爻, 二多譽, 四多懼, 近也." <高句麗>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 皆天者有司, 亂世則英雄特起, 竊名位者也, 可謂居多懼之地, 而無謙巽之意, 侵其封 以讐之, 入其郡縣以居之. 是故兵連禍結, 略無寧歲. 及其東遷, 値<隋>·<唐>之一統, 而猶拒詔命以不順, 囚王人於土室. 其頑然不畏如此, 故屢致問罪之師. 雖或有時設奇以陷大軍, 而終於王降, 國滅而後止. 然觀始末, 當其上下和, 衆庶睦, 雖大國, 不能以取之, 及其不義於國, 不仁於民, 以興衆怨, 則崩潰而不自振. 故<孟子>曰: "天時·地利, 不如人和." 『左』氏曰: "國之興也, 以福; 其亡也, 以禍. 國之興也, 視民如傷, 是其福也; 其亡也, 以民爲土芥, 是其禍也." 有味哉, 斯言也! 夫然則凡有國家者, 縱暴吏之驅迫, 强宗之聚斂, 以失人心, 雖欲理而不亂, 存而不亡, 又何異强酒而惡醉者乎?
三國史記卷二十二.
李丙燾. [冊府元龜].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唐書].趙炳舜. 『三國史節要』.허성도.李丙燾. [唐會要].李丙燾. [羅紀]. [資治通鑑].趙炳舜. 『三國史節要』.趙炳舜. 『三國史節要』.李丙燾. [唐書].
27년 봄 정월, 당 나라 고종은 우상 유 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 처준과 김 인문 등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였다.
2월, 이 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점령하였다.
설 인귀는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여, 승세를 타고 군사 3천 명을 이끌어 부여성을 치려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자기 편 군사가 적다고 하며 이를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인귀가 말했다.
"병력은 반드시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어떻게 쓰는가에 달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스스로 선봉이 되어 우리 군사와 싸워 이기고, 우리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가 또한 부여성을 점령하자, 부여천 안에 있는 40여 성이 모두 항복하기를 요청하였다. 시어사 이 언충이 임무를 받들고 요동에서 귀국하였다. 고종은 "군대 내부 상황이 어떠한가?"라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 이전에 선제께서 고구려에 죄를 물었을 때 뜻대로 되지 않은 것은, 적에게 빈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도 중매잡이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선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제 남생이 형제끼리 싸워 우리의 향도가 됨으로써, 적의 내부 상황을 우리가 모두 알고 있으며, 또한 장수들은 충성스럽고 군사들은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비기]에는 '9백년이 되기 전에 80대장이 있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라는 말이 있는데, 고씨가 한 나라 때 나라를 세워 지금 9백 년이 되었고, 이 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들은 거듭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항상 수탈을 당하고 팔려갔으며,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에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으며, 인심이 흉흉하니, 이번 원정이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천 남건이 부여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냈는데, 설하수에서 이 적 등과 조우하여 싸우다가 패하여 사망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 적은 대행성으로 진격하였다.
여름 4월, 혜성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당 나라 허 경종이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9월, 이 적이 평양을 점령하였다. 이 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승리하자, 다른 도로 출동하였던 제군이 모두 이 적과 만나 압록책으로 진군하여 왔다. 우리 군사가 대적하여 싸우다가 이 적 등에게 패배하였고, 이 적 등은 2백여 리를 추격해와서 욕이성을 함락시켰다.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가 연이었다. 설필 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밖에 도착하고, 이 적의 군사가 뒤따라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 장이 천 남산으로 하여금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백기를 들고 이 적에게 항복하게 하였다. 이 적은 예를 갖추어 접대하였다. 그러나 천 남건은 오히려 성문을 닫고 수비하며 대항하였다. 그는 자주 군사를 출동시켜 싸웠으나 그때마다 패배하였다. 남건은 승려 신성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맡겼다. 신성은 소장 오사·요묘 등과 함께 이 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뒤에 신성이 성문을 열었다. 이 적은 군사를 풀어 성위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하였다. 남건은 스스로 칼을 들어 자신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 나라 군사가 왕과 남건 등을 붙잡았다.
겨울 10월, 이 적이 귀국하려 하자, 고종이 그에게 먼저 고구려의 왕 등을 소릉에 인사시킨 후, 군용을 갖추어 개선가를 부르며 서울로 들어와 다시 태묘에 인사시키도록 명령하였다.
12월, 고종이 함원전에서 포로를 전해 받았다. 고구려왕은 정치를 자기가 한 것이 아니라 하여 죄를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원외동정으로 삼았다. 그리고 천 남산은 사재 소경, 승려 신성은 은청 광록대부, 천 남생은 우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이 적 이하 여러 사람들에게는 벼슬과 상을 정도에 따라 주었다. 천 남건은 검주로 유배시켰다. 고구려 지역의 5부, 1백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인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 대장군 설 인귀를 검교안동도호를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진무케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 원년 무진년이었다.
2년 기사 2월, 왕의 서자 안승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여름 4월, 고종이 3만 8천3백 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경서 등지에 있는 모든 주의 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함형 원년 경오 여름 4월, 검모잠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 나라를 배반하고, 왕의 외손 안순[[신라본기]에는 승으로 되어있다.]을 임금으로 세웠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 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2년 신미 가을 7월, 고 간이 안시성에서 우리의 남은 군사를 격파하였다.
3년 임신 12월, 고 간이 우리의 남은 군사와 백빙산에서 싸워 우리 군사를 격파하니,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다. 그러나 고 간이 이를 다시 격파하여 2천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갔다.
4년 계유 여름 윤 5월, 연산도총관대장군 이 근행이 호로하에서 우리 군사를 격파하고 수천 명을 사로잡았다. 남은 군사들은 모두 신라로 도주하였다.
의봉 2년 정축 봄 2월, 항복한 고구려의 보장왕을 요동주 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그를 요동으로 돌려 보내 남은 백성들을 수습하여 안정시키게 하였다. 이 때, 동방 사람으로서 이전부터 여러 주에 살고있던 자들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였다.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왕은 요동에 도착하여 당 나라에 대항하고자 비밀리에 말갈과 내통하였다.
개요 원년, 왕이 앙주로 소환되었다가 영순 초에 사망하였다. 고종이 그에게 위위경을 추증하고, 조서를 내려 영구를 서울로 오게 하여 힐리의 무덤 왼편에 장례를 지냈다. 묘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은 하남·농우의 여러 주에 분산 거주케 하였다. 그 가운데 가난한 자들은 안동성 부근의 옛성에 머무르게 하였다. 그러나 일부는 신라로 도주하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갔다.
마침내 고씨의 왕통이 끊어졌다.
수공 2년,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가, 성력 초에 좌응양위 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구부를 주어 통치하게 하였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 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조금씩 스스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원화 13년에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쳤다.
저자의 견해 : 현토와 낙랑은 원래 조선의 국토로서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는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와 누에치기와 베 짜는 법을 가르치고, 8조의 금법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곳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대문을 닫지 않고, 부녀들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음식을 먹을 때 그릇을 사용하였다. 이는 어질고 현명한 사람의 교화가 미친 탓이었다. 또한 그들은 서·남·북방의 오랑캐들과는 달리 천성이 유순하였다. 이리하여 공자는 자기의 도가 중국에서 행하여지지 않음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이곳에 살고자 하였으니, 이 또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역의 괘가 효이(爻二)를 다예(多譽), 효사(爻四)를 다구(多懼)라 한 것은 군위(君位)에 가깝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진·한 이후로 중국의 동북방의 한 쪽에 끼어 있었다. 북쪽 인근 지역들은 모두 천자가 관리를 보내 통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혼란한 시기에는 영웅들이 나타나 참람되게도 황제의 이름과 지위를 차지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실로 다구(多懼)의 지역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는 겸양하려는 생각없이, 천자의 영역을 침노하여 원수를 맺었으며, 천자의 군현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전쟁이 계속되고 화근이 맺어졌으므로 평안한 해가 거의 없었다.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때는 수·당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때 고구려는 오히려 불손하게도 중국의 조서와 명령을 거역했으며, 천자의 사신을 토방에 가두기도 하였다. 고구려는 이와 같이 고집스럽고 겁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번이나 죄를 묻는 정벌의 군사를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비록 어떤 시기에는 기묘한 계책으로 대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적도 있었으나, 결국은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하였다. 고구려 전체의 역사를 살펴보면, 임금과 신하가 화평하고 백성들이 서로 화목했을 때는, 비록 대국이라 할지라도 고구려를 빼앗지 못하였지만, 나라에 정의가 사라지고, 군주가 백성들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의 원성이 일어난 뒤에는, 나라가 붕괴되어 스스로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맹자는 "전쟁의 승리에 있어서, 시기의 이로움과 지형의 이로움이 인심의 화목함만 못하다."라고 말했으며, 좌씨는 "국가는 복으로 흥하고 화로 망한다. 나라가 흥하려면, 군주가 자기 몸에 난 상처를 보듯이 백성을 보살펴야 하나니, 이것이 복이다. 나라가 망하려면 백성을 흙먼지 같이 여기나니 이것이 화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맡은 군주들이 횡포한 관리들을 풀어놓아 백성을 구박하게 하며, 권문세가들로 하여금 가혹한 수탈을 일삼게 하여 인심을 잃게 되면, 비록 정치를 잘하여 혼란을 제거하고, 나라를 유지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고 노력할지라도, 이것이 또한 억지로 술을 권하면서도 취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삼국사기 권 제 22 끝
출처:진갑곤의 한자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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