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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왕권이 봉건제를 넘다 -1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28. 06:53

 

 

왕권이 봉건제를 넘다 -1

 

안녕하세요, 7로군입니다. 너무 오랜만에 쓰는 감이 없지 않네요. 일단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써왔던 것들을 보니........ 잠깐 했던 것 같은데 참 많이도 했네요.(?) 암튼 지금까지 관심 가져주신 분 감사하고 앞으로도 계속 관심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일단, 마지막 부분이 도시의 발전 부분인 것 같습니다. 어이휴, 저도 너무 뒤죽박죽이라서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시의 발전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도시와 왕권은 어떤 관계?> 도시는 십자군 전쟁의 실패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그 이전에도 로마 붕괴 이후 이탈리아 반도에 작은 도시국가들이 있었지만,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사실상 이름뿐인 촌락들이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과 신의 가호를 받아 반드시 승리할 것으로 예상됐던 전쟁이 실패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교황을 더 이상 신적이 존재로 취급하지 않고 사실상 세속적인 존재로 보게 되었습니다. 교황의 권력이 급격히 축소됨에 따라 이들과 유착 관계를 맺고 있던 여러 봉건 제후들의 권력도 자연히 쇠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왕권은 이를 계기로 좀 더 강력한 힘을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투르크와 같은 동방 세력들을 접하게 된 유럽은 좀 더 동방 무역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중요시했습니다. 이에 따라 중동과 거리상 가까운 지중해의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연안, 더 나아가 프랑스와 이베리아 반도의 도시들은 이 동방무역의 혜택을 입게 되었습니다. 도시의 발전이 순탄했던 건 아닙니다. 처음부터 제후의 권력이 땅에 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후는 군사력을 앞세워 자신의 장원에 속해있던 농노들이 탈출해가는 도시를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왕은 이를 노렸습니다. 봉건제도의 절정기라고 해도 왕은 왕 취급을 받았고 세력도 웬만한 제후보다는 강력하였기 때문에 만약 제후가 도시를 위협한다면 힘으로 도시를 보호해주었습니다. 도시도 왕에게 보답해야하기 때문에 무역을 통해서 얻은 이익을 왕에게 나누어주었고 이들은 마치 교황과 제후가 밀착한 것처럼 왕과 유착하였던 것이지요. 결국 이들은 상호적으로 이익을 주고받으며 서로 성장했던 겁니다.

 

도시에서는 무역과 생산 활동을 통해서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학식과 재력을 갖춘 계급 즉, 부르주아(불어 bourgeois)가 탄생했습니다. 부르주아의 뜻은 ‘성 안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도시가 규모를 확장하면 대개 성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이 도시가 장원에서 탈출해오는 이들로 점점 인구가 늘어가자 힘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성 밖으로 나가서 살아야했습니다. 그래서 성 안에는 돈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 살게 됐는데 이들이 바로 부르주아입니다. 부르주아는 이 ‘성 안 사람’이라는 뜻을 넘어서 ‘유산(有産) 시민계급’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는데 여기서 점점 의미가 확장하여 ‘자본가’의 뜻이 되었고 이에 따라 ‘부르주아 경제학’ 등의 단어를 탄생시키게 되는데 이는 제 수준을 넘는 것이니 생략하겠습니다.

 

왕권과 이 ‘부르주아’가 이끄는 도시의 충돌이 없던 건 아닙니다. 이건 절대 왕정기 이후에 나올 얘기인데 시민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프랑스 대 혁명은 전통적인 왕권과 신흥적인 시민권의 충돌이었습니다. 도시를 구성하며 제3신분을 대표하는 이들은 바로 농민, 도시 수공업자, 자본가(돈은 있지만 신분상 시민인 사람) 등 일반 시민 계급이었는데 이들을 모두 ‘시민 계층’이었습니다. 당시 사치로 악명이 높았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끌었던 왕실이 이들에게 더욱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자 차츰 시민 계층은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금으로 따진다면, 제1신분(왕족. 귀족 등 봉건적인 세력가들), 제2신분(성직자)은 내지 않으니 우리가 모두 내는 것인데 어째서 우리의 정치적 권리는 제한 되있는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삼부회(프랑스의 전통적인 신분제 의회, 대개 제1,2신분이 제3신분에 대한 더 많은 납세를 요구하는 곳이었다)에서 제3신분의 분노가 폭발하여 국민의회를 구성하는 계기가 됩니다. 돈은 더 많이 내면서 정치적 권한이 축소되있었던 ‘신분적 모순’에 원인이 있었던 것이죠.

 

이야기가 많이 새나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절대왕정에 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 드리겠습니다.

 

<절대왕정의 성립> 왕권이 저절로 도시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건 아닙니다. 전통적이면서 강력하였던 봉건제에 어느 정도 공격을 하면서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절대왕정(절대적인 왕의 정치체계)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루이 14세를 보겠습니다. 프랑스 역사에서 정말 이 사람을 빼면 나폴레옹 이전까지 말할 게 없다고 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입니다. 유럽사에도 정말로 아주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고요.

 

루이 13세부터 봅시다. 이때는 도시의 발전이 절정이 달하고 왕권도 점차적으로 봉건제에 반격을 해가는 시기입니다. 그의 아버지 앙리 4세는 종교적인 문제로 인해서 가톨릭 광신자에게 살해당하였는데, 이는 종교전쟁 편에서 알아봅시다.

 

루이 13세는 왕에 오르자마자 지방에서 왕이 행사해야할 사법권(司法權)을 대신 행사하고 있었던 지방의 고등법원의 힘을 축소시키고 대신 자신의 권리를 강화시켜 나갔습니다. 또한, 유능한 재상이었던 리슐리외 추기경을 등용하였습니다. 그는 수상의 전신(前身)격인 제1재무대신에 임명되어 왕권을 강화시키고 프랑스의 국고를 조금씩 채워나갔습니다.

 

루이 13세 또한 젊은 나이에 병사하자(1643년), 루이 15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당연히, 루이 13세가 권리를 축소해나가던 봉건 귀족들은 좋아라 박수를 쳤겠죠. 왕이 어린데 뭘 할 수 있겠습니까.

 

5살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그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을 때까지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는데 정치적인 역량이 부족했던 그녀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마자랭을 등용하였습니다. 마자랭은 이탈리아인 추기경이나 나중에 귀족들로부터 비난을 많이 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유명한 업적 때문입니다. 왕이 어린데다 모후 또한 정치적인 능력이 없던 탓에 마자랭은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이 직접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마저 능력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마자랭의 활약으로 정치적으로 탄탄해지고, 군사적으로 강대해진 프랑스를 마자랭의 죽음으로 22살의 루이는 물려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청년 루이 15세는 뭘 했을까요? 다음 편에 시작하겠습니다.

 

출처 : 삼국지 커뮤니티
글쓴이 : 7로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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