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이해
@차 례
Ⅰ. 서설- 한국불교의 특성
Ⅱ. 불교전래와 그 초기의 수용/삼국시대
Ⅲ. 불교의 정착과 문화발전/통일신라시대
Ⅳ. 국가불교의 계승과 전개/고려시대
Ⅴ. 배불정책하의 수난과 활동/조선시대
Ⅵ. 새로운 변화와 여명/최근세
Ⅰ. 서설- 한국불교의 특성
불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1600 여년의 시간이 흘렀다. 단지 시간상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유산의 거의 80%를 차지하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불교는 우리 민족의 삶이나 정신사적 경험 가운데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민족의 정신적⋅문화적 정체성과 역사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한국 불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B. C. 6세기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대륙을 거쳐 한국에 전해진 것은 대략 4세기 중반 경부터이다. 즉, 불교가 한반도에 처음 전래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이고, 이어서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전래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법흥왕 14년(527)에 이차돈의 순교에 의해 공인되었으며, 삼국 모두 왕실에 의해 불교가 전파되었다. 이때 불교는 단지 종교 신앙으로서 뿐만 아니라 종합적인 문화체계로서 이 땅에 전해져 기존 문화와의 융합을 통해 독특한 한국 불교를 형성하였다. 따라서 한민족의 삶과 문화발전의 모체로서 그 정신사적 경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한국불교는 인도와 중국 불교와는 다른 일면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불교 자체가 갖고 있는 개방성과 융합성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 불교가 갖고 있는 보편적 진리로서의 가르침 외에 한국 불교가 지닌 특성은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기존의 세력 및 민간 신앙[샤머니즘]과 자연스럽게 습합된 토속적인 불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차돈의 순교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기존의 전통 신앙과 별다른 대립과 갈등 없이 조화와 공존의 관계로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 결과 한국 불교는 기복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강하다. 다시 말해 한국의 샤머니즘적인 고유문화는 불교라는 높은 문화(정신) 세계와 만남으로써 그 의미와 가치가 한층 고양되고, 반면에 불교는 이를 통해 더욱 강한 토착력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한국 불교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하다. 원래 붓다는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위해 국가와 민족까지도 단념하였지만 한국 불교는 불교가 전래되었을 당시[삼국시대]부터 지금까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국가의 평안과 발전을 위해 적극 나섰다. 즉 한국의 불교는 그 종교적 목적과 이념을 추구하는 가운데서도 특히 국가의 발전과 민족의 안위에 언제나 큰 관심을 기울여왔고 또 구체적인 역할을 담당해온 것이다. 고려대장경이 13세기 초 고려에 침입해온 몽고군을 佛力에 의해 물리치고자 판각된 것이라든지, 16세기 말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맞아 수많은 승병(僧兵)이 신명을 돌보지 않고 항쟁했던 사실들이 그 단적인 예이다.
셋째, 한국 불교는 통불교적(通佛敎的)인 경향이 강하다. 물론 불교 자체가 근본적으로 극단적인 측면을 지양하고 중도적 통합성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인도 불교가 학파적 성격이 강하고 중국 불교가 종파적 성격이 강한데 반해 한국 불교는 선교의 통합뿐만 아니라 모든 학파와 종파를 융합시키고자 하는 원융성과 종합성을 띠고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과 휴정의 삼교회통 사상에서 그러한 특징을 잘 읽을 수 있다. 후대에 교학, 염불, 참선, 여기에 眞言 밀교에 이르기까지 그것이 동시에 수용되는 현상도 그것과 맥락을 함께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특성 외에도 마음사상을 강조한 것 등은 한국 불교의 특징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예컨대 원효의 일심(一心) 사상은 지눌의 진심(眞心) 사상과 휴정의 통심(通心) 사상으로 일미(一味) 청담의 무심(無心)
과 같은 에 들은 한국불교의 역사 과정을 간단하게 압축해서 보여준다. 그러나 1600여년에 걸친 한국불교의 역사가 그렇게 단순한 길만을 아니었다. 불교 초전기(初傳期)의 토착화 노력 이래 교학상의 연구 개척과 찬연한 불교문화의 발현으로 한민족의 역사를 선도하던 7 ~ 9 세기의 통일 신라기 불교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온전히 국교로서의 지위를 구가하던 10 ~ 13 세기의 고려불교시대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채택하였던 조선조에서는 14세기 말부터 거의 500년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 가혹한 배불의 정책적 탄압과 소외를 견디어 내기도 하였다. 이제 그 처음 전래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 역사의 주요한 흐름을 시대별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Ⅱ. 불교전래와 그 초기의 수용 / 삼국시대
1. 불교의 전래와 공인
한국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것은 이 땅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3국이 정립鼎立하여 서로 각축을 벌이던 시대의 일이다. 불교는 당시 북방 강대국의 하나이던 고구려에 맨 처음 전해진다. 즉 고구려 제17대 소수림왕 2년(372)에 당시 중국 전진의 왕 부견이 사신과 순도스님으로 하여금 불상과 경전을 전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식적인 한국의 불교 전래 년대의 기록이다.
이미 1세기를 전후하여 중국에 들어와 있던 불교가 북방의 강대국 고구려에 3백년 이상이나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전진의 왕이 불교를 전하기 이전에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이 땅에 알려졌을 것임이 분명하며, 실제로 이를 뒷받침 할 만한 흔적도 눈에 띈다.
즉 양고승전의 기록이 그것인데, 동진의 고승 지둔도림支遁道林(314~366)이 당시의 고구려 고승(道人)에게 글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이 기록의 요점은,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372년보다도 6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난 도림이 그 생전에 고구려 승려와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점이다. 고구려 승려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에도 석무명釋亡名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어쨌든 이는 한국의 불교 초전 년대를 훨씬 앞당겨 볼 수 있게 하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따라서 당시 상당히 우호관계에 있던 전진과 고구려의 국가간의 통교에 의한 공식적인 불교전래 이전에도 민간차원에서 불교가 전해져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이러한 사정은 한반도 남서쪽에 위치해 있던 백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백제에는 제15대 침류왕 원년(384)에 인도승 마라난타가 남부 중국의 동진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온 것이 불교전래의 처음이다. 이때 침류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교외에까지 나가 홀로 들어오는 이 이국승을 환영하였고 궁중에 머물게 하며 존경하여 받들었다고 한다.
승려에 대한 왕의 태도로 보아 백제에서도 마라난타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불교를 접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불교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는 왕이 교외에까지 마중나가 승려를 맞아들이고 왕궁에 머물게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침류왕 이전부터 동진과 외교관계를 모르고 들어올 무렵의 동진에는 이미 여산의 혜원(335~417)을 비롯하여 고승들의 교화가 널리 퍼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의 불교전래는 그 시기도 상당히 늦을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순탄하지가 못했다. 반도의 동남단에 위치하여 중국대륙과의 교류가 연맹체적 성격을 띤 국가의 정치적 상황이 이 외래종교의 입국 자체를 어렵게 하였다. 따라서 신라불교의 전래는 그 기록자체가 상당히 혼란한 편인데, 설화적인 내용을 제외하고는 대략 다음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19대 눌지왕(417~458)때 고구려에서 인도승 묵호자가 왔다. 그는 처음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지방이던 일선군(지금의 선산군)에 모례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그의 집 굴에 숨어 지내다가 어디론가 행방을 감추었다.
② 21대 비처왕(479~500)때 아도화상이 시자 3인과 함께 왔다. 역시 일선군 모례네 집에 숨어 지냈는데 그 생김새가 묵호자와 비슷했다 한다. 아도는 모례의 집에서 여러 해를 머물다 죽었으며 그가 데리고 온 시자 3인이 계속 남아 경과 율을 가르치니 간혹 불교를 믿는 자가 생겼다.
③ 23대 법흥왕 14년(527)에 아도가 일선군 모례가에 왔다. 아도를 본 모례가 놀라 “전에 고구려에서 정방과 멸구자가 왔다가 죽임을 당했다”면서 밀실에 숨겨 주었다. 마침 그 때 오나라(220~280)에서 향을 보내왔는데, 이를 계기로 궁중에 나아가게 되었으며 왕으로부터 마침내 불교의 신행을 허락 받았다.
이상이 대략 신라의 불교전래 기록들인데, 그 연대가 불확실하고 내용 또한 서로 혼동되어 있다. 신라에는 국가적인 통교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도승 개인들의 포교행각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것인 만큼 정확한 기록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 기록에 따른다면 19대 눌지왕 때 고구려에 와있던 서역 혹은 인도승이 신라에 첫발을 내리던 것을 시작으로, 통칭 ‘아도’로 불리우던 고구려승과 그 제자들이 신라 전도를 위해 들어왔고, 21대 비처왕과 23대 법흥왕 사이에는 두 고구려 승려의 순교가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서는 다시 법흥왕 15년에 신라에 온 아도와 관련하여 이차돈의 순교를 통해 불교가 공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불교의 신행을 허락했던 법흥왕의 뜻과는 달리 당시 신라의 귀족 대신들은 불교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에 법흥왕의 조카이던 젊은 이차돈이 왕과의 은밀한 약속 끝에 아도를 도와 천경림에 절 짓는 공사를 강행하였다.
이 일은 귀족세력의 거센 반발을 받아 이내 저지되고, 이차돈은 왕과의 밀약대로 그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이 때 그의 목을 베는 순간 흰 피가 수십 길이나 솟아오르고 천지가 진동하며 아름다운 꽃들이 비 오듯 떨어지는 이적이 나타났다. 이를 본 귀족대신들이 놀라 앞으로 불법을 잘 믿을 것을 맹세함으로써 법흥왕 14년(527)에 비로소 불교가 공인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차돈의 순교는 사실이야 어떻든 이는 불교를 받아들이려는 왕실과 이에 반대하는 보수적인 귀족세력의 갈등 속에서 왕실측 인물의 희생 끝에 불교가 공인되었던 것임을 잘 보여준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신라는 그만큼 정치적 ? 문화적 보수성이 강했고 그것이 불교의 전래와 공인을 어렵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불교의 공인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신라인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매우 주목할 만 하다.
한편 삼국과 함께 신라 남쪽에는 일찍이 6가야가 존재했고, 그 중에 금관가야는 이들의 맹주역할을 해왔다. 바로 이 가야국에 A.D 48년에 해양루트를 타고 인도의 아우티야로부터 불교가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이국적인 양식의 탑(파사석탑) 1기와 증명하기 어려운 전설 및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원산지 불교의 직접 전래와 그것도 고구려보다도 3백여 년이나 앞선다는 점에서 대단히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1세기 초의 남방으로부터의 불교전래설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확언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2. 국가적인 불교수용
삼국이 불교를 받아들인 경로와 그 시기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일단 전래 단계가 지난 후의 삼국은 각기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불교를 수용하였다. 고구려에서는 불교가 들어온 3년 뒤(375) 성문사를 세워 순도를 머물게 하고, 또 이불란사를 세워 순도바다 2년 늦게 고구려에 온 동진의 승려 아도를 머물게 했다. 그 뒤 18대 고국양왕 8년(391)에는 ‘불법을 잘 믿어 복을 구하라(崇信佛法求福)’는 왕의 령이 내려진다. 불교의 국가적 권장이라 할 이 같은 왕명은 곧 고구려 불교의 공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구려보다 12년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 또한 그 수용의 속도는 매우 빨랐다. 마라난타가 들어온 이듬해(385) 수도 한산에 절을 세우고 10명의 백제인을 득도시켰다.
이는 불교에 대해 백제인들이 사전에 충분한 지식이 있었고 또 관심이 그만큼 컸던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백제에서도 17대 아신왕 원년(392)에 ‘불법을 잘 믿어 복을 구하라’는 왕명이 내려진다. 고구려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불교를 국가적으로 권장, 공인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전래는 물론 공인 자체가 고구려 백제 두 나라에 비해 1세기 반 이상 뒤늦게 이루어진 신라에서는 법흥왕에 의해 불교의 초석이 다져진다. 그 위에 제24대 진흥왕(540~576)대로부터 국가의 비약적인 발전과 함께 불교는 크게 흥륭되어 국가지도와 발전의 원동력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였다. 법흥왕에 의해 불교가 공인되고 있지만 그것을 참으로 흥륭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 진흥왕의 흥불 정책은 흥륜사, 황룡사 등 대규모 사찰의 건립, 승관제도의 설치, 미륵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화랑도의 창설 등에 잘 나타나며, 불교정신에 입각한 그의 통치이념 또한 대단히 독특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삼국이 각기 불법을 잘 믿어 복을 구하라는 왕명을 내린 것이나, 불교를 국가지도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원시적인 속신 및 샤머니즘과 그런 정신세계에 바탕을 둔 사회 문화적 현실 속에서 살아온 이 시대 사람들에게 불교는 분명 처음 접하는 새로운 세계였다. 그것은 고등한 종교신앙으로써 만이 아니라 윤리와 철학으로써 또는 종합적인 문화로써 그들의 삶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수 있었고, 국가 사회의 지도에도 충분히 유익한 이념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삼국은 다같이 불교흥륭에 힘쓰고, 불교는 불교대로 그 시대와 인심에 알맞은 교화방법으로써 국가적 적응을 꾀하였다.
실제로 그 전래로부터 삼국의 사회와 국가발전에 끼친 불교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국가적으로 권장한 이후 눈에 띄게 국력이 신장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고국양왕이 불교신봉의 령을 내린 직후 그의 아들 광개토왕(391~413)이 즉위하여 평양에 9개소의 사원을 창건한 데 이어, 동진의 고승 담시가 요동지방에 들어와(396년) 본격적인 교화활동을 폈다. 우연한 일치일지는 몰라도 고구려는 이 광개토왕으로부터 다시 그를 잇는 제 20대 장수왕(413~495)대에 이르는 사이에 국력이 가장 왕성하였다.
백제도 불교를 받아들이는 침류왕 대로부터 제21대 개로왕(455~495)대에 국가가 안정세를 유지하면서 크게 발전하였고, 특히 개로왕대에는 불교의 국교화 이후 국력이 가장 신장된 시기였다. 이후 제26대 성왕, 27대 위덕왕을 거쳐 30대 무왕대에 이르면서 국가는 불교와 함께 그 전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라 또한 불교를 크게 흥륭시킨 진흥왕대에 미증유의 영토확장 등 비약적인 국가 발전을 이루었다. 이후 진흥왕의 흥불 정책이 모든 왕들에 의해 계승되는 가운데 신라는 차츰 여․ 제 2국을 압도하면서 통일을 예비해 갔던 것이다. 삼국의 불교전래가 다 같이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만큼 그 초기의 수용이 왕실 중심적 성격을 띠고 국가 불교로서 진행되었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이런 성격이 이후 한국불교 전개에 하나의 기본형식으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3. 고승 배출과 문화 전달
삼국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국가 불교적 성향은 오늘의 관점에서라면 충분히 비판적인 문제 제기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시대의 상황에 비추어 그것은 긍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지닌다. 무엇보다도 불교의 성장은 곧 국가 사회의 발전을 포함하여 문화의 향상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문화는 인간 삶의 질과 직결된다. 삼국이 다같이 왕살 중심의 국가 불교적 전개를 보였다 해서 그것이 지배세력들에게만 유리한 이데올로기로써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로써 대중들의 삶의 질 또한 함께 향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을 비롯한 왕실 그리고 귀족들의 불교에 대한 열성은 흥불 정책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불교교단에 흥성을 가져다주었다.
그 결과의 하나로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삼국에 다같이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의 교화활동이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보다 풍부하고 윤택하게 하였다. 삼국의 고승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 몇몇 만을 살펴본다.
고구려 장수왕대의 승랑은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교학 가운데 하나인 삼론학의 연구로 이름을 떨친 고승이었다. 그는 중국 남조의 제말양초濟末梁初에 섭산 서하사에 머물면서 양무제가 특별히 선발해 보낸 10명의 중국승려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뒷날 중국불교의 유수한 종파 가운데 하나로서 수대에 세워진 삼론종은 바로 승랑의 학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승랑이 그만큼 삼론학 분야에 있어서는 중국불교를 지도하였으며, 최초로 중국인들을 가르친 한국인이기도 하다.
백제의 고승으로는 성왕대에 인도에서 구법하고 돌아온 겸익을 들 수 있다. 그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겸익이 일찍이 인도로 건너가 중인도의 상가야대율사에서 5년 동안 머물면서 범어와 율학을 깊게 배우고 성왕 4년(529)에 귀국하였다. 이때 그는 인도승 배달다 삼장과 더불어 범본을 번역하여 72권의 율부를 만들고, 이에 담욱과 혜인 두 법사가 율문의 소疏 36권을 저술하였다.
이러한 겸익의 업적과 활동은 백제에 하나의 율학과 또는 율종을 상정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이는 중국의 율종 성립보다도 무려 1세기 가량이나 앞선 것이다.
한편 신라에서는 진흥왕의 흥불 정책 이후 각 왕대마다 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그 중에서도 진평, 선덕여왕대(579 ~ 647)의 원광, 자장은 신라불교 전기의 뛰어난 고승들이었다.
중국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원광은 신라 대승교학 연구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신라국민이 지녀야할 정신가치와 덕목으로써 세속오계를 정하여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자장은 화엄교학의 실천적인 신앙자로서 또 율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불교교단의 지도자로서 뿐만 아니라 국가 원로로서의 역할도 컸다. 선덕왕대에 국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비상직책이라 할 대국통이 되어 친당親唐정책을 조언하는 등 호국적 활동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들에 이어 신라에서는 원효, 의상과 같은 한국불교사상 불멸의 고승들이 출현하여 신라의 불교와 사회정신을 한 단계 높게 고양 발전시켰다.
한편 삼국의 국가적 저력과 불교문화의 풍성함은 그대로 바다를 건너 일본에도 전해졌다. 일본에 맨 먼저 불교를 전한 것은 백제 성왕 30년(552)의 일이며, 이어 고구려에서도 혜편 , 담징 등 많은 불교인들이 건너가 활동하였다. 특히 일본에는 불교뿐만 아니라 선진화된 백제의 문화 거의 전반이 그대로 이식됨으로써 일본의 생활문화 자체에 큰 향상과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오늘날 일본이 가장 자랑하는 아스카문화도 바로 백제문화를 모체로 하여 꽃피운 것이다.
그밖에 고대 일본의 신화적 존재이며 정신지주였던 성덕태자가 백제 승 혜총과 고구려 승 혜자를 스승으로 하여 교육 받았던 것이나, 일본의 승려들이 백제에 유학하여 율학을 배워가기도 했던 일 등은 일본 초기불교에 백제와 고구려가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삼국이 통일된 이후, 일본에는 중국에 못지않게 통일신라의 불교가 다시 많은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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