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종교이야기

한국불교의 이해-3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3. 9. 00:59

Ⅳ. 국가불교의 계승과 전개/고려시대

1. 국가적 흥불 정책과 제도

 통일신래 말기에 후백제(892~918)의 태봉국(901~918)이 일어남으로써 잠시 후삼국시대를 이루지만, 후삼국은 태봉을 이은 고려에 의해 통일(936)된다. 이 새로운 왕조 고려는 정신적으로는 옛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종교 정책에 있어서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이어받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런 경향은 우선 태조 왕건(王建)의 깊은 신 불심과 그의 불교정책에서부터 나타난다. 그는 후대의 왕들이 지켜갈 10조의 유훈(遺訓)을 미리 정하기도 했는데, 그 제1조에서 ‘국가의 창업(創業)이 부처님의 가호하심에 힘입어 이룩된 것’임을 단언하고 불교를 계속 보호 발전시킬 것을 당부하였다.

 이어 제2조와 6조에서도 각각 사원의 건립에 관해 준수해야 할 사항과 불교의례로서의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의 지속적인 봉행을 강조하고 있다. 태조는 유훈10조 가운데 3개조를 불교에 관해 당부하고 있을 정도로 두터운 신 불심과 불교보호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면 정통적인 신라불교에 대한 배려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 같은 태조의 신불의지와 불교 정책은 곧 고려 불교의 방행을 결정지었다. 이후 거의 모든 왕들에 의해 대조의 뜻이 착실하게 계승됨으로써, 고려불교는 처음부터 그대로 국교의 위치에서 국가와 사회에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국민의 정신을 응집시켜 나갈 수가 있었다.

 고려 일대에 걸쳐 펼쳐졌던 국가 불교로서의 각종 제도 및 흥불 정책과 불교에 대한 지원은 이런 배경 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고려의 국가 불교적 성격이 짙게 드러나는 몇 가지 대표적인 제도 및 흥불 정책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왕사 ․ 국사제도

승려를 왕사(王師) ․ 국사(國師)로 모시던 이 제도는 일찍이 통일신라시대에도 그 흔적이 보이고, 고려 태조에 의해서도 왕사가 책봉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정식 국가의 제도로서 확립된 것은 제4대 광종(949~975)에 이르러서였다.

 광종은 국초부터 문제가 되어온 지방호족세력을 제압하고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강화를 위해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왕이었다. 그런 광종 대에 왕사 및 국사제도가 확립되고 있음은 그의 정치개혁 작업과도 무관하지 않다. 즉 불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하는 고려에서 왕사 또는 국사라는 최고의 고승이 지니는 권위와 상징성은 민심의 포섭 및 국민정신의 통합이라는 사회적 기능까지 충분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왕사 ․ 국사가 어떤 실질적인 역할이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제도는 불교 각 종파의 흥성과 쇠퇴를 반영하기도 한다. 대체로 왕사 ․ 국사는 강시 가장 흥성한 종파에서 배출되었던 것이다. 고려불교의 국가적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이 제도는 조선조 초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배불숭유(排佛崇儒)를 정치 이념으로 하는 조선조에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는 제도인 만큼 태종대에 폐지되고 만다.


2)승과제도

 승려의 법계(法階)승진 및 인재등용을 위한 시험제도로서 역시 광종 대 일반 과거제도의 시행과 함께 시작되었다. 광종의 과거제도 설치에는 그의 정치적 목적의 하나로서 중앙 및 지방의 호족 세력들을 국가제도의 관료기구 속에 흡수코자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승과제도의 처음 시행 또는 이 점에 있어서는 거의 비슷한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말 이후 아직까지 정치적으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방 호족들과 연결되어 있는 승려세력을 국가의 통제 하에 두기 위해서는 승과와 같은 국가적인 제도의 시행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출발 동기가 어떠했든 간에, 승과제도는 승단의 인적 자질향상과 함께 각 종파에 의한 교학의 진흥을 가져옴으로써 결과적으로 고려불교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바가 되었다.

 승과의 내용을 보면, 먼저 각 종파별 종선(宗選)이 있었고, 이에 합격한 승려에 한해 응시의 자격이 주어지는 국가 주관의 대선(大選)이 3년 만에 한 번씩 실시되었다.

 이 대선에 합격한 승려에게 최초의 법계로서 대덕(大德)이 수여되고, 이후 차례로 승급하면서 아래와 같이 교종과 선종의 법계가 구분되었다.

교종법계: 대덕 수좌(首座) →승통 → 대사 → 중대사 → 삼중대사 →

선종법계: 대덕 선사(禪師) →대선사

위의 법계에서 교종과 선종의 최고법계인 승통이나 대선사 가운데서 왕사 ․ 국사제도와도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이 두 제도는 다같이 승려의 신분에 대한 국가적인 권위보장 및 유능한 인재등용을 위한 불교교단 발전의 제도적 장치였다고 말할 수 있다.

3)승록사(僧錄司)의 설치

 승록사는 승직(僧職)의 제도인 동시에, 불교에 관한 모든 업무를 관리하고 행사를 주관하던 국가 기관으로서의 교단과 정부의 행정적 협력기구였다. 이 승록사에서 전국 승려의 득도(得度) ․ 법계(法階) 등 행정적 관리 및 왕과 관련된 불사나 국가적인 불교행사를 주관 실시하였다.

 승록사의 조직과 승직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의 변화를 보이기는 하지만 좌 ․ 우 양가(兩街)로 나누어진 중앙의 승록사와 그 지방조직의 골격에는 큰 변동이 없었다.

 승록사의 최고 승직은 좌우양가도승통(左右兩街都僧統)으로 불리웠으며, 고려 후기에 가서는 주지파견 등 교단의 승정(僧政)전반이 이 도승통에 의해 전관(專管)되기도 하였다. 국가불교적 관리체제와 지원기구로서의 중앙관부였던 승록사는 고려불교의 발전과 함께 조재하였으며, 불교와 국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조선조 세종 대에 폐지된다.

4)출가의 공허(公許)

 국민의 출가득도(得度)는 조세 및 노동력의 확보 등과 관련하여 국가로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출가자 수의 증가는 그만큼 경제적 ․ 군사적 측면에서 국가에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민의 출가에 대한 고려 왕조의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10대 정종 대에는 한 가정에 네 아들 중 한 명이 출가하는 것이 허락되고, 다시 11대 문종 대에는 세 아들 중 한 명의 출가를 공시 허락하였다. 이 같은 여건 속에서 양민의 출가자가 급증했음은 물론 귀족 자제들의 출가도 빈번하였고, 고려일대에 16명에 달하는 왕자와 소군(小君)들이 출가하기도 하였다.

 고려조의 적극적인 출가공허는 결국 불교보호 및 흥불 정책 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이로써 불교교단은 그 구성의 양적 팽창은 물론 질적 향상까지도 도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출가자의 증가에 따른 부작용 또한 없지 않아서 고려후기 충숙왕 때에 이르러서는 도첩체(度牒制)를 시행하는 등 다소 제약이 가해지기도 하였다.

5)사원경제의 확대

 불교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보호와 각종 지원은 고려 사원의 경제적 부의 확대로도 나타난다. 사원은 기본적으로 지급외어 있는 전지(田地)외에도 왕으로부터 특별히 지급받은 사급전(賜給田)과 신도들에 의해 기증되는 시납전(施納田)을 비롯하여, 개간전(開墾田) ․ 투탁전(投託田) 등 여러 경로를 통해 토지를 확대해나갔다.

 이렇게 해서 사원들은 대장원을 소유하고, 나아가 사원노비의 노동력과 기타 자체 생산 및 시납물(施納物) 등에 막강한 특수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원들은 이 같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각종 불사를 행하는 한편 사회복지의 실천 등 대 사회적 봉사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원경제의 비대화에 따른 폐단도 적지 않았다.

 거기에는 이미 국가경제를 잠식 ․ 위축시킬 수 있는 요인이 내재되어 있었고, 더구나 후대로 가면서 부의 확대로 인한 승려들의 타락현상도 점차 두드러졌다. 고려 말에 성리학자(性理學者) 그룹을 중심으로 거센 배불론(排佛論)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같은 사원경제의 역기능 때문이었다.



2. 천태종 개창과 한국 선(禪)의 형성

 고려 전기에는 화엄(華嚴) ․ 유가(瑜伽) ․ 밀교(密敎) ․ 계율(戒律) 등 신라의 전통인 교학들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 가운데 화엄 ․ 유가(법상)학이 성행하였고, 특히 균여(均如, 923~973) 의천(義天, 1055~1101)등에 의한 화엄학은 고려 전기의 교학을 주도 하였다.

 통일신라 기에도 그러했듯이, 화엄교학은 국가 통합의 이념을 제시해주는 사상체계로서 가장 중요시되었고, 그 실천적 보살사상은 사회적 요구에도 크게 부응하는 바가 외었다. 이들 교학은 처음에는 ‘전공분야’정도의 의미를 갖는 업(業)으로 불리었지만 천태종의 개창을 전후하여 각기 한 종(宗)으로 성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 전기의 불교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실은 대각국사(大覺國師)의천에 의해 천태종(天台宗)이 개창된 일이다. 11재 문종의 넷째왕자로 태어나 11세에 자원하여 출가한 의천은 처음에는 화엄학을 닦았고, 모든 종학(宗學)을 폭넓게 섭렵하였다.

 그러나 해외 불교교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30세 때 중국 송(宋)에 건너가 제 종파의 경향을 두루 살피고, 1년 만에 귀국한 뒤에는 천태교학을 널리 펴기 시작하였다. 숙종2년(1097) 의천이 그의 모후인 인예왕후의 원찰로 지어진 국청사(國淸寺 )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함에 따라 비로소 고려에 천태종이 한 종(宗)으로 개창된 것이다.

 천태교학은 법화경의 사상을 철학적으로 재조직한 것으로 수(隋)대에 천태대사 지의(538~597)에 의해 그 체계가 완성되었다. 이런 교학을 바탕으로 하는 천태종은 중국에서 성립된 가장 대포적인 종파이다.

 이것이 이제 의천에 의해 고려에서도 한 종으로 개창된 것인데, 한국에서의 법화신앙 및 천태교학 연구 또한 상당히 오랜 전통을 지녀왔다. 그 연원은 삼국시대 때 중국 진(陳)에서 지의대사와 함께 수학하고 귀국한 백제의 현광(玄光)에서부터 찾아지지만, 특히 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 등을 저술한 신라의 원효에게서 그 심원한 연구를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조에 와서는 광종 11년(960)에 중국 오월(吳越)왕의 요청에 따라 천태 전적(典籍)들을 가지고 들어가 그곳 천태교학의 재건에 크게 기여했던 제관(諦觀)을 비롯하여,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천태종 제16조가 된 보운대사(寶雲大師) 의통(義通, 927~988)의 활동이 주목할 만하다.

 의천은 이 가운데서도 특히 신라 원효의 화쟁적인 불교사상과 높은 인격을 흠모하고 그런 원효의 화쟁 ․ 융회적 정신을 계승하려는 의도에서 고려에 천태종을 개창한 것이다. 천태교학이야말로 선과 교를 함께 포섭하고 시대와 국민정신을 귀일(歸一)시킬 수 있는 사상으로서, 이 같은 교학운동을 통해 원효의 정신을 계승 ․ 선양하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개창된 의천의 천태종과 그 활동은 사상 면이나 종파중심의 인적 계보 또는 대사회적 영향 면에서 한국불교사의 한 시대를 확연하게 구획 짓고 있다.

 한편 기존의 화엄종 활동 및 특히 새롭게 일세를 풍미하게 된 천태종의 영향으로 선법(禪法)은 크게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신라 하대로부터 고려 초에 이르면서 형성되어온 이른바 선문(禪門) 구산은 태조의 선사들에 대한 두터운 경신(敬信)과 지원으로 그동안 크게 성장 발전해 왔다.

 천태종의 개창은 그런 선동에 큰 타격을 준 것이다. 구산선문의 유능한 승려와 신진학도들이 대거 천태종에 경속(傾屬)함으로써 선종의 세력은 ‘쇠미하기가 마치 실낱과도 같다’고 표현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도 몇몇 고덕들은 선문을 굳게 지켰고, 예종 대(1105~1122)의 문신 이자현(李資玄)같은 이는 거사(居士)로서 능엄경(楞嚴經)에 의한 선법을 펴기도 하였다. 바로 이럴 즈음에 선법을 결정적으로 부흥시킨 것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었다.

 지눌은 일찍이 승과에 합격하기도 하였으나 명리의 길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선 수행에만 힘썼다. 그리하여 명종 15년(1185)에 공산(公山)의 한 작은 절 거조사(居祖寺)에서 뜻을 함께하는 동지 3~4명과 함께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맺으니, 이는 곧 순수 선불교운동의 시발이었다. 정혜결사는 불교수행의 두 핵심적 요소인 정(定, samadhi)과 혜(慧, prajna)를 함께 닦는데 전념하려는 수행공동체이다.

 이들은 당시 불교계가 정치권력 및 문벌세력들과 결합하여 여러 가지 폐단을 보이고 잇는데 대한 비판과 자각으로서 오직 산간에 은둔하여 스스로 노동하고 수행하는 한편 쇠미해진 선법을 다시 진흥시키고자 한 것이다.

 지눌의 선법 부흥 노력은 당시 불교계의 문제점에 공감하는 수행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시작 5년 후(1190)부터는 보다 조직적이고 본격적인 결사운동에 돌입하였다.

 그의 유명한 정혜결사문(定慧結社文)이 반포된 것도 이때였다. 그 후 신종 3년(1300), 정혜결사는 폭주하는 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적합한 수행 장소를 찾아 조계산 송광사(당시 송광산 길상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새로이 수선사(修禪寺)로 불리게 된 이곳을 근본도량으로 선법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고, 마침내 고려 중기 이후의 불교계는 선종을 중심으로 재편성되기에 이른다.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여 교 중심의 교선융회(敎禪融會)를 시도한 것이라면, 지눌은 선을 위주로 선교일치(禪敎一致)를 표방한 것이었다.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차이를 보이지만, 이 같은 입장은 다같이 원효로부터 시작되는 화쟁, 총화적인 정신 전통의 특징으로서 평가된다. 어쨌든 선교일체를 주창한 지눌의 선법은 중국의 그것과는 또 달리 대단히 독창적인 이론과 수행체계를 지니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 경절문(經截門)의 이른바 3문체계가 곧 그것이다.

 요컨대 ①먼저 크게 때달은 다음 점진적인 수행으로서 정과 혜를 함께 닥는 것. ②자기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선을 수행할 것. ③마침내 이해와 사고를 완전히 떨쳐버리고 화두(話頭)에 의해 궁극의 경지로 들어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선풍을 주도했던 지눌은 분명 한국 불교에 있어서 종조(宗祖)적 위치에 있다. 즉 한국의 선불교적 전통이 이런 지눌로부터 확립되어 온 것이다. 고려 말에 태고(太古, 1301~1382) ․ 나옹(1320~1376) 등이 중국 임제선(臨濟禪)을 도입하여 오늘에까지 그 선맥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또한 소급해 올라간다면 지눌의 선불교적 전통을 기반으로 성장 ․ 발전해온 것이라 하겠다.

 한편 지눌이 정혜결사운동을 전개하던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남 강진의 만덕사(萬德寺)를 중심으로 원묘국사(園妙國師) 요세(了世, 1153~1245)에 의한 백련결사(白蓮結社)가 펼쳐지고 있었다.

 요세는 그 무렵에 이르러 침체해진 천태종의 전통을 이어 수행중심의 새로운 천태결사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 양대 결사는 무신(武臣)집권기 고려불교를 대표하는 것이었고, 이후 원(元)의 지배기에도 수선사와 백련사에서는 대를 이어 수행기풍이 지속되었다. 수선사에서는 보조국사를 포함하여 15명(혹은 16명)의 국사가 배출되고, 백련사에서도 8명의 국사가 배출된 것은 그대로 고려불교에 있어서 이들 결사의 비중을 잘 말해준다.


Ⅳ. 국가불교의 계승과 전개/고려시대

3. 불사의 남설과 대장경 조조

 고려조에 국가와 불교는 그 출발에서부터 서로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런 고려불교가 호국성을 짙게 띠게 될 것임은 예견하기 어렵지 않으며, 실제로 국가의 불교에 대한 외호와 불교의 국가에 대한 鎭護관계는 대단히 두드러진다. 즉 국가와 불교는 상보적으로 역할하면서 공존해 간 것이다.

 이런 상호보완과 협력의 관계를 증명이나 하듯 고려 일대네는 사원의 건립을 비롯하여 각종 불사들이 무수하게 설행되었으며, 이들 불사의 대부분이 호국과 연결되어 있다. 고려의 불사 가운데서도 특히 의례로서 각종 법회 ․ 도량 ․ 法席 등의 개설은 지나칠 정도였다.

 법회와 도량은 ①외적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한 직접적인 진호 ․ 호국의 법회를 비롯하여, ②소재(消災) ․ 기양(祈攘) 등 민생과 관련된 법회 ③교설에 의한 순수한 수행적 법회 등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들 빈번한 법회와 그 내용들은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던 당시의 사정 및 시대의 정신적 성향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형식적인 기복과 양재의 행사가 신앙의 전부인 것처럼 되어버린 고려불교의 한 단면을 그대로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이 같은 불사의 남설은 오히려 불교의 순수성을 떨어뜨리고 지도적 활력을 상실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불사와 의례가 다 역기능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순수한 수행의 법회로서 오교법석 ․ 담선법회 등을 비롯하여 대표적인 호국의례로서의 인왕경강회 ․ 금강명경도량, 또는 국왕이 직접 보살계를 받고 그 정신을 다짐하는 보살계도량 등 그 전통을 오늘에도 재 음미해 볼 만한 법회와 행사 또한 적지 않은 것이다.

 한편 호국성과도 관련하여 고려불교는 특기할 만한 문화적 위업을 남기기도 하였다. 2차에 걸친 대장경의 조조(雕造)가 바로 그것이다. 고려에서는 먼저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현종(1009-1031)의 발원으로 대장경판의 조조에 착수하였다. 그 뒤 적이 물러가고 이어서 덕종과 정종을 거쳐 문종(文宗, 1046-1083)에 이르기까지 전후 약 40년에 걸려 1106부 5048권의 대장경 조판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되어 있던 이 초조장경은 몽고군의 2차 침입 때 불타고 말았다.

 이 1차 장경에 이어 대각국사 의천이 국내외에 흩어져 있던 불교의 章疏 들을 수집하여 이를 조판 간행한 것이 유명한 고려속장경이거니와 이 또한 제1차 장경과 함께 모두 불에 타버린 것이다.

 그 후 고종 때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대몽항쟁을 벌이면서 고종 23년(1236)부터 38년(1251)까지 16년 동안에 걸쳐 완성한 것이 오늘까지 해인사에 봉안되어 잇는 재조(再雕)대장경이다. 이 재조 대장경 또한 불력에 의해 몽고군을 물리치기 위해 국력을 기울여 조조한 것이다. 이는 1511부 6805권으로, 양면에 새겨진 판목의 수가 총81258판에 달해 속칭 팔만대장경으로도 불린다.

 고려대장경은 그것에 담긴 호국정신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그 내용 ․ 체제 등 학문적 우수성과 한 글자의 誤字도 없는 정밀성, 그리고 목판인쇄의 기술과 그 보존의 과학성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한문대장경 가운데 가장 완벽한 세계적 문화재로서 진중되고 있다. 또, 이 같은 대장경을 통한 인쇄기술의 발달과 그 경험의 축적을 통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의 출현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그 문화적 의의 또한 크게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대로 신라불교에 이어 국가불교로서 계승 전개되어온 고려시대 불교의 위치는 가히 국교 그대로였다. 따라서 고려불교는 국교에 상응하는 각종 흥불정책과 제도 하에서 성장발전하면서 정치 ․ 사회 ․ 경제 ․ 문화 등 제 방면에 걸쳐 종교이상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고려불교도 정치권력과의 결합에 따른 폐해, 경제적 부로 인한 타락, 그리고 종교적 순수성의 상실 등 그 내부의 문제들을 완전히 극복제거하지는 못하였다.

 그 결과 고려 말기에 불교는 자체의 활력과 국가 사회에 대한 지도력을 잃고, 이제는 오히려 배불론(排佛論)이 거세게 일어나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