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테크/종교이야기

한국불교의 이해-2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3. 9. 00:57

Ⅲ. 불교의 정착과 문화발전/ 통일신라시대

1. 삼국통일과 불교

 신라 진흥왕의 흥불 정책과 통치이념은 그 후대의 모든 왕들에 의해 충실하게 계승되었다. 그리하여 불교는 차츰 국민정신의 구심점을 이루었고, 이로써 응축된 힘은 마침내 신라의 삼국통일 대업을 뒷받침하게 된다.

 신라는 태종무열왕 7년(660)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문무와 8년(668)에 고구려를 평정하였다. 그로부터 6 ~ 7년 사이에는 신라의 연합군이던 당(唐)의 세력까지 이 땅에서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역사 이래 최초의 민족통일을 이룩하였다. 신라의 이 같은 통일 대업의 성취는 단지 영토의 통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족이 큰 하나로 뭉쳐지고, 민족문화가 공동의 의식 속에서 발전할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된 것이다. 흔히 이런 통일의 완수에 있어서 “불교의 영향이 지대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원광법사의 세속5계나 화랑도의 역할 같은 단편적인 설명에서 그치고 마는 것이 대부분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성공적인 외교정책을 비롯하여 정치적 안정과 군사의 강세 등 여러 가지 불교와 같은 종교 세력이 그 중심은 아닌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통일을 가능케 했던 여러 가지 요소 가운데, 특히 불교적 정신의 기반과 통일 주역들을 포함하여 당시 지도력을 발휘해 간 불교인들의 역할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불교가 구체적으로 통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의 통일 대업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끼친 불교의 정신적 요소들은 대략, ①불연국토(佛緣國土)사상, ②회삼귀일(會三歸一)의 이념, ③미륵정토(彌勒淨土)의 이상 등을 들 수 있다. 불연국토 사상이란 신라가 부처님과 인연이 깊은 국토라는 사상이다. 이 같은 사상은 일찍이 불교 전래기에 전도승(傳道僧)들에게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자장의 오대산 문수진신 상주설(文殊眞身 常住說)과 황룡사에 조성해 모신 장육존상(丈六尊像) 연기설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이런 사상이 국가의 관념과 결부될 때 그것은 국토의 신성성과 함께 호국의 의지로 작용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회삼귀일이란, 법화사상의 요체로서 성문․연각․보살의 삼승(三乘)을 일불승(一佛乘)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취지이다. 일찍이 법화신앙과 함께 그 사상이 깊이 연구되어 온 신라에서 회삼귀일의 이념은 삼국통일의 논리적 배경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즉 신라인들은 회삼귀일의 이념을 통해 민족통일의 필연성을 발견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마지막 미륵정토의 이상은, 미륵 부처님이 오시는 꿈결 같은 세상을 바로 신라 땅에 건설하려는 생각이다. 신라의 미륵정토 사상은 특히 진흥왕에 의해 창설되었던 화랑도의 조직이나 이상을 통해 화려하게 드러난다. 인간세상의 윤리나 도덕, 사회복지 등이 완전하게 구현된 그런 미륵정토를 신라의 현실 속에 앞당겨 이룩하고자 하는 이상이 또한 신라인들의 통일의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뒷받침했으리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황과 백성이 다 함께 불교를 믿고 받드는 정신적 일체감 또한 통일과업의 수행에 무엇보다도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불교가 삼국통일에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면 이상과 같은 사상과 이념 등을 통해서였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또한 신라 통일의 2대 주역이라 할 문무왕과 김유신의 깊고 철저한 신불심은 통일의 수행과정에서 불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잘 짐작케 해준다.

 문무왕은 평소의 신심은 물론, 죽어서까지 나라와 불법을 위해 동해를 지키는 호국룡(護國龍)이 되고자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동해 수중릉 대왕암(大王岩)의 전설로 남아 있다. 또 통일의 절대 원훈 김유신은 어려서부터 미륵 신봉자였다. 그는 일찍이 신라화랑 최고 우두머리로 나라의 미륵 부처님을 상징하는 국선(國仙)에 뽑히기도 하였다.

 그가 통일 전쟁을 수행하면서 보여준 미륵신앙 또한, 철저하고 강인한 것이었다. 그는 죽어서 33천(三十三天, 忉利天)의 천신이 되었다고 신라인들은 믿었다. 통일의 주역으로서 신불심에 의해 그 대업을 완수해 낸 이들은 생전에는 물론 죽어서까지 국가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신라인들의 가슴속에 살아있는 것이다.

 통일의 대업 완수에는 그것에 직접 간접의 영향을 주었을 신라 고승들의 국가의식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일찍이 세속오계를 정하여 신라 정년들에게 삶의 지표를 세워주고 현실을 일깨워 주었던 원광국사와 대국통으로서 불교교단과 함께 국민정신을 계도해간 자장율사의 호국적 국가의식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교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학적 이해를 통해 이론(異論)의 화쟁(和諍)과 민족적 대화합을 주장했던 원효 대사, 당군 침략의 위기를 알리기 위해 정보를 갖고 유학중에 급거 귀국했던 의상대사, 심지어 태종무열왕 때 실제사(實際寺)의 한 이름 없는 승려 도옥(道玉)에 이르기까지 신라 승려들의 국가의식은 투철한 것이었다. 도옥은 모든 백성이 전장에 나가 싸우고 있을 때 뛰어난 수행도 없었으면서 승려라는 직분으로 안주하고 있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고 스스로 일개 사졸(士卒)이 되어 백제와의 전투에 나아가 장렬하게 전사한 승려였다. 통일을 전후하여 신라의 승려들은 이처럼 국사사회를 위한 탁월한 비젼을 제시하는가 하면 그 시대 상황에 적절한 국가의식을 지니고 통일을 선도해 갔던 것이다.

 요컨대 신라의 삼국통일에는 이상과 같은 불교의 역할과 기여가 다른 어느 요인에 못지않게 크게 작용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2. 교학의 흥륭과 불교대중화

 신라의 통일 이후 약 120여 년 동안 불교 안에서 가장 주목함 만한 일은 대승 교학의 연구가 눈부시게 발전하고 동시에 불교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통일과 함께 안정된 국가 사회적 여건이 불교학 연구의 진흥을 가져왔고, 또 지금까지는 주로 왕실 혹은 국가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만 적용되어온 불교가 일반대중의 삶 속에 폭 넓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일찍이 원광으로부터 시작된 신라의 대승 교학 연구는 통일 전기에 이르러서 그 범위나 철학사상의 개혁 및 관성에 있어 실로 백화난만한 시기를 이루었다. 화엄과 유식을 비롯하여 법화․정토․율학․밀교 등 각 분야의 교학 연구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이들에 대한 주소(註疏) 등 저술활동 또한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대승교학의 연구는 주로 당시 중국에 유학했던 신라 학승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중국의 각 종학(宗學)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신라 학승들은 단순히 중국의 교학을 수입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교학 경향을 포함하여 이미 신라 불교가 다져 놓은 교학적 터전 위에서 그 주체적인 수용을 꾀함으로써, 때로는 오히려 중국의 교학을 능가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당시 중국 유학승들의 활동이나 국내의 교학 연구 경을 통해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그것에서 평생을 보내면서 그 독자적인 성격으로 내외에 학명을 널리 떨쳤던 원측(圓測. 623-696)의 유식학만 해도 그렇다. 그의 유식한은 현장의 제자 자은규기(법상종)와는 큰 차이를 지닌다. 원측의 주요 저술이라 할 성유식론소(成唯識論疏) 10권이 중국 유식학계에 일대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도 이 때문이다.

 당시 현장-규기 중심의 중국 자은학파와 서명서(西明寺)에 머물던 원축 중심의 신라 서명학파의 대립도 이처럼 서로 다른 학문적 경향에서 온 것이다. 원측의 유식 사상은 중국에서 신라인 제자 도증(道證) ․ 승장(勝莊)에게 전해지고, 그것은 다시 도증의 제자 태현(太賢)에게 이어진다. 이로써 유식은 화엄과 함께 신라 교학의 2대 주류 중 한 줄기를 이룬다.

 화엄학 연구는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문하에서 배우고 돌아온 의상(625-702)으로부터 꽃피어나기 시작했다. 의상은 중국에 건너가 지엄에게서 화엄학을 배우고, 그가 입적한 뒤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화엄을 강하였다. 그런 의상이 화엄종 제3조가 될 기회를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 온 것은 통일 이후 당의 대대적인 신라 원정계획에 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의상의 화엄교학은 간단명료한 것이 그 특징이다. 방대한 화엄사상을 30구 210자의 도식(圖式)속에 압축해 낸 그의 명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는 그의 이런 교학 경향을 잘 말해준다.

 의상이 떠난 뒤 화엄종 제3조로서 자리를 이은 법장(法藏)은 신라 유학승 편에 자신의 저술을 보내 의상에게 교감(校勘)을 청하고 있는데 이런 사실들을 통해서도 화엄학에 있어서 신라 의상의 위치를 엿볼 수 있다.

 원효(617-686)는 한 번도 나라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지만 그의 연구는 대소승 제종(諸宗)의 교학분야에 미치지 않는 바가 없었다. 그는 교학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독창적인 이론을 개척하고 완성해 나갔던 것으로, 그의 교학 사상은 한 마디로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불리 운다. 모든 파쟁과 대립을 멈추게 하여 전 불교를 화회귀일(和會歸一)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원효의 이 같은 연구들은 중국에도 전해져 그 곳 불교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의 수많은 주소(註疏)들이 해동서(海東疏)라는 이름으로 칭예(稱譽)되고, 특히 그의 역저(力著) 금강삼매경소(金剛三昧經疏)는 중국인들에 의해 ‘금강삼매경론’으로 고쳐 불려질 정도였다.

 논(論)이란 곧 보살로도 불리는 인도의 대 논사들의 저술에만 붙여진 이름이다. 그만큼 원효의 교학사상은 탁월한 것이었고, 자존심 강한 중국인들까지도 원효의 교학에 존경을 표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통일 이후 신라의 교학 발전은 이처럼 중국 각 종(宗)의 연구 경향 속에서도 분명히 그 주체성과 차별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 같은 교학흥륭과 함께 불교 대중화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 간 것도 신라불교 발전의 일면을 말해준다. 신라에서는 통일 훨씬 이전에도 서민 대중에 재한 교화가 행해져 왔다. 진평왕 대의 혜숙(惠宿), 선덕왕 대의 혜공(惠空), 그리고 그 무렵의 대안(大安)과 원효 같은 이들이 그 선구의 역할을 하였다.

 원해 국선 화랑을 돌보는 승려낭도(僧侶郎徒)였던 혜숙은 은퇴한 뒤, 수도 경주를 떠나 안강(安康)의 시골에 묻혀 살면서 서민 대중과 생활을 함께 했다. 신이력(神異力)을 지녔던 혜공은 도성의 이름 없는 한 절에 머물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을 교화한 것으로 유명하다. 비범한 고승 대한도 특이한 형상을 하고 항상 저자거리에서 사람들을 깨우쳤으며, 원효도 늘 대중과 함께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불교의 대중화는 통일을 전후하여 더욱 확산되고, 특히 통일 이후 대안․원효 같은 고승들에 의해 그 결실을 맺는다. 그 중세서도 원효가 보여준 불교 대중화 노력은 신라불교의 전혀 새로운 모습이기도 한 것이었다. 왕실이나 귀족들로부터 존경을 한 몸에 모았던 그는 어느 날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자호(自號)하며 전국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대중과 더불어 불법을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원효가 통일 이후 망국(亡國)의 유민 등 대중의 아픔을 새삼 깊게 인식 하면서부터 였는지도 모른다. 원효의 이런 불교 대중화 노력으로 불교는 이제 대중 속에서 살아나 일반 서민이나 하층민, 그리고 걸인이나 어린아이들까지도 설법을 듣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불교 대중화의 경향과 함께 통일 이후에는 특히 관음 신앙과 미타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 관음의 자비 속에서, 혹은 死後의 미타 정토에서 평등하게 구제 받기를 기대하는 대중의 염원이 그렇게 표출된 것이다.


활짝 꽃피운 문화예술

 통일 이후의 불교발전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대승교학의 연구라 하겠지만, 불교의 문화예술에서도 이 시기에 극성을 이루었다. 대승교학의 연구를 통한 심오한 철학적 사유와 종교적 이상, 그리고 신라인들의 수수한 실천적 신암심 등이 한데 어우러져 우리 역사상 가장 찬란한 불교 문화예술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전성기 통일 신라의 불교 문화예술은 건축․공예․회화․음악․문학 등 여러 분야에 걸쳐 그 정수를 자랑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경덕왕(景德王. 742-765)대에 세워진 불국사와 석굴암은 오늘날까지 당시의 불교사상과 그 문화 예술적 역량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불국사는 경덕왕 대의 대신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이다. 이 절은 많은 구조물들을 통해 하나의 불국을 상징해 보여주고 있다. 청운교․백운교 등 석조 구름다리의 가구 수법, 석탑미술의 최고로 평가되는 다보탑과 석가탑 등 그 아름다운 구조와 조영의 치밀함, 그리고 가람의 배치 등이 그러하며, 이는 곧 신라인의 세계관과 이상을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이 불국사에는 법화․화엄․정토․밀교 등 중요한 불교의 교학 사상과 함께 신라 불교의 현실사상이 아울러 담겨 있으며, 그 조형미와 전체적인 조화는 그대로 이상적인 하나의 불교세계, 즉 불국 정토을 이루고 있다고 할 만하다.

 토함산 동쪽 높은 곳에 동해를 향해 위치해 있는 석굴암(본래 석굴사)도 불국사와 마찬가지로 김대성의 발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이 석굴암은 조형미나 내포된 사상의 조화에 있어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수법이 절묘하고 구성이 신비로운 것으로 유명하다. 평면 원형과 장방형의 석실이 비도(扉道)석실로 연결된 이 석굴안에는 본존불상을 에워싸고 여러 보살․제자․천신상 등이 조화롭게 배열 안치되어 있다.

 그 구상적 표현과 함께 하나 하나의 조각들은 신라불교의 이상과 총화적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한국 불교 예술품 가운데서도 최고의 정화(精華)로 평가받고 있다. 이 밖에도 통일신라시대에는 불상․석탑․범종 등 뛰어난 미술공예품들과 함께, 호국신앙 및 정토신앙 등과 관련된 향가를 통해 독특한 불교문학 및 음악세계가 전개되기도 하였다.


새로운 불법․선법의 전래

 고구려와 백제의 통합으로 그 곳의 불교까지 함께 이어받아 총화적인 민족 불교로서 극성을 이룩해 온 신라 불교는 36대 혜공왕(惠恭王. 765-780) 이후부터는 점차 침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불교뿐만 아니라 대략 8세기 후반 경부터 신라는 정치적 사회적으로 점차 쇠망의 징후들이 나타나 보이기 시작한다. 잦은 민란과 도둑 떼의 창궐, 귀족 및 중앙 정계의 동요와 반복되는 왕위 찬탈 등이 바로 그러하였다.

 그동안 불교는 교학 연구 및 자체 발전을 도모하면서 국가의 지배이념으로써 민중의 귀의처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런 불교가 이제 교학 발전의 그 한계점에 이르고 오히려 왕실의 축원이나 담당하는 사제적(司祭的)인 역할에 만족함으로써 참신한 지도력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디까지가 불교이고 어디까지가 미신인지 조차도 모를 혼란상을 보여주는 신라 하대(下代)에 관한 기록들이 당시의 사회와 불교의 정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시대의 개척을 위해 새로운 정신, 새로운 불교가 요청되고 있던 바로 이런 시기에 중국 유학승들에 의해 지금까지의 교학 불교와는 전혀 다른 선법(禪法)이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선법은 우선 언어와 문자의 교학체계를 부정하는 점에서, 그 전해는 기성불교에 대한 도전이기도 한 것이었다.

 신라에 선법을 가장 먼저 전해온 이는 법랑(法朗)이었다. 그가 언제 당에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 선종의 제4조 도신(道信)에게서 선법을 배우고 동아와 그것을 제자 신행(神行)에게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이 신라에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또 실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41대 헌덕왕 13년(821) 당에서 돌아온 도의(道義)와 42대 흥덕왕(8226-836) 초에 귀국한 홍척(洪陟)이 중국 혜능 계통의 남종선을 전하고 부터이다.

 이후 신라에는 당에서 귀국하는 선승들에 의해 속속 산문(山門)이 개창되면서 점차 불교계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해 갔고, 위정자들의 지지를 받기고 하였다. 이 같은 선의 보급은 현학적이고 사제적인 불교의 근본정신을 되살려 시대를 선도하고자 하는 신라 불교인들의 새로운 움직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무렵 선사들 대부분이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산문을 근거지로 교화를 펴고 있는 것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 또한 그 동안 주로 도성을 중심으로 활동해 온 기존의 교학 불교와는 크게 대조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