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테크/내적치유 병원

[스크랩] 비만 오면 바지를 사러가는 사람 = 윤남옥목사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4. 25. 21:54

비만 오면 바지를 사러가는 사람 = 윤남옥목사 미국 중부에 있는 한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런데 교인들 가운데 제법 잘 사는 분이 계셨는데 식사대접을 해 주셨다. 담임목사님은 그 분을 칭찬하면서 "이 분은 항상 저의 양복까지 사주시고 주의 종들을 잘 섬기고 있지요" 라고 자랑하셨다. 그런데 그 분은 이어서 "저는 항상 비만 오면 양복을 사러 나가요. 그러면 목사님도 생각이 나서 함께 몇 벌 사드리죠..." 저는 "왜 비만 오면 옷을 사러 갑니까?" 그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우리는 오랜 대화와 상담 끝에 비오는 날에 대한 상처를 찾아내었다. 중고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그의 집은 무척 가난했다. 그래서 학교에서 사 입으라고 하는 정식 교복을 못 사 입고 싸구려 바지를 다른 데서 구입하여 입고 다녔다. 그 옷감이 너무 나쁜 것이라 비만 오면 몸에 착 달라붙어서 싸구려라는 행세를 하곤 했다. 비만 오면 이 사람은 이 옷을 입고 학교 가는 것이 너무 부끄러웠다. 옷이 또 "싸구려다"라고 티를 낼 것이 분명하고 그것은 우리 집은 “너무 가난해요”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싼 옷감의 바지를 입고 학교에 다녔던 그는 비오는 날을 항상 미워하였고 그리고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상처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자가 된 후에도 그는 비만 오는 날이면 미친 듯이 나가서 비싸고 좋은 옷을 몇 벌씩 사야만 하였다. 하지만 성령님은 그의 상처에 자리를 알게 하셨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한 후에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하게 되었고 다시는 비 오는 날에 옷을 사러 가지 않아도 되었다. 오히려 비오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난한 자신에게 지금 얼마나 큰 부와 재물을 허락하셨는지 기억하였고 감사하게 되었다. 예전에 충동적인 행동을 하며 감추어진 상처에 따라 행동을 했지만 지금은 비가 오면 마음에도 은혜의 비가 내린다. 우리가 어떤 충동적인 행동을 반복할 때 그 원인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충동적인 행동, 즉 무엇을 사재기 한다든지, 특별한 말에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른다든지.. 무엇을 살 때 수십 개씩 필요이상의 물건을 사서 집에 쌓아 둔다든지 하는 모든 행동은 과거에 숨겨진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처의 자리를 발견하여 하나님의 치유를 받게 될 때 오히려 그 상처는 은혜의 자리가 된다. 그러므로 상처에 매이지 말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건강한 은혜의 삶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상처만을 바라보고 연민에 빠지지 말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의 시선을 옮겨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적절한 상처와의 작별이 필요한 것이다. 어느 방송에서 대담을 할 때였다. 아나운서가 “목사님에게도 상처가 있나요? 목사님들은 없는 줄 알았는데요”해서 이해시키느라고 힘든 적이 있었다. 물론이다. 목사도 상처는 있다. 하나님도 상처가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계속 배반을 당했으며 수고와 사랑을 붓고 또 부었지만 끝내 이스라엘은 바알의 품에 안겨버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준 금은패물을 들고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가 버린 것이다. 하나님도 고독한가? 물론이다. 하나님만의 고독이 있다. 알아주지도 않는 짝사랑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끊임없이 구애하여도 이스라엘은 돌아보지 않았다. 또한 사랑하는 아들 예수도 이 땅에 보냈지만 결국에 그들의 손에 의하여 참수형을 당하고 만다. 누가 신(神)이 죄인을 향한 사랑을 이해할 것이며 누가 신(神)만이 가지고 있는 고독을 이해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상처로부터 자유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사회적 동물이고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상처는 있다. 그러나 상처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가 중요하다. 사실 상처는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무시해서 없어질 것도 아니다. 상처는 드러내어 치유 받아야 하고 적절한 시기에 작별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상처로 인하여 비뚤어진 인격이 형성된 것을 알지 못하였었다. 그리고 혼자서 고민하고 갈등한 적이 많았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하나씩 상처들을 드러내주시며 조명해 주셨을 때 이 상처를 치유 받고 굿바이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상처만을 바라보고 그 상처에 발목이 잡혀서 내가 과감하게 뛰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낮은 자화상, 교만, 미루는 것, 두려움 이러한 것들이 항상 나를 따라다녔고 그런 인성과 함께 분노, 질투도 항상 나와 함께 동거 동락하였다. 이제 우리는 상처의 실체를 알고 부드럽게 “굿바이”를 해야 할 때이다. 그것은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이며 누구도 상처에서 자유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함께 인정해야 할 일이다. 이 상처가 어느 때는 밖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있고 어떤 상처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밖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상처를 보게 되면 "아 저 사람은 장애인이구나 큰 상처가 되겠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적으로 분명하게 장애나 상처가 보이는 사람들이 있지만 밖으로 보기에 너무 괜찮은 사람들도 있다. 부유하고 가정 좋고 인물 좋고 친구도 많고 명예도 얻고 사는 사람들... 하지만 이외로 이러한 사람들이 더 고민하며 고통을 받으며 사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왜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고민을 사서 하지 참 이상하다” 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바로 범인은 숨겨진 상처이다. 내적 치유란 이렇게 외면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깊은 내면에 상처가 자리 잡고 있어서 남이 모르는 상처에 대한 치유를 말한다. 어느 때는 본인들도 모르게 숨겨져 있기도 하다. 이것을 치유 받지 못한다면 영적으로 눌리게 되고 왜곡된 인간관계를 갖게 된다. 비뚤어진 자화상을 갖게 되고 충동적이고 강박적인 행동을 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이유도 없이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 그리고 교만과 패역함으로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또한 자신의 상처를 방어하기 위하여 또 다른 자화상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자신을 외부와 소외시키기도 한다. 상처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상처를 숨기는 것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누구나 상처는 가지고 있다. 상처를 숨길 때 사단은 이것을 발판으로 우리 인생을 파괴적으로 이끌어간다. 이러한 상처의 가장 큰 피해자가 사울 왕이다. 사울왕은 다윗에 대한 질투, 그보다 못하다는 열등의식으로 40년의 인생을 소모하였다. 질투의 노예가 되어 아무 것도 못하고 비참하게 죽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하여 상처를 받으셨다. 그 분은 상처 입은 치유자이시다. 주님은 우리의 상처를 은혜와 사랑으로 치유하여 준다. 이 상처를 겸손하게, 용기 있게 주님 앞에 드러내는 것이 관건이다. 이제 상처에 얽매여 비관적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도록 주님 앞에 상처를 내어놓고 치유하여 주도록 나아가자. 이 용기까지도 주님이 허락하여 주실 때 가능한 줄 믿는다. 이제 이 상처에 얽매어 인생을 비생산적인 곳에 소비하지 말고 상처를 직시하고 치유하면서 더 큰 성장을 향해 나아가시는 발판이 되도록 하자. 아주 적절하게 성경적으로 과거의 상처와 굿 바이를 할 때 우리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이웃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며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는 생활에서 남을 위로하고 섬기는 생산적인 삶으로 변화 받게 된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