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인도이야기

[스크랩] 인도의 종교와 신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8. 5. 00:28


힌두교의 성장은 인도사회의 성장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었다. 힌두교의 신자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힌두(Hindu)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인들이 인더스(Indus)강 유역에 거주하는 아리아인(Aryans)들을 신두(Sindhu)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의 페르시아인들은 인더스강을 신두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고대 페르시아어에서는 'S' 를 'H'로 읽었기 때문이다. 'India'라는 명칭은 그리스인들이 'H'의 발음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Sindhu' 또는 'Hindu'에서 'H'를 제거하여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힌두라는 단어가 의미했던 것은 인더스강 유역의 아리아인들이었고 그들의 종교가 힌두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아인들의 인도아대륙에서의 세력확장이 이루어짐에 의해서 힌두화(Hinduisation) 작업과 아리아문화와 비아리아문화의 결합이 병행하면서 진행되었다. 이 결과, 힌두라는 단어는 본래의 지역적, 인종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힌두교의 신자와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의 구성요소들을 총칭하는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사회에서 힌두라는 명칭은 좋은 의미에서든지 나쁜 의미에서든지 한 개인의 소속과 정체를 나타내는 상징이 된다. 힌두들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종교를 느끼고 종교의 굴레에서 맴돌며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힌두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힌두교의 신자로서의 자격뿐만 아니라 특정카스트(Caste)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까지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공동체내 의 동질성과 결속력에 개인은 쉽게 동화할 수 있는 것이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적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 ; 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시교적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푸라나≫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삼신일체)는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흐마, 유지신,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세력을 갖고 있다. 비슈느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며,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敍事詩)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뉴파에 대하여 시바파는 사회의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주술,열광적인 제의에 특색이 있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흐마에게는 시라스바티, 비슈누에게는 라슈미가 배우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여신으로는 두르가, 파르바티, 우마, 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와 업, 해탈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업의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古)우파니샤드에 보이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가져와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나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法典)에 규정되어 있는 달바(법,의무)이다. 4성제도와 4생활기(學生,家住,林住,遊行期)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박티(信愛)와 그 은총의 능력,성별,직업,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흐마 시마즈, 아리아 사마즈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한다고 하여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흰두교의 최고의 신은 우주를 유지하는 신의 명칭. 브라마, 시바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룬다.
비시뉴는 유지, 브라흐마는 창조, 시바는 파괴와 창조로써 이 삼신이 우주를 지탱한다.

브라마
힌두교 신들 가운데 하나로 브라마(Brahma)이다.
브라흐마를 살펴본다면 먼저 창조의 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창조라는 개념은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인도의 신화에는 서양의 기독교적 전통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무(無)로부터의 창조라는 개념이 구체적인 모습이 아닌 가능 적인 씨앗의 형태로 이미 창조주 속에 내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브라흐마의 창조신화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인도의 성전인 베다 속에서 브라흐마는 '자라다, 성장하다'를 의미하는 동사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기도 또는 신성한 말속에 포함된 신비한 힘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점차 발전하여 우주 또는 그로부터 만물이 발생하는 절대자 혹은 근원자 또는 절대원리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절대자로서의 브라흐마는 그로 인해 다른 모든 존재들이 생성될 수는 있어도 자신은 결코 무엇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 존재하는 신이다. 그는 또한 모든 신들 중의 신이기도 하다. 모든 신들은 마치 외양간에 있는 소들처럼 브라흐마 신속에 거주한다. 그는 비슈누, 쉬바와 함께 힌두교의 삼위일체 신을 형성한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브라흐마 신은 창조의 역할을, 비슈누는 창조된 우주를 유지하는 임무를, 마지막으로 쉬바는 우주의 파괴를 통하여 새로운 창조가 시작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는 또한 브라흐마라는 이름 이외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 희생제를 처음으로 시작한 자 또는 으뜸가는 희생제주, 세계의 신, 황금알에서 태어난 자, 사비트리의 남편, 최초의 시인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태초의 이 우주는 하늘도 땅도, 그리고 빛도 없이 오직 어둠 속에 덮여 있었다. 거기에는 마치 꿈없는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어떠한 지각이나 구별, 그리고 앎도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누워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었던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저항할 수 없는 어떤 내적인 힘을 통하여 창조를 시작했다. 땅, 물, 불, 바람, 공기의 다섯 가지 요소와 그 밖의 다른 사물들을 이 우주 속에 창조하면서 그 자신도 어둠을 없애고 점차로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감각적 인식을 넘어선 미묘한 존재로서 인간의 앎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으며 또한 영원한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창조된 모든 사물의 본질이기도 하다. 어느 날 절대자는 자신의 몸 속에서 모든 창조물을 만들어 내려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제일 먼저 나라흐라고 불리는 물을 창조하여 하나의 씨앗을 그 속에 담아 두었다. 이 씨앗은 점점 자라 태양처럼 빛나는 황금알이 되었다. 그 알속에서 절대자는 모든 세계의 창조자인 브라흐마로 태어났다. 뿐만 아니라 물이 바로 그가 활동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그는 나라야나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쉬누
마하바라따를 보면 33,333 신이 산다. 후에 신들의 수는 천배로 많아졌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힌두의 신들은 33신으로 정의된다.
힌두의 대표적인 삼신은 브라흐마, 비싀누, 시바이며 이들은 각각 창조, 유지, 파괴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비싀누는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는 권능자로서 자비와 미덕을 갖추고 있으며 스스로 존재한다. 비싀누는 자주 거대한 새 가루다를 타고 다닌다. 비싀누는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모든 곳에 퍼져있는 우주의 대양(Nara)이면서 또한 물위를 거니는 나라야나이기도 하다. 그는 인간의 형태를 취하며 셰샤라고 하는 뱀의 또아리에서 잠을 자며 물위를 떠돈다. 창조의 신 브라흐마는 때로 비싀누가 잠자고 있는 동안 그의 배꼽에서 자라난 연꽃에서 나왔다고도 말하여진다. 우주가 파괴되면 다시 비싀누는 이 자세를 취한다.

우주는 선과 악이 균형을 갖고 있으며 때로 악이 우세해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비싀누가 인간으로 태어남으로써 이 균형을 잡는다고 한다. 현재의 마하유가(大時代)에서 비쉬누는 열 번에 걸쳐 화신으로 지상에 내려온다고 전해진다. 첫 번째 화신은 마뜨샤(Matsya)로서 마누이야기에 나오는 물고기이며 일곱 번째 화신 라마, 여덟 번째 화신 끄리싀나, 아홉 번째 화신 붓다 등이 잘 알려진 화신들이다. 열 번째 화신은 깔끼(Kalki)로서 아직 오지 않았다. 세상이 사악함으로 뒤덮인 말세가 되었을 때 깔끼는 흰말을 타고 지상에 사람으로 올 것이다. 유성처럼 번득이는 칼을 휘둘러 모든 악을 베면서 온 누리를 휩쓸어 다음 마하유가의 재창조시 선과 덕이 부활되도록 길을 예비할 것이다.

비싀누의 화신으로 알려진 라마는 인도의 대중적인 신이며 마하뜨마 간디가 암살당했을 때 임종 전에 외친 ??헤 람!(오 신이여)도 바로 이 신을 뜻한다. 현대 인도어에서는 람이라고 불린다. 라마는 비싀누신의 일곱 번째 화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라마가 실제로 현존했던 역사적인 인물로서 후에 신격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라마에 대한 이야기는 마하바라따에서도 간략히 언급되고 있다. 라마는 기원후 11세기경에 들어서야 신앙의 대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였으며 14-15세기 경에는 절대신으로 숭배되기 시작하였다. 라마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된 것은 16세기에 뚤시다스가 산스끄리뜨어로 된 라마야나를 힌디어로 개작한 람짜리뜨마나스(Ramcharitmanas)가 발표된 이후이다. 14-15세기에 인도 전역에 걸쳐 신애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라마는 끄리싀나와 더불어 가장 대중적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 신이다. 끄리싀나는 그의 짓궂음과 호색적인 면으로 인기가 있었지만 라마는 철저히 이성적이고 정의로운 행실, 이상적인 미덕 등으로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다. 라마 사원과 하누만(원숭이 형상을 한 라마의 충복)을 모시는 사당은 인도의 전역에 널리 자리잡고 있다. 라마는 친구들간의 인사말로 사용되기도 하며(람! 람!) 인도인들이 임종시 가장 자주 찾는 이름이다. 라마의 조각상을 보면 오른손에는 화살 왼손에는 활이 들려 있으며 라마의 사원에는 언제나 그의 부인 씨따(Sita)와 충실한 이복동생 락싀마나(Lakshmana) 그리고 하누만이 함께하고 있다.
끄리쉬나
끄리싀나는 라마와 더불어 대중적인 신으로서 비싀누의 여덟 번째 화신으로 숭배된다. 끄리싀나는 중세 박띠운동(신애운동)의 주된 대상으로서 이를 찬양하는 다수의 종교적인 시, 음악, 회화가 발전하였다. 끄리싀나 신화의 기본 출처는 마하바라따 서사시와 뿌라나의 10권과 11권이다. 끄리싀나는 현재의 우따르 쁘라데시 주에 해당하는 마투라 지역에서 사악한 왕인 깜사 시대에 야다브(Yadava)족의 아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바수데브와 데바끼로서 데바끼는 깐사의 자매이다. 깐사 왕은 자신이 데바끼의 아들에 의해 파멸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데바끼가 낳는 아이들을 죽인다. 그러나 끄리싀나가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는 깐사 왕의 눈을 피해 야무나 강을 건너 고꿀 마을의 소치기 부부에게 맡기고 그후 끄리싀나는 소치기 부부의 아들로 양육된다.

끄리싀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짓궂고 못된 짓들로 점철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많은 기적을 행하기도 했고 악귀들을 물리치기도 했다. 젊은이로서의 끄리싀나는 고삐(소를치는 여인네들)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피리를 불면 여인들은 유부녀든 처녀든 마을을 빠져나와 숲으로 들어와 그와 더불어 열정적인 사랑의 춤을 추었다. 여인들 중에서 그가 가장 맘에 들어한 여인은 라다(Radha)였다. 힌두교에서는 끄리싀나와 고삐들간의 관계를 신과 인간의 영혼과의 상징적 관계로 풀이한다. 후에 끄리싀나는 그의 동생 발라라마와 함께 마투라로 돌아와 사악한 깜사를 살해한다. 이후로 왕국이 안전하지 않은 것을 느끼고 그는 야다브족을 이끌고 서부로 이동하여 현재 구자라뜨 주의 드바라끄에서 왕궁을 짓는다. 그는 여러 여인들과 결혼을 하였다.

마하바라따 서사시의 두 가문인 까우라바와 빤다바가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두 가문에게 자신의 두 가지 제안 중 하나씩을 선택할 것을 말하였다. 그 하나는 끄리싀나가 무기없이 시중드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끄리싀나의 무기를 빌려쓰는 것이다. 빤다브족은 전자를 택하여 끄리싀나는 용사 아르주나의 전차를 모는 마부가 되었다. 마하바라따의 대 전투에 앞서 아르주나는 자신들의 사촌 친족 그리고 친구들과의 잔인한 살육전을 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고민을 하게 된다. 차라리 무기를 버리고 살해당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이 때 끄리싀나는 그 유명한 인생에 관한 담론, 다르마(의무)와 까르마요가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준다. 끄리싀나의 인생론은 힌두철학의 정수로서 바가바드기따(Bhagavadgita)를 통하여 전해 내려온다.

그가 드바라끄에 돌아왔을 때 야다브족장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고 그의 동생과 아들이 살해를 당한다. 이를 슬퍼하여 숲에서 울고 있을 때 사냥꾼이 그를 사슴으로 착각하여 화살을 쏘았다. 신으로서 완벽한 존재였지만 끄리싀나는 그의 단하나 약점에 해당하는 발뒤꿈치를 맞아 죽는다.
시바
시바는 '상서로운 존재'라는 뜻이다.
시바는 일반적으로 파괴의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상당히 복합적인 성격을 지닌 존재로서 일면 상충되는 성격을 동시에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파괴자인 동시에 재건자이며, 고행자인 동시에 관능의 상징이기도 하며, 자비로운 영혼의 목자인 동시에 분노의 복수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바의 양면성은 이전의 신화적인 성격들이 복합적으로 축적된 데 연유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힌두의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 흐름의 결과이기도 하다.
시바의 배우자는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이에는 우마(Uma), 사띠(Sati), 빠르와띠(Parvati), 두르가(Durga), 깔리(Kali) 등이 있다. 시바의 자손으로는 여섯 개의 머리를 가진 스깐다(Skanda), 코끼리 머리를 가진 가네싀(Ganesha)가 있으며 이들은 히말라야의 깰라싀(Kailash) 산에서 산다고 한다.

시바는 난디(Nandi)라고 하는 숫소를 타고 다니며 시바의 사원에서 난디는 지성소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시바사원에서 시바의 이미지는 링감(남성의 성기)으로 표현된다. 시바는 여러 가지의 신체적인 특징들을 갖고 있다. 그의 머리는 계단식으로 매트를 쌓은 것처럼 틀어 올려져 있으며 초생달과 갠지스강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의 피부는 잿빛 또는 흰색이며 목에는 푸른 점이 있다. 따라서 닐깐트(푸른 목)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독을 들여 마심으로 생긴 것이다. 한때 신들은 생명이 유한하였다. 이들은 불멸의 감로를 얻기 위해 우유의 대양에 약재를 넣고 거대한 산을 뱀으로 감아 저었는데 이 과정에서 뱀으로부터 뿜어 나온 독이 신들을 모두 위험에 처하게 하였다. 시바는 이 독을 자신이 들여마신 후 목에 저장하였기 때문에 목의 색이 변하였다.

시바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 세 번째 눈은 내면을 투시하는 눈으로서 밖을 주시할 때는 물질을 태우는 파괴력을 갖고 있다. 그는 두개골을 꿴 목걸이를 걸치고 있으며 목에는 뱀을 두르고 있다. 두 손 때로 네 손에는 사슴가죽과 삼지창, 작은 북, 해골로 된 타봉을 지니고 있다.

시바는 여러 모습을 보여준다. 여러 이미지 중에서 그는 배우자 빠르와띠, 아들 스깐다와 더불어 평화로운 모습으로, 우주의 댄서(Nataraja)로서, 벌거벗은 고행자로서, 탁발승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대표적으로 상기할 수 있다. 각각의 이미지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깔리
시바신을 밟고있는 깔리 여신

깔리는 힌두교의 삼신 중에 하나인 시바 신의 아내이며 검은 피부를 가지고, 피가 뚝뚝 흐르는 사람들의 손목을 앞치마로, 사람들의 목을 다발로 걸고, 늘 피비린내를 풍기는 무시무시한 여신이다. 깔리의 어원을 살펴보면 인도 유럽언어의 원형인 삼스크리탐의 카라, 즉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출발했다. 흐르는 강물에 시간의 상징하는 여신의 이름을 주었으니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고대 母神의 잔 인한 계승자인 검푸른 깔리Kali여신. 깔리여신은 여기서 많은 머리를 갖고있으며, 예외적으로 웃는 모습이다. 그러나 나머지는 균형적인 모습으로 내민 혓바닥, 잘린 손과 해골로 만든 장식을 하고 있다. 한편 시바교적인 권속의 여신으로서 이마의 제삼의눈. 장식 머리띠의 초생달. 삼지창. 잘라진 머리등으로 치장하고 있다.
가네쉬
간빠띠 또는 가네샤라고도 불리는 코끼리 머리를 한 힌두의 신이다.
시바와 빠르와띠의 아들로서 장애물을 제거해 주는 자로 여겨져 사업을 시작할 때 복을 비는 대상이며 제례의식의 서두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경배의 대상이다.
그의 신상은 사원이나 가정집 입구에 자주 보인다.
그는 또한 문자와 학습의 후원자이며 성자 뱌사(Vyasa)가 불러준 마하바라따를 받아적었다고 믿어진다.
그의 배는 볼록하고 상아는 한쪽이 부러졌으며 네 팔에는 각각 올가미, 몰이막대기, 쌀단지 그리고 부러진 상아를 들고 있다.
그가 타고 다니는 짐승은 쥐이다. 이러한 묘사의 이면에는 각각의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깔려 있다. 그의 탄생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대표적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빠르와띠는 목욕을 하면서 욕실을 지켜줄 아이를 때를 밀어 만든다.
시바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 아이가 부인에게로 못가게 가로막고 있자 그는 화가 나서 부하들을 시켜 아이의 목을 자르게 한다. 빠르와띠가 슬퍼하자 시바는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생명체의 머리를 떼어다 아이의 목에 달아 줄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그 생명체가 바로 코끼리이다.

이 결과에 대한 빠르와띠의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시바는 그 보상으로 인간들이 제사나 사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가네싀의 축복을 받아야만 일이 원만하게 되도록 하는 권한을 가네싀에게 준다.

다르마가 전통 힌두사회 조직의 근간이 되었던 것처럼 담마는 불교 사회의 뿌리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때때로 기존의 사회질서의 전면적인 부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부처는 타락한 생활방식을 버리고 원시시대의 순수한 생활방식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브라만이나 불가촉천민이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외양적인 권위, 그것이 초인적인 창조자이건 베다의 형태를 취했건 간에, 에 의문을 나타냈고 기계적인 의식주의와 극단적인 수행방식에 반대했던 것이다.
부처는 방종한 기쁨이나 극단적인 고통을 추구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고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마디야마 쁘라띠빠다(Madhyama Pratipada)을 창안하여 속인은 물론 승려들의 사회생활의 기본으로 삼았다. 모든 악은 무지에서 나온다. 진실한 지식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기초가 된다. 이것을 위해 2500년 전 부처는 ??정의의 바퀴(Dhamma Cakka)',를 설정했고 영원한 길(Akaliko)을 설명했다.

진정한 지식은 다음 네 가지의 ??숭고한 진리??에 기반한다. 첫 번째 진리는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두 번 째는 고통은 존재를 위한 욕망, 즉 형이상학적인 진리와 경험적인 진리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실패함에 의해 발생한다. 전자는 절대자에 대한 참여를 의미하고 후자는 단순히 가능성에 관계가 있을 뿐이다. 세 번째 진리는 욕망을 없애는 니바나(Nibbana)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진리는 해방과 평정은 팔정도(八正道)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인도의 불교사 - 불교와 자이나교
아리아 사회의 성숙과 더불어 인도에서는 브라만 교의 형식주의에 반대하여 사색을 통한 인생 문제의 본질을 밝히고, 나아가 종교적 자유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기원전 7세기의 우파티샤드 철학은 이러한 경향에서 연유하였고, 이는 불교와 자이나교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5세기경, 고타마 싯다르타에 의하여 이룩된 불교는 생의 무상함을 설파하고 해탈을 통한 영생을 강조하고 바라만의 차별주의에 반대하여 자비와 평등을 강조한 결과 당대인의 큰 환영을 받았다. 바르다마나의 자이나교는 교리가 불교와 비슷하였으나 금욕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인도의 불교사 - 마우리아 왕조와 불교의 전파
불교가 성립될 무렵까지 인도는 많은 정치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4세기 말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나와 남부를 제외한 전 인도를 통일하고 마우리아 왕조를 세웠다. 3개 아소카왕은 강력한 행정 및 군사 조직을 기반으로 통일 체제를 유지하고 대규모의 관개 사업으로 농업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는 대외적으로 영토 확장은 물론 불교 경전의 정리22) 불교경전의 통일 정리 사업은 석가모니가 죽은 직후, 그 1회 사업이 완성되었고, 2회 사업은 100년 후에 있었다. )와 포교에도 힘썼다.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하고 달마 (법, 윤회)에 의한 정치를 내세워 각지에 그 내용을 새긴 석주를 세웠다. 그는 실론 등 외국에 불교 전도사를 파견하여 주변국의 불교화에 힘써 큰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 대제국은 아소카왕 이후 급속히 기울어 기원전 180년경 망하였다.
인도의 불교사 - 쿠샨 왕조와 대승 불교
마우리아 왕조가 망한 다음 북인도는 약 5세기 동안 혼란이 계속된 반면, 남인도에는 안드라 왕조가 강대해져 해상무역으로 번영하였다. 당시 서북 인도에는 박트리아 인, 그리스 인, 파르티아 인이 파상적으로 침입한 끝에 1세기 후반에 이란 계의 쿠샨 왕조가 성립하였다. 쿠샨 조의 카니슈카왕은 불교의 보호자로 자처하고, 사색과 개인의 해탈을 강조하여, 이미 동남 아시아로 전파되었던 소승불교를 비판하고, 중생의 구제를 앞세우는 대승 불교를 일으켰다. 이 교파는 중앙 아시아,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에 전파되었다. 한편, 헬레니즘의 영양하에 있던 간다라 지방에서는 불교 문화를 수용하여 간다라 미술이 일어났다. 쿠샨 왕조는 3세기 초 사산조 페르시아가 중앙 아시아를 점령하면서 쇠망하였다.
야마
불교에서 염마(염라대왕)라고도 하는 야마(Yama) 베다에서 죽음을 겪은 최초의 인간으로 묘사된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들이 지상에서 수명이 다한 후 걷게되는 죽음의 길을 최초로 닦은 인간이다. 그는 땅속에 있는 죽음의 지역인 남방의 수호자로서 베다에서는 사자(死者)들의 왕으로 등장했으나 후에 죄를 심판하는 다르마라자로 발전하였다.
그는 대단한 외관을 갖고 있는데 특히 붉은 눈과 붉은 옷 해골장식 그리고 갈고리 달린 철퇴를 들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저승의 입구는 네 개의 눈을 가진 두 마리의 개가 지키고 있으며 까마귀와 비둘기가 그의 전령들이다.

역사적으로 인도아 대륙에 이슬람교는 아주 다양한 방법 즉, 교역과 정복, 언어 그리고 수피즘(sufism) 에 의해 전파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이슬람 문화를 발전시켜 왔다. 따라서 현재 동부인도에서는 수피 신도들이 힌두 신화와 우주론의 관용구를 수피 신앙에 접합하여 원래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문화를 생산했다. 아랍무역상들로부터 이슬람교를 도입했던 께랄라(Kerala)주에서는 아직도 아랍국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란과 중앙아시아에서 정복자로서 또는 무슬림 궁정에 봉사하기 위해 인도로 이주했던 사람과 그 자손들을 아쉬라프(Ashraf)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무슬림 고급문화의 표본으로 자처하고 있으며 힌두에서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들의 상위카스트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문화적, 사회적으로 서로 차이가 있지만 인도의 무슬림집단은 꾸란에서 알라가 규정한 '따라야만 하는 길(way to be followed)'라는 공통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다. 샤리아(Sharia: holy law)가 바로 그 '길(way)'인 것이다. 샤리아는 신에 의해서 모하메드에게 계시되었고 그는 그의 신도들에게 인간적인 실례가 되었다. 그러므로 샤리아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상세한 안내일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교의와 종교관습의 집합인 것이다.

샤리아를 따르는 것은 이상적인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일부 극단적인 울라마(Ulama) 들은 샤리아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과 지지를 요구한다. 한편 수피즘의 또 다른 극단주의자들은 개인이 신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식(Tariqa)을 개발해왔고 이 방식을 따르는 추종자(Murid)들은 그 자신의 영적 지도자(Pir)의 지도를 받는다. 비록 일부 수피 신자들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샤리아와 따리까(Tariqa)의 차이를 최소화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따리까가 샤리아의 대체물이 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로부터 도래한 것이지만, 중세인도의 평등주의운동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앞으로 설명할 나나끄(Nanak)가 만든 시크교(Sikhsm)도 수피즘의 영향을 받았다.
인도의 무슬림들은 순수한 이슬람적 관습들과 힌두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많은 관습들과 관례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농촌에 거주하는 무슬림 직업집단들은 힌두카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세습직업과 동족결혼을 지키고 있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이슬람교의 보편적인 평등정신과는 달리 세습적 지위 또는 계급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싸이드(Sayyid)와 앞에서 언급했던 아쉬라프 등은 다른 무슬림에 비해 상위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무슬림의 탄생의식과 결혼의식은, 특히 까쉬미르에서는, 힌두의 영향을 명백히 받고 있다. 문화적 통합은 건축, 음악 그리고 문학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우르두의 출현은 무슬림-힌두접촉의 결정적 증거가 된다.

이슬람교의 본질과 그 의미는 율법에 대한 복종과 알라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아라비아어로 신을 의미하는 알라는 전능한 이, 모든 것을 아는 이, 자비로운 이, 만물이 살고 있는 우주를 창조한 이를 말한다. 그는 또한 최후의 심판을 주관하며 이때 모든 무덤들이 열리며,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그의 영원한 권좌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이 알라에게 잘 복종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혹은 지상에서 참된 무슬림으로으로 살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즉 사탄의 유혹에 빠져 타락한 이교도로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한다. 전능한 신의 참된 말씀은 7세기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암송(Qur`an)으로 최후의 예언자 마호메트(570-632)에게 계시되었다. 이 신성한 신의 메시지는 모든 무슬림의 숭배를 받고 있는 신의 경전에 담겨져 있다.

이슬람교도가 되는 길은 먼저 진정한 신명을 가지고서 아라비아어로 세상에는 오직 한 신 알라만이 있으며, 마호메트는 신의 예언자이다라는 맹세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하고 헌신적인 무슬림으로서 메카(Makka-622년에 마호메트가 메디나에서 탈출하여 이슬람교를 창시한 곳)을 향해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를 올려야 한다. 게다가 금요일에는 모스크(Mosque-이슬람교 사원, Masjid-인도의 모스크이름)정원에서의 집회에 참석하여 낮기도를 올려야 한다. 이슬람교도는 독실하고 헌신적인 이들로 구성된 움마(Umma-민주적 공동체)에 자신의 벌어들이는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고, 알라의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음력 라마단(Ramadan)달 아홉번째 날에는 동틀녘부터 해질 무렵까지 단식을 해야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실한 무슬림으로서 일생에 한번은 마호메트가 태어나고 묻힌 곳인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이슬람교는 갖가지 율법과 전통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슬람교가 계율과 전통, 특히 마호메트의 계율과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구축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무슬림은 절대로 돼지고기나 술을 마시지 않지만, 결혼생활에서는 아내를 네명씩이나 거느릴 수가 있다. 무슬림에게는 "다르 울 이슬람"이라고 하는 이슬람교 통치가 이루어지는 땅에서 사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니면 그들은 이른바 "다르 울 하브"라는 전쟁중인 땅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된 의무는 필요한 경우,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지하드(성전)"에 종사하는 것이다. 무슬림은 이슬람교와 알라신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전능하며 불가사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의 형상으로 묘사되지를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성전에 가보면 기하학적인 디자인이나 글씨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다른 장식이랄 것이 없다. 단지 사원의 높은 정문에 놓여있는 대리석위에 아라비아어로 코란의 문장을 희귀한 보석이나 금 또는 은으로 새겨놓은 것이 눈에 띄곤하는 정도이며 힌두사원에 비하면 단조롭고 단순한 대칭구조와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슬람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탄생하여 중동지방과 남아시아로 번졌으며 인도에 들어온 무슬림은 10세기 초반에 영토침입과 함께 들어온것으로 이후에 무굴제국의 번성기 동안에 이르기까지 많은수의 힌두가 무슬림으로 강제로 혹은 의도적으로 개종한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맨처음부터 인도를 정복하고 그 자리에 머문 순수한 이방인 계열의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 아프카니스탄인, 터키 인과 몽골인인 무슬림교도들의 수는 인구 전체의 1%에서 2%수준에 불과하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많은 힌두의 후대들이 힌두에서 무슬림으로 개종을 한 경우가 많다고 봐야 하며 인도에서의 무슬림의 역사는 1천년을 보면 맞을 것이다. 지금은 인도 인구의 15%정도가 무슬림으로서 힌두인들과 함께 인도에서 등을 대고 살아가고 있으며 서로의 종교를 존중받기를 바라는 만큼 존중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나 힌두인들의 무슬림에 대한 이해의 폭보다는 무슬림의 힌두인들에 대한 이해의 폭은 현저히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것은 어쩔수 없는 그들의 신관에서 기원하고 있다.

힌두교와 비교해서 이슬람교의 신앙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신에 대한 개념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슬람은 유일신을 따르고 믿고 있지만 힌두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신을 보유하고 있다. 브라민이나 소에 이르기까지 신성한 것으로 취급하는 힌두사상에서 그들의 현존하는 신들의 수가 3억 3천만을 육박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또한 사원의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힌두교의 사원은 문과 벽 혹은 여러장소에 나체로 조각되어 있는 남자신과 관능적인 여신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슬람사원은 그러한 것들을 볼수가 없으며 우상시되는 어떠한 내용물도 사원안에 둘수가 없으며 관습적으로 관능적인 모습의 신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자신을 사랑하는 많은 팬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힌두교의 사상에서 보면 엄청나게 편협하고 고집스러우며 오히려 신을 모르는 존재들의 자기만족이라고 볼수도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1천년이상을 함께 공존해 오고 있는 힌두교와 무슬림의 종교세력들은 지금도 조그마한 시골 마을길에서 함께 등을 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인도의 실정이며 만디르와 마스지드가 함께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무슬림과 힌두간의 강한 갈등이 없지않아 왔던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어떻게 잘 풀어나가는 것이 현 정치권력의 역할이기도 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에 모하마드 알리 지나(1876-1948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 에 의해 힌두의 나라에서 독립을 하느니 차라리 영국의 통치를 더받겠다고 했던 인물의 말처럼 나라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무슬림들에게는 힌두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종교분쟁으로 인하여 분리독립을 이루고 나서도 인도땅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무슬림이 살고 있으며 이들과의 마찰로 인한 분쟁과 사고, 폭동이 한두번에 그치지 않고 있는 것도 인도의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지나에 의해서 파키스탄으로 종교분리독립을 한 무슬림들이 전부 그 당시에 파키스탄으로 혹은 방글라데시로 넘어갔더라면 문제가 없을 것인데 넘어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힌두의 땅 인도는 여전히 가시를 목에 걸고 살아갈수 밖에 없는 현실에 처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배운 식자들의 과격한 언사는 그들을 향하여 빗발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그들을 등에 업고 정치권력을 얻으려는 정치 불나방 같은 존재들이 자신의 나라의 정체성보다는 권력에 눈이 멀어 종교적 갈등을 오히려 조장하는 경우가 없지 않음도 뼈아픈 현실이며 이것은 민중을 향하기 보다는 권력을 향하고 있는 이기심으로 가득찬 정치꾼들이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도에서의 이슬람교

인도의 회교는 10억 인구의 10% 정도를 신자로 가져 1억에 육박하는 신도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도는 단일 국가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회교도를 지니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인도에 회교가 본격적으로 발을 내디딘 것은 12세기 였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회교도에 의해 성립되었던 무굴 제국은 상징물이나 형상으로서 신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일부다처제 이며 신분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돼지를 제외하고는 고기를 먹는 다는 것이 자유롭다는 힌두교와는 여러모로 많은 차이가 잇는 종교를 인도에 전파 시키기 위해 집요한 포교 정팩과 개종 정책을 펼쳤지만 대분분의 개종자는 하층신분 출신이었다고 한다.

현재 무슬림들은 인도 내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억압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이는 무슬림이 지배 세력이었던 무굴 제국 때 아우랑제브 대왕이 죽은 이후 인도에 영국이 진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영국의 방침은 영어교육을 받은 자를 관리를 시킨다는 것이었다. 지배 세력이었던 무슬림들은 이에 반발하여 영어 교육을 받아 들이지 않았으며 그래서 독립투사들은 무슬림들이 많다. 하지만 피지배세력이었던 힌두인들은 영어 교육을 받아들였고 바로 이러한 교육을 받은 힌두 세력들이 인도의 독립 후 관료로 뽑혔다. 이러다 보니 점점 힌두 세력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러 던 중 2차대전이 끝나고 인도가 독립을 하게 되었는데 인구의 20퍼센트도 채 안되는 무슬림들로서는 민주주의 하에서는 자신들의 입지가 약할 수밖에 없어 독립을 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동-서 파키스탄으로 나뉘어 독립을 하였는데 서 파키스탄에 수도가 있어 경제적 정치적 중심이였고 상대적으로 동파키스탄은 정치적 경제적인 착취를 당하였다. 이에 동파키스탄이 반발,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기를 원하였고 인도가 이들을 지원하여 방글라데시로 독립하였다. 보팔, 아우랑가바드, 아그라 같은 곳들은 무슬림의 세력지지만 정치적인 고립지역이다.

최근에 있었던 국회의사당 자살테러 사건의 배후조종자로서 체포된이가 바로 델리대학교의 교수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의 종교가 무슬림이기도 하다는 것 때문에 인도의 힌두 식자층들의 비난을 사고 있으며 무슬림들에 대한 좋지 않은 견해가 확대되어 가고 있던 차에 구자랏트 무슬림테러가 다시 발생한것이다. 본래 아요디아에 있던 회교 사원은 본래 힌두템플들의 위치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것으로 10세기 초반에 밀고 들어왔던 이슬람세력들이 인도땅에 있는 많은 힌두템플을 우상숭배로 여기고 때려부수고는 그 부순 자리에서 나온 벽돌로 다시 그자리에 회교사원을 세운 과거 역사가 있으므로 여기에 대한 복구, 혹은 회귀에 대한 힌두인들의 열망은 당연한 것이라 할수 있다. 특히 아요디야는 힌두인들의 성지로서 위대한 라마왕이 태어난곳이며 비슈누신의 화신으로서 숭앙받고 있는 신의 고향이기도 한곳이다. 그러한 중요한 곳에 있던 템플을 우상숭배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때려부순 회교인들의 잔악성과 우매함이 결국 지금에 와서 역사적으로 다시 되풀이 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20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자신의 고향을 주장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 한가운데 신과 신앙의 이름으로 폭탄을 퍼붓고 총질을 해대어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했고 서구 유럽에서 그것을 못본체 했음을 상기할 때 힌두인들이 람의 고향에 있는 회교사원을 허물고 자신들의 본래의 건물과 신앙을 회복하겠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2000년전도 아니고 900년전의 일이므로 지금 인도는 무슬림으로 시끄럽다.

힌두교인인 나나크가 창시한 종교.
힌두교의 신애(바크티)신앙과 이슬람교의 신비사상을 융합한 것으로 인도 서북부의 펀자브 지방에 퍼졌다.
16세기경 교조 나나크는 펀자브의 라호르 주변에서 태어나 인도를 여행하면서 많은 성자들을 만났는데, 특히 바크티의 성자 카비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나나크가 죽은 후에 대대로 구루밑에서 교단조직이 정비되어 오다가 제5대 구루인 아르준시대에 교전이 성립되고 암리차르에 본산이 건설되는 등 일단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단으로서 그 세력이 확대해 감에 따라 무굴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아르준은 1606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무굴제국과의 항쟁을 통하여 교단은 전투집단화하였는데, 무굴제국 쇠퇴 후에는 영국과 끝까지 싸웠다. 이 전쟁을 시크전쟁이라고 한다.
오늘날 시크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인정받고 있지만 본래는 힌두교에 있어서의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볼 수 있으며, 자이나교나 불교와 달리 이슬람교로부터 중요한 요소를 병합한 일종의 힌두-이슬람의 종합으로본다.
처음에는 평화적 성격을 띠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핍박에 저항하기 위한 전사조직이 만들어졌는데 이때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터번을 두르며, 짧은 바지, 손목에 철제팔찌를 끼고, 단검을 차는 시크교도의 특징이 만들어졌다.
시크교는 그 교리가 매우 평화적임에도 불구하고 다수집단인 힌두교와 정치권력인 이슬람교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군사적촵호전적 태도를 몸에 지니게 되었다. 1947년 인도 분할 당시 시크교도 역시 자신들의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으나 그들의 수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비해 형편없이 적었고 분파주의와 지도력의 결핍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시크교는 역사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무슬림이 만드는 국가인 파키스탄보다는 인도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루 나나끄의 평화주의적이고 범종교적인 교리가 지금에도 그리 변화된 것은 없다. 그러나 교리의 실제적인 운용은 상당히 호전적이고 적극적이다. 이 시크교가 지금까지 존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칼을 들었기 때문이고 칼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복수를 위한 칼보다는 영적인 무기가 더 낫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시크교도들이 인도를 위해 공헌하는 바는 전체 인구에 2%에 못미치는 그 비율에 비해 매우 크다. 즉 인도군의 발전에 시크교도들이 미친 영향은 매우 크고 현재에도 인도의 군부 내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시크군단도 시크교도만으로 이루어진 부대이다. 또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주인 뻔잡 주에는 주민의 60%이상이 시크교도들이고 이 주의 쌀 생산고는 에이커 당 일본, 남한을 제외하고는 제 1위이다. 또 델리를 포함한 서북인도 지역의 상권의 상당부분을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시크교도들은 자신들이 사회에 대한 공헌도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불만이 노골화된 것은 1981년 3월 찬디가르에서 있었던 54차 시크 교육자 회의에서 시크교도만의 독립 국가인 칼리스탄(Khalistan)을 세우자는 결의가 나왔을 때부터 였었다. 사실 시크교도들의 분리주의 운동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다. 이미 1947년 독립 당시 시크교도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원했었지만 실패했었고 그 후에도 간간이 분리주의의 외침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1981년의 결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즉, 분리의 첫 번 째 작업으로 국제연합에 회원국으로 인정 받아야한다는 결의까지 나왔었다.

이때부터 인도정부와 시크교도사이의 대립과 협상은 계속되었고 1984년에는 극단적인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의 성지인 황금사원을 점령하고 독립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게 되었다. 인도정부는 같은 해 6월 5일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농성자들의 대부분을 살해하고 황금사원을 파괴하였다. 이 사건은 시크교도들의 무장저항을 불러왔고 11월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도인 자신의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이후 10 여년 간 뻔잡 지역은 시크교도 무장단체와 인도정부군 사이의 전장으로 변화하였고 지금도 일부 단체들은 테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자이나교는 브라만교에 반기를 든 최초의 종교운동이었다.
기원전 599 - 527년 사이가 생존연대로 추정되는 마하비라(Mahavira)에 의해 창시된 이 종교의 명칭은 진(Jin)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를 창시자라 하지 않고 24대 교주라고 주장한다.
즉, 마하비라는 이전부터 존속되어온 미르그란타(Mirgrantha)의 24대 후계자로서 교리상의 결점들을 보완하여 자이나교로 부흥시켰다는 것이다.

마하비라의 생애는 그가 왕자였다는 설 또는 바이샤계급 출신이었다는 등의 설이 있지만 어느 쪽이 확실한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마가다(Maghada)왕국 출신이라는 것과 30살에 출가하여 그 이후 30년 동안 포교활동을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하비라는 창조주를 부정했다. 이 세계의 무한한 변화는 각 사물이 가진 본성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신의 의지 또는 신성한 간섭에 의해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주는 그 자체가 무한한 영속성을 가지고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 우주는 진보와 퇴보라는 두 가지의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고 하나의 진보기(Utsarpini)와 하나의 퇴보기(Avasarpini)는 하나의 시대를 구성한다. 그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각 시대는 24명의 주요한 종교의 창시자(Tirthankara)을 가지고, 12명의 우주적인 제왕, 그리고 63명의 위대한 인물들을 갖는다. 마하비라는 앞으로 40,000년 이상 계속될 이 퇴보의 시기에 나타난 마지막 창시자인 것이다.
자이나교자이나교에서는 모든 사물이 지바(Jiva)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나무 등은 2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동물들은 3개 이상의 영혼을 가졌다고 본다. 따라서 교도들은 1개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되어지는 물, 우유, 과일, 콩, 쌀, 채소 등만을 먹을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자이나교도들도 힌두교도들처럼 재생의 원칙을 신봉하고 다시 이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이나교의 교리에서도 까르마(Karma)라는 개념이 나오지만 이 해석에 있어서 힌두이즘이나 불교와는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즉, 자이나교에서는 까르마를 영혼 다시 말해, 정신을 물질적인 불결한 것에 집착하게 하여 부정한 것으로 만드는 해로운 힘으로 본다. 따라서 인생의 목적은 개인적인 수행을 통해 까르마를 극복하여 영겁의 윤회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이 초월을 위해서는 단식, 절식, 육체적 고행 그와 동시에 높은 윤리적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 발을 깨끗하게 하고 결혼의 완전한 정절, 쾌락을 피하는 일, 출가한 것과 동일하게 생활하는 일, 수도자를 물질적으로 원조하는 것, 인생의 마지막에는 사유물을 포기하는 일 등이다. 가장 좋은 길은 출가하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윤리적 특성은 극단적인 불살생이다. 즉, 생명에 대한 절대적 존경이다. 모든 생물, 하찮은 벌레에서 인간까지를 ??살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면, 자이나교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을 살상하지 않기 위해 입에 마스크를 쓰고 또 모르는 사이에 곤충을 삼켜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물을 마시지 않는다. 어떤 자리에 앉기 전에는 작은 빗자루나 총채를 자리를 쓸고 농사지을 때도 쟁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무의식적인 살생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자이나교에서는 그 신도에게 단식을 통한 자살은 장려하고 있다.

인도에서의 자이나교
자이나교의 철학적 사유의 특성은 부정주의(不定主義)이다. 그들은 무엇을 진리라고 하거나 오류라고 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현실에 대한 가장 적절한 태도는 절대적인 부정 혹은 모든 종류의 긍정을 피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판단은 항상 상대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기원 후 1세기경에 백의파(白衣派: Svetambaras)와 공의파(空衣派: Digambaras)로 분리되었다. 전자는 보다 현실적인 관용주의이고 후자는 엄격주의를 표방한다. 다시 말해, 백의파는 다른 종파와의 사회적 공존을 위해 옷을 입는 등의 현실타협적 자세를 취한 것이고 공의파는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극단주의와 편의주의가 기묘하게 융합된 종교이고 인도 역사상, 그 세력이 가장 강대했을 때마저도 인도의 지배종교가 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자이나교가 힌두사상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즉, 부정주의는 인도 철학의 편의주의 내지는 회의주의적인 논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현대에 와서는 그 유명한 비폭력사상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마하뜨마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자이나교의 영향을 받은 힌두교신자였기 때문에 자신도 자이나교의 불살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사실상 간디가 비폭력사상을 공표했을 당시 많은 인도인들까지도 간디를 자이나교도로 오인하기도 했었다. 또 간디가 대영투쟁에서 자주 사용했었던 ??죽음에 이르는 단식(the fast-unto-death)'도 자이나교에서 착안한 것이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저항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인도에는 약 200만명의 자이나교도가 있으며 주로 인도의 서해안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원래 자이나교에서는 카스트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회적 환경의 영향으로 지금은 신자들 사이에 매우 느슨한 형태의 계급이 존재하고 있다. 현재 인도 내에서 자이나교도들은 무역상, 은행가 등 상업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이 원인은 자이나교도들의 일반적인 정직성 그리고 편의주의적 사고에 따른 ??상업에 의한 치부를 통한 사회봉사??라는 정신이 원동력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또 힌두교 신자들의 입장에서도 자이나교도들은 역사상 힌두교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위협세력으로 등장한 일이 없었으므로 자이나교도들의 상업적 성공에 저항의식을 느끼지 않고 있다.

 

 

 

 

<출처 : 인도네시아사랑>

출처 : 여행가이드 [국내여행,유럽여행,일본여행,중국여행,동남아여행]
글쓴이 : [여가]운영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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