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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의 성장은 인도사회의 성장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왔었다. 힌두교의 신자를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힌두(Hindu)라는 단어는 페르시아인들이 인더스(Indus)강 유역에 거주하는 아리아인(Aryans)들을 신두(Sindhu)라고 부른데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의 페르시아인들은 인더스강을 신두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고대 페르시아어에서는 'S' 를 'H'로 읽었기 때문이다. 'India'라는 명칭은 그리스인들이 'H'의 발음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Sindhu' 또는 'Hindu'에서 'H'를 제거하여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힌두라는 단어가 의미했던 것은 인더스강 유역의 아리아인들이었고 그들의 종교가 힌두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리아인들의 인도아대륙에서의 세력확장이 이루어짐에 의해서 힌두화(Hinduisation) 작업과 아리아문화와 비아리아문화의 결합이 병행하면서 진행되었다. 이 결과, 힌두라는 단어는 본래의 지역적, 인종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힌두교의 신자와 그것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권의 구성요소들을 총칭하는 의미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도사회에서 힌두라는 명칭은 좋은 의미에서든지 나쁜 의미에서든지 한 개인의 소속과 정체를 나타내는 상징이 된다. 힌두들은 매일의 생활 속에서 반복적으로 종교를 느끼고 종교의 굴레에서 맴돌며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힌두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힌두교의 신자로서의 자격뿐만 아니라 특정카스트(Caste)의 구성원으로서의 자격까지 획득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 공동체내 의 동질성과 결속력에 개인은 쉽게 동화할 수 있는 것이다. 힌두교는 바라문교에서 많은 신관,신화를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적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 ; 權化)이라고 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시교적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푸라나≫문헌 등에 나타나는 트리무르티(삼신일체)는 그 좋은 예이다. 이는 별도의 기원에 속하는 우주창조신 브라흐마, 유지신,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 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것이다.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 대종파를 형성하였다. 비슈누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 상층부에 세력을 갖고 있다. 비슈느는 인간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 출현하는 것으로 신앙되며, 비슈누의 10권화(權化) 중의 라마와 크리슈나는 2대 서사시(敍事詩)의 영웅이며,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라마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 비슈뉴파에 대하여 시바파는 사회의 하층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주술,열광적인 제의에 특색이 있다. 또한 인도에서는 예부터 신비(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흐마에게는 시라스바티, 비슈누에게는 라슈미가 배우여신으로 간주되며, 시바신의 배우여신으로는 두르가, 파르바티, 우마, 칼리 등 많은 이명이 있다. 이들 여신을 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 힌두교의 특징적인 사상은 윤회와 업, 해탈의 길, 도덕적 행위의 중시, 경건한 신앙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윤회,업의 사상은 민간신앙을 채용한 것으로 이미 고(古)우파니샤드에 보이며, ≪마하바라타≫에 이르러 특히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인도인의 도덕관념을 키웠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을 가져와 사회의 발전을 저해하는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인간의 사후운명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이 있었다. 신들도 업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다, 그러나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출가 유행(遊行)의 생활과 고행 또는 요가가 교설되었다.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이며, 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힌두교 사회에 있어 도덕관념의 기초는 바라문교의 법전(法典)에 규정되어 있는 달바(법,의무)이다. 4성제도와 4생활기(學生,家住,林住,遊行期)가 중심으로서,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었다. 최고신에 대한 박티(信愛)와 그 은총의 능력,성별,직업,계급, 여하에 관계없이 일반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다. 또한 힌두교는 이슬람교 및 그리스도교와 접촉하여 여러 가지 영향을 받아, 근세에는 브라흐마 시마즈, 아리아 사마즈 등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비베카난다(1863~1902)에 의한 라마크리슈나 교단은 모든 종교가 하나로 귀일한다고 하여 보편주의적 종교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많은 신자를 가지고 있다. 흰두교의 최고의 신은 우주를 유지하는 신의 명칭. 브라마, 시바와 함께 삼위일체를 이룬다. 비시뉴는 유지, 브라흐마는 창조, 시바는 파괴와 창조로써 이 삼신이 우주를 지탱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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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마가 전통 힌두사회 조직의 근간이 되었던 것처럼 담마는 불교 사회의 뿌리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때때로 기존의 사회질서의 전면적인 부정을 나타내기도 한다. 보다 엄밀히 말한다면 부처는 타락한 생활방식을 버리고 원시시대의 순수한 생활방식을 회복하려고 시도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브라만이나 불가촉천민이 출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는 외양적인 권위, 그것이 초인적인 창조자이건 베다의 형태를 취했건 간에, 에 의문을 나타냈고 기계적인 의식주의와 극단적인 수행방식에 반대했던 것이다. 부처는 방종한 기쁨이나 극단적인 고통을 추구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치스러운 것이고 헛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마디야마 쁘라띠빠다(Madhyama Pratipada)을 창안하여 속인은 물론 승려들의 사회생활의 기본으로 삼았다. 모든 악은 무지에서 나온다. 진실한 지식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기초가 된다. 이것을 위해 2500년 전 부처는 ??정의의 바퀴(Dhamma Cakka)',를 설정했고 영원한 길(Akaliko)을 설명했다. 진정한 지식은 다음 네 가지의 ??숭고한 진리??에 기반한다. 첫 번째 진리는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두 번 째는 고통은 존재를 위한 욕망, 즉 형이상학적인 진리와 경험적인 진리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실패함에 의해 발생한다. 전자는 절대자에 대한 참여를 의미하고 후자는 단순히 가능성에 관계가 있을 뿐이다. 세 번째 진리는 욕망을 없애는 니바나(Nibbana)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네 번째 진리는 해방과 평정은 팔정도(八正道)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얻어진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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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문화적, 사회적으로 서로 차이가 있지만 인도의 무슬림집단은 꾸란에서 알라가 규정한 '따라야만 하는 길(way to be followed)'라는 공통적인 이상을 가지고 있다. 샤리아(Sharia: holy law)가 바로 그 '길(way)'인 것이다. 샤리아는 신에 의해서 모하메드에게 계시되었고 그는 그의 신도들에게 인간적인 실례가 되었다. 그러므로 샤리아는 보통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상세한 안내일 뿐만 아니라 이슬람교의 교의와 종교관습의 집합인 것이다. 샤리아를 따르는 것은 이상적인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 일부 극단적인 울라마(Ulama) 들은 샤리아에 대한 그들의 해석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과 지지를 요구한다. 한편 수피즘의 또 다른 극단주의자들은 개인이 신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독자적인 방식(Tariqa)을 개발해왔고 이 방식을 따르는 추종자(Murid)들은 그 자신의 영적 지도자(Pir)의 지도를 받는다. 비록 일부 수피 신자들이 위험스러울 정도로 샤리아와 따리까(Tariqa)의 차이를 최소화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따리까가 샤리아의 대체물이 될 수는 없다. 이 모든 것들은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로부터 도래한 것이지만, 중세인도의 평등주의운동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앞으로 설명할 나나끄(Nanak)가 만든 시크교(Sikhsm)도 수피즘의 영향을 받았다. 인도의 무슬림들은 순수한 이슬람적 관습들과 힌두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받은 많은 관습들과 관례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농촌에 거주하는 무슬림 직업집단들은 힌두카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세습직업과 동족결혼을 지키고 있다. 더 눈에 띄는 것은 이슬람교의 보편적인 평등정신과는 달리 세습적 지위 또는 계급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싸이드(Sayyid)와 앞에서 언급했던 아쉬라프 등은 다른 무슬림에 비해 상위계급을 형성하고 있다. 무슬림의 탄생의식과 결혼의식은, 특히 까쉬미르에서는, 힌두의 영향을 명백히 받고 있다. 문화적 통합은 건축, 음악 그리고 문학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우르두의 출현은 무슬림-힌두접촉의 결정적 증거가 된다. 이슬람교의 본질과 그 의미는 율법에 대한 복종과 알라신의 의지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아라비아어로 신을 의미하는 알라는 전능한 이, 모든 것을 아는 이, 자비로운 이, 만물이 살고 있는 우주를 창조한 이를 말한다. 그는 또한 최후의 심판을 주관하며 이때 모든 무덤들이 열리며,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그의 영원한 권좌앞에 모습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들이 알라에게 잘 복종했느냐, 아니냐에 따라 혹은 지상에서 참된 무슬림으로으로 살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즉 사탄의 유혹에 빠져 타락한 이교도로 살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된다고 한다. 전능한 신의 참된 말씀은 7세기에 대천사 가브리엘의 암송(Qur`an)으로 최후의 예언자 마호메트(570-632)에게 계시되었다. 이 신성한 신의 메시지는 모든 무슬림의 숭배를 받고 있는 신의 경전에 담겨져 있다. 이슬람교도가 되는 길은 먼저 진정한 신명을 가지고서 아라비아어로 세상에는 오직 한 신 알라만이 있으며, 마호메트는 신의 예언자이다라는 맹세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하고 헌신적인 무슬림으로서 메카(Makka-622년에 마호메트가 메디나에서 탈출하여 이슬람교를 창시한 곳)을 향해 하루에 다섯 차례 기도를 올려야 한다. 게다가 금요일에는 모스크(Mosque-이슬람교 사원, Masjid-인도의 모스크이름)정원에서의 집회에 참석하여 낮기도를 올려야 한다. 이슬람교도는 독실하고 헌신적인 이들로 구성된 움마(Umma-민주적 공동체)에 자신의 벌어들이는 수입의 일부를 기부하고, 알라의 사랑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며, 음력 라마단(Ramadan)달 아홉번째 날에는 동틀녘부터 해질 무렵까지 단식을 해야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실한 무슬림으로서 일생에 한번은 마호메트가 태어나고 묻힌 곳인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이슬람교는 갖가지 율법과 전통들이 있는데 이것은 이슬람교가 계율과 전통, 특히 마호메트의 계율과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구축된 신앙이기 때문이다. 모범적인 무슬림은 절대로 돼지고기나 술을 마시지 않지만, 결혼생활에서는 아내를 네명씩이나 거느릴 수가 있다. 무슬림에게는 "다르 울 이슬람"이라고 하는 이슬람교 통치가 이루어지는 땅에서 사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아니면 그들은 이른바 "다르 울 하브"라는 전쟁중인 땅에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주된 의무는 필요한 경우, 이교도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지하드(성전)"에 종사하는 것이다. 무슬림은 이슬람교와 알라신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이 천국에 이르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슬람교에서는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전능하며 불가사의한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의 형상으로 묘사되지를 않는다. 따라서 그들의 성전에 가보면 기하학적인 디자인이나 글씨를 제외하고는 특별히 다른 장식이랄 것이 없다. 단지 사원의 높은 정문에 놓여있는 대리석위에 아라비아어로 코란의 문장을 희귀한 보석이나 금 또는 은으로 새겨놓은 것이 눈에 띄곤하는 정도이며 힌두사원에 비하면 단조롭고 단순한 대칭구조와 디자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슬람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탄생하여 중동지방과 남아시아로 번졌으며 인도에 들어온 무슬림은 10세기 초반에 영토침입과 함께 들어온것으로 이후에 무굴제국의 번성기 동안에 이르기까지 많은수의 힌두가 무슬림으로 강제로 혹은 의도적으로 개종한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맨처음부터 인도를 정복하고 그 자리에 머문 순수한 이방인 계열의 아라비아인, 페르시아인, 아프카니스탄인, 터키 인과 몽골인인 무슬림교도들의 수는 인구 전체의 1%에서 2%수준에 불과하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많은 힌두의 후대들이 힌두에서 무슬림으로 개종을 한 경우가 많다고 봐야 하며 인도에서의 무슬림의 역사는 1천년을 보면 맞을 것이다. 지금은 인도 인구의 15%정도가 무슬림으로서 힌두인들과 함께 인도에서 등을 대고 살아가고 있으며 서로의 종교를 존중받기를 바라는 만큼 존중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나 힌두인들의 무슬림에 대한 이해의 폭보다는 무슬림의 힌두인들에 대한 이해의 폭은 현저히 떨어지지 않는가 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것은 어쩔수 없는 그들의 신관에서 기원하고 있다. 힌두교와 비교해서 이슬람교의 신앙은 많은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신에 대한 개념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슬람은 유일신을 따르고 믿고 있지만 힌두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신을 보유하고 있다. 브라민이나 소에 이르기까지 신성한 것으로 취급하는 힌두사상에서 그들의 현존하는 신들의 수가 3억 3천만을 육박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또한 사원의 모습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는데 힌두교의 사원은 문과 벽 혹은 여러장소에 나체로 조각되어 있는 남자신과 관능적인 여신들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이슬람사원은 그러한 것들을 볼수가 없으며 우상시되는 어떠한 내용물도 사원안에 둘수가 없으며 관습적으로 관능적인 모습의 신을 찾을 수가 없다. 이것은 신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자신을 사랑하는 많은 팬을 두고 있는 것이지만 힌두교의 사상에서 보면 엄청나게 편협하고 고집스러우며 오히려 신을 모르는 존재들의 자기만족이라고 볼수도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1천년이상을 함께 공존해 오고 있는 힌두교와 무슬림의 종교세력들은 지금도 조그마한 시골 마을길에서 함께 등을 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인도의 실정이며 만디르와 마스지드가 함께 바라보고 서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무슬림과 힌두간의 강한 갈등이 없지않아 왔던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어떻게 잘 풀어나가는 것이 현 정치권력의 역할이기도 하다. 영국으로부터 독립시에 모하마드 알리 지나(1876-1948 파키스탄 자치령의 초대 총독) 에 의해 힌두의 나라에서 독립을 하느니 차라리 영국의 통치를 더받겠다고 했던 인물의 말처럼 나라보다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종교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무슬림들에게는 힌두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렇게 종교분쟁으로 인하여 분리독립을 이루고 나서도 인도땅에는 여전히 많은 수의 무슬림이 살고 있으며 이들과의 마찰로 인한 분쟁과 사고, 폭동이 한두번에 그치지 않고 있는 것도 인도의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지나에 의해서 파키스탄으로 종교분리독립을 한 무슬림들이 전부 그 당시에 파키스탄으로 혹은 방글라데시로 넘어갔더라면 문제가 없을 것인데 넘어가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힌두의 땅 인도는 여전히 가시를 목에 걸고 살아갈수 밖에 없는 현실에 처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배운 식자들의 과격한 언사는 그들을 향하여 빗발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나 그들을 등에 업고 정치권력을 얻으려는 정치 불나방 같은 존재들이 자신의 나라의 정체성보다는 권력에 눈이 멀어 종교적 갈등을 오히려 조장하는 경우가 없지 않음도 뼈아픈 현실이며 이것은 민중을 향하기 보다는 권력을 향하고 있는 이기심으로 가득찬 정치꾼들이 인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보면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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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힌두교의 신애(바크티)신앙과 이슬람교의 신비사상을 융합한 것으로 인도 서북부의 펀자브 지방에 퍼졌다. 16세기경 교조 나나크는 펀자브의 라호르 주변에서 태어나 인도를 여행하면서 많은 성자들을 만났는데, 특히 바크티의 성자 카비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나나크가 죽은 후에 대대로 구루밑에서 교단조직이 정비되어 오다가 제5대 구루인 아르준시대에 교전이 성립되고 암리차르에 본산이 건설되는 등 일단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교단으로서 그 세력이 확대해 감에 따라 무굴제국으로부터 박해를 받아 아르준은 1606년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무굴제국과의 항쟁을 통하여 교단은 전투집단화하였는데, 무굴제국 쇠퇴 후에는 영국과 끝까지 싸웠다. 이 전쟁을 시크전쟁이라고 한다. 오늘날 시크교는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 인정받고 있지만 본래는 힌두교에 있어서의 하나의 개혁운동으로 볼 수 있으며, 자이나교나 불교와 달리 이슬람교로부터 중요한 요소를 병합한 일종의 힌두-이슬람의 종합으로본다. 처음에는 평화적 성격을 띠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핍박에 저항하기 위한 전사조직이 만들어졌는데 이때 머리카락과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터번을 두르며, 짧은 바지, 손목에 철제팔찌를 끼고, 단검을 차는 시크교도의 특징이 만들어졌다. 시크교는 그 교리가 매우 평화적임에도 불구하고 다수집단인 힌두교와 정치권력인 이슬람교사이에서 생존을 위해 군사적촵호전적 태도를 몸에 지니게 되었다. 1947년 인도 분할 당시 시크교도 역시 자신들의 국가를 만들기를 원했으나 그들의 수는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비해 형편없이 적었고 분파주의와 지도력의 결핍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다. 시크교는 역사적으로 적대적이었던 무슬림이 만드는 국가인 파키스탄보다는 인도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루 나나끄의 평화주의적이고 범종교적인 교리가 지금에도 그리 변화된 것은 없다. 그러나 교리의 실제적인 운용은 상당히 호전적이고 적극적이다. 이 시크교가 지금까지 존재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들이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칼을 들었기 때문이고 칼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복수를 위한 칼보다는 영적인 무기가 더 낫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다. 현재 시크교도들이 인도를 위해 공헌하는 바는 전체 인구에 2%에 못미치는 그 비율에 비해 매우 크다. 즉 인도군의 발전에 시크교도들이 미친 영향은 매우 크고 현재에도 인도의 군부 내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시크군단도 시크교도만으로 이루어진 부대이다. 또 인도에서 가장 부유한 주인 뻔잡 주에는 주민의 60%이상이 시크교도들이고 이 주의 쌀 생산고는 에이커 당 일본, 남한을 제외하고는 제 1위이다. 또 델리를 포함한 서북인도 지역의 상권의 상당부분을 이들이 장악하고 있다. 그러나 시크교도들은 자신들이 사회에 대한 공헌도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불만이 노골화된 것은 1981년 3월 찬디가르에서 있었던 54차 시크 교육자 회의에서 시크교도만의 독립 국가인 칼리스탄(Khalistan)을 세우자는 결의가 나왔을 때부터 였었다. 사실 시크교도들의 분리주의 운동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었다. 이미 1947년 독립 당시 시크교도들은 자신들의 국가를 원했었지만 실패했었고 그 후에도 간간이 분리주의의 외침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1981년의 결의는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즉, 분리의 첫 번 째 작업으로 국제연합에 회원국으로 인정 받아야한다는 결의까지 나왔었다. 이때부터 인도정부와 시크교도사이의 대립과 협상은 계속되었고 1984년에는 극단적인 시크교도들이 자신들의 성지인 황금사원을 점령하고 독립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이게 되었다. 인도정부는 같은 해 6월 5일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농성자들의 대부분을 살해하고 황금사원을 파괴하였다. 이 사건은 시크교도들의 무장저항을 불러왔고 11월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도인 자신의 경호원들에게 암살당하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이 이후 10 여년 간 뻔잡 지역은 시크교도 무장단체와 인도정부군 사이의 전장으로 변화하였고 지금도 일부 단체들은 테러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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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599 - 527년 사이가 생존연대로 추정되는 마하비라(Mahavira)에 의해 창시된 이 종교의 명칭은 진(Jin)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를 창시자라 하지 않고 24대 교주라고 주장한다. 즉, 마하비라는 이전부터 존속되어온 미르그란타(Mirgrantha)의 24대 후계자로서 교리상의 결점들을 보완하여 자이나교로 부흥시켰다는 것이다. 마하비라의 생애는 그가 왕자였다는 설 또는 바이샤계급 출신이었다는 등의 설이 있지만 어느 쪽이 확실한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마가다(Maghada)왕국 출신이라는 것과 30살에 출가하여 그 이후 30년 동안 포교활동을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마하비라는 창조주를 부정했다. 이 세계의 무한한 변화는 각 사물이 가진 본성의 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신의 의지 또는 신성한 간섭에 의해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주는 그 자체가 무한한 영속성을 가지고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 우주는 진보와 퇴보라는 두 가지의 주기를 가지고 움직이고 하나의 진보기(Utsarpini)와 하나의 퇴보기(Avasarpini)는 하나의 시대를 구성한다. 그 과정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각 시대는 24명의 주요한 종교의 창시자(Tirthankara)을 가지고, 12명의 우주적인 제왕, 그리고 63명의 위대한 인물들을 갖는다. 마하비라는 앞으로 40,000년 이상 계속될 이 퇴보의 시기에 나타난 마지막 창시자인 것이다. 자이나교자이나교에서는 모든 사물이 지바(Jiva)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나무 등은 2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동물들은 3개 이상의 영혼을 가졌다고 본다. 따라서 교도들은 1개의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되어지는 물, 우유, 과일, 콩, 쌀, 채소 등만을 먹을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자이나교도들도 힌두교도들처럼 재생의 원칙을 신봉하고 다시 이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자이나교의 교리에서도 까르마(Karma)라는 개념이 나오지만 이 해석에 있어서 힌두이즘이나 불교와는 다른 관점을 취하고 있다. 즉, 자이나교에서는 까르마를 영혼 다시 말해, 정신을 물질적인 불결한 것에 집착하게 하여 부정한 것으로 만드는 해로운 힘으로 본다. 따라서 인생의 목적은 개인적인 수행을 통해 까르마를 극복하여 영겁의 윤회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이 초월을 위해서는 단식, 절식, 육체적 고행 그와 동시에 높은 윤리적 규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과 발을 깨끗하게 하고 결혼의 완전한 정절, 쾌락을 피하는 일, 출가한 것과 동일하게 생활하는 일, 수도자를 물질적으로 원조하는 것, 인생의 마지막에는 사유물을 포기하는 일 등이다. 가장 좋은 길은 출가하는 것이다. 자이나교의 윤리적 특성은 극단적인 불살생이다. 즉, 생명에 대한 절대적 존경이다. 모든 생물, 하찮은 벌레에서 인간까지를 ??살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예를 들면, 자이나교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을 살상하지 않기 위해 입에 마스크를 쓰고 또 모르는 사이에 곤충을 삼켜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물을 마시지 않는다. 어떤 자리에 앉기 전에는 작은 빗자루나 총채를 자리를 쓸고 농사지을 때도 쟁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도 무의식적인 살생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자이나교에서는 그 신도에게 단식을 통한 자살은 장려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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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여행가이드 [국내여행,유럽여행,일본여행,중국여행,동남아여행]
글쓴이 : [여가]운영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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