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도 ( 印度, India, 바라트 )
공식 명칭 : 인도 공화국(Republic of India)
인구 : 1,119,538,000
면적 : 3,166,414㎢
수도 : 뉴델리
정체·의회 형태 : 연방 공화제, 다당제, 양원제
국가 원수/정부 수반 : 대통령/총리
공식 언어 : 힌두어·영어
독립일 : 1947. 8. 15
화폐 단위 : 인도 루피(Indian rupee/Re, 복수형 Rs)
india gate
역 사
A. 선사 시대
초기 선사 시대
이 시기의 공동체의 삶은 주로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인더스 문명은 처음에는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었다.
인더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정연한 도시 계획에 있다.
모헨조다로의 북서쪽 12km 지점에 위치한 하라파 지역 역시
특히 하라파의 유적 가운데 장례와 죽음에 관한 종교적 사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두 지역 외에도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로는 칼리방가·로탈 등이 있다.
그 멸망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이 인더스 문명이 그후의 인도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B. 인도 문명의 전개
아리아인의 침입과 카스트의 정착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로 대표되던 인더스 강 유역의 문명이 몰락하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도시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 문화의 형성 시기를 전후한 인도 역사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아리아인의 민족 이동과 인도 정착이다.
침략자 아리아인들은 원주민과의 전쟁에서 비교적 쉽게 승리했다.
그 우월 의식의 사회화가 카스트 제도이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악습이 되고 있다.
브라만은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으로서, 신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담당하던 사제 그룹이다.
그 신을 찬양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법식을 집대성한 성전이 바로 〈리그베다 Rigveda〉이다.
아리아인들이 바로 오늘날 유럽 인종의 조상이다.
이때 번성한 나라들은 주로 갠지스 강의 동부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코살라 등이 알려져 있다.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BC 7세기를 전후한 인도 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도시 국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상호간의 정복 전쟁을 야기시켰다.
이런 정복 전쟁의 와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마가다 왕국의 왕 빔비사라(BC 582~554 재위)이다.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침입은 인도의 정치·종교·문화·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민족 정신의 고양에 힘입어 인도를 통일하게 된 왕이 마우리아 제국의 찬드라 굽타(BC 327~297경 재위)이다.
마우리아 왕조는 이 찬드라굽타로부터 시작된다.
마우리아 왕조는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제3대 아소카왕(BC 273~232 재위) 때 번영의 절정기를 맞는다.
각각의 행정 부처를 담당하는 다수의 관리가 임명·배치되었으며,
지방 관리를 감독·통제하는 순회 감사관 제도도 시행되었다.
잘 짜진 행정 조직과 잘 정비된 도로망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효과적으로 관리·통제할 수 있었다.
특히 아소카 왕은 불교의 보호와 전파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번성하던 마우리아 제국은 아소카 왕의 사후에는 분열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지방마다 서로 다른 화폐와 언어를 사용함으로서
사회적·경제적으로 통일 제국의 기능을 원활하게 발휘하지 못했던 점 등을
![](http://file.dic.daum.net/dic100/brit/files/thumbs/o/oindia0004m4.gif)
1. 굽타왕조의 성립
3세기 초 쿠샨 왕조가 쇠퇴하고, 데칸 지방의 사타바하나 왕국도 분열되었다.
또한 갠지스 강 유역의 동부 지역인 마가다 역사에 대해서는 약 300년에 걸쳐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 후 마가다에 관한 확실한 역사는 굽타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의 출현으로 비롯된다.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법 제도, 경제, 사회, 문화 등을 모두 포함한 통일 국가 체제를 처음으로 수립한 북부 인도는 당시,
인도 세계에 있어서의 선진 지역이었다.
그리하여 마우리아 왕조의 뛰어난 지배 체제가 사방으로 확대되자,
이제까지 그들 사회의 전통에 대하여 뚜렷한 자각을 갖지 못했던 후진 지역이
제각기 고유 문화의 전통을 의식하고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마우리아 왕조의 지배 체제가 거의 미치지 않았던 남인도에서 조차 4세기에 이르자
팔라바 왕조가 출현하여 특색 있는 타밀 문화를 이룩했던 사실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마우리아 왕조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를 시조로 발족하였던 인도의 북동부 마가다 지역에,
같은 지역에서 그 이름도 찬드라굽타 1세가 320년경에 굽타 왕조를 세운 것이다.
마가다 지방에서 건국한 굽타 왕국(320~520)은 점차 북서 인도에 세력을 펴더니
사무드라굽타를 거쳐 찬드라굽타 2세 때에는 벵갈만에서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북인도 전역을 장악하였다.
특히 찬드라굽타 2세는 열렬한 예술 보호자로서
인도 최대의 평화 시대와 함께 인도 최대의 문화적 황금기를 가져다 주었다.
굽타 시대 역사의 근거가 되는 것은
4세기에 들어와서 나타나기 시작한 명문(銘文)으로서
당시, 인도사의 면모를 비교적 확실히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명문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것은
사무드라굽타의 알라하바드(Allahabad)명문이다.
이는 아쇼카 왕이 조칙을 새긴 석주 상단에 조각된 것으로
사무드라굽타의 궁정 시인이었던 하리세나(Harisena)가
이 위대한 왕의 정복 전쟁의 사적을 자세히 기록한 서사시이다.
‘최대의 정복은 신심의 법의 정복이다’라고 믿었던
600년 전의 아쇼카 대왕이 새겨놓은 평이한 프라크리트어의 칙령과 나란히,
정복왕 사무드라굽타가 세련된 고전 산스크리트어로
처참한 전쟁과 공략의 내용을 새겨 놓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명문에 의하면 사무드라굽타의 부왕 찬드라굽타 1세 때 처음으로
대왕 중의 왕(Maharajatiraja)이라는 인도에서의 최고의 군주권을 나타내는 칭호를 썼다.
그의 조부나 그 위로는 모두 대왕(Maharaja)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을 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파탈리푸트라의 주변 지역을 지배하던 조그마한 왕국이
차츰 이웃 나라를 정복하여 왕권을 확대해 나간 경위를 이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찬드라굽타가 ‘왕중의 왕’이란 칭호를 쓴 것은 그 영토를 무력으로 확대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불타 생존시 베이샬리를 통치한 명문 귀족
릿차비(Lichchhavi)가문 출신 쿠마라데비(Kumaradevi)와 결혼한 것은
이웃 나라 베이샬리를 정복한 뒤의 강화 조건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굽타가에 있어서는 이 혼인으로 얻은 물질적인 이익보다도
릿차비라는 이름있는 가문과 결합함으로서, 왕가로서 존경받는 자격을 얻었다는 데에
의미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그리하여 굽타 왕조의 기원이 찬드라굽타가 즉위한 320년부터 시작된다.
2. 사무드라 굽타
찬드라굽타 1세의 뒤를 이어 330년에 즉위한 사무드라굽타는
역대의 인도의 왕 중에서 가장 유능하고 다양한 재능을 갖춘 왕 가운데 한 사람이다.
특히 군사적인 정복 전쟁으로 굽타 왕조의 기초를 확립한 영주이다.
알라하바드의 명문에는
부왕이 그를 여러 아들 중에서 제일 유능하게 보고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생생한 문체로 표현되어 있다.
알라하바드의 명문을 보면 사무드라굽타 왕이 벌인 정복 전쟁의 모습을 매우 자세히 알 수 있다.
사무드라굽타는 먼저 갠지스 강 유역의 여러 나라를 무력으로 복종시킨 뒤 그 영토를 병합했다.
그리고 힌두스탄 평원은 평정에서 아삼에 이르는 지역을, 또한 서쪽으로는 말와와 펀잡을,
다시 북쪽으로는 네팔과 그 서쪽 지역을 전쟁을 통하지 않고 복속시켰다.
그는 다시 북부 인도와 격리되어 있는 데칸의 여러 나라를 향해 대원정을 단행하였다.
칼링가(지금;오릿사) 해안에 도달한 왕은 동해안을 따라 각국을 정복하면서 넬로르까지 남하했으며,
크리슈나 강 기슭에서는 그의 전진을 막으려는
남인도의 팔라바왕이 거느린 데칸 여러 나라의 동맹군을 격파했다.
그리하여 이들 왕을 포로로 하였는데, 그 중의 유력한 자에게는
굽타 왕이 그들 위에 군림한다는 것을 인정시킨 뒤에 풀어주었던 것 같다.
굽타 왕조의 영토로 병합시키기에는 이들 나라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고,
더욱이 토착의 여러 왕들의 힘이 끈질기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데칸 지방의 주민은 북부 인도와는 종족이 달랐고,
사회 습관 등도 독자적인 발전을 하여 그 나름의 전통이 서 있었다.
따라서 왕조의 기초가 아직 확고하지 못한 굽타 왕조로서는 곤란을 무릅쓰면서까지
이들 지역을 직접 통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 지방의 왕들을 통치하여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 같다.
사무드라굽타는 이들 데칸의 여러 나라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탈취했다.
그 결과 사무드라굽타는 그의 위세를 크게 떨쳤다.
멀리 스리랑카(세일론) 왕으로부터도 그에게 사절단을 보내오고,
성지 부다가야(보드가야)에 불교사원의 건립을 허락한 사실이
7세기 중엽에 인도를 여행한 중국의 왕현책(王玄策)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남방 원정에서 개선하는 도중 사무드라굽타는 말을 희생으로 바쳐서 장엄한 아슈바메다 마(馬81)를 거행했다.
아슈바메다라고 하는 마제는 인도에서 최고의 주권을 선포하는 왕이 행하는 제식이다.
이 의식을 기념하여 브라만교도들에게 반포하기 위해 말의 표장(標章)을 새긴 금화를 주조했다.
한쪽 면에 희생의 말을 나타내고,
다른 면에는 이 의식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왕비를 나타냈는데
제명(題銘)에는 이 희생의 효과에 대해서 써 놓았다.
사무드라굽타가 주조한 금화에는 그의 정복 전쟁에 관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많은 금화를 만든 것은 그가 남방 원정 때 가져온 다량의 황금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금화의 형식, 중량은 모두 다 쿠샨 왕조의 디나르 금화를 그대로 본뜨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무드라굽타 당시의 굽타 왕조가
샤카족과 후기 쿠샨 왕조의 화폐가 일찍부터 유통하던 지역을 지배 하에 넣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사무드라굽타가 무력으로 복종시킨 지역은
북부 인도의 거의 전 지역과 데칸 고원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지만,
실제로 그 정치 권력이 미친 곳은 갠지스 강과 그 지류에 연해 있는 힌두스탄 평원에 국한되었다.
아쇼카 왕 때에 남 인도를 제외한 인도 북부의 대부분이 한 정권 밑에 귀속된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4세기 중엽 굽타 왕조의 영주 사무드라굽타가 군사적인 역량으로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였지만,
말와 이서의 서북 변경 지방, 서부 해안 지방 및 데칸의 여러 지역은
제각기 특색있는 문화 전통과 국가 체제를 발전시켜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우리아 왕조에 비하면 굽타 왕조의 정치 권력이 직접적으로 미친 범위에는 한계가 있어서
북부 인도의 직할령에 국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굽타 왕조의 정치력, 군사력에 한계가 있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치ㆍ문화의 전통을 달리하는 각 지역이 이미 이루어져 있어서
굽타 왕조의 통치에 대하여 끈질긴 반발을 나타냈음을 암시하고 있다.
거기에는 중세 인도에 보이는 두드러진 특색,
즉 지역마다 분립한 이질적인 국가가 서로 항쟁을 거듭하는 난세의 징조가 완연히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많은 왕후가 각지에 분립하여 300년에 걸쳐서 무질서와 혼란이 계속된 북부 인도를 무력으로 통일하고
멀리 데칸 오지에까지 원정해서 그 지상권을 인정시킨 사무드라굽타의 업적은 매우 큰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통일이 기반이 되어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도적인 정치 체제와 문화의 성격이
굽타 왕조 시대에 형성된 것이다.
사무드라굽타는 매우 교양이 높은 왕이었다.
뛰어난 군인인 동시에 시를 잘 지었고 악기 연주에도 능숙하였는데
비나(Vina)를 손에 잡고 의자에 기대인 왕의 좌상을 나타낸 금화가 발견되고 있다.
그는 이름 있는 학자와 성전에 관하여 논의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으며,
브라만교 신자이면서도 불교도를 우대하고 불교학자 바스반두(Vasubandhu, 世親)를 경애했다고 한다.
3. 찬드라굽타 2세와 후세의 왕
사무드라굽타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찬드라굽타 2세는
비크라마아디트야(Vikramaditya:武士?83?의 太陽)라는 존칭을 스스로 사용하였다.
그도 혼인이라는 평화적인 수단을 군사력과 아울러 활용함으로써
인도 세계에 굽타 왕조가 차지하는 대외적인 위치를 높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데칸 중부(사타바하나왕국)에 확고한 기반을 쌓은 바카타카(Vakataka) 왕가의
루드라세나(Rudrasena) 2세에게 자기 딸을 출가시키고 그와 동맹을 맺었다.
그리하여 확고하게 기반을 닦은 뒤 찬드라굽타 2세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말와에 원정했다.
그리고 서부 말와에서 카티야와르 반도에 걸친 지역을 정복하고 병합하였다.
이곳의 웃제인을 병합했다는 것은 굽타 왕조의 사회ㆍ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 지방은 일찍부터 상업의 중심지로서
이 곳의 여러 항구는 페르시아만을 거쳐 알렉산드리아와 무역을 활발히 해서 번영하였으므로,
이후 굽타 왕조는 해로를 통하여 서아시아의 영향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영향이 확실히 인정되는 것은 화폐이다.
찬드라굽타 2세의 화폐에 새겨진 상을 보면
왕의 말탄 모습과 함께 사자 사냥하는 모습을 나타낸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어느 정도 인도풍으로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서아시아에서 일찍부터 사용해온 제재와 의장(意匠)을 본뜬 것이다.
굽타 시대에 인도와 서아시아와의 문화 교섭을 나타내는 실례로서 흥미있는 것은
인도의 면직물, 그 중에서도 금실을 많이 섞어서 짠 비단의 직법(織法)이
페르시아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인도와의 평화로운 교섭에 의하여 이 특색 있는 직법이
굽타 왕조 때 페르시아에 전해져서 페르시아 비단을 낳게 하였다.
굽타제국이 서방을 향해 발전함에 따라 그 경제의 중심이 서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말와의 중심 도시인 웃제인이 번영하였다.
이 도시는 수도 파탈리푸트라와 서해안의 여러 항구를 연결하는
동서의 간선에 연한 교통ㆍ상업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굽타 왕조의 수도도 파탈리푸트라에서 서북쪽의 아요드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찬드라굽타 2세에 이어 그의 이들 쿠마라굽타(재위 414~455)가 즉위하였다.
넓은 지역에 걸쳐 사용된 그의 화폐를 통해서 또는
이 왕 때의 명문(銘文)이 발견된 소재지 등으로 그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쿠마라굽타 왕은 40여 년의 통치 기간 중에
부왕에게서 이어받은 제국을 잘 확보해 나가면서 문화 부흥에 힘썼으며,
특히 내치에 주력하여 국내 각지에 총독을 임명하여 통치하는 등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했다.
쿠마라굽타 다음에는 그의 아들 스칸다굽타(재위 455~467)가 즉위했다.
스칸다굽타 왕은 부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켜 굽타 왕가를 위협한
푸시야미트라(Pusyamitra)를 제압하고 국가를 다시 부흥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왕이 즉위한 것과 전후해서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해 온 유목 민족, 훈(흉노)족이
방비가 허술한 서북 국경을 넘어 인도에 침입해 왔다.
스칸다굽타는 이들을 맞아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훈족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이 지역에는 유능한 새 총독을 임명해서 통치하도록 하였다.
스칸다굽타가 죽자 굽타 왕조의 화려했던 시대도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5세기말의 부다굽타 시대까지는 아직 굽타 왕조의 권위가 북인도를 제압하고 있었던 것 같다.
스칸다굽타 뒤에도 여러 명의 후계자 이름이 화폐를 통하여 알려졌다.
훈족의 침입으로 타격을 받고, 이어 6세기 전반에 아쇼다르만(Yasodharman)의 세력에 위협을 받아
마가다를 영유하는 소왕국으로 전락한 굽타 왕조는 그 후 2세기 남짓 존속하다가
8세기 중엽에 이르러 벵갈에서 일어난 팔라 왕조에게 멸망되었다.
4. 굽타 왕조의 통치 제도
굽타 왕조는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 제도를 제정하였다.
특히 굽타 왕조 시대에 이르면서 왕정 체제가 확립되었고,
왕위는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세습적인 형태를 취하였다.
하지만 귀족이나 일종의 의회 집단의 제청에 의해서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왕은 모든 권한을 실제로 행사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제국 내의 법 질서를 관장하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었다.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만 왕을 보좌하여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대신들이 있었다.
대신들의 중요한 임무는 주로 군사적인 성격을 띤 중요한 부서의 관리인 것이다.
왕은 이와 같은 대신들을 거느리고 총괄적으로 제국을 통치하였지만,
실제적으로 행정을 원활하게 행하기 위해서 행정 구역을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하나는 왕이 직접 통치하는 직할 지역으로서 현재 비하르 및 북부 벵갈을
몇 개의 부크티(bhukti, 州)로 그리고 부크티는 다시 여러 개의 위샤야(visaya, 지방)로 분할했다.
또한 위샤야는 몇 개의 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에서 직접 지방관, 즉 우파리카(uparika, 주지사)와 위샤야파티(visayapati, 지방관)를 임명하여 통치했다.
다른 하나는 변경 지방에는 왕에게 예속된 총독이 위임을 받아 모든 행정권을 행사하는 하나의 소왕국이었다.
여기서 행정권이라는 것은 조세ㆍ군사ㆍ사법 등의 모든 권한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촌 지역에서는 성인들로 구성된 의회가 있거나
일종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브라만이나 훌륭한 지도적 인물들이 모인 의회가 구성되어서
행정권을 일종의 자치 형식으로 행사하였다.
군사 제도도 굽타 왕조에 이르면서 잘 정비되었다.
보병을 제외한 특수 부대인 코끼리 부대와 기병들의 활약은 대단하였다.
과거에 있었던 전차 부대의 사용은 점차 사라지게 되고,
사막에서 전쟁을 할 필요가 생겨 낙타 부대가 생기게 되었다.
제국의 군사들과 물자를 관리하고 보급할 임무를 진 관리들은 잘 훈련되어 있었다.
굽타 왕조의 모든 왕들은 백성의 복리를 증진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무엇보다도 광대한 제국을 통괄하고 백성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모든 도로망이 잘 확충되었으며, 곳곳에 휴식처도 증설하였다.
농사에 필요한 관개용으로 댐을 건설하였다.
무역도 다방면으로 장려되었으며, 여러 가지 상품들에 대한 중과세를 폐지시켰고,
외국 상인들이 국내에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평화롭게 편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범죄도 많지 않고, 사형같은 극형은 처해지지 않았다.
5. 힌두 문화의 부흥
굽타 왕조의 여러 왕들은 힌두교 보급의 후원자가 되었다.
원래 5세기 초에는 불교의 부흥을 꾀하는 정책도 폈으나, 후대의 굽타 왕들은 힌두교의 후원자가 되었다.
제3대 왕 찬드라굽타 2세 시대는 고대 인도 문화의 최대의 황금기로서
브라마니즘과 더불어 불교도 보호를 받아 발전하였다.
이 시대에 이르러 이 두 가지 종교는 토속 신앙과 결합하여
인도의 정서를 대변하고 인도인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힌두교를 성립시켰다.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은 전통적인 힌두 문화를 중시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굽타 왕조는 복고 왕조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경향은 생활 문화적 측면에서 더욱 현저하여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은 열렬한 힌두교 신자였다.
베다 성전에 대한 가치관이 재인식되고 브라만적인 색채가 짙은 힌두 의례가 부활되었다.
제2대 사무드라굽타 왕은 아슈바메다(馬祀祭)를 성대히 거행하였으며, 관정 의례를 포함한 전통적인 힌두 의식들을 부활시켰다.
일반 서민들 사이에도 힌두의 종교 의례가 침투되어 의례 양식으로 확립되어 갔다.
쉬바, 비슈누 같은 힌두교의 주요한 신들은 토착 문화를 흡수하면서
그 기능과 성격을 높여 갔으며, 이에 따라 힌두 신화도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마누법전’을 비롯한 제반 법전들이 정비되고, 힌두 사상의 고취에 따른 새로운 저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하여 힌두적 세계관과 인생관은 새롭고 확실한 모습으로 정착되었으며,
힌두교의 고전적 양식이 확립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신분과 직업도 고정되어 갔기 때문에 토지의 매매나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어
사람들은 자신이 출생한 고향에 정착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힌두교의 교리는 베다 경전과 브라마나에 두었으나 점차 승려나 왕의 개인적인 가르침에 따르는 경향을 보였다.
그 결과 마누 법전은
각 카스트에 관한 세부적 행동 양식과 도덕에 관한 내용 등을 담은 힌두 생활의 지침서가 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힌두교는 종교, 법, 미신 등이 혼합된 모든 계층에 호소력을 가진 종교가 될 수 있었고,
이의 광범한 전파는 그러한 이유에서 찾을 수 있겠다.
이와 같이 굽타 왕조 시대에는 힌두이즘이 전 인도 사회에 정착되고 있었지만
불교도 이에 대응하여 고전 산스크리트어로 많은 체계적인 철학적 문헌을 편찬했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法顯)은 기원후 405년부터 411년 사이에 불경의 수집과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인도에 머물렀는데,
그의 여행기 ‘불국기(佛國記)’는
굽타 왕조의 통일과 번영 그리고 아직도 불교가 살아 있는, 평화로운 생활 모습을 알려 주고 있다.
굽타 시대는 인도 문화의 중흥기라고 불리고 있다.
이민족의 침입으로 분열 상태에 있었던 인도를 다시 통일한 굽타 왕조의 여러 왕들은
인도 문화의 복고적 부흥에 힘써, 종교, 철학, 문학, 과학, 미술 등 각 방면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였다.
그래서 이 시대의 정치사에 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는 반면, 문화적인 모습은 많이 알려져 있다.
굽타 왕조의 문예 부흥은 궁정의 예술인과 학자에 의한 구전 산스크리트 문학의 결집 위에서 가능하였다.
산스크리트는 원래 브라만들에 의해 주로 사용되던 언어였으나
굽타 왕조에 의해 널리 유포되었다.
이는 언어의 다양성에 따라 통일된 언어가 필요하게 되었고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는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데 뿐만 아니라
힌두이즘을 발전시키는 학자들의 학문 연구에도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는 힌두이즘이 발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민족의 지배로 남아 있던 이국적 요소를 배재하고, 이 시대의 학자들은
민간인 사회에 떠돌던 설화를 산스크리트어로 기록한 것이다.
작자 미상으로 굽타 왕조 이전부터 오랫동안 내려오던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를 집대성하여 인도의 국민 문학으로 정착화시킨 것도 이때이다.
순수 문학과는 별도로 종래의 서사시가 거의 완성된 형태로 전승되면서
‘푸라나(purana, 古事古譚,)'라는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이것은 역사서와 유사한 것으로
역대 왕조의 왕통과 역사가 신화적인 형태로 기술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힌두교의 신 관념, 신화, 민간 신앙, 각종 의례, 인생관 등
힌두교의 기본 관념이 들어있기 때문에
힌두교의 형성 과정과 정착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6. 하르샤 왕
굽타 왕조는 6세기초에 접어들면서 점차 쇠퇴하더니
중앙 아시아로부터 유목 민족의 침입을 받아 인도는 다시 소왕국 분립 시대로 접어 든다.
이러한 혼란기인 7세기초, 갠지스ㆍ야무나 두 강 사이의 쿠루평원(Kuru-ksetra)에 자리잡고 있던
바르다나(Vardhana) 왕국의 영주 하르샤(Harsa)가 나와 북인도를 통일하여
하르샤 왕조를 건설함으로서 굽타시대의 영광을 다시 찾게 된다.
그는 군력을 정비하여 6년 동안이나 주변 지역을 공략했다.
그 결과 동쪽은 아삼으로부터 서쪽은 카티야와르에 이르는 북부 인도 전역을 평정하였다.
하르샤 왕은 학문과 예술의 보호자로서,
그 때 쓰여진 산스크리트어로 된 시와 희곡 작품은 현재까지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하르샤 왕은 몸소
라트나왈리(Ratnawali: 진주의 목장식)와 프리야다르쉬카(Priyadarsika), 나가난다(Nagananda) 등
3편의 희곡을 쓰기도 했다.
그의 궁정에 머물러 있던 문학가 중 명성이 높았던 사람은 바나(Vana)였다.
그는 세련된 산스크리트 문체로 하르샤 왕의 전기(傳記)인 하르샤차리타(Harsacharita)를 썼는데
이것은 왕의 인품을 전하는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하르샤 왕은 종교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여
5년마다 각 종교의 주요 신도를 수도인 카나우지에 소집하여 종교 회의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는 각 종교들 사이에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하르샤 왕은 이미 힌두화가 보편화된 인도 사회였지만,
만년에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을 썼다.
하르샤 왕의 불교 보호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차차 세력을 잃고 있었다.
그는 불교 학문의 중심지이던 날란다 대학의 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중국은 당, 태종 때로, 구법승인 현장이 인도에 와 날란다 승원에서 연구하고 돌아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썼다.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지배가 사실상 종언을 고한 뒤에도, 통일 제국을 꿈꾸는 군소 왕국들의 부침은 끊이지 않았다.
형식에서가 아니라 내용면에서 굽타 왕조는 인도아 대륙의 실질적 강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굽타 왕조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마가다와 우타르프라데시의 동부지역을 지배했다.
찬드라굽타 1세는 330년에 왕권을 그의 아들 사무드라 굽타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그는 북인도의 전역을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합병하지 못한 지역들로 부터는 조공을 받아냄으로서
쿠샨 왕조를 비롯한 일부 도서지방은 그들 나름의 일정한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북 인도가 완전히 굽타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비크라마디티아(Vikramāditya:'용맹의 태양')라는 칭호로 불리던 그의 또다른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마침내 굽타 왕조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그러나 계속되는 주변 소왕국들의 압박으로 그 세력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다.
C. 이슬람 시대
10세기 말에 접어들면서 인도 대륙은
투르크와 아랍계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투르크와 아랍계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델리에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인도인들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델리는 갠지스 강 유역과 중부·서부 인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 왕조는 13세기부터 16세기 무굴 제국이 들어서기까지 북인도의 역사를 주도했다.
투르크계 궁정 노예 출신이거나 그 직계 자손들이므로 노예 왕조(1206~90)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왕조는 1229년부터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1241년 서부 펀자브 지방을 잃게 되자 그 위세가 꺾였다.
북인도의 구자라트· 치투르· 데바기리 등이 술탄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선포했는데, 그도 1316년 죽음을 맞게 되었다.
알라 웃 딘의 사후 몇 년 동안은 계속 왕이 바뀌어 할지 왕조는 혼란에 휩싸였다.
바마니 왕조와 비자야나가르 왕조
한편 남인도에서는 술탄국의 원정을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세력 기반을 갖춘 왕조들이 나타났다.
바마니와 비자야나가르의 경계선은 크리슈나 강이었다.
이유는 급변하는 남인도의 정세와 바마니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이었다.
1538년 바마니 왕국은 마침내 비자푸르· 골콘다· 아메드나가르· 비다르· 베라르 등의 5개 나라로 분열되었다.
가반의 죽음을 계기로 바마니 왕국이 쇠잔해져 갈 즈음 비자야나가르는 상대적으로 남 인도에서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D. 무굴 제국
무굴 제국의 성립과 악바르 대제
무굴 제국의 발전
무굴 제국의 기원은 1398년 인도를 침입한 티무르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무굴 제국은 이 티무르의 5 대 손인 바부르가
그러던 그가 다시 영토 회복에 자신을 갖게 된 것은
1504년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하고 나서 부터이다.
그는 이 지역의 확보를 그 옛날 티무르의 영토였던 사마르칸트를 회복한 것에 비유할 만큼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한편 바부르는 1526년 4월 로디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이브라힘과 델리 근교의 파니파트에서 접전을 벌여
결국 그는 자신의 지도력으로 이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무굴 제국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 바부르였다면
그러나 악바르의 사후,
무굴 제국은
특히 마라타족의 흥기는 무굴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E. 유럽의 팽창
유럽은 인도에 대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국제적 긴장 관계는
하지만 1580년, 포르투갈은 1세기 동안이나 대립 관계에 있던 스페인에게 점령 당함으로서
카르나티크와 벵골의 지배권 확보에 성공한 영국은 이를 발판으로
그 중에서도 남부 인도의 마이소르는 인도의 장래에 미칠 영국의 위협을 누구보다도 일찌기 감지하고,
한편 북 인도에서는 마라타 동맹과 시크 세력이 영국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이른바 1차 마라타 전쟁(1775~82)이 시작된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인더스 강 유역의
카슈미르· 펀자브· 신드 등도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모두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8세기 중반부터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영국은 거대한 인도 대륙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F. 영국의 지배
폭동과 반란 (1857~59)
영국의 인도 지배가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도
이와 같이 인도 사회 전반에 스며든 反英 분위기는
1857년 5월 마침내 메루트의 세포이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의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델리로 진격했다.
그러나 반란군 측에도 많은 약점이 있었다.
이에 반해 영국측은 1857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낭패감에서 벗어나 전력을 재정비하고,
상대적으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은
이 반란은 식민지 지배에 의해 초래된 많은 문제점들이 이른바 연쇄 반응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이른바 '인도 통치법'(1858. 8)이 발효되었다.
영국인들의 지배가 확대되고 견고해질수록, 다른 한편으로 인도인들의 민족 의식도 깨어나게 되었다.
최초의 종교·사회 개혁 운동은 벵골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브라마 사마지(Brahmo Samaj)이다.
이밖에도 같은 경향의 운동 단체로서 베단타 철학을 기초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상을 접목한 라마크리슈나 선교회,
이들의 개혁 운동은 종교적 배경과 그 추구하는 이념이 같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더욱이 이들은 대부분 인도 고전 사상의 재인식과 부활을 강조함으로써
인도의 일체화를 꿈꾸고 있던 도시의 중간 계층이나 지식인들의 민족 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유럽 열강들의 인도 진출은
한편 사회 제도가 근대화되고 각종 관공서·재판소·학교 등이 생겨나면서 이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차츰 인도인들도 자신들의 한계와 민족적 일체감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1914~18)에 협력하는 대가로 인도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었다.
이후 영국은 강압 정책을 병행하면서도 차츰 인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갔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내외적 여건은 인도의 독립에 밝은 빛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 독립국을 요구함으로서,
그들을 제외한 국민회의파 중심의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도에는 2개의 공화국, 인도공화국과 파키스탄 공화국이 동시에 탄생하게 되었다.
1950년 1월 인도는 신헌법을 시행해 주권 재민의 연방제 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독립 인도의 정치사는 1957년 제2단계를 맞이했다.
1962년에 인도와 중국 국경에서 발생한 군인간 무력 충돌 결과
인도군의 패배는 네루의 정치적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1967년 인도 정치는 全 독립 인도사에서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해 인디라 간디 총리는 강권 정치를 도입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자 모색했다.
1977년 제6회 총선거 결과 독립 후 만년 여당이던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처음으로 패배하고
마침내 1978년 인디라 간디가 정계로 복귀했고, 1980년 7회 총선거에서 재집권했다.
새 총리에는 그녀의 맏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취임했다.
한편 1989년에 네루 일가(인디라 간디와 그 아들 라지브 간디)의 권력 독점을 종식시키고 출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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