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관통으로 꼭 배워야 할 것은?
진주는 꿰어야 보배다.
작금 시행되고 있는 성경의 맥을 잡는 공부는 대체로 그 구성체계만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신구약 성경 전체 구조와 각권의 저자, 시대적 배경, 내용 들을 간단히 파악하는 것이다. 마치 학술적으로 성경개론(槪論)을 배우는 것과 흡사하다. 가장 먼저 배워야 할 필수적 내용이긴 하다. 그러나 일반 책에 비유하면 목차와 서문을 읽은 정도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어느 누구도 목차와 서문의 내용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며 또 그럴 필요도 없지 않는가?
무슨 책을 읽더라도 반드시 건져야 할 것은 전체 줄거리와 그 결말이며 또 그로 인해 자기가 받은 감흥이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은 66권이 따로 독립된 개별 책으로서 별도의 줄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 전체구조를 안다고 해서 그 66권을 하나의 일관된 스토리로 연결시키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예컨대 신명기라는 제목의 뜻과, 누가 저자인지, 언제 기록되었고, 시대 및 저작 배경은 어떠하며, 그 중요 내용이 무엇이고, 구조적으로 구약의 역사서로 모세오경에 속한다는 것을 줄줄이 외워봐야 직접 신앙생활 하는데 어떤 도움이 되는가 말이다. 학술적 지식으로 두뇌라는 컴퓨터에 저장되는 데이터에 불과하다. 신자의 영혼에 믿음의 확신으로 뿌리박지 못한다. 시험 공부하듯이 반복해서 점검하지 않는 한 금방 잊어버린다.
성경을 관통하는 공부는 자연산 진주 66개를 목걸이로 만드는 작업과 같다. 자연산 진주는 그 크기 모양 색깔이 다 다르다. 그러나 하나 같이 영롱하게 아름답다. 그러나 한 알씩 갖고 있는 것보다는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면 그 아름다움과 가치는 더 확실히 드러난다. 이처럼 성경관통 공부를 마친 자도 반드시 신구약 66권을 한 권의 책으로 재편집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일관된 줄거리를 가진 한 가지 이야기로 바꾸어 남들에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그 구조 체계보다는 성경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찾아내어야 한다.
그럼 성경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한 마디로 예수다. 구약은 예수님이 꼭 오셔야만 했던 이유를,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과 그 결과를 적은 책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일대기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면 여전히 네 복음서와 같이 예수라는 한 인물 즉, 66개의 진주 가운데 하나만 만지작거리면서 감상한 것에 불과하다.
예수는 인간과, 특별히 그 죄와 연결해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이 어떤 상태에 있었기에 꼭 오셔야만 했고 또 오셔서 하신 일로 인해서 인간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성경 전체를 엮어서 풀어내어야 한다. 또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인지 살펴야 한다. 나아가 인간이 구원 받은 의미와 결과를 알려면 교회와 종말에 관해서도 살펴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조직신학이 가르치는 6가지 핵심교리를 - 신론(神論), 기독론(基督論), 인간론(人間論), 구원론(救援論), 교회론(敎會論), 종말론(終末論) - 섭렵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을 관통하는 공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공부가 장차 목회자가 될 신학생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절대적으로 예수에 관한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어 교회를 세우시고 그 머리가 되어 성도들을 인도하시다 때가 차면 재림하여 최후의 심판을 하신다.”는 내용이지 않는가? 그럼 그 각각의 구체적 내용을 모르고 어떻게 성경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진주 목걸이의 정체는?
그런데 사실 교회 출석한지 몇 년이 지난 신자들은 기독교의 이 핵심교리를 그런대로 잘 알고 있다. 새신자 공부나 제자훈련을 통해 열심히 배우기 때문이다. 그런 공부에 참석하지 않는 게으른 신자라도 매주 설교를 통해 반복해서 듣기에 명확히 정리는 안 되어 있어도 그 큰 맥(脈)은 잡고 있다.
그럼 구태여 성경을 관통하는 공부를 꼭 따로 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교리를 아는 자도 여전히 진주를 꿰어 목걸이를 만들지 못하거나, 만들 생각조차 않는 우(愚)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교리 하나씩, 신학적 과제 하나씩 구분해선 잘 알면서 성경과 상호 연결해서 이해하는 측면에선 아주 약하다는 것이다.
알기 쉽게 예를 들어보자. 성경구조를 공부한 사람은 에스더서의 등장인물, 시대 배경, 스토리, 중요 신학사상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예수와 연결해서 해석해보라고 하면 완전히 까막눈이 되어버린다. 에스더서에 관한 지식만 습득했지 예수에 관해 실제로 배운 것은 하나도 없다. 그 반대로 기독교 교리에 정통한 자더러 각각의 교리가 에스더서의 어느 부분에 어떻게 반영이 되어 있는지 찾아보라고 해도 헤매기는 마찬가지다. 이 또한 교리라는 지식을 별도로 떼어내어 공부했기에 막상 성경과 제대로 연관 짓지 못한다.
물론 에스더서는 기독교 교부들이 정경화 할 때에도 논란이 되었던 책으로 그 맥을 잡기가 아주 어렵긴 하다. 더 분명하게 실감토록 하기 위해 예를 든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책에 적용해도 솔직한 실정이 그렇지 않은가? 일반 신자에게 초대 교부들도 겨우 풀었던 숙제를 맡기려는 뜻이 아니다. 성경은 절대로 기독교라는 종교 지식으로, 교리도 포함해서, 습득해선 안 되고 반드시 예수와 연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손쉬운 방안이 하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는 인간을 배제하고는 아무 의미가 없다. 성경이 예수 이야기라면 결국 인간에 관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럼 성경이 인간에 대해 일관되게 말하는 내용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내면 관통한 것이 된다.
그런데 사실 그 하나의 이야기를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은 오히려 그분을 배반했고, 그래서 당신의 독생자가 오셔서 구원해 주었으며, 마지막 때에는 부활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이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인간은 창조-타락-구원-완성의 네 단계를 거친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관점에선 “예수를 통해 인간을 구속” 하신다는 이야기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이 네 단계에 대한 구체적인 상술이다. 따라서 성경을 관통하여 기독교 핵심교리를 혹은 성경구조체계를 아니면 둘 다 배우든 목걸이로 꿰려면 그 배운 내용을 반드시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준거 틀에 비추어 해석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창조 교리는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닮아 인간을 짓고 당신을 대신하여 이 땅을 다스릴 청지기로 세웠으며 그 일을 수행하라고 자유의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당신을 닮은 형상이 무엇인지, 인간이 이 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거기에 자유의지가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등의 구체적 교리도 반드시 창조 이후의 타락-구원-완성이라는 전체 맥과 연결해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구조적으로 따질 때도 마찬가지다. 구약의 창세기 1-2장은 인간의 창조, 3장은 인간의 타락, 4 장 이후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까지는 그 타락이 확장 만연되는 모습, 신약의 복음서부터 교리 서신들의 중요 내용은 인간의 구원, 또 서신서의 일부 내용과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완성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아모스서의 내용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정치 경제적으로 제일 풍요로울 때에 오히려 도덕적으로 가장 부패했기에 남왕국 유다의 한 목자를 불러올려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다는 것으로 구약의 대선지서에 해당된다. 그러나 그런 것을 배우는 것으로 그치면 여전히 성경 지식일 뿐이다.
그보다는 인간 타락의 가장 극명한 예를 찾되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겨진 인류구속사의 시나리오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다른 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발견하는 것이다. 단순히 어떤 구절이나 단어가 예수님과 그분의 죽음을 예표 상징하는지 찾으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 절차는 당연히 거치되 아모스의 내용도 바로 이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큰 틀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대담론(巨大談論, Meta Narrative)이라는 철학용어가 있다. 문자적으로는 여러 작은 이야기들을 묶어서 만들어 낸 하나의 큰 이야기를 뜻한다. 그 실제 의미는 인간의 역사적 경험과 지식들에 관한 종합적 설명이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인간 체험과 지식에 관한 보편적 절대적 진리에 관한 이야기다.
유사 이래 인류는 자신들에 대한 거대담론을 명확히 정립해보려 노력해왔다. 인간의 과거 기원과 현재 상태와 미래의 결말에 대해 항상 궁금해 하며 그 해답을 추구했다. 그런데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인간이 어떻게 해서 이 땅에 있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어떤 체험을 겪었으며, 현재는 어떤 상태에 있으며, 그 종말에는 어떻게 되리라는 것, 다른 말로 거대담론이지 않는가?
성경 66권에 흩어져 있는 모든 기록들을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의 네 이야기로 집약할 수 있다. 구약은 인간이 창조되었고 죄로 타락하였다는 거대담론이라면 신약은 예수가 와서 인간을 구원하고 완성시킨다는 거대담론이다. 결국 세상 사람이 찾고 있는 거대담론과 성경의 그것과의 결정적 차이는 "타락한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라는 진술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모든 역사적 경험과 지식을 함께 묶어 해석할 수 있는 키를 성경은 예수라고 제시한 반면에, 세상은 여전히 인간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요컨대 성경은 하나님이 모든 인간이 반드시 믿고 따라야 할 보편적 절대적 진리를 계시해 놓은, 사람이 믿든 안 믿든 간에, 책이다. 또 성경을 관통해 목걸이를 꿴다는 것도 바로 이 거대담론을 찾아 그 바탕 위에 성경 66권을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주 목걸이는 목에 차야 한다.
진주를 목걸이로 꿰었다고 해서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리 예쁜 목걸이도 보석함에 담겨만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지 않는가? 실제로 목에 차고 다녀야 한다. 자랑하라고 차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봐도 확연히 진주목걸이인 줄 알아야 하고 또 그들도 그런 목걸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자기를 아름답게 꾸며야 한다.
성경도 공부하여 실제 삶에 반영되지 않고 지식으로 사장되어선 안 된다. 그 지식을 남들에게 자랑하거나, 자기만 치장하여 남들에게 아무 영향력을 끼치지 못해도 마찬가지다. 양식진주(인간의 지식에서 나온 종교 경전)라면 몰라도 천연진주(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자 진리) 목걸이를 파티에 차고 나오지 못할 까닭이 전혀 없지 않는가?
작년 미국 대선 때에 캘리포니아 주에선 동성 간 결혼의 허용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도 함께 치렀다.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는 한 한국인 남자고등학생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당연히 반대라고 답했다. 이어서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더니 한 마디로 그냥 싫고 징그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어려서 친구들끼리 그런 문제를 토론할 기회가 별로 없겠지만 곧 미국대학교에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미국학생들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자들을 향해 인간의 권리, 자유, 개인적 성생활을 억압하는 반지성적, 비인간적 과오라고 반발해 올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고 재차 물었다. 만약에 단순히 싫다고만 말하면 틀림없이 싫고 좋은 개인적인 취향에 속하는 이유만으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앞뒤가 꽉꽉 막힌 벽창호 같은 기독교인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그 학생은 여전히 동성애 반대에 대한 체계적인 의견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교회에서 그런 문제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없다고 했다. 그럼 대체 고등부 예배 설교나 성경공부에서 무엇을 배우느냐고 했더니 힘든 일이 있으면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내용만 주로 듣고 배운다고 했다.
한국 교회에선 기도하여 문제 해결받는 것만을 두고 믿음과 삶이 연결되는 양 가르친다. 기도는 믿음과 하나님과의 연결이다. 삶과 믿음의 연결은 기도한 후에 나타나야 한다. 이 학생의 경우는 믿음도 믿음이지만 성경과 삶과 실질적 연관이 없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셈이다.
성경의 창조와 타락과 구원과 완성에 관한 거대담론은 바꿔 말하면 인간의 기원과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관한 이야기다. 또 인간이 이 땅에서 최초로 살게 된 때로부터 마지막 종말의 때까지의 이야기라면 당연히 삶과 인생의 모든 부분에 대한 내용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쉴 새 없이 발현되는 새로운 문화, 사조, 현상, 기술 등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하나님이 인류 역사 전체를 이끌고 가는 근본적 뜻과 계획, 다른 말로 인간을 다스리는 기본 원리는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대에 일어나는 어떤 새로운 현상도 성경의 원리로 해석해 적용하지 못할 것은 없다. 인간을 지으셔서 당신께서 조성하신 생존환경에서 직접 다스리는, 인간을 인간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는 그 거대담론을 반드시 자신의 개인적 삶에도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존재와 삶과 인생을 하나님의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의 틀로 해석 조정 실현해야 한다. 우선 자신의 ‘기원’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심히 아름답도록 예정된 신분이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는 아담의 원죄 하에 태어나 그분과 담을 쌓고 죄악 속에 지낸 추하고 악한 존재였음을 절감해야 한다. 그러다 예수님의 일방적 은혜와 권능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 ‘현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회복되었음을 확신해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야 한다. 언젠가 천국에서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될 ‘미래’의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한다.
이 네 가지 틀을 동성애자 결혼과 관련해 위에 예를 든 남학생의 경우에 구체적으로 적용해 보자. 교회에서 힘들면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배워서 기도하는 것은 아주 잘 봐주어 네 개의 거대담론 중에 구원만 적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을 연결해서 배우지 못했거나 그런 방식으로 삶을 해석 적용할 줄은 전혀 모른다. (사실상 고등학생 수준에서 그렇게 하라는 것은 무리다. 마침 실제로 겪은 일이라 예를 든 것일 뿐, 교회 오래 다닌 성인 신자도 이 학생과 거의 같은 수준인 경우가 분명 많을 것이다.)
우선 동성애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을 남녀 간에 서로 다르게 창조하였고 가정은 반드시 남녀가 서로 돕는 배필로 만나 이루라는 원리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또 동성애에 빠지는 원인도 유전자나 주위 환경 때문이 아니다. 사단의 종이 되어 쾌락에 눈먼 인간들이 더 자극적인 성적유희를 자의적으로 선택했거나, 전쟁이나 형무소 같은 죄악이 원인이 되어 동성만 장기 격리 수용함으로써 생긴 절대적 잘못이라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대학교에 들어가 인권과 자유를 주장하는 세속적 지성의 반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는 절대적 원리에 대해 얼마든지 논리적으로 변증할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앞뒤가 꽉 막힌 골통이라는 소리를 듣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죄는 철저히 미워하되 죄인은 자신이 죽기까지 사랑한 예수님의 복음 안에 들어온 입장에서 동성애자도 그렇게 대해야 한다. 동성애라는 행위 자체는 분명 죄임을 납득시키고 그 본인은 끝까지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또 능치 못할 일이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여 동성애 습성을 버리고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함께 기도해 주어야 한다. 물론 그보다 먼저 상대가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온전한 믿음을 가지도록 전도해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선 아무리 동성애라는 죄에 물든 자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갈 수 있다는 소망을 심겨주어야 한다. 나아가 그가 장래에는 주위의 동성애 동료들마저 하나님의 은혜로 이끌 만큼 그 인생이 주님 안에서 고귀하게 완성될 수 있음을 확신시켜야 한다.
이처럼 동성애라는 죄의 기원을 ‘창조’와 ‘타락’에서 찾아야 한다. 또 현재 그 죄에 빠져 있는 자도 예수님의 ‘구원’으로 초대하고 장래에 얼마든지 고귀한 형상으로 ‘완성’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하면서 함께 기도하며 섬겨야 한다. 단순히 동성애가 성경적 죄이므로 반대하고 그 본인도 멀리한다면 성경의 표지만 슬쩍 훔쳐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성경 관통은커녕 통독조차 하지 않은 꼴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성경 관통으로 반드시 습득해야 할 내용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최소한 다음 세 가지가 된다.
첫째. 자기가 구원 받은 의미와 결과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어야 한다. 예수 안에서 바뀐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이제 신자답게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확정해야 한다. 단순히 성결하게 사는 것보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소명을 성경의 거대담론에 비춰 확정지을 수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직업 종류를 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과 생활 방식을 예수 믿기 전과는 완전히 반대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위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는 근본 원리를 알았기에 세상의 사조와 현상들을 그분의 뜻에 맞추어 분별하고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신자답게 산다는 것이 성직의 길을 가거나 전도에 매달리거나 죄를 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세속에서 확실히 비기독교적인 악한 일만 아닌 이상 무슨 일을 해도 된다. 아니 반드시 해야 한다. 대신에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자로 사는 것이다. 창조, 타락, 구원, 완성이라는 틀로 사람과 사건과 환경을 해석하여서 천국을 준비하며 사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 정체성과 자신이 할 일과 대인관계를 그 틀 안에서 새롭게 정립하여 살고 있지 않다면, 최소한 그럴 소원이라도 안 생겼다면, 아무리 성경을 심도 깊고 광범위하게 배워도 또 하나의 종교인을 양성한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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