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은 영화계의 비수기다. 그러나 사실 진짜 볼만한 영화들은 비수기에 나온다. 성수기엔 평균화된 관객의 오락을 겨냥해 볼거리를 ‘제조’하는 몇 편의 대작 블록버스터들이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올 가을 역시 인상적인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되고 있다. 그 중 가장 남성적인 영화 한 편과 여성적인 영화 한 편을 이 자리에 추천한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신작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은 거의 모든 면에서 예측이 불가능한 특급오락물이다. 이야기의 전개에서 액션의 디테일까지 관객의 예상과 장르의 관습을 철저히 배반한다. 이 영화의 총알은 언제나 의외의 순간에 의외의 인물로부터 의외의 인물에게로 발사된다. 제2차세계대전이 벌어지고 있는 유럽. 유태계 미군 장교 알도(브래드 피트)는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모아 특수부대를 만든 후 나치 소탕전을 벌이기 시작한다. 나치 장교 한스(크리스토프 왈츠)의 손에 가족을 잃고 홀로 살아남게 된 쇼사나(멜라니 로랑)는 자신이 운영하는 극장에 나치 수뇌부가 모두 모이는 것을 알고 복수를 준비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구체적 시공간을 무대로 삼고도, ‘역사적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할 수 있는 대담한 상상력이다. 장별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제1장 자막 ‘옛날옛적 나치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옛날옛적’이란 표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스의 대사들 중 ““어떤 역사를 원하는가””라는 게 있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사실 타란티노가 정말로 관심있었던 것은 영화를 통해 나치의 만행을 응징하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그저 마음껏 때려잡아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대상을 찾았을 뿐이다. 이를테면 이 영화에서 나치가 다뤄지는 방식은 (타란티노가 각본을 쓴) ‘황혼에서 새벽까지’의 뱀파이어나 (타란티노가 연출한) ‘데쓰 프루프’의 마초 악당이 당하는 방식과 흡사하다.
극장을 옴짝달싹할 수 없는 함정으로 바꾸는 거사를 기획한 것은 쇼사나와 알도 뿐만이 아니다. 타란티노 역시 이 영화를 보러온 관객들을 극장 안에 모아놓고 순도 높은 ‘킬링 타임’을 만들고 싶어한다. 이 영화의 결말이 관객을 만족시키는 방식은 즉각적이다. 그러나 종반부의 그 같은 직설적 대리만족에 도달하기까지 감독은 창의적이고도 효과적인 곡선주로를 닦는다.
클라크 게이블의 표정으로 찰스 브론슨처럼 행동하는 브래드 피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오스트리아 배우 크리스토퍼 왈츠다. 이 영화로 칸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왈츠의 연기는 함께 등장한 다른 배우들 연기를 모두 다 잡아먹을 정도로 강력하다.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타란티노라고 연출 과정에서 고민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인 필치로 시작해서 변칙적인 화법으로 끝맺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같은 영화를 보면서 생생하게 감지되는 것은 한껏 흥이 나 있는 사람이 내뿜는 에너지다.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는 ““아무래도 이게 나의 걸작이 될 것 같아””다. 살짝 얄미울 수도 있지만, 타란티노는 그렇게 뻐길만한 자격이 있다.
박찬옥 감독의 ‘파주’에서 사랑하는 남녀는 찔리거나 멍드는 대신, 떠돌거나 녹아내린다. 이 영화는 자신의 혈관 속을 흐르는 감정의 기척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내면에 끝내 고이고 마는 어떤 쓸쓸함을 골똘히 응시한다.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동인 듯한 그 미세한 물방울들. 택시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한 여자를 묵묵히 비추는 ‘파주’의 첫 장면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은 푸르스름한 안개다. 이 영화에서 안개는 인물의 마음 깊은 곳 우물에 드리운 그림자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의 뼈대 사이를 채우는 미스터리이며, 삶을 되돌아보았을 때 어쩔 수 없이 피어나는 불가지론이다. 그 축축한 공기 속에서, 침묵은 아우성친다.
몇 년만에 고향 파주에 돌아온 은모(서우)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줄 알았던 언니 은수(심이영)의 죽음에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알게 된다. 철거민들과 함께 철거 반대 투쟁에 나서고 있는 형부 중식(이선균)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상황. 중식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두려움에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은모는 이제 언니의 남편이었던 중식에게 캐묻기 시작한다. 중반까지 스토리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은 이 작품의 다소 불친절한 화법은 부유(浮遊)하고 점멸하는 생(生)의 순간들을 살려내기 위해 서사의 고리를 과감히 제거했다. ‘파주’의 플롯은 사건의 추이를 밟아가지 않고 마음의 궤적을 따라간다. 감춰진 진실에 대한 관객의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일보다 감독이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7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마음의 풍경화를 그려내는 작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영화의 이야기를 추동하는 것은 은수의 죽음에 대한 비밀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미스터리, 혹은 삶이라는 미스터리 그 자체다.
‘질투는 나의 힘’ 이후 무려 7년. 박찬옥 은 홍상수 감독의 영향이 일부 담겨있었던 데뷔작의 스타일을 벗어나 이 예민한 작품을 온전히 자신의 영화로 만들었다. 시적이고 몽환적인 멜로에 매우 사실적인 한국 사회의 단면이 밑그림으로 내려 앉아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폭력적인 철거 작업에 쫓겨 삶의 칼날 끝에 제겨디딘 사람들의 ‘현장’이 실감으로 담긴 이 영화의 장면들은 기이할 정도로 숭고하다. 이선균 은 안타까운 로맨스에 입체감을 부여하는 목소리와 얼굴로 그의 영화 이력에서 가장 도드라진 순간을 빚었다. 좋은 감성을 지닌 서우는 언어가 끊긴 지점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기대에 부응했다.
안개 속에서 은모가 고향으로 돌아오며 시작된 이 영화는 안개가 걷힐 무렵 그녀가 다시금 그곳을 떠나며 끝난다. 그 사이에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물을 때 이 영화의 제목은 불현듯 ‘난파된 배’를 뜻하는 ‘파주’(破舟)로 읽힌다. 그녀는 정말 파주를 떠날 수 있을까. 안개가 시간을 타고 또다시 밀려올 텐데.
이동진 영화평론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10여년 간 조선일보에서 영화 전문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1인 미디어 ‘이동진닷컴’을 운영하며 섬세한 글쓰기와 명쾌한 감성으로 다수의 독자를 확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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