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군사력은 고구려가 훨씬 막강했고, 경제나 문화에 있어 백제와 비교가 안되었는데.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던 신라가 훨씬 강하고 훨씬 발전해 있던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바로 그 힘이란? 바탕이란?
결국 당나라의 도움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일찌감치 중앙집권을 완성했다는 것이 가장 컸을 것이다. 국왕의 명령 아래 나라가 일치단결하여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 고구려와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당면한 공격에도 우왕좌왕하며 끊임없이 분열하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일관된 명령체계 아래 단합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
물론 신라라고 처음부터 중앙집권이 갖춰졌던 것은 아니었다. 건국신화에서 보듯 신라란 박혁거세의 박씨와 알영, 그리고 사로 육촌의 육두품이 연합하여 만든 나라였다. 초기에는 왕위도 박씨와 석씨와 김씨가 번갈아가며 오르고 있었고 - 주로 결혼을 통해 계승이 결정되었었다. - 그나마 내물왕 이후 김씨가 왕위를 독점한 뒤로도 귀족회의인 화백에 막대한 권한이 주어지고 있었다.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한 것도 그 때문인 셈.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권위를 빌어 로마를 안정시키려 했듯 법흥왕 역시 불교의 힘을 빌어 왕권을 안정시키려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전성기를 지나고 귀족들의 불만이 커지면서 마침내 진흥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진지왕이 귀족들에 의해 화백회의에서 폐위가 결정되는 일대 역전이 일어나게 된다. 진지왕의 왕권강화시도는 비형랑의 신화에서도 그 단초를 찾을 수 있거니와 이로써 신라의 내정의 주도권은 왕에게서 귀족에게로 넘어가고 진평왕은 내내 귀족들의 눈치를 신경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이 즉위하게 된 것은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였다. 진평왕이라고 왕권강화에 대한 욕심이 없을 리 없었다. 그러나 욕심대로 하기에는 화백을 중심으로 한 귀족의 힘이 너무 막강했다. 그것은 일족 가운데 그러한 귀족의 입김이 닿았을 - 혹은 자신처럼 귀족에 의해 휘둘릴 다른 남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에조차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가 무리해가며 선덕 - 당시에는 덕만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한 것도 그런 정황 때문이었다. 최소한 자신의 딸이니 자신의 의도를 이해할 테고, 또 그만한 역량이 되니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실제 덕만은 왕위에 올라서 진평왕이 바라던 바를 충실히 이루고 있었다. 남편을 셋이나 둔 것도 결국 귀족을 견제하고 가까이 친위세력을 두기 위함이며, 김춘추와 김유신 등의 소외되어 있던 신진세력을 등용한 것도 이들이 아직 귀족들과 손이 닿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세계사적으로도 군주가 자신의 권한을 강화할 때는 비빌 구석이 없던 신진세력을 등용해 그들을 통해 친위세력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만도 그렇게 서울남인 가운데 친위세력을 만둘고 있었다.
아마 그러한 내용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김춘추와 김유신의 여동생 문영이 결혼하는 과정일 것이다. 어딜 감히 모계로 보면 조카요 부계로 따지면 육촌동생이 되는 김춘추와 멸망한 가야계 유민에 불과한 김유신의 여동생이? 그러나 김유신은 그것을 간절히 원했고, 선덕여왕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김유신에게는 중앙정계와 연결될 끈이, 선덕여왕에게는 기존의 귀족들과는 분리된 또다른 친위세력이 필요했다. 그 사이에서 거래의 대상으로 선택된 것이 김춘추, 그러나 이는 또한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잇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니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선덕여왕 연간의 신라 내부의 혼란이라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보면 된다. 그만큼 선덕여왕의 왕권강화는 기존의 귀족들의 반발을 샀을 것이고, 그것은 일시 신라의 내적 단합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때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해 쳐들어오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어려움은 더욱 배가되었을 것이고. 그것을 빌미로 귀족은 여왕의 기세를 꺾으려 했을 것이고, 여왕은 다시 당의 도움을 빌어 그를 꺾으려 했을 것이고, 여기에 당마저 왕을 흔들려 했으니,
"부녀자가 왕으로 있으니 나라가 그 모양이다."
그리고 태종이 뿌린 떡밥은 선덕여왕의 죽음에 즈음해 비담의 반란으로 터져나오고 말았었다.
"왕이 정치를 못하니 나라가 위태로운 것이다."
비담에 대해서는 사실 전해지는 것이 전혀 없다시피 하다. 진덕여왕이 즉위하고 비담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일족이 모두 주살되어 역사에서 그 기록이 사라져 버렸디 때문이다. 다만 일찌감치 상대등의 자리에 올랐고, 선덕여왕의 죽음에 즈음해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왕위계승권이 있던 귀족 - 그 가운데서도 상당히 순위가 높았던 인척이 아니었을까 한다. 김춘추만도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기까지 국왕인 선덕여왕의 배려가 적잖이 작용했었는데 비담은 이미 상대등이었고 무리를 모아 사사로이 왕위를 노릴만한 위치에 있었다. 아마 생각하기로 진덕여왕과는 다른 진흥왕의 손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나 싶은데, 그러나 일찌감치 권력의 핵심에서 왕위를 노릴만한 위치에 이르고 보니 잡생각이 많아졌던 것이었다. 왜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도 대세론에 빠져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권력 이후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더구나 그는 귀족회의의 대표격인 상대등이었다.
즉 선덕여왕이 굳이 일족 가운데서도 남자인 비담이 아닌 진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한 이유였다. 기껏 진평왕에서 자신까지 온갖 어려움을 무릎쓰고 왕권을 강화해 왔는데 정작 다음 왕이 될 이가 귀족들과 밀착해 있는 이라면 이것은 이제까지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것이었다. 선덕여왕 자신에게 후사가 있다면 모를까 아니라면 - 김춘추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귀족들에 의해 왕의 자리에서 내쫓겼던 진지왕의 손자라는 약점이 있었다. 따라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육촌여동생인 승만이었고, 그를 뒷받침해줄 것이 그녀가 발굴한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이었던 것이었다.
다시 말해 비담의 반란이란 어느새 대세가 된 비담을 중심으로 다시 뭉친 구세력과 선덕여왕에 의해 발굴되고 키워진 김춘추와 김유신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과의 충돌이라 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서는 여전히 귀족들의 신라를 고집하던 봉건적인 구세력과 권력을 사유화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을 완성하려 했던 이를테면 왕당파와의 충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김춘추가 승리함으로써 - 뿐만 아니라 비담의 반란을 계기로 고위귀족이고 왕위계승에도 가까웠던 비담의 일족을 남김없이 주살함으로써 김춘추가 왕위를 잇는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고 말이다.
말했듯 비담은 신라에서도 고위귀족이었다. 신라에서 고위귀족이란 왕과 그만큼 혈연적으로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왕위계승에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이고, 또한 말했듯 진지왕의 손자로서 약점을 안고 있던 김춘추의 경쟁자이기도 하더라는 뜻이다. 그런 이들을 무려 300이나 주살했으니,"성골의 남자가 없어 김춘추가 왕위에 올랐다."는 말은 이때 성골의 남자가 모두 몰살했다는 뜻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건 역사에 기록될 리 없으니 확언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렇게 김춘추와 김유신의 세력이 승리하면서 신라에서 구귀족의 권위는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귀족회의의 대표로 권력의 또다른 핵심이던 상대등이 몰락하고 대신 왕권을 받들던 시중이 부상하고, 이후 다시 한 번 왕권이 크게 흔들리기까지 이로부터 신라의 모든 권력의 중심은 국왕, 그리고 국왕이 머무는 경주가 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지방세력이 강력해서 왕을 비웃고 흔들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 신라가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이로부터 신라의 삼국통일이 가능했다고나 할까?
예전 이경규씨가 방송에 나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10년을 고생하면 인기가 10년을 갑니다."
사실은 박명수를 놀리기 위해 꺼낸 말이었지만,
그대로다. 역사에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란 없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면 또 하루아침에 망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 - 바로 직전 선덕여왕과 진덕여왕까지만 하더라도 고구려와 백제에 열세를 보이던 신라가 마침내 저들 두 나라에 우위를 점하고 그들을 멸망시켜 병합할 수 있었던 그 원동력이란 역시 무열왕과 문무왕에 의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왕권을 강화하고, 국론을 통일하고, 나아가 강대국이던 당에 대해 온갖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동맹을 이끌어내고, 그리고 새로운 신라를 건설하고 이끌 새로운 세력을 발굴하여 키우고, 이로써 신라는 선덕여왕 이전과 이후가 전혀 다른 나라라 할 정도로 그녀가 신라에 남긴 영향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비록 여성이라는 한계로 남성중심의 전통사회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저 무협소설의 소재로나 쓰이고 있고.
참고로 김춘추가 즉위하며 성골의 대가 끊겨 진골이 왕위에 올랐다 하는 것도 실상 실제 성골과 진골의 구분이 있었다기보다는 그만큼 신라가 크게 일신하여 이전과 구분지을 필요가 있었다는 쪽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전까지의 왕이 귀족의 대표자였다면, 이제부터의 왕이란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존재일 것이니. 아마.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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