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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염화약방문/1.산업사회와 인간/8-1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2. 13. 12:55

<염화약방문/1.산업사회와 인간/8-1>


염화약방문


  몽환공화 - 꿈속 허공에 핀 환각의 꽃을

  가노파착 - 무어라 애써 붙들려 하는가

  득실시비 - 얻고 잃고 옳고 그름을

  일시방각 - 한꺼번에 놓아버릴지어다.

 "삼조승찬 신심명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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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산업사회와 인간

2. 가정을 위한 장

3. 여성을 위한 장

4. 마음의 병

5. 기호품과 건강

6. 삶과 기쁨

7. 비화

8. 염화약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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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업사회와 인간

 

 (1)암 공장시대

 용숙(제나라 때의 사람; 열자 중니편중 '병아닌 병'에 나온다)이 문지(제나라 양의 열자 중니편 중 "병아닌 병"에 나옴)라는 의사를 찾았다. "선생의 의술이 놀랍다고 들었습니다. 제 병도 고쳐주실 수 있을런지요?"

 문지는 "고쳐보지요. 그러나 병의 증상을 먼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숙은 "향리가 모두 칭찬해도 영광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온 국내 사람이 헐뜯어도 모욕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또 무엇을 얻어도 기쁘지 않고, 잃어도 걱정이 안됩니다. 생이 사처럼 보이고 부가 가난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돼지나 다름없이 보이고, 내 자신이 남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내 집에 있으면서도 여관에 있는듯하고, 내 고장이 이방같이 생각됩니다. 이런 병으로 인해 벼슬이나 상을 준대도 내키지 않고, 형벌도 두렵지 않습니다. 성쇠 이해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애락에도 영향받음이 없습니다. 물론 임금을 섬긴다든가, 친구와 사귀고 처자를 거느리며 하인들을 통솔할 생각이 날리 만무합니다. 대체 이것은 무슨 병입니까?

 어떻게 해야 나을 수 있겠습니까?"

 문지는 용숙에게 밝은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도록 했다. 그리고 뒤로부터 밝은 쪽을 향해 그 가슴을 비쳐 보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말했다.

 "아! 당신의 가슴을 보니 마음 속이 텅 비어 있구려. 거의 성인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가슴속 일곱개 구멍 중 여섯 개는 뚫렸지만 한 개가 막혔습니다. 이제 성인의 지혜를 갖추고 있으면서 그것을 병환이라 여기고 계신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입니다.

 나의 변변찮은 의술로는 도저히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참 아름다운 교훈이다.

 정신건강의 극치는 무심이고, 육체적 건강의 극치는 조화이다. 무심을 체로 삼고 리듬을 타는 조화감각을 용으로 삼는 것이 건강의 비결이다.

 무심은 무위심이다. 함이 없는 마음은 아무것도 일하기 싫은 나태심이 아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없는 마음이다.

 사물에 응하여 쓰는 경우가 있고 쉴 곳을 안다. 쉴 곳을 알므로 항상 지루함 없이 신선하다. 육체는 항상 외부 기운의 간섭을 받아 질병에 걸리기 쉽다. 차고 덥고 습하고 건조한 것의 기운을 잘 조절하여 수시로 기거동작의 조화를 도모해야 한다.

 '탑돌이'의 숨은 비유는 바로 이 몸이 탑인데 수시로 잘 살펴 조화를 잃지 않는 지혜의 수행이라고 일찍이 달마대사는 갈파하셨다.

 육신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다. 마음이 동하면 육신도 따라 동하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육신도 안정된다. 마음이 동하지도 가라앉지도 아니함은 곧 우리의 자성 자리이다. 조동하는 괴로움은 선정의 방편으로 다스린다. 선정의 부동심이 좋은 약과 같은 것이지 깨달음 그 자체는 아니므로 세존께서 선정의 낙에 빠질 것을 경계하신 바 있다. 그러나 이는 차원높은 차후의 얘기이다. 이 시대는 우선 고요히 반조하는 선정의 힘이 절대로 필요한 시대이다.

 모든 암은 마음의 집착에서 온다. 동하는 마음의 쌓임이 곧 물질화 되어 덩어리가 된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망동함이 자꾸 산과 같이 쌓인 것을 암이라 한다. '병 갓머리'안에 입 구자가 세 개 뫼산 자가 들어 있음이 그 삼독의 산이라는 그럴듯한 파자풀이 해석도 있다. 독한 마음도 시초에는 별것 아닌 데에서 시작된다.

 그리움과 부러움 망설임 등이 그 씨앗이다. 그리움 망설임의 열매가 암의 원인인 애욕과 질투와 의혹의 삼독이다. 시초에 한 생각을 경계하지 않으면 그 쓴 열매인 암의 과보가 온다. 어릴 적부터 비교당하는 괴로움은 암을 낳는다. '누구처럼 되어라!' '누구보다 못하다!'바로 이것이 야심을 낳고 패배의식을 낳는다.

 분주하게 두뇌를 굴려서 자기 영역의 확대를 꾀하거나, 남을 파괴하는 업을 짓는다. 궁리하는 사량심은 교활함과 통한다. 야심과 패배감 교활함은 서로 일관된 중심을 가지고 있다. 즉 Ego(自我), 그것이다. 내 야심의 달성에는 남을 패배시키거나 죽이는 방법이 필요하다. 그 방법의 다양한 추구가 곧 교활성이다.

 패배감은 억울함, 분노의 표현으로 나타나 죽이고 싶은 살기를 수반한다. 나를 죽임은 자살이요, 남을 죽임은 타살이다. 내향적이든 외향적이든 같은 살인이며 근본은 나와 남의 비교에서 열등해진데 원인이 있다.

 이런 면에서 현대인은 모두 암세포 보균자이며 방조자이다. 자식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는 현명함이 없이, 끊임없이 견주어 채찍질하는 부모와, 일류 이류를 분리하여 성공의 야심을 부추기는 교사는 암세포 방조자이다. 소위 '통밥'잘 굴린다는 교활한 천재나 자신을 잃고 방황하며 무턱대고 도취하고 반발하는 청소년은 암세포 보균자이다.

 가슴속 일곱 개 구멍 중 여섯 개가 뚫린 사람은 미간에 제 3의 눈이 생긴다. 탐진치 3독의 구멍을 확 뚫어버린 이 제3의 심안을 터득해야만 영원히 비교의 늪에서 헤어나 암세포의 밥이 되지 않으리라.

 골치아픈 암으로 당황하는 의사가 아니라, 용숙과 같은 병 아닌 병으로 세상의 의사가 모두 당황해 하는 통쾌한 광경을 보고 싶다.

 오장육부 씻어내는

 제삼의 눈 팽개치고

 혹만드는 검은공장

 용광로에 삽질하네


 (2)제3의 순환

 토플러(앨빈 토플러 1928년 뉴욕에서 출생한 사회비평가. 사회적 변화에 대한 현대인의 사고에 심오한 영향을 주었던 "미래의 충격"및 "제3의 물결" "미래학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해박한 지식으로 문학, 법학, 과학분야에서 다섯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다. 현재 부인 하이디와 딸1명과 함께 코네티커트에 살고 있다)가 주장하는 '제3의 물결' 운동의 핵심은 개인 창조 능력의 개발에 있다. 집단 산업체제의 경직된 약점을 더욱더 보완해 나가려면 개개인의 특성과 장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자유스러운 영적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요되어진 규율에서 오는 공포나 위축감은 오히려 마이너스적인 효과를 연출시킨다. 활달하고 명랑하게 깨어 있는 분위기의 영향은 의외로 폭발적인 창조 효과가 있다.

 종교 역시 개인의 구원에 각별히 관심을 두어야 한다. 집단적 의식과 행사에서 느끼는 분위기는 안락감이나 의지성의 미묘한 쾌락이 있다. 그러나 그것에서 느끼는 안락감이나 의지성 자체는 공포나 불안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다.

 진실한 자유는 인간 개개인의 심리적 속성과 진행과정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작용은 실로 불가사의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통로는 예로부터 경락이라는 신비한 제3의 순환 체계로 표현해 왔다. 우리가 일으키는 한 생각의 통로인 이 제3의 순환은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고대의 명철한 성인이 개발해 놓은 이 경락의 생리 체계는 실제 동양의학에서 모든 진단 치료에 응용된다. 경락의 순환 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곧 인간의 심리적인 진행 상황을 이해하는 구체적 작용이다.

 이 제3의 순환 체계는 크게 몇 개의 기차 레일과 같은 통로가 있는데, 그 중 수백 개의 주요한 정착역이 있다. 이 정착역을 경혈이라고 하는데 흔히 침술치료나, 병의 반응점으로 진단하는 데 쓰인다. 이상의 14개 가운데 임맥, 독맥 두 경락을 뺀 12경은 아주 중요한 혈기 또는 반응의 통로여서 일반적으로 '12경락'이라 부른다. 이 모든 레일은 서로 상대적으로 짝을 이루고 있는데 심리적 긍정과 부정의 상반된 에너지의 흐름을 나타낸다.

 인간의 욕망은 참으로 다양하다. 식욕, 재욕, 성욕, 지식욕, 명예욕, 권력욕, 등등으로 그 욕망이 일정하지 않다. 그 만족의 정도 또한 다르며 성취되지 못한 불만이 필수적으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만족과 불만은 바로 마음의 무상성이다. 배고픔, 재물의 빈곤, 실연의 아픔, 쾌락, 상실의 공포, 불명예의 수치, 무지의 괴로움, 등등은 마음의 부정적 측면이고, 포만감, 부유함, 연애의 쾌락, 칭찬의 즐거움, 지식의 힘, 등등은 마음의 긍정적 측면이다.

 이 마음 변화의 다양성은 예측할 수 없는데, 예를 들면 부유함을 축적하다가 명예, 연애에 몰입하다가, 지식을 갈구하다가 재산 등등으로 그 추구의 모양이 실로 변화무쌍하다. 이 추구성의 커다란 세 가지 현상을 바이오리듬 학설에서는 신체리듬(Physical Rhythm), 감성리듬(Emotional Rh.), 지성리듬(Intellctual Rh)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경락 체계에서는 좀더 세밀하게 분류하고, 그 에너지의 통로까지 감별해 놓았다. 구체적으로 태음 양명경락은 신체리듬, 소음 태양경락은 감성리듬, 궐음 소양경락은 지성리듬으로 삼음과 삼양경락의 여섯가지 순환작용을 기본으로하며 이를 다시 나누어 12경락이 된다.

 인간의 제1차적 욕망인 의, 식, 주, 등의 만족과 불만은 태음경과 양명경의 작용이며, 제2차적인 성 미학적 예술적 충동 등의 만족과 불만은 소음이나 태양경의 작용이고, 제3차적인 욕망 즉 무형에 대한 욕망으로 명예욕 권력욕 지식욕 등의 만족과 불만은 곧 궐음 소양경의 작용이다. 거꾸로 사람이 일으키는 1차 2차 3차 욕망의 성쇠는 그에 해당하는 경락 에너지의 성쇠를 결정한다.

 만족 불만의 흐름에 따라 결정지워지는 경락의 허실은 정도가 지나치면 자동조절 기능을 상실하여 질병이 된다. 넘치면 다시 모자라고, 빈 것은 어느덧 차고 얻은 것도 잃어지고 낮은 것은 높아지고 끊임없이 균형을 이루는 이 자연의 순리가 곧 인간의 제3의 순환 생리와 같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제3순환기 리듬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이 아니라 허욕이다.

 배고프지 않는데도 먹고 마시고, 춥지 않는데도 껴입고, 부족하지 않는데도 재물을 긁어  모으고, 좁지 않는데도 땅을 넓게 소유하고, 자연스러운 정열 없는 음탕함이나 미적 감각 없는 퇴폐적 방탕함과 필요하지도 않는 지식을 많이 축적함, 분수없는 명예의 교만함과, 오만한 파벌의 세력을 과시함 등등 그 적당함을 잃고 있는 이것이 곧 허욕의 실상이다.

 '즐거워하되 음탕하지 말며, 슬퍼하되 상하지 말라(약이불음 애이불상)'는 공자의 교훈은 바로 영적인 제3의 순환에 표적을 맞춘 적절한 충고가 아닐 수 없다.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다.'는 옛 선사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과연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고 있는가?

 제비오는 춘삼월은

 삼삼백발 가을서리

 순리따른 저길손을

 환영나온 제삼도로

 

 (3)시간의 노예

 차분히 깨어 있어서 제자들을 관심있게 관찰하는 교사가 우리에게 아쉽다면, 지금부터 당장 스스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어리석고 교활한 망상 중의 하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누군가 나타나서 그렇게 가르쳐 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간은 흘러가 버린다. 생각과 행동이 시간차를 두면 지루하게 될 것이며, 지루함도 곧 폭력적인 에너지로 돌변할 위험한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 스스로 능력에 회의를 품는 사람이 흔히 그러하듯이, 미래에 어떤 지도자가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속임수 역시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일 뿐이다.

 도피하지 말고 솔직담백하게 정면으로 마주보는 길이 있을 뿐이다. 또한 교사를 구하는 길이나, 교사가 되는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말 것이다. 즉각 자기관찰이나 주위의 관찰을 시도한다면 바로 그 관찰의 힘이 위대한 교사의 힘있는 눈이기 때문이다.

 쉬운 길을 선택하려는 것은 또한 두뇌의 교활한 작용이어서 자칫하면 긴 시간을 방법을 찾는데만 낭비하게 되기도 한다. 많은 약속과 계획과 준비로 생을 묶어 놓은 사람도 역시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댈 것이지만 아는 시간의 노예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생이란 그렇게 단순한 것만은 아니어서 계획과 준비나 약속처럼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확실하고 명랑하게 깨어 있는 자세만이 올바른 준비태세이지, 막연한 자신의 기억이나 지식으로 미래를 판단하려 하는 것은 기억이나 지식에 의존한다는 자체가 이미 오랜 시간을 둔 것이어서 현실감이 없다. 그리하여 합리화난 현실을 외면하려고 하는 교활한 두뇌를 만들어낸다.

 청소년은 항상 정신적으로 연약해서 교사나 스승이 있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쉬운 약점이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태에 직면했을 때 누군가에게 상담하고 싶고 배우고 싶고 고충을 털어놓고 싶어한다. 그러나 누군가를 찾고 의지해서 배우려고 마음먹는 순간, 현실은 즉각 외면하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참다운 각성이다. 벌써 물으려고 생각한 순간, 시간차를 두는 습관이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러한 성향, 습관, 교육 등에 대하여 민감하게 해부를 할 수 있는 젊은이가 되어야 한다. 가장 고독하고 쓸쓸한 듯한 작업이지만 충분히 값어치 있는 일이며, 모든 창조의 정열을 샘솟게 할 원천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인생에서 스스로 혼자 배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모험인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물론 안전하려면 교육을 받아 실패가 없는 쪽으로 확률을 높이는 것이 나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패 자체가 또 하나의 경험이며 발견이라면,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안일한 성공위주의 교육이란 항상 실패에 대한 두려움 내지 회피에서 출발한 것이므로 지극히 타산적이고 교활하다. 요컨대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성공에 대한 인간의 집념이나 추구 자체를 들여다보자는 것이지, 성공 자체를 목표하는 것이 아니다.

 실패로부터 자유스러우려면 성공이라는 문제도 심각하게 검토해야 한다. 오늘의 괴로움을 참고 미래의 성공을 위해 노심초사하는 대부분의 인간 군상들은 시간에 속아 오늘과 내일의 시간차를 두고 희망을 두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에 대하여도 깊이 성찰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존재한다면 시간이 미치는 영향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아무리 검토해봐도 시간의 영향이 인류에게 나쁜 것이라 결론지어진다면, 과감하게 시간을 추방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참으로 어렵고 난해한 명제이지만 역시 청소년 시절의 순수한 지성으로 늙기 전에 수련해 놓아야 한다. 늙은 세대가 보여주는 과거 지향적인 지루한 모습이나, 실패한 인생을 뒤에 두고 다음 생의 영광이나 꿈꾸는 미래 지향적인 두 가지 모습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눈앞의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이원성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뜻이다.  인류는 항상 선과 악같이 양자택일의 결론을 즐기는 경향이 있어 왔고, 또 그러한 결론을 근거로 모든 이론과 방법이 세워져 왔다. 현실을 개혁해야만 한다고 부르짖는 개혁의 근거는 알고보면, 부정적인 견해를 근거로 하는 소리임에 틀림없다.

 또한 현실에 만족하라는 가르침의 근거를 보면 긍정을 기본으로 하는 주장일 뿐이다. 긍정이나 부정없이 그저 지켜보는 작업이 잘 납득이 안가는 극단 지향적인 인류는 항상 방황하고 있을 뿐이다. 모순과 갈등으로 뭉쳐진 실제를 무시한 채 자신의 편리한대로, 혹은 습관 전통대로 판단하려는 경향은 항상 시간의 노예를 만드는 원인이다. 가장 영향받기 쉽고 예민할 수 있는 시절에 참다운 진리의 눈을 뜬다는 것 이외에 더 아름다운 작업은 없다.

 긍정이나 부정없이, 시간차를 두지 말고 활발히 깨어 있는 사업을 끝까지 추구하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뭔가한번 보여준다

  이악물고 뛰는여치

  낙엽지는 가을황혼

  더듬이가 말하잖니?

 

 (4) 콘크리이트 문명

 흙도 숨을 쉬어야 한다. 도시 전체가 온통 콘크리트 아니면 아스팔트이다. 지구를 온통 싸 발랐다.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지구도 숨을 쉰다.

 남극 북극으로 빨려 들어간 기운은 다시 내부로부터 뿜어 나온다. 그 쉬는 피부구멍이 곧 지표이다. 숨구멍을 틀어막았으니 도회지 땅은 죽은 땅이다. 죽은 땅이니 생동감이 없다. 생동감이 없으니 권태가 빠르다. 지루함과 권태는 도회인의 전유물이다. 변화가 없으니 날로 말초신경적인 자극의 변화를 시도한다. 나무를 심는 공간도 눈이 무색할 정도로 좁고, 그나마 콘크리트로 싸발랐다.

 동양적 소견으로 보면 땅은 중앙토이다. 토는 곧 인체의 비장에 해당한다. 토기 즉 흙의 기운을 접촉하지 않는 인간은 차차 비장의 기운이 약해진다. 비장이 약해지므로 모든 소화기능의 장애가 온다.

 정신적으로는 의지가 박약해진다. 사색력이 부족해진다. 쓸데없는 의혹이 많이 생긴다. 온갖 번뇌망상이 들끓는 원인이 곧 비장 중앙토의 기운이 부족한 데도 있다는 말이다. 도시인의 태반이 신경성 소화불량이라는 병명을 이마에 붙이고 있지 않는가? 도회지에서만 자란 아이들이 그저 예민하기만 하고 지구력이 없고 사색능력이 없는 것은 일단은 콘크리트 문명에도 그 책임이 있다. 흙에서 나온 것은 흙으로 돌아가며 흙과 친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게다가 매연으로 가득차있는 이 도시는 더욱 더 숨이 막힌다. 나무와 흙이 풍부한 교외나 시골이나 산으로 즐겨 피난(?)하는 이유는 생리적 요구이다. 생체리듬의 부조화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각성을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내면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인류는 스스로 자신을 파멸로 이끌게 될 것이다.

 이 격동하는 세대에서는 침착한 사고 능력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더 풍요로운 물질의 향락과 소비를 조장시키면 그만큼 진실은 멀어질 것이다. 살아 숨쉬는 흙은 콘크리트보다 약하다. 인간의 영원성 추구는 콘크리트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저 오래가면 좋은 것인 줄 안다. 죽지 않는 물건을 만들고 싶어 야단이다. 죽지 않는 물건이란 역시 생명도 없지만, 도대체 영원성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숨쉬는 땅은 수시로 변하면서 수용한다. 그러면서 모든 씨앗의 자궁이다. 포근하고 광활한 땅의 은혜는 묵묵히 담아주고 자랑하지 않는다. 콘크리트는 견고하여 수명이 길기는 하나 생명이 없다. 생명이 없는 물건을 온통 상하로 깔아놓고 사는 견고망상의 세대이다.

 그러므로 고집장이의 세대이다. 고집은 항상 자기의 생각만을 내세운다. 이해가 없으며 아량이 없다. 세존께서 제시한 수행방법론 중 지평등관이 있다. 땅의 분별없는 포용을 보고 깨달아야 한다. 오물과 보석이 동시에 대지의 품에 있다. 그리고 모두를 감싸준다. 모두를 키워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씨앗의 개성을 존중하여, 그대로 키워준다. 위대하고 넓은 땅의 덕을 배울 자연환경이 필요하다. 자연 속의 학교가 필요하다. 자연속의 사무실이 필요하다.

 플라스틱 꽃으로 눈을 속인 장식은 피곤하다. 생사의 변화가 있는 것이 진리인데 어리석은 망상으로 진리를 거부한다. 살려고만 하는 자는 죽는 것이요, 죽을 줄 아는 자만이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삶을 사랑하려면 죽음도 같이 사랑해야 한다. 사계적의 변화가 뚜렷한 금수강산은 그대로 살아 있는 수도장이요, 자연의 관찰 장소이다. 이 시대는 무엇인가 유동적이고 변화있는 환경을 가져야 한다. 아니! 자연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면 된다. 인간의 어리석은 견고망상으로 온통 지구가 숨죽기 전에 무언가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머리를 써서 손댈수록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바로 자연의 경우가 그렇다. 더이상 머리 쓰지 말자! 인위적이고 조작된 사랑분별의 지혜는 항상 파괴와 부자연을 낳는다.

 '무사인이 귀하다'라는 임제선사(?--867 당나라 진주 임제의 현, 조주 남화사람, 속성은 형씨, 황벽을 이어 임제종의 조가 되었다. 어려서 출가하여 제방을 다니면서 경륜을 연구하다가 황벽스님에게서 그의 법을 잇고, 나중에 하북 진주성의 동남호 타하반의 임제원에서 널리 교화를 폈다. 당의 의종함통8(887)년 4월 10일 좌화. 저서로는 임제혜조선사어록1권이 있음)의 말씀이 있다. 일이 없기가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한 생각을 쉴 수 있어야 자연의 친구가 되며 대지의 덕을 배우게 된다. 견고망상의 산물인 콘크리트보다 더 강한 것은 무엇인가? 분명히 견고함으로 말하면 금강석이 더욱 강할 것이다. 지평등관을 성취한 금강 불괴신의 여래만이 능히 콘크리트 문명을 죽이고도 살리리라.

  용과뱀을 섞어만든

  금까마귀 아침식사

  외눈박이 도깨비가

  훔쳐먹고 졸도했네

 

 (5)안경지옥

 무거운 안경테를 자꾸 들어올리는 젊은이의 모습, 갈수록 늘어만 가는 근시안과 난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오히려 멋으로 생각하는 풍조라면 문제가 없겠지만, 안경은 진실로 귀찮은 물건이다. 필자의 말을 듣고 가슴 아플 분들도 많겠지만, 어쨌든 진실을 이야기해 보자.

 근시안의 동양의학적 원인은 음실양허다. 처방은 주로 기를 보충시키는 약을 쓰게 된다. 원시안은 물론 그 반대로 양실음허요 주로 혈을 보충시킨다. 말은 간단하지만 무슨 뜻일까? 쉽게 풀어보자. 음과 양이란 모든 기능의 상대적인 작용을 표시한다. 간단한 예를 들면 어둠은 음, 밝음은 양, 달은 음, 해는 양, 물은 음, 불은 양, 욕심은 음, 분노는 양 등이다. 근본적 정신 차원에서 보면 나는 음, 너는 양이다. 따라서 자아의 강화가 곧 음실증인데, 타인과의 관계를 긴장으로 몰고간다.

 음실이란 말 그대로 '나'라는 생각이 쌓여 내 가까운 곳만 보는 것이며,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아집은 근시안이다. 남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사고나 미래 또는 사후의 일에 무관심하고 찰나주의나 금생위주의 사고는 곧 근시안이다. 반대로 남에게 의지한답시고 가까운 자기를 등한시하는 무력한 사고는 즉 양실음허의 증상이며, 흔히 노인들의 지나친 의존성과 사후세계나 생각하는 미래 망상의 경향은 자신을 잃게 되고 현실의 일은 무시한다. 말 그대로 원시이다.

 이 경우 멀리만 보려하고 가까운 것에는 서툴다. 근시와 원시는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볼 수는 없다. 먼 미래의 일만 꿈꾸는 원시의 어리석음이나 코앞의 일만 꿈꾸는 근시나 모두 음양리듬의 조화를 잃었다. 급증하는 근시의 현상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오직 개인주의와 자아 확대, 찰나주의의 재빠른 출세욕 등등의 아상은 엄청난 에너지의 낭비를 가져온다.

 타인과의 긴장된 경쟁과 과잉 자기보호 등은 어두운 근시문화를 낳는다. 자기의 꿈을 잃은 노인성 문화도 문제이지만 자기의 꿈만 먹고 살려는 근시안의 문화도 문제이다.

 자기의 희망 꿈 욕망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전쟁을  불러일으키고야 만다. 근시안을 뿌리 뽑으려면 청소년 교육을 자연스럽게 바꿔야 한다. 남보다 나의 우월을 강조하는 경쟁위주 시험위주의 교육은 지양되어야 한다. 타고날 때부터 근시 원시가 어디 있겠는가? 가장 귀중한 초등교육 시절부터 모든 위험의 씨앗은 뿌려진다.

 책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근시가 된다는 미온적인 학설도 믿기 어렵다. 문제는 가까이만 들여다보고 있는 어린이의 집착적인 성격이다. 주위를 외면하고 자기자신의 즐거움에만 몰두하는 습관은 곧 음실증이다.

 게다가 뜻대로 안될 때는 마음이 산란해지니 온통 혼란된 마음이 곧 난시의 원인이 된다. 삼계가 오직 마음뿐이니, 한 생각이 모든 병의 원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날로 늘어가는 근시와 난시의 현상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엄청나게 불길한 징조인 것이다. 이대로 나가면 모든 세계가 분리된 교육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아무리 머리가 좋다해도, 오직 나 밖에 모른 근시안 천재라면 폭력적이 될 것이다. 너와 나를 갈라놓고 경쟁과 비교와 시험위주의 교육을 조장해 온 교육은 머지않아 그 과보를 톡톡하게 치러야 할 것이다. 풀뿌리의 힘을 빌리기 전에 이 가증스러운 세대는 참회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무거운 육신의 업에다가 더욱 더 무거운 안경의 짐을 씌우고서도 어찌 육근의 청정을 바라겠는가?

 안식의 작용은 번뇌의 근본이다. 화살과 같이 빨라서 전간사라 비유했는데 더욱 더 분주해졌으니 쉬기는 어찌 쉬겠는가? 그렇다면 눈의 가장 좋은 친구는 무엇일까? "눈은 수면을 약으로 하고 여래는 열반을 약으로 하나니"라는 세존 말씀이 있다.

 억지로 잠을 이겨내려는 충혈된 눈으로 지긋지긋한 시험의 지옥을 치르는 어린 학생과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부모와의 공동작품이 곧 근시와 난시가 아니겠는가?

 답답한 이 세대여! 경쟁의 지옥에서 지치다 귀중한 눈을 잃으니 차라리 어른 아이 모두 Ego 없는 단잠을 이룰 생각이나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짙은안개 유리지옥

  허공한점 찍는바보

  해골속의 푸른눈이

  벼락칠때 깨려는가?


 (6)폭력

 누구든지 한번쯤 마음껏 두둘겨 부수고 싶은 때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청소년시절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수치의 감정 등은 여러가지 복잡한 형태로 나타난다. 교양있는 어른들이라고 해서 더욱더 폭력적인 생각이 일어나지는 않는가?

 폭력이 이 사회의 큰 문제다. '큰 문제다'라고 떠들수록 폭력에 대한 호기심이나 관심이 쏠리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폭력적이 되어버린 모든 원인을 청소년들에게 돌려버리는 무책임한 어른들은 오히려 가공할 무기나 전쟁의 씨앗을 심고 있다. 이유없는 폭력적 분노라고 이름짓는 청소년이 주먹과 몽둥이와 칼을 휘두를 때, 단추 하나만 누르면 전세계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두뇌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청소년의 아버지 어머니 세대인 것이다.

 폭력을 어떻게 보아야할 것인가?

 어른들이 그렇게 교활한 폭력을 휘두른다 해서 어른들의 폭력성을 증오만 하고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교묘하게 위장된 폭력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들춰 기성세대를 공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먼저 지구상에서 폭력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청소년의 폭력문제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혹시 나의 폭력성에 대하여는 교묘하게 위장을 하고 변호하면소도 남의 폭력에 대해서만 공격하고 있지는 않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특별히 객관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객관적인 사고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멀리 보지말고 가까이 자신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폭력을 증오하는 사람이 폭력을 그치게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증오하는 그 자체가 또 폭력을 유발시키는 동기가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폭력을 사랑하는 사람이 폭력을 그치게 할 수는 더욱 없다. 모든 문제를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역시 폭력의 조장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겉으로는 평화라든가 질서라든가 명분을 내세울지도 모르지만 방법에 있어 폭력적이라면 결과는 예측할 수 없는 잠재적인 위험을 가지게 된다. 모든 폭력적인 상태를 가만히 지켜보라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숨어있는 폭력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심지어는 자살충동으로까지 발전하는 교묘한 변형의 형태인 폭력성을 주시해 본다는 것은 실로 끈기있는 사람만이 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그 누구도 자신 속에 폭력성이 하나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칼과 몽둥이나 총을 들어 죽이거나, 주먹으로 공격을 하여 상해를 입히지 않았다 해서 폭력이 행사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욕구하는 그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 대하여 강한 질투나 시기를 느꼈기 때문에 상대방을 뒷전에서 모함한 일은 없는가? 가족 중에 한 사람이 자기의 뜻을 거슬리기 시작하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없는가? 예쁜 꽃을 보면 그냥 그대로 살려 놓고 보지 못하고 꺾어서 집안의 화병에 꽂아 놓으려는 충동은 없는가? 귀여운 동물을 묶어서 데리고 다니면 괴롭히지는 않는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여러 가지 형태의 폭력이 우리에게는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미묘한 형태로 나타나는 폭력의 근본은 무엇일까?

 아마 근본을 찾기 위해서는 대단한 희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폭력을 수반하는 욕망이라는 것은 너무도 다양해서 일일이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힘이 세고 강건한 사람이 꼭 폭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지식인도 대단히 폭력적일 수가 있다. 학문적인 견해가 상충할 때 입에 거품을 물고 공격해 버리는 학자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종교인도 예외일 수는 없다. 교파나 교주가 다르다고 해서 마구 저주나 공격을 퍼붓는 것 또한 커다란 폭력이기 때문이다.

 또한 정당이 다른 정치인의 투쟁, 사상의 갈등, 민족 국가간의 전쟁, 지역간의 질시 등등이 모두 모양만 다른 폭력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폭력을 주고받는 상황은 항상 존재하는데도 겉으로는 평화를 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깊은 내면을 응시해 볼 때 폭력성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며, 진실로 폭력이 사라지기를 소원하면서도 그것이 어려운 일임을 깨닫게 된다.

 어떠한 동기든지 욕망과 기대감은 불만과 실망을 수반하는 것이며, 불만과 실망은 폭력의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 욕망이 지식욕이나 권력욕이나 명예욕 같은 미묘한 욕망일수록 여러가지 형태의 폭력으로 나타난다. 무관심한 냉대나 멸시, 음모, 저주 등등의 변형된 형태의 폭력은 대단히 무서운 독을 품고 있다. 심지어는 전염성도 지니고 있어서 무심코 받아 들이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교활한 폭력주의자가 되고만다.

 강력한 듯 보이는 이념이나 종교나 사상에 도취되어,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갖게 하는 것도 매우 심각한 형태의 폭력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성적인 욕망의 불만에서 오는 폭력, 의식주의 기본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의 폭력 등도 모두 우리가 깊이 이해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복잡한 욕구가 모조리 이해되어지려면 상당한 시간과 정력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청소년에 대한 교육은 이러한 근본적 이해를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 고민하며 분투노력하여 폭력없는 마음의 개발에 정진할 수밖에 없다.

 지금 세상의 어느 모퉁이에서는 나날이 전쟁이 증가해 가고 있다. 과연 갈라질대로 갈라진 이 지구촌에 어떠한 방법으로 폭력을 종식시킬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는 극도로 중요한 문제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특별한 주의력을 필요로 한다.

 평화의 어떠한 이미지나 색깔을 미리 가지지 말고, 지극히 명석한 눈으로 스스로의 폭력성을 면밀히 주시하는 자세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줄지 모른다. 이 길만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수동적이고 연약한 듯 보이는 작업이지만, 절대로 쉬운 작업이 아니며 이 길만이 해결의 열쇠임을 깨달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구대천 아비원수

  씹어먹고 눈파먹어

  천상천하 맹세하자

  뻥뚫린눈 해골염주

 

 (7)지구촌의 전쟁

 유태인의 경전 "탈무드"에 수수께끼가 있다.

 몸통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기를 둘로 볼 것인가? 하나로 볼 것인가? 몸이 하나니 둘로 볼 수도 없고, 머리가 둘이니 하나라고 볼 수도 없다. 탈무드의 가르침은 흔히 비유로 잘 나타나진다. 이 문제의 골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만일 뜨거운 물을 몸에 부어 보아서, 두 머리가 동시에 '뜨겁다'고 하면 하나요, 하나는 뜨겁다고 하는데 다른 하나가 모른 체 한다면 이것은 둘이다'라는 탈무드의 해답은 참으로 뜻이 깊다. 유태인으로서 한핏줄이라면 동족의 아픔을 같이 느낄 때만이 같은 민족일 수 있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이 교훈이 유태인들만의 이야기일 수는 없다. 이 지구에 함께 살면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모른 체 한다면 어디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가?

 유마거사는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했다. 같이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이 마치 무심도인의 경지나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면 커다란 잘못이다. 민족끼리는 커녕 한 식구마저도 서로 모른 체 외면하는 개인주의의 세대에서 필요한 것은 깊은 관심이다. 직장은 싸늘하고 냉소적이며 무관심한 분위기에 있다. 정열적이고 자유스러운 영혼으로 입사해도 시간이 갈수록 차차 물들고야 만다. 직장의 윗상사나 선배들은 처음에는 '다 그렇다'는 식의 표정으로 신입사원을 지켜본다. 처음의 정열이 무모하다는 것을 차차 깨닫게 되면 점차로 무표정한 직장인의 가면을 쓴다. 피차 편리해지자는 것이다.

 너무 회사에 충성을 바치는 태도도 빈축을 사고, 이해할 수 없는 분위기에 반항하는 것도 경멸을 살 뿐이다. 나라고 하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타협을 한다. 타인이 아파도 관심이 없고 즐거워해도 같이 즐겁지 않다.

 이러한 정신병적 증상인 무관심은 대단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제법 싸늘한 지성을 가진듯 하지만 실은 무관심의 축적에서 오는 병일 뿐이다. 특히 학문적으로나 직업적으로 전문분야 이외에는 '나는 모른다'는 식의 전문교육 위주의 병폐는 심각하다. 심지어는 생채유기체인 의학에 있어서도 각각 분과가 되어 있는 현실이다. 분과적 관찰로 전체적 통일성과 상호 연관이 등한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간장이 아픈데 심장이 같이 아프다고 우는 것은 당연한 인체의 생리이다. 만일 같이 울지 않는다면 하나의 인체라 볼 수 없다. 이러한 점은 깊이 반성해야 한다. 같이 울지 않는다면 이미 분리되었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같이 울고 웃을 수 있는 살아있는 인간관계의 정립이 곧 하나를 아는 지름길이요, 구원의 소식이다. 그래서 두 머리의 아이들은 자신이 하나임을 깨닫게 되니, 그것에는 무슨 심각한 대립이 있을 수 없다.

 시시각각 한쪽 머리가 심히 뜨겁다고 아우성치는데, 우리는 하나인가? 둘인가?

  둘이아닌 하나그놈

  돌아갈곳 어드메요?

  묻는곳을 밟아가니

  만파식적 피리소리


 (8)이상비대증과 지루감

 부인의 비대증으로 지루해진 삶이 있다면 거짓말인가? 동창의 상담은 슬쩍 지나가는 말같이 하면서 심각한 기색이 농후했다. 사실 비대한 사람에게는 웬일인지 권태감이나 지루함이 풍겨온다. 지루함이란 어떤 괴물이기에 자꾸 인간을 좀먹어 가는 것일까. 지루하기 때문에 먹어대는 것일까, 먹어대기 때문에 지루한 것일까?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보았지만, 배고픔과 배부름이란 똑같이 괴로운 일이다. 풍요한 시대이다 보니 마음껏 포식하는 경향이 있다. 게슴츠레 나태해진 눈빛에다 뒤뚱뒤뚱 걷는 어린이들도 눈에 띄게 많다. 많이 먹는 것만이 과연 비만증의 원인이 될 수 있을까?

 비대증으로 고민하는 왕이 세존께 호소했다.

 "살이 빠지는 비결을 일러주십시오"

 물론 음식을 적당히 맞추어 먹고 운동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올바른 가르침이지만, 세존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거만한 생각을 버려라!"하셨다. 거만한 생각이 곧 비만증의 원인이라면 좀 놀라운 사실이 아닐까? 꼭 입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모든 원인이라 생각하는 어리석은 이 시대에는...

 한 생각 거만함을 먹는(?)것이 뚱보의 원인이라면 생각먹는 법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거만한 생각이란 어떤 유형의 것일까? 모든 기준이 자기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생각 즉 '나도 있다', '나도 가질 만하다', '나도 잘났다', '나도 한다', '내가 최고다', '나야말로 위대한 사람이다'등등이 두려움 없는 거만함이다. '나'라는 생각이 넘치고 넘쳐서 마치 웅덩이에 물이 고이듯이 몸과 마음에 고이니, 세존께서 교만한 생각을 오줌물 피하듯이 피하라고 경계하셨다.

 항상 관계 속에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나와 너를 함께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항상 남(타인)의 입장에서 매사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사람은 거만할 리가 없다. 살빼는 약, 헬스클럽, 사우나탕, 안마, 지압, 조깅, 나날이 늘어만 가는 껍데기 치료방법들은 결코 거만의 치료가 못된다.

 흔히 한의원으로 살 빼는 약이 없는가 상담해 온다. 물론 체중을 조절해 주는 약이 왜 없겠는가마는 근본적으로 잘 안되는 것은 웬일일까? 바로 생각먹는 법을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한 생각 잘못 먹어 지나치게 핏대를 올리다가 고혈압, 중풍으로 반신불수가 되는 것은 인정하면서, 한 생각 잘못으로 못난 뚱뚱보가 되는 도리는 왜 믿지 않는지 모르겠다.

 자식에게 그저 자기가 최고이며 우리 집안이 최고라고만 믿게 하는 어리석은 부모의 교육은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 한다. 내가 최고라면 남(타인)도 최고라고 인정해 주어야 한다. 내게 있다면 남에게도 있다. 있는 것을 의지하여 없는 남을 멸시한다면 언젠가 나도 멸시를 받는 법이다.

 군더더기 살을 빼고 싶다면 누구나 다 깊이 가족, 주위, 사회, 국가, 인류, 더 나아가서는 전 중생세계에 이르기까지 지루함 없이 사랑의 관심을 먼저 주고 볼 일이다. 한 생각 넓게 관심을 쏟다가 더 넓힐 것도 없는 경지에 도달하면 지루함이 사라진다. 지루함이란 모든 이기적 욕망과 실현과의 시간차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기다림이란 이기적인 인간의 욕망에서 만들어낸 교활한 인내심이다.

 현실은 뜻에 맞지 않는데 미래의 좋은 꼴을 보고 싶어 기다리는 것이다. 게임이 늦어지면 지루한 관중은 갑자기 이것저것 사먹거나 마셔대고 씹기 시작한다. 애인을 기다리다 지루해진 연인은 갑자기 성냥을 꺾기 시작한다. 손톱을 씹기 시작한다. 남편을 기다리다 지루해진 여인은 마구 먹어대기 시작한다. 때가 아닌데도 마구 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모두가 다 같은 현상이다. 지루함이란 시간이다. 시간이란 인간이 고안해 낸 교묘한 고통의 창작이다.

 남편이 들어오기 전에 혼자 지루해질 수밖에 없는 여인은 마구 먹어댐으로써 지루감을 잊으려 한다. 이런 식의 도피는 잠자거나 부수거나 먹어대는 형태로 나타난다. 차라리 무서운 일이라도 생기면 지루감은 없어진다. 공포영화라도 보면서 오싹오싹 전율을 느끼는 편이 차라리 나을 지경이다. 무엇인가를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지신 스스로는 무력해진 증거인데 스스로 활짝 깨어 있을 수 있다면 과연 지루할 수 있을까? 즐거웠던 과거의 회상에 잠기는 여인은 현실이 지루하다.

 소설과 꿈속의 일처럼 멋진 일은 결혼생활에서 안 일어난다. 처녀시절 꿈꿔왔던 환상 속의 결혼생활이 알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권태스럽고 지루해진 것이다. 남편은 더이상 자기의 연인이 아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엄청난 지루감과 허무를 남긴 채 못다한 욕망의 변형은 무지무지한 식욕으로 둔갑한 것이다. 무엇에 의지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주체성을 상실하고 또 시간차를 두게한다. 숱한 욕망이 쌓인 시체가 지루감임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라즈니쉬의 책(Journey Toward the Heart) (라즈니쉬 지음 Journey Toward the Heart(마음으로 가는 길)은 수피사상을 다루는 열편의 화려한 글로 이루어졌으며, 그 열편은 저마다 하나의 짤막한 일화를 내놓은 다음 그에 따른 사상을 전개 시킨다)에 나온 '수피'의 예화를 소개함으로써 얘기를 끝맺는다.


 한 남자가 의사에게 아내의 불임증을 호소했다. 의사는 여자의 맥을 짚어보더니, "40일 안에 당신이 죽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당신의 불임증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 여자는 어찌나 걱정이 되었는지 그후 40일 동안 전혀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예고한 날에 죽지 않았고 이 문제를 남편이 의사에게 따졌더니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

 "예, 나도 그건 알아요, 이제 부인은 임신을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남편은 어째서인가 물었다. "당신 부인은 너무 살이 쪘고 그래서 임신이 방해가 되었습니다. 나는 죽음의 공포 이외에는 어떤 것도 부인을 음식과 떼어 놓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 이제 부인은 치료가 되었습니다."

  유아독존 한물건은

  너나없이 지닌구슬

  공포삼겹 얻은조롱

  흑백나눈 자업자득


 (9)사망 보험

 S종합병원의 시체실. 냉동되어 있는 갓난아기의 평화스러운 모습-- .

 이것은 괴기소설의 한 토막이 아니다. 수일 전 필자가 직접 체험한 현장이다. 삼베로 만든 버선까지 곱게 신기어 작은 관에 담는다.

 아주 익숙한 솜씨의 시체처리 담당자 하는 말.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있나요!"

 이건 차마 밖에서 못들어 오고 있는 가슴아픈 부모의 심정을 모르는 소리다. 부모의 눈물겨운 마지막 정성을...

 아쉬운 죽음이 어디 이 집뿐이랴! 일찍 죽으면 일찍 죽는대로, 늦으면 늦는대로 죽음 앞에 아쉽지 않은 부모 형제가 있을까?

 지구상의 의사가 다 동원되어도 못 다스리는 죽음!

 너무나 가까운 현실인데도, 가장 멀리 밀어제껴 놓은 불편한 관계의 사신!

 커다란 저택과 유복한 집안의 손녀는 부귀영화를 못누려 본 채 갔다.

 "참! 그 아이도 언간히 복이 없군요!" 이것은 이 집안의 다복함을 너무나도 잘 아는 운전기사의 독백이다.

 거의 실신하다시피 되어버린 젊은 어머니와 달래는 젊은 아버지.

 죽은 딸이 첫아이였고, 이제 겨우 백일이 지났단다. 한참 귀여울 때가 아니던가?

 우리는 막연히 의사를 믿는다. 죽음까지도 어찌해 주려니 생각한다.

 우리는 막연히 타인을 의지한다. 모든 문제에는 누구나 해결사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혼자 왔다 혼자 떠나는 인생의 나그네인데도 불구하고, 저승길을 누군가 가르쳐주고 미리 예비해 두고 또 예방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삶 속에서 잃은 것은 다시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죽음이 사람 자체를 몽땅 앗아가 버리는 데에는 아찔하다.

 길 없는 캄캄한 벽을 느낀다. 의지하거나, 기대하거나, 애착하거나한 만큼 마음은 와르르 무너진다.

 필자의 싸늘한(?) 충고는 이러했다.

 "일찌기 옛날 말씀에 부모 앞에서 먼저 죽는 자식은 숙생의 원수랍니다!"

 "댁의 따님은 단지 원수에 불과합니다"

 "잊으십시오!" 이러한 무심한 말은 모두 옛사람의 지혜로운 방편설일 뿐이다. 애착을 끊어 주기 위해 죽은 자는 죽은 자지만, 담담하지 못한 산자의 망녕된 애착을 끊어주는 것이 우선은 큰 문제이다.

 이것은 분명히 죽은 혼령의 천도에 해로운 영향을 미친다.

 "시체는 여기 있는데 주인은 어디로 갔을까?"

 "뭐라고!?"

 칠현녀가 숲속에서 놀다가 하루는 시체를 보았다. 그중 한 명이 위와 같이 질문을 하자, 나머지가 위와 같이 반문하면서부터 자세히 관하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의사의 업은 삶의 유지를 위한 건강의 지혜개발이지, 죽음까지 해결하지는 못한다. 장의사가 담당하는 시체처리와 모든 형식적인 절차는 형이하학적인 죽음처리이다. 누가 죽음에 대비해야 하며, 누가 죽음을 처리해야 하겠는가?

 전염병이나 재난에 대비하는 백분의 일만큼이라도 죽음에 대비하고 있는가?

 이것만은 무의식적으로 저 먼나라를 꿈꾸는 잠꼬대 정도로 생각한다.

 아니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설마 그런 불길한 일이, 죽음에 과난 얘기는 재수없는 화제라고 고개를 돌릴 정도로 이것은 불길한 현상일 뿐인가?

 종교가나 철학자만이 죽음의 해결사일까? 분명히 나에게도, 부모에게도, 자식에게도, 남편, 아내, 형제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오는 이 진실을 눈감고 있으면서.

 "머리에 화롯불 인듯 공부하라!"는 옛 선사의 따끔한 충고. 죽음공부는 누구나 스스로 해야한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몇 가지 이론이나, 내생에 대한 믿음 정도로 간단히 마음을 위로하려는 교활한 습성은 죽음의 공포를 피해 보려는 술책에 불과하다.

 죽음에는 공포의 이미지가 수반이 된다. 공포는 소유에서 출발한다. 소유는 쾌락을 낳는다. 삶을 즐기며 애착했다면 죽음을 슬퍼하여 무서워하리라. 그래서 마지막까지 마음을 위로하고 싶어서 갖가지 종교적 방편에 의지하고 만다.

 공포와 쾌락은 그냥 놓아둔 채 말이다. 공포를 없애려면 삶도 없애야 한다. 도대체 삶이니 죽음이니 실제로 있지도 않는 것을 즐거워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만약에 삶에서 더한 것이 없다면 죽음이 앗아가 덜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은 자꾸 무엇을 더해 가는가? 더말 것도 덜할 것도 없는데 자꾸 쌓아놓은 소유는 무슨 번뇌의 함정을 암시하는 것이까?

 한 줌의 흙이 되어버리는 이 몸뚱아리는 본래 내것이라 할 수 있는가?

 몸뚱아리를 운전하는 놈이 떠나버리면 여우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인간의 냄새나는 시체, 시체는 어째서 스스로 보고 듣지 못하는가? 무엇이 그렇게도 부모 앞에서 웃고 재롱을 떨고 갔는가?

 울고 애통해하는 오늘의 이 물건은 무엇인가?

 웃을 때는 빛을 보이더니 울을 때는 어두움을 보이는 이 주인공의 정체는 무엇인가?

 죽었다느니 살았다느니 생각하는 이 주인이 어찌 죽고 살 수 있겠는가? 쓴맛 단맛을 보는 혓바닥을 어찌 본래 쓰다 달다 할 수 있는가?

 빨강 파랑을 보는 이 눈이 어찌 빨갛고 파랗다 할 수 있는가?

 한 번 자세히 살펴보고 살펴봐야 할 일이다. 목이 말라 타죽어 가는데 그제서야 우물을 팔 수는 없고, 배가 고파 다 죽어가는데 이제 볍씨를 심을 수도 없지 아니한가? 죽을 때가 다 되어서 교회가고 절에 가고 죽음과 타협에 보려하나 이미 때는 늦는다.

 예고 없는 죽음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청소년 시절부터 생사해탈의 용맹정진을 해야한다.

 보내는 자와 떠나는 자가 서로 생사를 달관한 그 소탈하고 담담한 아름다움은 도의 극치이다.

 사망보험은 산 자만의 위안이지만, 남 몰래 닦은 생사해탈의 수행은 죽은 자와 산 자의 공동 사망보험이 아니겠는가?

  염라대왕 초대받은

  귀한길손 소맷자락

  수고로이 만류마소

  법왕궁의 황제라오


 (10)A.I.D.S소고

 A아! I이제는 D다 S살았구나! 시중의 풍자적인 말장난대로, 인류의 질병도 이제는 갈대로 다갔고, 올대로 다 왔다.

 후천성 면역 결핍증!

 원인불명의 꺼지지 않는 열과 체중감소와 더불어 흉칙하게 번져가는 피부의 반진, 부스럼, 출혈, 탈모 혹은 치아이탈, 기억력 감퇴, 두통 등 심지어는 전신마비까지 일으키는 이 세기말적인 A.I.D.S!

 후천성 즉 선천적이 아니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본래 타고날때부터 유전적이라면 부모나 선조를 원망해도 될텐데...

 후천적이라! 이것은 무슨 말인가? 잘 낳아놓고 잘 키워놓았는데, 제 스스로 잘못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제 스스로--자업자득 스스로 몸관리 잘못한 인과응보라는 말이다.

 어떻게 잘못했는가?

 오도되어진 의학상식은 혹시 없는가?

 인간의 가장 가까운 존재는 바로 자신의 개체인 몸이다. 일생동안 자신이 끌고다니면서도 그 신비는 오직 의사나 생물학자만이 풀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몸과 맘을 멋대로 부려놓고서는 오직 치료는 의사의 영역이라고 믿으며, 또한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몸과 맘을 파괴적으로 사용하고서는 이의 회복은 오직 의사의 분야로 내맡겨 버린다.

 영국의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세계 A.I.D.S대책모임에서 선물로 받은 것이 무엇인지 독자께서는 아시는가?

 놀라지 마시라!

 '콘돔'바로 이것이다.

 세계 과학자들의 모임에서 주는 선물이 겨우 이 콘돔일 수밖에 없다는 이 현실이 아프다. 참으로 아프다.

 어느 학자의 연설--

 "우리는 결국 인간의 생활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는 데에서 이 A.I.D.S 해결의 실머리를 풀어야 합니다!"

 이는 무엇인가? 바로 예방의학적인 차원밖에 치료방법이 없다는 말씀인데, 그 예방의학적 차원이란 바로 인간의 윤리성 도덕성의 회복 내지는 잘못된 악습을 교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A.I.D.S병균은 곧 인간의 비자연적이고도 보기에 혐오스러운 동성연애의 산물이다. 남녀간의 정상적인(?) 성행위도 지나치면 그 가운데에서 매독과 임질이라는 고약한 질병을 불러들인다.

 인류 최초의 매독은 어디에서부터 왔겠는가? 자세히 그 근원을 조사해본다면 최초의 매독 발명자는 음탕했던 한 남녀사이였을 것이 틀림없다.

 음과 양의 접촉은 이미 하늘이 허락한 바, 서로의 부족을 보충시키고 잃어버린 반쪽과의 화합을 통해 전우주적 합일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주제는 곧 전체성으로의 회귀본능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과정에서 지나친 탐닉이 병으로 발전되어 탈이 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새발의 피도 안된다. 하나의 A.I.D.S는 일만종류의 성병이라도 얘기거리가 전혀되지 않는다.

 대책이 없는 이 A.I.D.S맹독병균의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좀 침착하고 냉정하게 그 근원을 조사해 보아야 한다.

 A.I.D.S병균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늘에서 왔는가? 땅에서 왔는가? 아니다! 이는 결코 인간 스스로의 몸에서, 마음에서 만들어진 창작품이다.

 최초의 비자연적인 섹스의 몰두에서 탄생한 이 위대한 악마의 탄생은 틀림없이 한 인간과 한 인간과의 접촉에서였다. 굳이 동성연애가 아닌, 이성간의 성행위라도 결함이 있는 접촉에서 생겨났을 것이라는 말이다.

 비자연적이고도 결함이 있는 성행위란 과연 어떠어떠한 것인가?

 한번 살펴보자.

 이는 성을 오직 몸의 접촉과 마찰 운동내지는 출입등의 물리적 물질적 가시적 운동이라고 착각하는 오류에 있다. 성은 양극(+)과 음극(-)의 만남인데 그 양극과 음극 각각인 남자와 여자라는 개체는 스스로 어차피 반쪽이므로 독자적인 개성을 지닐지언정 결코 스스로 완전할 수 없다. 더 나아가서는 동성끼리라도 서로 성격이나 취미에서부터 육체의 생김새에 이르기까지 서로 그 장단점을 나누어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우정을 긴밀하게 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무의식은 항상 자신의 결점을 보충하고 싶어하고 또 상대의 단점을 보충시켜 줌으로써 완전을 향한 행진을 항상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으로의 행진!

 나는 남자, 나는 여자라면 그 자아의식(Ego)으로부터의 해방은 오직 헌신적이고 진실한 사람에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끊임없는 마찰, 헐떡거림, 피스톤같은 출입운동을 성이라 여기고 있는 관념은 저 서양의 물리학적 기반으로 세워진 허구 과학문명의 가공적 학설에 의한 착각 때문이다.

 이 어마어마한 인간의 몸과 마음의 결합체인 유기체를 오직 몸 즉 물질의 가시적인 물건의 조직체로 파악하는 그들의 턱없는 착각때문이다.

 사랑은 육욕적 마찰의 부딪힘 그리고 숨막히게 발광하는 행진의 연속이 아니다.

 사랑은 마음의 교환에서 출발하는 창조주와의 만남이다.

 어느 가수의 노래 '우리는'에서처럼 마주잡은 손 끝 하나로도 모두 알 수 있는, 그런거라 할 수 있다.

 마구 부딪쳐 마찰되어지는 열이 아니라, 모든 연인의 헌신적인 사랑속에서 나'라는 조건--남자니 여자니 몸이니 마음이니 미래니 과거니 등등--이 모든 조건지워진 시공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AIDS의 예방은 오직 참사랑의 개발에 있다.

 남자와 남자가 만나서는 강태공의 육도삼략에 있듯이 군자는 요득기지(군자는 그 동지 즉, 그 뜻을 같이하는 벗을 사귀는데 그 즐거움이 있다)라 했다.

 이 인류문명의 황폐함, 참다운 교육의 부재현상, 날로 개인주의적 찰나주의적으로 되어가는 인심, 날로 창궐하는 괴질과 도발적 테러나 전쟁...

 이 엄청나게 산적되어진 문제를 같이 고민하는데 뜻을 같이하여 토론 연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정상으로 열려진 문이 아닌 곳에다 음행을 해대고 말초감각적 쾌락만을 조잡하고 비열하게 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여자와 여자와의 만남에 있어서는 자녀교육의 문제점, 가정의 화목, 날로 무너져가는 정조관념으로 인한 문란한 성충동 등등에 초점을 맞추어 반성과 수양이 이루어져서 우아하고도 정숙하고 고상한 여성적 인품의 향기를 우정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핥고 빨고 물고 그리고는 거칠고 조잡한 기구들을 사용하여 감각적 쾌락을 탐닉하여 민감한 세포들을 파괴하고 또 파괴하고...

 천지신명이시여!

 굽어살피옵소서

 저들로 하여금 AIDS 공포로 부터의 해방은 먼저 참사랑의 개발에 있음을 알게 하소서!

 담담하나 맛이 그윽히 깊고, 간명하나 그 요점이 분명한 지혜가 있고 우아하고도 정숙함이 목련과 같고, 때로는 대쪽같은 정절로서 참사랑을 드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스스로 몸과 맘을 잘 관리하는 지혜를 주소서.

 그래서 이 지구상에 영원히 의사는 굶어 죽게하소서.

 의사라는 직업이 아예 사라지게 하소서

 그래서 박물관에 전시되는 품목이나 되게하소서!

출처 : 잼있는 농원
글쓴이 : 槻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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