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뒤늦은 통신 시장 진출로 '만년 2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국내 통신 업체 킹텔(King Tel). 이 회사의 경영진은 '1위 등극'을 위한 비장의 카드로 WCDMA(3세대 이동통신)를 꺼내 들었다. 통신시장이 음성통화에서 영상통화 중심의 WCDMA 시대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
하지만 불운하게도 킹텔은 경쟁사를 압도할 만한 WCDMA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외국 기업과 합작을 통해 WCDMA 시장을 공략하기로 결정, 일본의 최대 통신사인 드래곤텔(Dragon Tel)과 접촉을 시도했다. 드래곤텔은 세계 최초로 WCDMA를 기반으로 한 3세대 통신서비스를 제공한 회사. 킹텔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파트너였다.
하지만 제휴란 게 말처럼 쉬운가? 제휴 조건, 제휴 이후의 사업 추진 등에서 양측의 입장 차는 너무나 컸다. 제휴 협상은 난항에 난항을 거듭했고 그 사이 1위 업체와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CEO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협상계 초절정 고수'로 통하는 안고수씨를 전무로 전격 영입, 드래곤텔과의 협상을 맡겼다. 안 전무가 파악한 현재의 협상 상황은 다음과 같다.
#상황 1. 협상에 소극적인 상대를 만났을 때
협력할 사업의 범위를 결정하는 게 문제였다. 킹텔은 '제휴 사업 분야를 WCDMA를 포함한 10개로 결정하고 이를 계약서에 적어놓자'고 주장했다. 장기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드래곤텔의 기술 노하우를 전수받겠다는 게 킹텔의 의도였다.
하지만 드래곤텔은 생각이 달랐다. 우선 WCDMA 분야부터 제휴를 시작한 뒤 앞으로 추이를 봐가며 공동 사업 범위를 정하자고 맞섰다. 킹텔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드래곤텔은 사업이 지지부진할 경우 중간에라도 제휴를 끊고 싶었던 것이다. 킹텔측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대에 대한 믿음 없이 어떻게 파트너가 되겠느냐"고 주장했지만 킹텔의 말은 독백에 가까웠다.
#상황 2. 똑같은 상황에 대해 '동상이몽'일 때
또 다른 이슈는 '돈'이었다. 성공적인 전략적 제휴를 위해선 일정 수준의 자본 제휴가 필요했다. 킹텔 주식의 10%를 드래곤텔이 매입하기로 합의는 했는데, 얼마에 사느냐가 문제였다.
킹텔은 현재 주가보다 20% 높은 프리미엄을 요구했다. "누구나 인정하듯, 지금 주식시장은 바닥 중의 바닥이며 내년 이맘때쯤이면 주가는 30% 이상 올라 있을 것"이란 게 킹텔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드래곤텔의 반응은 차가웠다. 드래곤텔측은 두툼한 자료와 함께 "우리 회사 재무팀이 분석한 결과, 1년 후 킹텔의 주가는 오히려 지금보다 10% 이상 떨어져 있을 것"이란 내용의 문서를 보내왔다. 돈과 직결된 내용인 만큼, 프리미엄 비율에 대한 양측의 입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받은 안 전무는 회사 내 정예 멤버로 구성된 협상팀을 새롭게 꾸렸다. 그리고 협상팀을 상대로 협상의 기본 원리부터 하나하나씩 가르쳐 나갔다. 그렇게 준비하길 몇 달.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킹텔과 드래곤텔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했다.
평행선을 달리던 킹텔과 드래곤텔의 협상은 어떻게 될 것인가? 또 킹텔의 안고수 전무가 준비한 비장의 협상 전략은 무엇일까? 두 회사의 협상 현장으로 가보자.
Answer
1 인간적 공감대 '라포르(rapport)'를 형성하라
협상대표가 골프광이란 정보 입수 골프 이야기로 대화 시작해 친밀감 형성
침묵과 긴장이 흐르는 협상 테이블. 안고수 전무가 먼저 드래곤텔의 협상대표인 나카무라 이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누구도 생각지 못한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안 전무. "이사님, 지난주 타이거 우즈 경기 보셨나요? 골프를 어떻게 하면 그렇게 예술적으로 할 수 있을까요? 특히 마지막 홀의 퍼팅은 제가 본 퍼팅 중에 최고의 장면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골프 얘기는 무려 15분 동안이나 계속됐다.
안 전무는 협상 관련 정보를 모으면서 나카무라 이사가 '골프광'이라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리고 대화의 첫 주제를 의도적으로 골프로 시작했다. 안 전무의 이런 행위를 협상학에선 '라포르(rapport) 형성'이라 부른다. 라포르는 인간관계에서의 '공감대' 혹은 '감성적 유대'라는 의미로, 언어 심리학에서 많이 쓰이는 용어다. 본격적인 대화 이전에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효과가 있다.
사례를 보자. 에콰도르와 페루는 50년 이상 지긋지긋한 영토 분쟁에 시달렸다. 이 분쟁을 지난 1998년에 타결시킨 주인공은 에콰도르의 마후아드 대통령. 그가 페루의 후지모리 대통령을 만나 협상장에서 처음 건넨 말은 영토와 관련된 얘기가 아니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자리인지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라포르를 형성했다. 그리고 상대 후지모리 대통령의 말을 충분히 듣고, 공감하며 상대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를 토대로 영토 분쟁을 '싸움'이 아닌 '공통의 이익을 찾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고, 결국 협상을 성공시켰다.
2. 상대가 얻을 이득부터 설명하라
"한국을 중국 진출 교두보로 삼으면…" 심드렁하던 상대방 관심 이끌어 내
일단 분위기까지는 잘 만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제휴의 필요성과 성공 가능성을 설명해도 드래곤텔측은 반응이 없다. 결국 안 전무가 회심의 카드를 빼 들었다. 바로 '중국 진출'. 심드렁한 표정으로 안 전무의 말을 듣던 나카무라 이사의 눈이 중국 얘기가 나오자마자 반짝이기 시작한다.
"한국 시장은 일본 기업이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 가야 할 테스트 마켓입니다. 아시다시피 일본 할인점인 '이빠이싸다 마트'도 한국 할인점과 제휴한 이후에 중국으로 진출했지 않습니까? 드래곤텔도 이번 제휴만 성공 한다면 중국 시장 진출이 쉬워질 것입니다."
협상 성공을 위해선 이처럼 '나'가 아닌 '상대방'이 얻을 이익을 알려줘야 한다. 이 세상에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거부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세종대학교와 미국 시라큐즈 대학의 협상 일화를 보자. 지난 2000년, 세종대는 미국 시라큐즈 대학과 함께 조인트 MBA 과정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문제는 시라큐즈 대학의 무관심. 이에 세종대 경영대 학장이 직접 미국으로 날아가 담판을 벌였다.
"한국과 일본, 중국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이들 동아시아 국가의 공통점은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면 집에 있는 논밭이라도 팔 정도로 교육열이 높다는 것입니다. 이번 협력을 통해 동아시아 시장에 대한 경험을 쌓으면 이후에 중국 진출이 쉬워질 겁니다. "
이 제안은 시라큐즈 학장의 마음을 움직였다. 결국 한국 최초로 외국 대학과 협력한 조인트 MBA 과정이 개설됐다.
3. 창의적 상황조건 (creative contingency) 제안
"주가 하락 땐 프리미엄 돌려줄 것" 주가 프리미엄 20% 요구 관철시켜
협상에서 돈과 관련된 문제는 항상 어렵다. 현재 주가보다 20% 높은 프리미엄을 요구하는 킹텔과 프리미엄은 지급할 수 없다고 맞서는 드래곤텔. 골똘히 생각하던 안 전무는 이렇게 제안을 했다. "제휴 이후 주가 변동을 고려하여, 2주간 평균 주가의 20%를 프리미엄으로 주시면 어떨까요? 저희는 앞으로 1년 후 주가가 현재보다는 최소 20% 이상 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순간 나카무라 이사의 얼굴이 붉게 물들고 있다. 열 받았다는 얘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가 보낸 자료 못 보셨나요? 우리 재무팀 분석 결과, 1년 후 주가는 오히려 떨어질 것으로 예상…."
순간 안 전무가 나카무라 이사의 말을 자른다. "물론 그 보고서는 꼼꼼히 검토했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죠. 그래서 추가 제안을 합니다. 만약 드래곤텔의 예상대로 주가가 1년 후 오히려 떨어진다면 그때는 저희가 이번에 지급받은 프리미엄 20% 전액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그쪽은 떨어질 것이라 확신하고 저희는 오를 것이라 확신하고 있으니 합리적인 방안이 아닌가요?"
나카무라 이사는 무릎을 탁 쳤다. "말 되네요. 사실 우리 드래곤텔의 가장 큰 걱정은 1년 후 주가가 떨어졌을 때 이사진들이 1년 전에 왜 그렇게 비싼 가격에 지분을 인수했느냐고 힐책할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안 전무님 말대로 주가 하락 시 돈을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이사진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제안을 협상학에서는 '창의적 상황 조건(creative contingency)'이라 부른다. 협상을 하다 보면 나와 상대가 미래를 다르게 예상하고 이로 인해 갈등이 발생할 때가 있다. 이때 싸우는 사람들은 협상의 고수가 아니다. 양측의 서로 다른 예상을 인정하고 거기에 따라 베팅을 하면 문제는 쉽게 풀린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은 땅을 매매하려 한다. 당신은 이 지역 인근에 지하철 역이 5년 내에 들어설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현재 가치로는 3억원이지만 5억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려는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지하철이 들어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게 상대의 확신이다. 이때 협상을 못하는 사람들은 3억원과 5억원의 중간선인 4억원에 대충 합의한다. 하지만 협상 고수는 다르다. '현재 가격인 3억원으로 거래하되, 5년 내 지하철 역이 개통되면 2억원을 매수인이 추가로 지불한다'는 조항을 넣는다.
4. 권한위임 전술을 활용하라
협상 결과 우리 쪽의 수확이 커도 상대방이 이겼다는 느낌 들게 해야
이제 협상은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다. 협력 사업의 범위를 결정하는 일만 남았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카무라 이사가 입을 연다. "안 전무님, 제휴 사업 분야를 10개로 확정하는 것은 정말 곤란합니다. 저희가 8개까지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더 이상은 힘듭니다."
'으잉? 웬 횡재냐!' 나카무라 이사의 제안에 안 전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겉으로는 10개의 협력 사업을 주장했지만, 내심 5개까지만 협력 사업을 확정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개 분야요? 좋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안 전무는 참고 참고 또 참으며 입을 천천히 열었다.
"그래요? 협력사업은 정말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실무책임자인 제가 함부로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 사장님께 전화 한 통만 드리고 협상을 재개해도 될까요? 사장님 허락이 필요합니다."
30분 후 안 전무는 환한 표정으로 다시 협상장에 들어섰다. "축하합니다. 나카무라 이사님! 사장님이 고심 끝에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사님, 사장님 설득한다고 고생한 저한테도 꼭 밥 한번 사셔야 합니다."
나카무라 이사도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네, 일본 오시면 제가 꼭 맛있는 스시집에서 한번 모실게요!" 협상 종료를 알리는 한마디였다. 이런 안 전무의 협상기법을 협상학에선 '권한 위임 전술'이라 부른다. 일반적인 권한 위임은 권한을 위에서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협상에선 다르다. 실제로는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데 '없는 척'하는 것을 권한 위임 전술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왜 안 전무는 나카무라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사장님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척'을 했을까? 이는 상대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안 전무가 나카무라의 제안을 1초의 고민도 없이 덜컥 받아들였다고 가정해 보자. 나카무라 이사는 어떤 기분이 들까? '아~ 내가 너무 약하게 불렀나? 8개가 아닌 5개만 받아들이겠다고 좀 세게 나갈 걸 그랬나?' 아마도 나카무라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들고, 협상을 타결시키고도 왠지 찜찜한 기분을 갖게 됐을 것이다. 좋은 협상가란 이런 사람이다. 협상이 끝나고 상대가 집으로 돌아갈 때 '내가 이번 협상에서 이겼다. 또는 적어도 비겼다'라는 만족감을 갖게 만들어 주는 사람.